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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31. 인삼을 씹는 기분

나비 |2005.01.05 16:10
조회 1,605 |추천 0

kiwi - 31


“이만 원 대신에 무슨 일인지 말 좀 해줘라. 궁금해 죽겠어”

“됐어, 그럼. 기다리다 지치면 돌아가겠지.”

“아니야. 밤새 기다릴 기세던데. 봄이라도 밤이라 추워.”

“어떻게 할 거야, 이거 도로 넣어?”


언니가 꺼낸 2만원은 내게 제발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기 싫을 정도로 만나기 싫다면 밤새 기다리 건 말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여자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자에게는 오히려 가혹한 형벌자가 되어 자신의 위한 그의 고통을 즐기곤 하니까.

그의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자랑거리는 더욱 커지는 법이다.

어떤 남자는 한 달 동안 날마다 편지를 보냈다느니, 그건 우습다, 내 얼굴을 잠깐 보기 위해 다섯 시간을 기다린 남자가 둘이나 있었다는 등 한번 시작된 그녀들의 경쟁은 점점 과열되고, 불쌍한 남자들의 명단은 늘어만 간다. 그쯤에서 연하의 미남 탤런트가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는 화려한 경력은 모두를 K.O 시키고 언니에게 승리를 안겨줄 사건이었다.  


“밖이 많이 추워?”


그런데 이 여자 즐기지 않고, 그 남자 걱정을 하고 있다.


“입술이 다 파랗더라. 잘 돌려보내고 올게. 걱정 하지 마.”


빨리 나가는 척 서둘러 문 밖을 나와서는 한참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잘 생긴 남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고 싶었다.


“저기 제이 오빠?”


말을 뱉어 놓고 후회될 만큼 어조가 웃겼는데도 남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지 않았다.


“오늘 묘향 언니 집에 안들어 온대요. 전화가 왔었다고 하던데요. 혹시 계속 기다리실까봐 나왔어요.”

“만나기 싫다고 하던 가요?”

“아니에요. 진짜 집에 없어요.”

“좀 더 기다려 볼께요. 혹시 모르잖아요.”

“안돼요. 절대 오늘은 안 온다고 했는데.”

“거짓말이 서투시네요. 금방 표가 나는데요. 아까 봤어요. 집으로 들어가는 것. 전화를 해도 안 받더라구요. 혹시나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던 거예요.” 


역시 거짓을 모르고 산 내 삶이 얼굴에도 나타나는 구나.

그나저나 어쩌지? 꼭 돌려보내야 하는데.


“사실 언니가 꼭 돌려보내라고 했어요.”

“집 앞에 있는 것도 싫다던 가요?”

“아니요. 날이 춥다고 걱정했어요.”

“하나도 춥지 않아요. 누나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따뜻해지는 걸요.”


정말 혼자 보온메리라도 입은 듯 따뜻해 보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요?”


고양이 여럿 죽였다던 호기심이 발동되어 물었으나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도와준다면 제가 고맙죠. 놓치고 싶지 않는 누나니까. 그런데 이야기가 길지도 모르는데 춥지 않을까요? 옷이 너무 얇아 보여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옷 좀 입고 나올께요. 또 언니한테는 돌려보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네. 기다릴께요.”

“여기 말고 빌라 들어오는 입구에서 기다리세요.”


언니에게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오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소설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다.


“오래 안 걸렸죠?”

“언니는 자던 가요?”

“아니요.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아직 잠이 들진 않았어요.”


혼자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었다고, 오늘 따라 자신의 주름을 더 속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노라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어디 들어가야겠지만 그냥 차에서 얘기해도 될까요?”

“그래요. 저도 빨리 가봐야 해서요.”


음악도 나오지 않은 차안은 단 둘이 얘기하기에 호젓한 분위기였다.

제이 오빠는 처음 만난 이야기와 만나는 동안 정말 편한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언니가 사랑한다고 말을 했을 때 대답을 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편안함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고, 아직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언니를 만나서 뭐라고 말 하시려구요?”

“일단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냐고 묻고 싶어요.”

“잡고 싶기는 한 건 가요? 에휴, 그 말 듣고 돌아갈 여자가 어디 있어요? 좀 더 세게 나가야죠. 너 아니면 나 죽는다 그래야죠. 언니도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그정도로 제이 오빠에게 돌아가겠어요? 그것도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아직 선물을 하기에는.”

“언니는 선물에 유난히 약해요. 특히 금붙이 이런 걸 아주 좋아하죠.”

“그러고 보니 선물을 준 기억도 없네요.”

“지금 언니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좀 더 세게 나가보세요. 저도 사실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유명 연예인이랑 만나는 건 꺼려질 것 같아요.”

“여자들을 만나기는 좋은 직업이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는 어려운 직업이긴 하죠.”


얘기를 듣고 보니 짐작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설책 속의 밑줄 친 구절도 제이 오빠 때문에 가슴 아프게 본 것이겠지.

예전 일이지만 언니는 매일 같은 장을 펼쳐놓고 자주 읽곤 했던 구절이 있었다. 노희경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은 뭐에요?”

“아, 이거. 언니가 아주 예전에 사온 책인데 밑줄 친 구절이 있어요. 그 때 유부남을 만나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오빠 때문이었던 같네요. 갑자기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요.”

“...?”

“어디더라? 여기 있다. 읽어 볼게요. ‘매 끼니마다 나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사준 넥타이 떳떳하게 맬 수 있나요? 컴컴한 비상구 말구 딴 데서 날 안을 수 있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나랑 나란히 서서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니 웃기네. 그래도 느껴지죠? 다음 구절은 이래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거예요. 내 남자는 잠버릇이 이렇더라, 나 없이는 양말 한 짝 못 찾아 신고, 세수를 할 때면 옷이 앞섶까지 젖더라, 난 그런 남자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고 싶더라.’”

“······.”

“언니가 제이 오빠를 만났던 건 아무도 몰랐어요. 우리 식구들 모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게 힘들었겠죠. 저도 그게 싫을 것 같은데. 아마도 이 책 속의 주인공과 같은 생각을 했었나봐요.”

“떳떳하게 만난다고 하면 마음을 돌려줄까요?”

“그야 모르죠.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걸요. 상처받은 여자는 한을 품고 산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책 속에 있는 말인가요?”

“아니요. 묘향언니가 늘 하던 말이에요.”

“하하하. 상상이 되요.”

“언니 화 풀리려면 오래 걸릴 거예요. 제가 옷만 몰래 빌려 입어도 일주일은 가니까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걸요. 그리고 선물도 자주 사주려면 돈도 많이 들 거고.”

“풀리기만 한다면 기간은 상관없어요. 많이 피곤해요?”

“아직은 괜찮은데요.”

“그럼 지금 잠깐 저랑 같이 가요.”

“어딜요?”

“금붙이 사러요.”


제이 오빠는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이 시간에도 만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을 언니를 생각하면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한 번 결심하면 웬만해서는 굽히지 않는 여자니까.


“그래. 까짓 것 가요. 대신 저두 사주셔야 돼요.”

“그럼요. 출발합니다.”


제이 오빠의 은색 bmw 차는 이 밤 유일하게 금붙이를 살 수 있는 동대문으로 향했다.


“왜 나를 도와주려고 해요? 본인도 연예인 만나는 건 싫을 것 같다면서?”

“연예인 남자 친구는 싫어도 연예인 형부는 괜찮을 것 같아서요.”


실은 그의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져서였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니까, 어려운 사랑을 하니까 동지의식이 느껴졌던 걸까? 동대문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가 처한 위태로운 사랑에 관해 짤막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힘들다고 했지만 사랑이라는 거 정말 행복한 기분 아니에요?”

“맞아요.”

“어제 누나를 만나기 전보다 마음이 더 괴롭지만 가슴 속은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찬 것 같아요. 어제까지는 냉기가 돌았다고 할까 계속 서늘했어요. 힘내요. 그리고 제가 도와줄 것 있으면 말해요. 할 수 있는 만큼은 도울께요.”

“그럼 우리 동지가 된 건가요?”

“그렇죠. 배신하기 없기에요.”


내 편이 하나 늘었다는 것은 기운이 솟는 일이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 했다.


“괜찮겠어요? 얼굴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텐데.”

“제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숨을 이유는 없죠.”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걱정이 되어 물었으나 제이 오빠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계속 거울을 보는 폼이 나름대로 긴장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지하 2층에 가면 있다구요?”

“네.”


우리는 다른 곳은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뛰다시피 주얼리 매장으로 향했다. 같이 걷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더 받을 것 같아 내가 앞장을 섰고, 그 뒤에 제이 오빠가 따라오듯 걸어왔다.

급하게 반지와 목걸이를 사고, 내 몫으로는 귀걸이를 샀다. 야밤에 유명 탤런트와 함께라니 적지 않은 긴장감이 들긴 했지만 엄마 몰래 처음으로 외박을 한 날처럼 무척 신이 났다.

포장도 하지 않은 선물을 들고 서둘러 나오고 있을 때였다. 다른 매장에 여자와 함께 있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견서루.

내 신랑이 되겠다고 오늘 낮에도 바락바락 우기던 남자 옆에는 찜질방에서 보았던 여자가 서있었다. 


“여기서 만나네.”

“어, 혜림아.”


서루 오빠의 얼굴에 번지는 당혹스러움이 너무나 싫었다.

왜 내게 미안해하는 거야?

그냥 뻔뻔하게 들켰으니 할 수 없게 됐군 그렇게 말해 주면 안되는 거야?


서루 오빠는 이 사건을 두고 미안하다고 기회를 달라며 날 또 귀찮게 할 것이 뻔해보였다.


“선물 사주고 있었어? 하던 일 계속해. 좀 바빠서.”

“잠깐. 오해하지 말고. 내 말 듣고 가.”

“오늘 낮에 우리 집에서 그 난리를 피더니 그새 마음이 바꿨나봐. 다행이야. 좋은 사람에게 상처 줄까 고민했었는데. 아주 잘됐어.”

“혜림아, 우리 내일 얘기하자.”


서루 오빠가 날 보는 눈빛에서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쳐버린 어느 과거의 내 모습이 느껴졌다. 하지만 버스를 놓쳤다고 학교를 못가는 것은 아니다. 다음 버스는 어김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오늘 잡지 않아도 내일 잡으면 된다는 거겠지.


“이 여자가 오빠가 결혼한다는 그 여자야?”


얼굴에 어울리는 도도한 말투로 물었다. 마치 놀리듯이.


“이 남자가 널 귀찮게 한다던 그 남자니?”


나의 든든한 응원군이 여자의 말에 거슬렀는지 나섰다.


“오빠, 가요. 너무 늦었어요.”

“우리 처제 귀찮게 말아요. 내일 나타나면 가만있지 않겠소.”


마치 대사를 읊듯한 말을 한 제이 오빠는 보호자처럼 내 어깨를 감싸더니 주차장으로 향해갔다.


“고마워요.”

“속상해요?”

“아니요. 잘 된 일이잖아요. 이제 내게 할 말도 없을 거고.”

“갑자기 남자 친구가 보고 싶죠?”

“정말 그러네요.”


뒤통수를 맞은 것은 쓴 인삼을 씹는 것처럼 입은 쓰지만 나에게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이젠 민성 오빠에게 가는 길에 거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다. 누나에게 달려가는 제이 오빠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나는 속력을 더 내달라 말하고는 창문을 열고 내게 불어오는 찬바람을 거침없이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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