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33
“뭐 특별히 싸우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남자가 이젠 절 지겨워하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평정을 찾은 병진이가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 전화도 없이 늦게 들어온 거예요.
다른 날 같으면 미안하다고 빌고 또 빌었을 텐데 그냥 씻지도 않고 누워버리는 거 있죠.
화가 나서 얼른 일어나라고 소리도 지르고 했는데 꿈쩍도 안하고 있어요.
억지로 일으켜 세웠는데도 피곤하다면서 그냥 자고.
그리고 다음 날 되서도 오히려 자기가 짜증을 내더라구요.”
“다음 날 싸웠어?”
“아뇨. 이런 일은 처음이라 두고 보자 했지만 그냥 말을 안했어요.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와서는 텔레비전만 보고 있더라구요.
화는 계속 나서 나도 말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답답한 것 있죠?
단칸방이라 다른 데 갈 곳도 없고 괜히 좁은 부엌에 있을 수도 없고.
결국은 내가 져준다, 하고 피곤해, 하며 아양을 떨었드랬어요.
속은 끓고 있지만 막 웃으면서 주물러줄까 이랬죠.
그랬더니 귀찮다고 저리 가라는 거예요.
더는 못 참겠어서 도대체 왜 그러냐, 문제가 뭐냐, 하는데 별 문제 없대요.
자기가 뭘 잘 못했냐고. 그냥 텔레비전 보는데 왜 시비냐고 하는 거 있죠.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꼬인 데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냉랭해요?
대화로 풀자 말을 해봐라 아무리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만 해요. 이게 대체 뭐래요?”
“권태기네.”
큰 언니의 판정에 모두 동의 한다는 듯 언니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같이 얼굴 보니 권태기가 빨리 오겠지. 나이도 어리잖아. 나이 어리면 더 심할 걸.”
“맞아. 나랑 동갑인 남자애 작년에 결혼했는데 부인한테 잘 하는 것 같지 않아. 말은 안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느낌 받았어.”
둘째 언니의 말을 내가 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싫증났으니까 헤어져야 되는 거에요? 난 권태기 아닌데. 아직도 많이 좋아하는데 어떡해요?”
병진이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이려고 했다.
“지겹다는 말은 뭐야?”
셋째 언니가 병진이를 도닥이며 물었다.
“그건 사실 별 거 아니에요.
제가 이젠 나도 지긋지긋해, 돈이라도 없으면 사랑이라도 먹고 살아야되는 건데, 좁은 방에서 둘이 날마다 싸우고 있으니 지겨워 그랬어요. 어제요.
그러니까 오빠가 나도 지겨워 그런 거에요. 근데 그 말이 잊어지지가 않아요.
날보고 한 말 같아서. 내가 지겨워져서 오빠가 요즘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건 아니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 같은데. 서로 신경이 예민했을 때니까.”
“그럴까요?”
“남자들이 원래 다 그래. 결혼한 내 친구들 남편이 잘 해줘서 같이 사는 줄 아니? 그냥 사는 거야. 너희는 보통 연애보다는 부부생활에 가깝잖아. 내가 보기엔 별 일 아니야.”
그녀들은 원래 그런 것에 대한 전문 박사다. 원래 그런 것은 왜 이리 많은지 웬만한 상담은 ‘원래 그래’란 말로 마무리한다. 특히 방금 말한 셋째 언니의 특기다.
“병진아, 남자란 말이지. 처음 만날 때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무서워, 그러면서 벌벌 떨어. 그러다 같이 살아가는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세상에서 네가 제일 우스워, 한다. 제일 만만한 거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여자니까.”
둘째 언니는 어록을 남길 때 쓰는 어조로 말을 했다. 씁쓸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그 어투만큼은 좋아서 늘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병진이도 듣기 싫지 않은지 언니의 입을 바라보며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건 다른 뜻으로 자신의 손 안에 있으니까 그만큼 편하구나 그런 뜻도 있는 거야.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텔레비전을 멍하게 보고 싶을 때도 편하게 옆에 있어주는 여자, 가끔 그런 여자가 되어주는 건 어때?
병진이도 그럴 때 있지 않아?
친구 혜림이가 좋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옆에만 있어주었으면 하는 때 말이야.”
분명 병진이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항상 매력이 넘치고, 잡고 싶은 여자가 되기보단 편한 여자가 되어주라는 말은 필시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요즘 남자 친구가 말수가 없어지고, 멍하게 딴 생각을 할 때가 많지 않아?”
“맞아요. 밤에 편의점을 같이 갈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더라구요. 삐진 건지 뭘 그리 생각하는지 말이에요.”
“남자는 가끔, 주기적으로 꽤 멍청해져.
지나치게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이 지나가면 여자들이 묻잖아. 너 봤어, 하고.
그럼 남자는 뭘, 그러면서 그제야 두리번거려.
도심에 갑자기 경운기가 나타나 탈탈거리며 바로 옆을 지나가도 모를 정도라니까.
그 때가 되면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말을 해주려 하질 않아.
그 뿐 아니라 옆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것도 견디지를 못해.
마음 속 생각이야 절대 들여다봐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여자가 보기엔 꽤나 심각해 보이는 데도 늘 아무 생각도 안한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
나도 잘은 모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우수에 젖어있고 싶어 한다고 할까. 아님 대체 뭐지?
실은 나도 그건 잘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도 그냥, 정말 이유 없이 하는 행동일 뿐인 것 같아.”
“여자들 생리할 때 짜증나는 것처럼 이유 없이요?”
병진이답게 되물었다.
“응. 그런 것 같아. 여자도 자신이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힘든 거니까.”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날 만나면서 딴 생각을 하는 남자를 이해해주라니. 난 민성 오빠가 저러면 딴 생각할 거면 집에 가서해, 하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병진이는 돌아갈 곳이 오빠랑 같이 사는 집뿐이니 이해하는 눈치다. 아니면 남자랑 같이 살면 이해가 되는 건가?
“이 나이되도록 남자랑 살아본 적이 없어서 병진이한테 조언을 해주기는 그렇지만 말이야.”
이번에는 큰 언니가 나섰다.
“병진이 나이 때 남자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
“그런 적이 있었단 말이야? 남자 집에?”
묘향 언니 순진한 척 하기는.
“처음엔 극진히 잘해주더니 몇 번 놀러가니까 밥도 안차려주더라고.
그 날은 내가 상을 차렸어.
다 차려놓고 아무리 불러도 오락에 정신이 팔려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 거야.
난 밥 차리고, 남자라고 꼴에 오락을 하며 기다리더라고.
한 십 분을 기다렸는데도 조금만, 조금만, 그러면서 안 나오는 거 있지.
슬슬 화가 나더라구.
처음 만날 때는 돌을 줘도 맛있다고 우걱우걱 먹던 남자가 이젠 밥상을 갖다 바쳐도 거들떠도 안보니까.
이게 결혼생활이구나 싶더라.
난 뭐 그냥 화나서 바로 나와 버렸지만 말이야.
그런 느낌이랑 비슷한 거 같아.
그냥 참는 수밖에 별 도리 없지 뭐.
아님 차려주지 말던가.
그런데 이제 너희는 서로 눈치 볼 때는 지나지 않았어?
너도 그냥 편하게 텔레비전 봐. 말 시키면 대답해주고.
내가 들어보니 심각한 일도 아니고, 권태기도 아닌 것 같애.
남자는 지금 널 집이라고 생각할 거야. 여자 친구가 아닌 집의 일부.
그냥 편한 집의 일부가 되어줘.”
“그게 쉬운 가요? 저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구요. 여자만 참고 산다는 건 억울해요. 그리고 분명히 조금 싫증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럼 여행을 한 번 가봐. 매일 지칠 만큼 일하다 얼굴을 보니까 기분 전환할 기회가 필요한 것 같은데.”
“여행이요?”
“그게 좋겠다. 둘이 일박이라도 바람을 쐬고 와. 너나 남친 둘 다 지친 것 같다.”
병진이는 여행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설레는지 밝아지기 시작했다.
“여행이 좋겠어요. 오빠도 많이 답답해하는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자고 할까?”
그녀의 마음은 벌써 자신의 남자와 단둘만의 달콤한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 언니들이 그녀에게 명쾌한 답을 내준 것은 아니었지만 고민을 함께 나눈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풀린 듯 수다가 끝난 오후 내내 망아지처럼 경쾌한 걸음으로 찜질방을 누비고 있었다.
마치 초원을 거닐 듯이.
마음이 드넓은 초원에 가있다면 찜질방도 그녀에게는 초원이리라.
경쾌한 그녀의 발걸음에 언니들 모두 흥겨워진다고 즐거워했고, 다섯 여자들은 각자 떨어져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서로를 느끼며 그 날 오후만큼은 너와 내가 아닌 ‘우리’였다.
늦은 오후쯤에 우리에서 떨어져 나와야 할 일이 생겼다. 서루 오빠가 찾아온 것이었다. 어제 여자와 함께 있었을 때 얼굴 가득 있던 생기는 간데없고, 퀭한 눈을 해서는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그가 앞장서 간 곳은 근처 노래방이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노래방 비를 지불하고, 방에 들어가서는 의아해하는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와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손짓이 너무나 힘이 없어서 화를 내며 돌아설 수가 없었다.
“노래방은 왜?”
“노래가 하고 싶어서.”
너무나 당연한 이유를 댄 이 남자는 마치 방안에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혼자 노래를 고르고, 버튼을 누르더니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듣는 팝송이었다.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헤비메탈 그룹의 노래가 아닐까 추측을 해 볼뿐이었다.
그는 목청껏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 힘없이 손을 흔들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쌓인 것이 많았나봐.’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가사와 강한 비트, 갈라지고 벽까지 찢을 듯한 기세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견딜 수가 없더니 그것도 익숙해지는지 차츰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상당히 잘 하는 노래 같았다.
단정한 옷차림에 머리까지 흔들며 노래에 취해있는 그를 보며 지금 머리보다는 분홍 머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그도 내게 노래를 권하지 않고, 연달아 10곡을 부르더니 나가자고 했다.
“니 생각대로 해줄게.”
그의 말에 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부모님께는 당분간 말하지 말자. 아버지가 조금 호전되시면 내가 말할 테니까.”
“알았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 여자랑 나 별 사이 아니야. 그 여자보다 내가 더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별 사이가 아니라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잖아.”
“네가 상상하는 것 아니라고. 너 전에 찜질방에서 봤다고 했지? 심각한 사이면 그 시간에 찜질방은 가지 않아. 어제도 그렇고.”
“아무 것도 상상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 편이 더 비참하군. 조금의 질투는 기대했는데 말이야.”
잠시 침묵.
“이만 가볼게.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연락할게.”
“알았어. 잘 가.”
서루 오빠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민성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주말 약속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복학할 등록금 마련 문제로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섭섭함에 화를 낼 뻔 했지만 언니들의 말대로 이 남자에게 단순한 여자 친구가 아닌 집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못미더워 불안해졌다.
잘 하고 싶다. 아니, 꼭 하고 싶다.
정말 진실로 그의 집이 되고 싶었다. 그 욕구는 점점 더 강해져 걸음을 빠르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