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희뿌연 장면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검붉은 선혈이 동준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혈류가 하얀 도포위에 토해져 그려진 매화위에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도포를 움켜 쥔 채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너를 기억해 가져갈 것이다.
오직 너 하나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시오.
그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
며칠째 같은 꿈을 꾸고 있던 동준이 다시 그 꿈길의 중간에서 잠을 깼다. 등줄기에 축축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생소한 느낌도 낯설었지만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남자의 모습이 꿈을 꾸었던 첫날부터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베게에 쑤셔 박은 머릿속으로 연결되지 않는 장면들이 이리저리 오버랩 되며 뒤섞이고 있었다. 7월의 후텁지근한 밤공기가 그대로 온몸에 달라붙어 뒤숭숭한 머릿속만큼이나 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베게를 끌어않고 씨름을 하던 동준이 더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 네시었다.
꿈을 꾸기 시작한 날부터 깊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느낌이 하도 생생해 동준자신처럼 느껴지는 그것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 잔재를 털어내 버리기 위해 마신 맥주가 벌서 네 통째 비워지고 있었다. 잡음에 가까운 기상나팔소리에 눈꺼풀을 걷어 올린 동준이 아홉시가 넘은 시계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냈다.
이런......씨!
대충 겉옷을 걸친 동준이 양말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급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30분 거리를 12분에 달려 헬스클럽 앞에 도착한 동준 앞에 이를 갈며 핏발을 세운 한 무더기의 회원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떻게 된 거예요....오늘이 도대체 며칠 째예요....”
“아!.....최송합니다....진짜..죄송합니다...”
클럽을 관리하던 정재가 소리 소문 없이 행적을 감추고 이주 째 그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여덟시에 클럽 문을 열어 12시까지 지키고 있어야 하는 장거리 레이스가 밤 생활에 익숙한 동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밤 태양을 띠우고 야인으로 꿈틀거리다 아침나절에 잠들어 오후를 하루의 시작으로 생활하던 동준이였다. 평소대로라면 푸근한 잠속에서 평온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 다음 느긋한 오후쯤에 일어나 말끔히 스타일을 세우고 전의를 가다듬어 세상 속에 자신을 내놓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생활이 잠수를 타버린 정재로 인해 하루아침에 봉 걸레 맨이 되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동준의 구겨진 스타일에 운동을 하던 회원들의 힐끗거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탈의실에서 샤워를 마친 동준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실 문을 들어섰다.
짧은 머리에 눈만 댕그란 여자아이가 신문을 펼치고 앉아 있었다. 동준이 새로 입회할 손님일거라 생각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운동하시게요?”
읽고 있던 신문을 대충 접은 아이가 몸을 일으켜 동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뇨.....저...”
동준이 말없이 그 얼굴을 보고 서있자 아이가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사람 구한다고 해서....”
그 제서야 구인광로를 보고 온 사람임을 알아차린 동준이 잠시 어리둥절했다. 허우대 멀쩡하고 아줌마들 성격 맞춰줄 반 얼짱 반 몸짱 정도는 돼야하는 조건에 너무도 생뚱맞은 아이의 등장에 어이없는 웃음이 세어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왔어요?”
“.......”
“잘못 온 것 같은데....여긴 회원들 관리도 해야 하고 또 트레이닝도 시켜야 하는데....운동은 해봤어요?” “........”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의 반응에 동준은 아이가 잘못 온 것을 난처해해 그런 것이라 생각해 커피를 권했다.
“커피 할래요?”
“아뇨.....”
당장 사랑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될 형편이었다. 누구라도 가릴 처지는 아니었으나 한눈에도 외소 한 체구에 사교성은 그보다 더 없어 보이는 그것에 동준이 마음을 접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겸연쩍은 시간이 흐르고 동준이 커피대신 내놓은 녹차를 몇 모금 마신 아이가 대뜸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꼭 남자가 아니어도 된다면 일하게 해주세요....”
동준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다 그 말을 내 놓는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뭐....꼭 남자여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운동은 해본 모양이니 그럼 한번 해봐요..지금 사람이 많이 급한 상태고....해보다 안 되면 그때 가서 또 얘기를 해보던지....”
큰 기대는 없다 해도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은 가까스로 모면한 듯 했다. 하루 온종일 클럽을 지켜야 하는 부담감과 전쟁 같은 아침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존재감은 충분했다. 굳이 회원들의 트레이닝과 매끄러운 사교성으로 클럽 분위기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그것까지 고려할 상황이 아니라 동준이 일단 아이를 받기로 결정했다.
대충 전화 받는 요령과 간단한 입회신청을 알려준 후 동준이 아이에게 열쇠를 주고 그곳을 탈출했다. 문을 열고나서다 금방 생각난 듯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형식상 필요한 것이니 이력서 한통이랑 등본한통 준비해요”
“......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면접 보러온 첫날 아무런 인수인계도 없이 열쇠만 덜렁 던져주고 자리를 비우는 동준의 행동에 놀랐는지 아이의 큰 눈이 더 둥그레져 있었다. 동준이 그렇게 나가버리고 온통 낯설기만 한 그곳에 혼자 남겨진 아이의 눈에 난처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동준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겉옷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데워졌던 방안이 싸하게 세나오는 에어컨 바람으로 삽시간에 냉기를 모으고 있었다. 며칠째 리듬이 깨진 생활 탓으로 금방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너에겐 너무 큰 짐을 지우고 떠나는 구나....
보아내는 것이 힘들 것이다...
이곳에 있지 마라.]
[아닙니다..... 제가 지킬 것입니다.
마지막 가시는 그 모습.....제가 지킬 것 입니다.]
[그 사람.....부탁한다... 나를 보았던 그 마음으로 니가 그 사람 곁에 있어다오.]
[그리 할 것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무겁게 떠나지 마십시오. 그 마음에 지워진 무게들 모두 버리시고 가볍게 소풍가시듯 떠나십시오. 제가 지킬 것입니다. 도련님 모셨던 마음으로 제가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러니.......편히 떠나십시오]
사내가 약사발을 들어 한번에 들이켰다. 뜨거운 불갈퀴가 목을 훑어 지난 듯 한순간에 온 영혼이 뿔뿔이 산화되어 몸이 굳고 있었다. 목을 타고 넘어온 한 움큼의 선혈이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와 하얀 도포위에 그대로 번져들고 있었다.
사내가 마지막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한사람의 떠올려 맥을 잃어가는 심장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절절함이 너무도 애달파 꺼져가는 몸에서 흩어진 염원들이 주위의 모든 생명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 한세상 이리 살다 가는 것을 원통하다 한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만은 제게 주십시오....
그 사람 제가 가져갈 것입니다....
이 가슴에 피로 새겨 품고가려 합니다.....
태어나 가지고자 탐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시오.....]
[ 아프게 살지 마라...
서러워하지도 마라...
니가 가지는 그 모든 것이 온전한 내 몫의 아픔이다...
그리워 견딜 수 없거든 차라리 모두 버려라...
그리 못하겠거든.....
아픈 것 서러운 것 버리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겠거든......
담아오너라...
내게 줄 선물로 하나 남김없이 담아오너라......
미안하다....
은혜해서 미안하다.....
내 가장 큰 죄는 너를 은혜한 것이고......
은혜하는 너를 이리 두고 가는 것이다......
미안하다....
동준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눈가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 아픔이 여전히 온몸에 달라붙어있는냥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
며칠째 같은 꿈을 꾸면서도 어느 것 하나 선명한 것이 없던 그곳에 한사람의 얼굴이 뚜렷이 영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