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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강-31

삶의이유 |2005.01.14 16:02
조회 224 |추천 0

애증의강-31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않는 기나긴 침묵이었다.

헛기침도 없었고, 메모지를 넘기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주심판사의 눈동자가 피고인석에 꼿꼿하게 서 있는 한 인물만 응시할 뿐이었다.

지영을 애워싼 교도관들이나 판사석 양옆의 검사와 변호사 역시 판사의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우측에 앉아있던 또 다른 판사가 주심판사에게 귓말을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숙연한 분위기인지라 귀만 쫑긋 세운다면 들릴법도 한 일인데 도무지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음이 지영을 답답하게 했다.

3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는 사건이거나 죄질이 무겁다고 판단되는 사건의 경우엔 판사 혼자의 단독부가 아닌 3인의 합의부에서 재판을 하는 통에 주심판사 혼자서 일 처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단지 주심판사는 원할한 재판의 진행을 위해 좌.우심의 판사보다 좀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을 뿐이었고, 형량을 결정하거나 선고를 할때는 3인이 합의하에 일을 처리하고 있는 거였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좌심 판사는 여자였다.

 진하지 않은 화장기가 그녀의 연륜이나 경력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만큼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판사들중에 여자가 끼어있으면 피고에게 손해라는 말을 듣고 있던 중이었지만 피고가 특별하게 판사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면 처음에 결정된 판사들로 재판이 벌어지는 거였다.

여판사들은-그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없이-피고들 사이에선 상당히 좋지 않은 존재라고 불평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강간이나 추행..기타 여자가 피해자인 재판의 경우에 어김없이 비슷한 다른 죄인보다 많은 형량을 받는다는 것이 죄인들 사이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깬건 좌.우심의 판사들과 적지않은 귓말이 오고간 후였다.

[증인 정승주 법정에 나왓습니까?]

판사가 증인을 호명하고 있었다.

[네]

뒷편 방청석에 앉아있던 정승주가 우렁찬 대답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증인석으로 향햇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법정을 메운 사람들이 깔깔 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어수선함에도 변함이 없던 사람은 지영과 주심판사 둘뿐이었다.

[피고 내 말 잘들으세요.]

[네]

[일단 피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하는 피고의 질문이나 행동이 피고의 형량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간단하고 짧은 주문이었다.

지영도 판사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승주가 증인석에 앉았다.

법원 서기가 성경책을 들고나와 정승주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을.....]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까지만해도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정승주의 증인선서와 더불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영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선 채로 지영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증인의 직업이 형사 맞죠?]

[네]

[성남경찰서 중부서에 근무하시는거도 맞죠?]

[네]

정승주는 지영의 질문에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했다.

검사나 변호사가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피고가 질문을 하고있으니 당황스러웟지만 어쩐지 존칭을 써야할듯한 위압감이 들기 시작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제가 무슨죄목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도 다 알겠군요?]

[네 알고 있습니다.]

[형사님께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 9시30분경 저와함께 사건현장에 가신일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네 기억납니다. 그 사건의 현장 검증차 갔던 거였습니다.]

[피해자 이상희가 머리에 많은 상처를 입었고 당시 상당한 양의 피를 흘렸다고 했는데 기억나시죠?]

[네 조서를 꾸밀때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들에도 많은 피가 묻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기억납니다.]

[그럼 그녀가 당시 입고 있던 옷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통상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물품들은 본인에게 돌려줍니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구요. 당시에 이상희가 돌려줄것을 요구해서 검사지휘아래 돌려 주었습니다.]

지영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현장을 검증하던날 사건현장에 많은 피가 떨어져 있던 것을 기억하시죠?]

[네]

[이상희가 저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며 제 옷과 머리스타일 말소리와 생김새 모두 일치한다고 조서를 꾸민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제가 형사님께 저의 옷을 사진찍어 달라고 부탁드렸고 형사님께서 찍은 걸로 알고있는데 그 사진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조서에 같이 올렸으니 아마도 판사님이 가지고 계신 서류에 있을겁니다.]

판사의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2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의 굵직한 서류를 뒤적였기 때문이었다.

판사가 서류 중간 어느쯤엔가에 붙은 사진을 훓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영이가 사건 당일날 입고 있었다던..그리고 피해자 이상희가 지목했다는 옷을 앞이며 뒤며 손목 부분이나 팔부분 가슴과 목언저리를 세심하게 찍어놓은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속 어디에도 피한방울 묻어있지 않았죠?]

[네 그렇습니다.]

[판사님 이상입니다.]

판사가 물끄러미 지영을 바라보았다.

미소인지 뭔지 알수없는 잔잔함을 입가에 남겨둔체 검사를 불렀다.

[검사는 할말있으면 하세요.]

[증인...몇일후 피고측 변호인과 사건현장에 간적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땐 변호사뿐만이 아니고 당시 사건을 지휘하셨던 검사님도 함께 갔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서류에는 바닥엔 피 한방울도 없었다라고 쓰여져 있는데요?]

지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찌 된걸까?

분명 사건의 현장 검증때는 많은 피가 흘려져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현장검증이 있던날 저녁에 비가 많이 왓어요. 잘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2-3일정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싰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건을 처리하셔야 할텐데 똑똑하게 기억하시는군요?]

비아냥 거림이었다.

검사의 질문에 정승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론 많은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잊혀져 가죠. 그런데 이 사건은 좀 특이해서 기억이 납니다. 피해자는 범인이 맞다고 하고 피고는 아니라고 하고 특별한 물증도 없고....]

[그럼에도 구속의 소견으로 조서를 꾸미셧는데 이유가 뭔가요?]

[당시엔 피해자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런건 아니지만...]

정승주가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땀을 닦는지 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어 이마로 가져갔다.

긴장했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 순간 더 많은 긴장과 공포에 휩싸인건 지영이었다.

[더 이상 질문할게 없나요?]

판사가 피고와 검사를 번갈아보며 묻고 있었다.

[네 없습니다.]

지영과 검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증인은 내려가도 됩니다.]

정승주가 자리에서 일어서 판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장내는 다시 어수선해졌다.

그 어수선함을 틈타 지영은 정승주에게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정승주는 대답대신 어깨를 가볍게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피고 더 부를 증인 있나요?]

[네 사건당시 저를 제일 처음 수사했던 김구연을 증인 신청합니다.]

[증인이 자리에 나왔나요?]

[네 나왔을 겁니다.]

판사가 방청석을 향해 김구연을 호명했다.

사람들의 눈이 서로를 응시하고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김구연씨 없습니까?]

판사의 부름에 맨 뒷줄에 앉아있던 김구연이 엉거주츰 일어서고 있었다.

[네]

[김구연씨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판사가 이맛살을 찌뿌리며 물었다. 처음에 호명할때 대답하지 않았기에 짜증스러워서 였다.

[증인석으로 가세요.]

판사의 툴툴거리는 말에 김구연이 증은석으로 향했다.

이윽고 증인선서가 시작되었다.

증인선서를 하는동안 김구연은 계속해서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의 질문은 검사처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제법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김구연의 눈이 지영과 마주치면서 증인 선서가 끝이났다.

[피고 질문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지영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아까와는 사뭇다른 눈빛으로 김구연을 쏘아보았다.

법정은 이미 고요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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