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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41. 오빠의 진심

나비 |2005.01.15 17:56
조회 1,482 |추천 0

kiwi - 41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빨리 받아봐. 이 기집애야, 끊기겠다. 빨리 좀 받아.”


병진이는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 독촉을 해왔고, 나도 행여 끊길세라 덥석 핸드폰을 쥐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진동이 내 마음과 닮아 있었다.



“여보세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화가 되기만 하면 잡동사니로 꽉 채운 비닐봉지가 북 찢어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던 말들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숨소리도 들릴까 숨마저 참고 있었던 것이다.


“너 어디야?”

“나?”


마치 나와 병진이가 몰래 여행을 왔다 들킨 기분이었다. 움츠러진 심장은 행여 소리라도 크게 내면 전화가 끊겨 영영 통화를 하지 못할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동해 왔다면서. 동해 어디에 있어?”

“여기? 여기 속촌데.”

“속초 해수욕장?”

“어.”


심문을 받는 기분으로 아주 착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기다려. 30분정도 걸릴 거야. 더 걸릴지도 모르고.”

“들었어?”

“어, 들었어.”

“도착해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후에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30분 후면 민성 오빠를 볼 수 있다는 것, 정말 사실일까?


“뭐라고 해?”

“여기로 온대. 30분 정도 걸릴 거래.”

“뭐? 그럼 이 근처에 있다는 거잖아. 지들끼리 바다를 보러 왔다 이거지?”

“오지 말라고 할까?”


난 진심이었다. 바로 전까지 ‘절대’를 외쳐가며 굳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병진이를 배신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냅둬. 방만 안 가르쳐주면 되지. 자기들이 여기 방을 다 뒤질 거야, 뭐야.”

“알았어. 미안해.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어. 다 알고 있더라고. 아까 우리가 다 말했잖아.”

“영규 오빠도 같이 온대?”


병진이도 뜻밖의 일이 싫지 않아 보였다.


“몰라.”

“에이, 물어봤어야지.”


와도 모른 척 하겠다는 말과 달리 병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병진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소주병을 들고 문밖을 나섰다.


“어디 가?”

“병 치워야지. 빈 병 치우면 좋잖아.”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방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 그거 버리게?”


남은 회를 버리려고 할 때 병진이가 날 불러 세웠다.


“너 먹을래?”

“아니. 여행 와서 우리끼리 청승 떨지 않고 잘 먹고 놀았다는 티는 내야지.”


세심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병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초조해 했다. 초조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끊은 지 30분이 넘어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깨끗이 정돈이 된 방 안에 앉은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일분 일분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초조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더 지나자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민성 오빠를 기다려야 하는 거지. 날 공주병 환자라고 취급했던 그 사람을.


“이러지 말자.”


말을 꺼낸 것은 병진이었다.


“우리 받아주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아까처럼 술이나 먹자.”


사랑하는, 하지만 끝날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안겨주는 사람을 기다리기는 초조함이 술을 요구한 것처럼 보였다. 십분, 백분 이해되는 행동이었다. 알콜이 내 몸을 모두 점령하여 바닥을 딛는 내 발이 물 위에 서있는 지, 자갈밭에 서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감각을 잃을 때 민성오빠를 만나고 싶었다. 왜 술의 뒤로 몸을 숨기려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존심을 조금 덜어내고 나의 진심을, 내 곁을 말도 없이 떠났지만 돌아올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간직한 채였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았다.

우리는 도착을 하기 전 에 취할 목적으로 쫓기 듯 술을 마셔댔다. 건배와 대화도 잊은 채 자신의 술잔에 술을 부었고, 그 술을 입 안에 부었다. 원했던 효과는 빨리 나타났다. 세상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일국의 대통령이 내 앞에 있다 해도, 수만 명이 운집한 광장의 한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호통을 칠 정도의 용기로 충만해진 것이다.


“나야, 문 열어.”


통화 한 시간 후 두 남자는 온통 그들의 생각에 빠져 있던 두 여자가 있던 공간의 문을 열었다. 민성 오빠였다. 내 눈 앞에 그가 있었다. 문 밖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리고 미안함을 가득 담은 그의 눈동자를 봤을 때는 다리의 힘이 다 풀려버릴 정도였다. 분명 미안함이었다. 당장 변명이라도 쏟아놓을 눈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하려 왔다면 무서운 눈을 하고 왔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안도감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혜림아!”


그가 내게 달려왔다.


“혜림이 술 왕창 먹었어. 나도 많이 마셨고. 오빠 때문이잖아. 오빠 때문에.”


병진이는 나와 달리 분하고 억울한 것이 떠올랐는지 영구 오빠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나가! 니 맘대로 왔다가 니 맘대로 와도 되는 줄 알아? 당장 나가라고.”

“너 때문에 온 줄 알아? 민성이 때문에 왔어. 안 그래도 가려고 했다.”

“그래, 가! 가버리라고. 오빠 없으면 내 인생 더 편해질 것 같다고. 나가!”


두 사람의 목소리는 높아져갔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괜찮아?”

“오빠!”


돌아온 것이냐고, 이제는 갑작스레 떠나는 일 없는 거냐고 가슴에 기대어 묻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적당한 말은 아니었다.

오빠는 나를 번쩍 안더니 침대에 눕혀주었다.


“힘들다고 먼저 도망을 가다니 비겁해! 지치고 힘들어도 함께 한다고 했잖아!”

“먼저 지친 것은 네 쪽이야. 나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밤마다 힘든 생활 지겹다 노래 한 건 너잖아. 나도 힘든데 집에 와서는 쉬고 싶은데 날마다 지친다, 짜증난다, 넌더리난다고 말했던 것 기억 안나?”

“난 생활에 지친 거지만 오빠는 나한테 지쳐 버린 거잖아. 내가 지겨운 거지? 그런 거잖아! 난 힘들어도 참아보려 했다구.”

“니가 참긴 뭘 참아? 참는 사람이 그러니? 돈 못 벌어온다고 괄시하는 것도 아니고. 니가 혜림이 결혼할 사람 잘 산다고 날마다 부럽다고 노래했잖아. 먼저 비교하고 먼저 질려한 건 너야!”

“그래. 부러워. 부러웠어. 부럽다고 말도 못해? 가슴 속에서는 부러워 죽겠는데 말도 하면 안 되냐고?”

“그게 네 솔직한 심정이었겠지, 그런 널 보기가 너무 힘들었어. 참을 만큼 참아봤는데 이젠 참아지지가 않아!”

“너희들 나가서 얘기해라. 혜림이 재워야 할 것 같아.”


두 사람의 싸움에 민성오빠가 끼여들었다.


“야, 창피하니까 나와.”

“싫어.”

“얘기 안 할 거야? 빨리 나와.”


영규 오빠는 나가지 않으려는 병진이의 손을 잡고 나가버렸다. 두 사람이 문을 닫고 나가자 갑작스런 적막이 찾아들었다.


“차가운 수건 갖다 줄까?”

“괜찮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야. 잠깐 누워있어.”


차마 민성오빠를 보지 못하고 돌아누웠다.


“연락도 없이 혼자 와서 미안해.”


나직한 목소리로, 내 등에 대고 말했다.


“내일 일어나는 데로 연락할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

“처음엔 화가 난 것도 사실이야. 그러다가 영규에게 연락이 왔어. 만나자고. 그러더니 나한테 이러는 거야. 자기처럼 살림 차린 것 아니니까, 아직 책임질 일 한 것 없으면 널 놓아주래. 자기 지금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결국 가난한 생활의 모든 책임은 남자에게 돌아오더래. 남들은 예쁜 여자 능력도 없으면서 발목 잡고 있다고밖에 생각을 해주지 않는다는 거야.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자신을 두고 손가락질 하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하더라고.”


등 너머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숨을 대신해 연기를 내뿜는 소리.


“미안하다. 연기 싫지? 창문 열어 줄게.”


잠시 후 시원한 바다 향이 코끝까지 전해왔다.


“그래. 가난이 죄라고 생각하고 다 이해하고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게 있다더라. 집에 와서 쉬고 싶은데도 안 놀아준다 늘상 삐지고, 어쩌다 화라도 내면 맨날 공주처럼 살게 해준다고 해놓고 이게 뭐냐 얘기하고···.”

“난 안 그럴 거야.”


몸을 돌려 민성 오빠를 보았다.


“난 안 그럴 거라고. 오빠가 봤어? 왜 다른 사람을 빗대어 미리 본 것처럼 말하는 건데? 내가 투덜거리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왜 속단하고 먼저 포기하는 건데.”

“너 안 그럴 것 알아. 그래도 내 마음은 널 공주처럼 살게 해주고 싶어. 난 영규말 다 이해가. 다 이해한다고. 널 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 같아.”

“결론이 그거야?”


몸을 일으키면서 소리를 쳤다.


“날 보낸다고 결론을 지어 버린 거냐고!”

“아니. 너에게 미안하지만 널 보낼 용기가 없었어. 아마  고생스러울 지도 몰라. 힘들어도 조금 참아줄 수 있겠어?”

“······.”

“진짜 열심히 해볼게. 학교도 조기 졸업할 수 있게 공부도 열심히 할 거고.”

“오빠!”


난 침대 밑으로 내려가 오빠를 덥석 안았다.


“고마워. 돌아와 줘서. 용기 내주어서 정말 고마워.”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건 사랑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었다. 사랑은 내게 많은 기적들을 보여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기적 같은 일이니까.

오빠는 뺨에 흐르는 눈물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니 눈물 내가 다 먹을 거야. 어디에서 눈물을 흘리든 네 눈물은 내가 다 먹을 거야. 나 없을 때는 울지 않기다.”

“응.”


곧 오빠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약하지만 짭짜름한 내 눈물 맛이 나는 듯 했다. 둘이 함께 느끼는 눈물 맛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길, 마지막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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