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보셨던 분들 많으실 줄 알지만
카엔의 오렌지 식탁에 올리고 싶은 글이라
다시 올려드려요.
경쾌한 글입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문희와 함께 해주세요.
말랑말랑 러브송
1
2001년 겨울.
스키장에서 단 3시간 만났을 뿐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다.
목숨 빼고 다 줄만큼.
그리고 3년 후. 다시 겨울의 문턱
‘망할 점쟁이. 한달 안에 꼭 만나게 될 거라고 큰 소리 뻥뻥치더니. 역시 사기였어. 내일이면 한달이잖아. 괜히 돈만 버린 거야!’
조금 남은 점심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고 있었다. 창 밖은 어제보다도 겨울의 황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추워지는 듯한 풍경이었다.
“대리님! 이거 잠실점 행사 매출표요.”
사무실 막내인 혜림이가 건네준 서류에는 ‘날씨가 추워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라고 쓰인 분홍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다.
“알았어요. 놓고 가요.”
혜림이는 싱싱하고 젋은 여자들이 누리는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뭐가 즐겁다고 맨날 실실거리는 거래.’
늘 웃는 얼굴의 그녀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상냥한 친절을 베풀어 싫어하는 이가 없었다.
있기는 하다. 나는 그녀가 싫다. 왠지 괜히 싫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똑똑한 척했던 내 신입 시절과 비교되어 그러는 건지 그녀의 인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기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뭐 왜 싫어하느냐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 그럴 예정도 없다.
“뭐 하세요?”
그녀는 싱싱하고 상냥한 얼굴을 내게 들이 밀었다.
“강혜림씨! 남 사생활 엿보는 게 취미야?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사적인 일 하고 있었다고!”
“죄송해요. 모니터는 미처 못 봤어요.”
“그렇게 미안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남은 점심시간을 누리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사람이 너무 착한 건 곤란한 일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저쪽인데 화를 낼 수가 없다.
“예. 일 보세요.”
혜림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얼굴마저 빨개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예민했던 건 내 쪽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다소 짜증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또 그 지겨운 문구를 또 보고 만 것이었다.
[이 글을 읽는 즉시 1시간 이내에 10곳에 옮기시면 정말 마술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가 옵니다.]
그 남자를 만난 이후 이런 문구들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용기가 내겐 없었다. 요즘 들어 이틀에 한 번꼴은 이런 문구를 만나게 되었고, 이젠 별 고민도 없이 글을 복사해 옮긴다. 옮기는 속도도 제법 빨라졌다. 로그아웃 상태로 올릴 수 있는 곳을 20군데쯤은 알고 있으니까. 부하직원에게 성질까지 부리면서 하는 일이 기껏 이런 일이라니. 이윤섭 당신 만나면 얼굴 한 대 갈겨버리고 싶은 내 맘 알아?
23살. 졸업을 앞두고 여자친구 여럿이서 스키장에 갔었다. 멋진 남자들에게 헌팅 당할 각오로 나선 길이었다. 그 때 우릴 헌팅한 사람이 윤섭씨와 친구들이었다.
불운하게도 난 윤섭씨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단 5초만의 일이었다. 낮에 즐겁게 스키를 같이 탔지만 내 마음은 전달할 기회는 없었고, 저녁에 함께 놀자고 약속을 하고 잠시 헤어졌기에 12시가 넘어가기 전에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 친구 연락처를 건네주었는데도 연락조차 없었다. 우리는 곧 다른 남자들에게 헌팅을 당했고, 친구들은 별 아쉬움을 갖질 않았었다. 서울에 돌아와 뒤늦게 내 마음을 친구들에게 알렸지만 모두 찾을 방법은 없다고 했다. 직업이며 학교도 모두 거짓말이었을 거라고 포기하라고 한 것이 충고의 전부였다.
그를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기 위해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매주 스키장을 찾았다. 스키장을 누비는 내 눈은 오직 한 사람만을 쫓았다. 3년 전 우연히 만나 다시는 볼 수 없는 남자를 말이다.
하지만 그는 늘 그곳에 없다. 스키장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우울한 기분에 마치 실어증 환자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가고 기분이 나아져서는 또 다시 스키장을 찾았다. 3번의 겨울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는 아주 멋진 남성이었다. 180이 넘는 키에 어깨는 넓지 않고, 허리를 굽히고 걷는 법이 없다. 평소에는 신사적으로 웃지만 썰렁한 농담으로 분위기가 흐려질 때는 큰 소리로 쾌활하게 웃는, 친절함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내 존재조차 모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현재 느끼는 이 감정을 난 당당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맹추 같거나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똑똑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그 말 앞에는 예쁘고, 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똑똑하다는 말을 듣기 힘들지만.
“문대리! 오늘 본점 행사 알바들 출근 확인했어?”
“어제 확인 했는데요.”
“오늘 했냐고 물었잖아!”
윤과장님이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또 펑크가 났단 말이야?
“핸드폰 연락도 안 된다고 하던데.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일한지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면서 일은 신입사원보다도 못해?”
“빨리 매장에 연락 취해보겠습니다.”
“이제 와서 연락 취한다고 일할 사람이 생겨? 똑바로 좀 해!”
살랑거리는 신입사원이 들어온 뒤로는 구박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 노처녀 과장이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증거겠지. 나도 남 일은 아닐 것 같아 왠지 이해가 되었다.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행사장에서는 본사에서 받쳐주지 않는데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냐며 오늘 매출은 누가 책임 질 거냐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사람을 볶아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건만 자책감이 너무 심하게 들었고,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겨울병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3년 전부터 매년 겪는 겨울병이.
어디서 술이나 얻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생각나는 것이 황보용준이었다. 2주 전부터 내게 작업을 걸어오는 그 남자는 선배가 하는 째즈바에 갔다가 알게 되었는데 잘 생긴 외모에 화끈한 성격까지 나무랄 데는 없었지만 호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멀리서도 풀풀나는 바람둥이 냄새 때문이었다. 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자신감에 넘치는 그를 보면 힘찬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로는 별로였지만 친구로 친해지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 희양! 이게 무슨 일이죠? 먼저 전화를 다 주고?
“퇴근 시간인데 기분이 우울해요. 술친구 좀 해주세요.”
- 기꺼이 해드려야죠. 누가 희양을 우울하게 했어요? 내가 혼내줄게요.
“한두 명이 아닌데요. 그것도 노처녀들이에요.”
- 그럼 좀 곤란하네요. 저는 여자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하거든요. 많이 우울해요? 진짜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네요.
“그냥 술이나 함께 마셔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 지금 끝난 건가요?
“아니요. 30분쯤 후에. 술친구라고 말했어요. 제가 넘어갔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 알겠습니다. 술친구! 근데 제가 지금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요. 바로 나갈 수는 없는데. 방금 만났거든요. 이쪽으로 오셔서 다른 테이블을 잡는 건 어때요?
“좋아요. 여하튼 술만 마실 수 있다면 싫지 않아요.”
- 정말 술 때문에 절 찾으신 거군요. 섭섭한데요.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는 거죠?
“예. 용준씨 쾌활한 웃음도 보고 싶어요.”
- 하하. 엎드려 절 받았군요. 일단 끝나는 대로 이쪽으로 오세요.
하루 종일 남들의 짜증에 시달리다 보니 흑심을 품은 남자들의 뻔한 친절이라도 받고 싶었다. 바람둥이만 아니라면 좋을 텐데. 오늘의 우울함을 날려버릴 약속이 생겼음에 가라앉았던 기분은 벌써 두둥실 뜨고 있었다.
“도착했어요. 어디에 있죠?”
- 여기요.
용준씨는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일행을 빠져나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회사해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얼굴이 정말 우울해 보여요.”
“늘 있는 그런 일이죠. 그나저나 이렇게 빠져나와서 곤란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랑 형들이에요. 합석 하실래요?”
“아뇨. 오늘은 용준씨랑 오붓하게 둘이서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 수다 떠는 것 좀 그냥 들어주세요.”
“오붓하게. 듣기 좋네요. 앞으로도 자주 오붓하게 지내요.”
늘 앞서가는 남자다. 일부러 불타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 나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어수룩했다. 그런 점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희씨는 스키장 자주 가요?”
“예. 겨울엔 매주 한번씩 가요.”
“그래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데. 안 그래도 저 형들이 한 번 가자고 해서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요. 같이 갈래요?”
“저 분 들이랑요?”
난 고개를 돌려 용준씨가 형들이라고 부르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으니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라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괜찮은 것 같고. 간다고 할까?
“어떻게 아는 분들인데요?”
- 동네 친구들이요. 근래에 알게 된 형들도 있고. 다들 매너 좋고 괜찮아요.
“예. 좋은 분들 같네요.”
그때! 바로 그 때!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이윤섭. 그 남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점쟁이님! 감사합니다. 만수무강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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