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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면...★

only one |2005.01.22 01:33
조회 450 |추천 0

<<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면  >>


intro


넷이 한 자리에 모이니 그 분위기가 참 묘했다.
사랑에만 바보인 공영광,
그 사랑을 시종일관 모른채 하는 박영채
박영채을 알고부터 사랑에 불이 붙은 로맨티스트 은현,
영채의  남동생 영민...

 

은현의 피아노 연주회가 끝나고 난 후 모인 저녁 식사 자리였다.
은현과 영채는 은근슬쩍 서로를 챙겨주느라 바빴고
공영광은 식사에 딸려 나온 술을 내내 홀짝거렸다.
영민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자주 먹을 수 없는 그 음식들에 정신이 없었다.


영채: 오빠, 오늘 진짜 들어가자마자 자야 돼, 알겠지? 또 응급실에 있다고 사람 불러내면 나 안 가!

 

은현: 진짜 안 와?

 

영채: ... 안 가... 그러니까 오늘 이거 많이 먹고 집에 가자마자 쉬어. 알겠지? 이제 공연만 끝나면 불안해 죽겠어...


 

은현은 공연이 끝나면 늘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긴장이 풀리고, 무리한 몸에 신호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 한 며칠 입원했다 나오는 게 은현은 익숙했다.
그리고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영채 때문에 입원하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은현에게는...   


은현: 영광씨, 오늘 옷 진짜 고마워요.


은현이 영광에게 말을 붙였다.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서로 말을 놓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 공연 의상은 영광이 직접 디자인해 만들어 주었다. 영광은 자신이 자꾸 은현과 영채의 사이에 끼어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영채와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하고 봤다.

술을 마셨지만 전혀 취하지 않은 영광은 슬쩍 웃고 말았다.


 

'네가 좋아서 해 준 게 아니라, 영채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 준 것 뿐이야...'


 

늘 영광의 편이었던 영민이 다정스럽게 은현과 이야기를 한다. 누나의 사랑이 은현에게 다 가버린 이상, 언제까지 은현에게 어색하게 굴 순 없었다.
영광은 그걸 다 이해하면서도 한 편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아픈 그 사람의 이마 짚어주기*


 

아침에 전화가 왔다. 은현은 어김없이 병원에 있었다.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간 영채는 그 날 따라 헛소리까지 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은현 모습에 놀랐다.
공연 준비를 위해서 은현은 몸을 아주 혹사시켰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그럴 때마다 영채는 마음이 안 좋다.

 

영채: 깼어?


하루종일 자던 은현이 일어났다. 곁에 영채가 있자 은현은 슬쩍 웃는다.


 

영채; 웃음이 나와?

 

은현: 나오네...

 

영채: 못 살아 진짜... 또 여기 이렇게 있으면 안 온다고 했지! 공연 전에 무리 좀 하지 마...


영채의 잔소리가 은현은 즐겁다.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잤더니 허리가 뻐근하다.

 

은현: 영채야, 나 링겔 좀... 화장실 갈래.

 

영채: 응...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다. 영채는 은현의 옆에서 책도 읽고, 은현의 곡을 들어보기도 하고 (듣다가 또 졸긴 했지만...)세상 모르고 자는 은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은현이 다시 자려고 뒤척인다. 영채는 가만히 손을 은현 이마위에 올려본다.


영채: 열이 많이 내렸네. 아까는 불덩이더니...


은현은 자신이 아플 때 늘 곁에 있어주는 영채가 좋았다. 체온계보다 자신의 손이 더 열을 잘 짚어 낸다며 가만히 이마를 만져줄

땐 열이 다 내려갈 것만 같다.

영채는 아침에 죽을 끓여 오겠다고 병실을 나섰다. 영채가 가고 나서 얼마 안 돼 은현은 또 잠이 들었다.


 

집에 와 죽을 끓이는 데 영민이 일어나 부엌으로 온다.


 

영민: 뭐 해? 죽 끓여?

영채: 응, 영민아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언제 온데?

영민: 아빠 일이 안 끝나나봐... 모르겠데 잘...  근데, 그거 또 형 갖다 주려고?

영채: 그럼 너 주려고 아침부터 죽 끓이겠니?

영민: 좋겠다 형은...

영채: 부러우면 너도 얼른 여자친구 만들어. 맨날 인기 많다고 말만 하지 말고 한 명 데려오란 말이야. 너 사실은 여자한테 인기 하나도 없지?

영민: 웃기셔... 내가 지금은 국방의 의무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곧 무대에 오르면 팬이라는 게 생기겠지. 내 싸인 미리 받아놔~

 

영민은 공익근무요원이다. 지하철 타러 가면 안전선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는 영민을 볼 수 있다.

 

 

 

*마음이 자꾸 그녀에게 가다...*

 

 

 

아프면 사람은 어리광쟁이 된다고 하더니, 평소엔 오빠노릇 하느라 바쁘던 은현도 병원에서 만큼은 영채한테 자꾸 기댄다.
영채가 죽을 내 놓자 은현은 숟가락을 뜨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영채: 안 먹어?

은현: 숟가락이 무거워 보이네...

 

영채는 말없이 죽을 떠 은현의 입에 넣어준다.

 


은현: 갈 수록 죽 끓이는 솜씨가 느는군... 기특해!


 

은현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은현은 낮잠을 자고 영채는 그 옆에서 졸고 있을 즘.
노크소리가 났다.
영채는 화들짝 깨 누가 들어오나 봤다.
영광이었다.

 

영채: 어머, 오빠. 여기 웬일이야?

영광: 은현씨 입원했다길래...

영채: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뭐. 이리 와. 음료수 하나 줄까?

영광: 응, 아무거나... 은현씨는 자나보네.

영채: 그 동안 못 잔 거 다 자느라... 하루 종일 잠만 자...

 

영광: 요즘은 1인실이 호텔보다 좋다더니 진짜 그러네... 병실 같지도 않고...

영채: 응...

영광: 밥은 제대로 먹어? 이거 초밥인데, 이따가 은현씨 깨면 같이 먹어. 너 먹든지.

영채: 어머, 고마워...

영광: 맞다, 어제 밤에 너희집 가니까 영민이만 있더라. 그래서 네 방에 두고 왔는데... 봤어?

영채: 뭐?

영광: 못 봤나보네... 엄마 가게에 재고품 있다길래 내가 나름대로 수선해서... 너랑 사이즈 맞는 게 있길래 갔다놨어. 마음에 들면 입으라구...

영채: 고마워 번번히... 안 그래도 다들 물어봐, 옷 어디서 샀냐구... 오빠 이제 혼자서 의상실 하나 내도 될 것 같은데!

영광: 그래?...


영광과 영채는 그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영광: 이제 가봐야겠다. 엄마 의상실에 가는 길이었거든.

영채: 맞다, 아줌마 의상실이 이 근처지. 아줌마 못 본 지도 오래됐다... 나중에 한 번 놀러간다고 전해 줘.

영광: 그래.


 

영광은 힘없이 복도를 걸어 나왔다.
영채가 밤 낮 보살피는 은현이 부러워 뱃속이 꼬일 지경이었다.
자신도 아프면 영채가 저렇게 보살펴줄까, 그렇게만 해준다면 온 몸이 박살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영채가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봐준다면
그렇게 아프다가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김현희 부띠끄.


영광의 엄마가 하는 의상실이다. 크고 화려하고 넓다.  
아들 사랑이 곧 삶의 의미인 엄마가 영광을 반긴다.


엄마: 아들, 유학 보단 그냥 엄마 의상실에서 디자인 좀 해라. 오늘 아들이 디자인 한 옷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 있어 하는지, 나 부러워서 혼났어. 몇 벌이나 팔았는지 몰라.

영광: 글쎄... 나 취직시켜 주는거야?

엄마; 물론이지!

영광: 생각해볼게. 그래도 엄마가 한 것만 하겠어?

엄마; 무슨소리... 아주 훌륭해.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든 영광은 오늘따라 더 영채가 생각난다.
다른 사람 곁에 있으니 더 그렇다.

가끔 영민과 술을 마실 때 영민은 그랬다.
이제 그만 누나를 잊으라고... 그 무심한 여자를 왜 그렇게 못 잊어 하냐고... 형이 뭐가 모자라서 바보같이 그러냐고...

영광은 소주를 한 잔 들이키고는 웃기만 했다.

 

'....마음이 자꾸 영채에게 가는 데, 난 도무지 그걸 막을 길이 없다...... 나도 이제는 힘들어서 싫은데...' 

 


자기의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그 아이가 미워서 영광은 멀리 유학을 가려고 했다.
몇 년 그렇게 지내면 다 잊혀질 줄 알았다.
그런데,
미련이라는 게 있었다. 정말 그러다 그 아이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잊기로 해놓고 멀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영광은 자기도 모르게 유학가려는 생각을 서서히 접고 있었다.


 

 

*특별한 콘서트*

 

 

 

은현은 병원 문을 나오자 갑자기 번쩍 영채를 들어 안았다.
놀란 영채는 빨리 내려달라고 바둥대는데 은현은 아랑곳 하지 않고 택시 타는 곳까지 걸어간다.


영채: 뭐하는거야!

은현: 힘자랑.

영채: 다 나았다 이거야?

은현: 덕분에... 택시 온다. 얼른 집에 가고 싶다... 부인도 잠시 우리 집에 갑시다!

 

 

은현은 능청을 떤다. 영채는 안 그래도 한 번 가려던 참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냉장고도 텅 비었을테고 집도 엉망일거다.
더군다나 요 며칠 집을 비웠으니 혼자 그 집에 들어가는 일은 외롭기까지 할 것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은현은 훨씬 더... 

 

집에 도착하자 한기가 느껴진다.


 

영채: 얼른 보일러부터 올려야겠다. 집이 너무 추워...


 

영채는 서둘러 보일러를 올리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냉장고는 없어도 될 듯 싶다. 전기만 먹은 채 윙윙 거리고 있다.
뭘 해먹은 흔적이 없는 싱크대는 그러나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은현은 그 동안 못 친 피아노를 한 손가락으로 뚜, 뚜, 눌러보고 있었다.


영채: 오빠, 몸 괜찮으면 마트에 가자. 당장 저녁 해 먹을 것도 없어.

은현: 그래...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은현은 식성이 거의 서양식이었다.
김치를 못 먹고 된장찌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빵, 버터, 마요네즈, 구운 고기를 좋아했다.
반면 영채의 식성은 완전한 신토불이였다.
처음엔 식성이 틀려 밥 먹으러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은현은 카트를 끌고 영채는 그 옆에 서서 살 것 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은현: 나 저녁 뭐 해 줄건데?

영채: 김치찌개.

은현: 김치찌개?

 

영채: 응. 나는 지금 그게 너무 먹고 싶어. 전에 갖다 준 김치 손도 안 댔더라. 덕분에 적당히 쉬어서 찌개 끓이기 딱 좋겠더라구.  오빠도 이제 식성 바꿔야지. 한국 음식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맛있게 해 줄테니까 많이 먹어야 돼. 아마 오빠가 김치를 안 먹어서 매번 아픈 걸거야.

 

은현: 그런 게 어딨어...

영채: 어딨긴! 여기 있지! 이제부터 편식하면 혼 날 줄 알아.


은현의 긴 속눈썹이 깜빡거린다.


 

영채는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하고 생선을 굽고 밑반찬도 한다.
요리에 영 소질 없음을 깨닫고 1년 동안 요리학원에 다녔다. 덕분에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꽤 그럴싸한 식탁을 차려낸다.

분주히 움직이는 영채의 뒷모습이 예쁘다.
은현은 괜히 혼자 히죽거렸다.


영채: 이제부터 꼭 밥으로 챙겨먹어. 자꾸 느끼한 거 먹지 말구... 먹다보면 아마 다른 거 못 먹을거야.


은현은 삐죽거린다. 오랜시간 익숙해져 있는 것을, 특히 음식을 자꾸 바꾸라니.... 그러나 영채는 완강해 보인다.
은현은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어본다.


영채: 오빠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곧 익숙해 질거야.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지, 안 그래?

은현: 몰라!


그래도 툴툴 거리면서 밥 한 공기를 비운 은현은 후식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하자며 와인잔을 들고 거실에 나타났다.


은현: 여기 앉아봐.


 

은현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상하게 영채는 은현의 곡만 들으면 꾸벅꾸벅 졸았다.
잔잔한 은현의 곡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영채에게 만큼은 자장가 이상으로 졸렸다.


 

은현; 오늘은 노래야.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러고보니 영채는 은현이 부르는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은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연주를 시작한다.


 

 

#아직도 널 잊지 못해 이유 없는 울음 삼키고

애써 기다린 그대 지우려 하네

어두웠던 지난 겨울비 내린 그날 밤

이젠 잊은 듯한 눈길이 다가와

사랑해,
너무 사랑했었어. 널 위해 살아 온 날 잊지 말아줘

널 보며 너를 기다려오며 너만을 그리워 한

오직 너 뿐인 나를 기억해 줘...

 

그렇게 지내온 시간 속에 넌 아마 날 잊어 버린 채

애써 행복한 듯한 눈빛을 보이지

울어도 괜찮아

내게로 와

너를 위해 남겨진 내 품 안으로

아직 난 널 사랑해...

 

사랑해, 너무 사랑했었어...

 

 

영채: 내가 그 노래 좋아하는 지 어떻게 알았어?

은현: 괜찮았어?

영채: 응... 막 닭살도 돋고... 왜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목도 메이고...


은현: 기록이다, 기록... 박영채가 한 번도 안 졸고 끝까지 다 들은 거... 저번에 공연 때도 그대는 특별석에 앉아서 졸더군...


영채에게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는 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행복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었다.


*봄*


 

3월,
영채는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집 근처 고등학교의 문학 선생님으로 돌아갔다.
 
학기 첫 수업시간,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주영이라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어하는 아이었다.


주영: 선생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선생님 남자친구가 은현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영채: 누가 그래요?
주영: 아니... 그렇게 들었어요. 정말 선생님 남자친구가 은현이예요?
영채: 네.


야, 은현이 누구야?
은현... 피아니스트...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영이는 그 사실이 못내 부러운 듯 영채를 쳐다본다.


 

영채: 제 남자친구를 아세요?
주영: 그럼요, 팬이예요, 진짜. 싸인 한 장만 받아다주시면 안 돼요?
영채: 그래요, 받아다 줄게요.


 

괜히 영채의 어깨가 으쓱하다.


은현은 일본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공연 후 부모님과 형이 있는 영국에서 한 달 정도 머문 후 한국에 올 예정이었다.

퇴근 후 영채는 은현을 만났다.
둘이 자주 가는 까페였다.


은현: 여기...

은현은 영채의 전화를 받고 CD에 싸인을 해가지고 왔다.


영채: 와, 이거 돈 받고 팔아야 되는 거 아니야?

 

은현은 웃는다.


은현: 여기 까푸치노 2잔이요.

 

한 동안 은현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영채는 무엇보다 일본 공연이 걱정이었다.


 

영채: 내가 일본에 따라갈 수도 없고... 절대 거기선 아프면 안 돼. 알겠지?

은현: 걱정 하지마, 거기가면 나 도와주는 스텝들 많으니까...

영채: 몇 시 비행기야?

은현: 내일 낮 3시.

영채: 나 보고 싶다고 울지 말구...

 

평소에 이런 닭살 멘트가 오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영채는 괜히 마음이 이상하다.


영채: 가면 꼬박꼬박 메일 보내고, 알겠지?

은현: 응...


 
그 시간 영광은 작업실에 있었다.
한 동안 영채와 연락 없이 조용히 디자인 작업에만 매달려 있었다.
너무 일에만 빠져 있는 영광이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영광에게 저녁을 사주겠다며 불러냈다.


엄마: 아들, 요즘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니야? 아들 같은 킹카가 뭐가 모자라서 여자랑 연애같은 것도 안 해? 이 엄마도 며느리 봐야 지... 응?

 

영광: 원래 킹카가 외로운 법이야.


영광은 장난스레 말을 던진다.
조용히 지냈지만 마음 속으로 수 없이 영채를 생각했다.

 

상상 속에는 늘 영채가 자신의 여자였다.

 

영채네 빌라 아래층에 살고 있는 영광.
영민과 영채, 그리고 영광. 이렇게 셋이 포장마차에 모여 가끔 술  마시며 어울렸었다.
그 때가 참 즐거웠는데

영채가 은현을 만난 후로 그렇게 모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영광은 밤에 술 생각이나 영민을 불렀다.
먼저 포장마차에 가 앉아 있는데 영민이 잠시 후 오고 뒤따라 영채도 왔다.
영광은 놀라기도 하고 금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영채는 영광이 가져다 준 옷을 입고 있었다.


 

영광: 옷 잘 어울리네... 역시 넌 빨간색이 잘 어울려.

영채: 살이 좀 빠졌나봐. 좀 헐렁해.

영광: 그래? 다시 수선해줄게, 내일 갖다 줘.

영채: 아니야, 그럴 정도는 아니구...


뜻 밖에 영채가 나오자 영광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영광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 사실 영민이 영채를 끌고 나온 것이었다.

영광의 기분은 영채 하나면 금방 좋아지곤 했다.


반면 잠시 은현과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영채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이 주량인 영채는 그 날 혼자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은현: 곰~방~와!


 

밝은 은현의 목소리다. 영채는 기분이 좋아진다.
일본에 잘 도착한 모양이다.


은현: 지금 막 저녁 먹고 왔어. 근데 이상하게 네가 끓여줬던 김치찌개 생각이 난다... 역시 일본 음식은 좀 싱거워... 배도 안 부른 거 같구... 

 

영채: 그래? 알았어, 한국에 오면 맛있게 끓여줄게. 피곤하진 않아?

은현: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영채: 응, 무리하지 말고, 몸 조심해, 알겠지?

은현: 넵!

영채: 일본 여자가 쫓아오면 도망가!

은현: 도망을 왜 가냐? 어서오세요... 해야지.

영채: 어허... 그랬단 봐... 나도 오빠 없는 참에 바람이나 한 번 피워볼까 생각중이었는데... 알아서 해...

 

그렇게 둘은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전화는,
쉽사리 안 끊어졌다.

 

 

*영광씨를 사랑해요*


 

 

영광이  의상실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시간이었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멋들어지게 옷을 빼 입은 중년 여자와 그 여자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모녀 사이인 모양이다.

단골인지 영광의 엄마는 두 여자를 보자 환히 웃으며 반긴다.


영광엄마: 어서오세요.

중년여자: 날씨도 화창하고 해서 봄 옷 장만하러 나왔어요.

엄마: 잘 오셨어요.

중년여자: 제 딸이에요. 이현이. 올해 대학원 들어갔어요.

현이: 안녕하세요

영광엄마: 반가워요. 엄마 닮아서 정말 예쁘네.


예의성 멘트였다.
엄마를 안 닮아서 미인이었다. 사실 그 현이의 엄마는 인물이 그저 그랬다. 안 꾸미면 볼품 없었을 뻔한 외모였다.
둘은 넓은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이 옷, 저 옷을 고르고 있었다.


 

현이엄마: 이 디자인... 괜찮다. 현이야, 너 입으면 참 예쁘겠다.


현이도 마음에 드는 눈치다.


영광엄마: 제 아들이 디자인 한 옷이에요. 여기 옷 중에 반은 저기 제 아들이 디자인 한 거예요. 마음에 드시면 한 번 입어보세요.


현이 엄마는 영광을 눈여겨 본다.

훤칠한 키에 남자답게 생긴 외모, 거기다 실력도 있다니, 현이 엄마는 괜히 마음에 든다.
현이 엄마는 계속 옷을 둘러보고

현이는 쇼파에 가서 앉는다.
카탈로그를 둘러 보다가 눈을 감고 음악 듣는 영광을 쳐다본다.


현이엄마: 아들이 잘 생겼네요.

영광엄마: 뭘요. 저래도 아직 여자 하나 없어요.

현이엄마: 어머... 우리 딸도... 큰일이에요. 도통 남자에 관심도 없고... 그저 공부만 하려고 드니 이제 슬슬 속상하려고 해요.


 

보아하니 뻔한 분위기다.
두 아주머니는 멀리 사돈지간까지 보고 있는 눈치다. 둘이 호호 거리면서 금새 친해졌다.
현이 엄마는 이 옷, 저 옷 많이도 고른다.


영광의 핸드폰이 울린다. 후배가 점심을 사달라고 온 전화였다.
영광은 이어폰을 빼고 앞에 앉은 현이를 슬쩍 쳐다보고 무심히 일어선다.


 

영광: 후배 좀 만나고 올게요. 점심 먼저 드세요.

영광엄마: 그래, 알았어.

 

옷을 담은 쇼핑백을 기사가 앞장 서 들고 간다.
현이엄마와 영광엄마는 그 전엔 그저  옷가게 사장과 손님 사이였지만 그 사이에 뭔가 타이틀이 더 붙은 듯 친밀해졌다.


영광엄마: 들어가세요.

현이엄마: 다음에 또 들를게요.

영광엄마: 네, 언제든 오세요. 현이씨도 잘 가요, 자주 놀러오고...


모녀가 차 뒷자석에 앉아 소곤거린다. 현이는 시선을 창 밖에 두고 엄마에게 말한다.


 

현이: 저 옷 가게 아들 말이야... 괜찮지 않아?


현이 엄마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행복한 그 사람, 불행한 그 사람*

 

 

한 달 후,
은현이 귀국했다. 은현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들러 짐을 놓고 영민이 근무하고 있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영민은 술 먹고 선로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어슬렁 거리는 아저씨와 실갱이중이었다.

 

 

영민: 아저씨, 조금 있으면 열차 들어와요. 이러시면 위험해요.


아저씨는 영민이 말리자 오히려 더 선로 근처에 가 발을 내미는 등 영민을 난처하게 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남자 한 명이 그 아저씨를 같이 말린다.


아저씨: 왠 술은 저리 마시고... 아저씨, 이리 와요. 사고 나면 아저씨만 손해야...


영민은 그 아저씨가 탄 열차가 떠난 후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은현을 봤다.


영민: 형!

은현: 저런 아저씨 설치면 골치 아프겠다.

영민: 언제 왔어요?

은현: 좀 전에... 한국에 오자마자 그냥 여기에 오고 싶더라. 곧 퇴근이지?

영민: 네.

은현: 맛있는 거 사줄게.

 

실컷 저녁을 먹고 영민은 은현과 포장마차에 갔다.


영민: 영광이형이랑 나랑 누나랑 여기서 자주 놀았어요. 셋이서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은현은 포장마차를 둘러본다.


은현: 재밌었겠네...

영민: 그런데 누나가 형 만난 이후로 셋이 모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은현은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은현: 영광씨랑은 많이 친한거봐.

영민: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죠. 형도 아시죠? 영광이 형이 우리 누나 좋아하는거...


은현: 응, 대충은... 처음에 영채랑 사귈 때 나 찾아오고 그랬었어.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더라.


영민: 그 많이... 라는 게 장난이 아닌 게 문제죠. 근데 요즘 영광이 형 쫓아다니는 여자 생겼어요. 누나는 그 여자랑 잘 되길 바라는 눈치구요.

 

은현: 그래?... 잘 됐으면 좋겠다.

 

그 때 영채가 나타났다. 은현은 깜짝 놀란 눈치다.


 

은현: 나 여기에 있는 지 어떻게 알았어?

영채: 글쎄... 한국에 왔을텐데 전화는 없고... 텔레파시를 쐈더니 포장마차에 있을 것 같더군.

 

사실은 영민이 문자를 몰래 보냈었다.


 

영민: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눈 뜨고 못 봐주겠더라구요. 도대체 형이 얼마나 잘해주길래...

 

영민은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보기 좋다.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영민은 자기 누나를 사랑하는 은현이 좋았다. 영광 못지 않게...

그리고 지나가다 영광은 셋이 너무나 즐겁게 모여 앉아 있는 것을 봤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 은현이 있었다.
너무나 잘 어울리고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영광은,
우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미안해요*


 

 

현이는 옷가게에 자주 들렀다.
처음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들르더니 이제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온다.
현이와 영광의 엄마는 이미 꽤 친해졌다.
영광의 엄마가 슬쩍 현이에 대해 떠 봤었다. 영광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싸늘했었다.
자꾸 현이가 옷 가게에 오는 게 자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영광은 현이에게 점심을 먹자고 했다.


영광: 한식 좋아하세요?


영광은 영채의 집에 놀러갔다가 먹은 김치찌개가 여태껏 자기가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다고 생각했다.

 

 

현이: 그럼요.


영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영광: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현이는 눈도 깜짝 하지 않고 말했다.


현이: 네.

 

짐작했던 영광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차가 나오자 그 때 영광이 입을 뗐다.


영광: 저한테 관심이 있어서 가게에 왔다면 이제 오지 마세요.


현이는 조금 놀란다.
여태껏 자기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이 엄마가 영광 엄마에게 말했던 것 처럼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현이는 이미 꽤 많은 남자와 사귄 적이 있었다.


 

영광: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현이: 아... 그래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아요? 늘 어둡고... 짝사랑이예요?

영광: 네.

현이: 그렇구나... 그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네요.


영광은 현이를 빤히 쳐다본다.


 

영광: 짝사랑 하지 마세요. 그거 무지 힘들어요. 제가 마음을 줄 듯, 안 줄 듯 질질 끌면 힘들어지는 건 현이씨 일 것 같아서 빨리 말하고 싶었어요. 현이씨가 절 좋아하든 말든, 난 현이씨를 좋아할 마음이 없습니다.


생각외로 비참했다. 현이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이: 나도 짝사랑 해봐서 알아요. 그런데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영광은 그 말도 예외가 있다고 생각했다.
꼭 영채처럼...


영광: 안 넘어 가는 나무... 있어요. 나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그래요.

 

현이: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친구해요. 친구는 괜찮잖아요? 나 같은 친구 나쁘진 않을거예요.  나 영광씨 친구 이상으로 안 보

면 되잖아요. 근데, 이왕 이렇게 얘기 나온 거 그 안 넘어가는 나무 얘기 좀 들려줄래요? 어떤 여자가 그렇게 영광씨를 마다해요?


영광: 그냥 여자예요. 뜨뜨미지근한 걸 싫어하는 여자예요. 차갑거나... 아니면 뜨겁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여자예요. 그래서 어정쩡하게 좋은 나는 그냥 냉탕에 몰아넣고, 정말 사랑하는 남자는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예요. 나도, 그 여자를 좋아하다보니 닮아졌나보네요.

 

 

영광은 일어섰다.
현이는 잠시만 있다가 가겠다고 했다.


현이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마음에 상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당신...*

 

 

토요일이었다. 영채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참느라 죽을 뻔 했다.
영채의 고질병,
생리통이었다.

 

하루 종일 엎드려 있었다. 약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은현의 CD를 틀었다.
영채는 여태껏 은현의 CD를 끝까지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은은하고 맑은 피아노 소리는 영채의 하품을 유도했다.

 

그 날 은현은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영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이 든 영채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영채: 여보세요.......

은현: 잤어?

영채: 응...

은현: 웬 낮잠이야?

영채: 몸이 좀 안 좋아서.

은현: 왜? 어디가 아픈데?

영채: 그냥 좀... 배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하고...


영채는 차마 생리통이라 말은 못 하고 그냥 얼버무렸다. 그런데 은현이 오늘따라 집요하다.


은현: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구체적으로 말해봐. 내가 약 사가지고 갈게. 나도 너 아플 때 간호라는 걸 한 번 해 보자.

영채: 응? 아니야. 자고 일어났더니 많이 괜찮아졌어. 올 필요 없어.

은현: 그래? 진짜 안 아파?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는데! 혹시 영채야...

영채: 응? 뭐?...

은현: 너 마술 걸렸니?


 

은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새삼 민망스러워 영채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영채: 어?... 뭐... 뭔소리야. 오빠, 나 아프니까 끊어. 내가 연락할게.


전화를 서둘러 끊음으로서 자신이 지금 생리통으로 아프다는 걸 인정해버렸다.

영채도, 은현도
조금 보수적인면이 있었다.

저녁이 되자 영민이 왔고 은채가 엎드려 있자 영민은 달력을 본다.


 

영민: 누나, 약은 먹었어? 고생이 많네.

영채: 시끄러워. 저녁 네가 알아서 챙겨 먹어.

영민: 아, 맞다. 엄마랑 아빠 다다음주에 오는데, 토요일날 제주도로 오래.

영채: 왜?

영민: 여태까지 제대로 구경 못 했다고 이번에 구경하자던데.

영채: 아, 몰라 귀찮아. 안 가.

영민: 왜 짜증이니... 하긴...


밤 9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올 사람이 없는데, 굳이 있다면 영광인데 영광은 영채네 집에 올라올 때 꼭 전화를 하고 올라왔

다.
전화도 없이 누굴까,

영민이 문을 열자 꽃다발을 든 은현이 서 있었다.

 


영민: 형! 이 밤에 웬일이예요?


 

방에 있던 영채는 형! 이라는 소리에 영광이 온 줄 알고 아예 나오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버린다.
설마 은현이 왔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영민: 누나 안 자니까 들어가봐요. 근데 방구석이 완전 돼지우리 저리 가라인데, 놀라진 말고...

 

은현은 웃으며 방문을 연다.
영채는 꼼짝도 안 한다.


 

은현: 영채야! 많이 아파?


 

목소리가 영광이 아니다. 영채는 고개를 내민다. 은현이 너무나 해맑게 웃고 서 있다.


영채: 엄마야.!!!

은현: 야, 전화를 그렇게 끊어버리면 어떻게 해... 이거 약 먹어. 내가 생리통 약 달라니까 약사가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어머, 처음본다.
왜 저렇게 능글맞나 모르겠다. 은현은 밖에서 물까지 떠 가지고 온다.


영채: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뭐하러 이 밤에 와.


영채는 민망하다.


은현: 내가 와서 싫어?

영채: 싫은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긴 해.

은현: 민망할 게 뭐있냐? 아, 해. 너도 나 병원에 입원했었을 때 이렇게 해 줬잖아. 뭐 먹었어? 죽 끓여줄까?

영채: 아니, 이거 죽 먹고 그럴 만큼 중병 아니야. 약 이리 줘.


굉장히 부담스러운 과잉친절이다.


 

영채는 약을 먹고 누었다. 은현은 그 곁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누워있는 영채를 바라보는 은현의 눈빛이 심히 부담스럽다.


영채: 뭘 그렇게 쳐다봐...

은현: 달 마다 이렇게 아픈거야?

영채: 그 얘긴 그만 하지... 늦었는데 얼른 가 봐. 그리고 다음부턴 이렇게 오지마. 사람 민망하게 왜 이래. 그냥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는거니까 유난 떨지마.


 

은현: 알았어...


 

은현은 웃는다. 영채는 은현을 쳐다본다.


영채: 웃지마, 능글맞아보여.

은현: 미안,

영채: 나 자게 빨리 집에 가. 집에 가서 얼른 작곡 해야지. 돈 안 벌어?

은현: 알았어, 갈게. 푹 쉬어. 

 

꽃다발에 약에 음료수에 바리바리 싸들고 온 은현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잘 자라며 손을 흔드는 은현을 보자 그만 영채는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다.


 

*두 남자*


 

은현이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래에서 영광이 올라온다.
영채에게 옷을 가져다주는 길이었다.
서로 놀란다.


은현: 오랜만이에요.

영광: 네.

은현: 영채한테 가는거예요?

영광: 아니... 옷 좀 가져다주려고요.


영광은 굳은 표정으로 은현을 쳐다본다.


은현: 영채가 아프다길래 약 사다주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영광: 영채가 아파요?

은현: 배 아프데요.

 

자기 여자에게 옷을 가져다주는 남자.
은현은 자기도 모르게 영광을 보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한 마디 하고 싶은데 그건 좀 웃길 것 같았다.


 

은현: 시간 되면 저 앞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할래요?

영광: 갖다 주고 내려올게요.


 

둘은 마주 앉았다.
한 동안 말 없이 잔만 오고간다.


은현: 영채 옷이 늘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영광씨가 자주 옷을 선물하나봐요.

영광: 그냥 버릴 뻔한 재고품 조금 손 봐서 주는 거예요. 선물이라고 할 것도 없죠.


그게 다 아직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은현은
내 여자한테 그만 미련을 버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영광: 저 보기 불편하시죠?

 

영광은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영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영채가 언젠가 그러더라구요. 나보고 친정오빠 같다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이성이 아닌 가족 같다는 식으로 뭉뚱그리는 거... 

은현: ............

 

영광: 더 이상 영채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어요. 근데 도무지 그게 잘 되질 않아요.


영광은 소주를 마신다. 마셔도 마셔도 오늘은 취하지 않는다.


영광: 나는 은현씨에게 거슬릴만한 상대가 아니예요. 영채처럼 좋고 싫은 게 확실한 여자는 처음 봤어요.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바라봐달라고 하면 한 번쯤은 쳐다봐주는데, 영채는 은현씨를 만나기 전에도 날 한 번도 봐주지 않았어요.


은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광의 독백이 이어졌다.


 

영광: 처음에 영채가 남자친구 있다고 말했을 때, 그 남자를 찾아가 죽도록 패주고 싶었어요. 왜 그랬는지 몰라요. 네가 뭔데 나도 못 가지는 영채를 가지느냐... 막 속에서 불덩이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어요. 우울하고 비참하고... 


영광: 영채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로막진 말아주세요. 이건 부탁이에요. 그것마저 못하면 난 어떻게 될 지 몰라요. 그냥 지금처럼 바라보는 것 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줘요. 음... 해바라기도 목이 아플 때가 있다고 ... 무슨 노래가 있던데 저도 영채만 바라보다 언젠가 지칠 날이 있겠죠.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고
남은 술은 없었다.
영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광: 술값은 제가 계산하죠. 조심히 가세요.


 

 

* HAPPY BIRTHDAY TO YOU *


 

영채의 생일이다. 또, 영광의 생일이기도 하다.
영채가 은현을 만나기 전,
영채와 영광, 영민은 셋이 집에서 파티를 했었다.
영광은 같이 파티하며 놀았던 그 시간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오늘은,
영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영채는 아마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보낼 것이다.


영광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의상실에 있었다.
일부러 일을 찾아서 했다.
정신없이, 밥도 안 먹고...


엄마: 아들, 점심 먹어야지. 저녁에 미역국 끓여주려고 했는데 약속이 생겨버렸네. 어떻하지?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

영광: 생각 없어.


 

저녁이 되자 현이가 찾아왔다. 그 때까지 영광은 의상실에 남아 수선을 피우고 있었다.
일이 손에 들어올리 없었지만 영광은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좀 불안해보이기까지 했다.
엄마는 약속이 있다고 나간 후였다.

현이에게 자리를 비켜줬다는 말이 더 옳았다.  


 

현이: 영광씨.


 

영광은 현이를 본다. 
세련된 미인이다.

 

영광: 웬일이세요.
현이: 저 저녁 좀 사주세요.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돈이 없네요...


같이 저녁 먹자는 뜻인데 영광은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영광: 돈 드릴테니 사 드세요.


사람을 굉장히 비참하게 만든다.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상처받을 지 자기가 더 잘 알면서...
현이는 무안한 듯 그냥 서있기만 한다.
영광은 자기가 말해놓고 미안하긴 마찬가지다. 옷을 챙겨입고 나선다.


 

영광: 뭐 드시고 싶은데요?


현이가 가지는 곳으로 갔다. 부잣집 딸이라 그런지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이다.
설렁탕 맛있는 집을 찾아냈다며 어느 후미진 골목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던 영채가 생각난다.


 

현이는 능숙하게 영광의 몫까지 주문을 했다.
 

 

현이: 친구로서. 생일 축하해 주고 싶었어요.


생일 케잌이 서빙 되어 왔다. 촛불을 끄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던 영광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현이: 불꺼요. 소원빌고.


'영채야, 영채야, 영채야...'


 

영광은 영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불을 껐다. 


 

 

은현은
영채의 생일을 기념해
작고 아담한 소극장에,
영채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채가 입장하면 공연은 시작된다.

자신의 곡을 졸려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은현은 가수가 되기로 했다.
평소 영채가 좋아하던 노래만 골라 연습했는데 잘 될 지 은현답지 않게 긴장을 한다.

 

극장 안에는 은현과 영채 친구들이 나름대로 꾸며놨다.
영채 친구들은 그런 영채가 너무 부럽다.
제일 샘이 많은 소현이 풍선을 달며 삐죽거린다.


소현: 뭐야, 계집애. 복도 많아... 아, 왜 괜히 열 받지? 


 

뒤늦게 불꺼진 공연장에 영채가 들어선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영채가 앉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은현의 피아노와 노래가 시작된다.

주위를 둘러보던 영채는 다 자신의 친구들인 걸 알고 깜짝 놀란다.

멋진 공연,
그리고 공연 후 은현이 준비한 뒤풀이...
은현과 영채 그리고 친구들은 기억에 남을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은현이 영채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영채: 정말 고마웠어. 아마 잊지 못할거야.

은현: 다행이다...


은현은 긴장을 풀어보려는 듯 한숨을 크게 쉰다. 영채는 차에서 내리려는 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영채는 은현을 쳐다본다.


 

영채: 잠깐... 나 좀 봐바...


은현은 영채를 본다.


영채: 고마웠으니 나도 선물을 드려야죠...


아직도 서툴렀다. 은현과 영채의 키스는 누가 보면 키득, 하고 웃을 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 둘은 나름대로 뜨겁고 진지하고 달콤했다.


 

그 후,
너무나 어색해 둘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은현은 작은 카드를 한 장 꺼낸다.


은현: 여기... 생일카드.

영채: 와, 제대로네. 생일엔 카드가 빠지면 안 되잖아.


어찌나 어색한지,
영채는 그만 차에서 내린다.
 


영채: 오빠, 조심히 들어가. 나 들어갈게.

은현: 응, 잘 자!


 

은현은 휭~ 하고 차를 몰고 가버린다.
큰 길로 나와 은현은 차를 세운다.
아직도 심장이 떨렸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온 영채는 은현의 카드를 펴본다. 긴 말은 없고 딱 한 줄이다.


"태어나줘서 thank you"

 

 

 

*부탁합니다*


 

일요일 저녁,
현이는 영채를 기다리고 있다. 영채가 10분 늦게 도착했다.

 

영채: 죄송해요, 좀 늦었죠.

현이: 괜찮아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주문하세요.

 

현이는 먼저 시킨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이: 제가 불러서 놀라셨죠?

영채: 아니요, 저도 한 번 뵙고 싶었어요.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다.

 


현이: 영광씨가 영채씨를 많이 좋아해요. 알고 있죠?


영채는 대답이 없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현이를 쳐다본다.


현이: 영광씨... 생일 날 운 거 모르죠?
영채: 울어요?

현이: 아마 마음속으로 계속 영채씨를 불렀겠죠. 울더라구요. 영채씨가 딱 잘라 말했다고 하던데 그래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니 그 사람 참 바보같죠.


현이는 영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딱히 특별한 얘기를 하진 않았다.

영광을 좋아하는 여자와 영광을 걷어낸 여자와의 상반된 이야기가 오고갔다.


영채: 영광오빠... 저 때문에 상처 많이 받았어요. 영광오빠가 계속 저를 좋아하는한 전 오빠에게 상처주는 일 밖에 없을거예요.

곧 결혼도 할거고... 한 남자의 여자가 되니까.


현이는 앞에 앉은 이 여자가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영채: 영광오빠한테 잘 해주세요. 현이씨가 정말 영광오빠를 좋아한다면요... 


 

밤이 되도록 둘의 이야기는 계속 오고갔다.
영채는 현이에게 영광을 잘 부탁한다 얘기하는 그 시간,
영광은 또 영채에게 준답시고 옷을 고르고 수선을 시작한다.

 

 

*질질 끌 거 뭐 있나요*


벌써 반팔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토요일 오후,
영채 부모님과 은현의 부모님이 마주 앉아 있다. 그리고 구석에 영채와 은현이 있다.
두 부모님은 상견례라기 보다는 친목 모임에 가까워 보인다.
애들 결혼 얘기는 뒷전으로 미루고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하하, 호호 시끄럽다.


영채엄마: 날짜는 저희 쪽에서 잡겠습니다.
은현엄마: 그러세요. 되도록 빨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가을까지 갈 거 뭐 있나요.


그리고 또 얘기는 옆길로 빠진다.

지루해진 영채와 은현은 이제 어른들 얘기를 듣기보단 자기들끼리 얘기를 한다.  

 

신혼집은 지금 살고 있는 은현의 집에서 차리기로 했다. 몇년 후 은현의 부모님이 영국에서 완전히 한국으로 오면 그 때 집을 짓고 같이 살기로 했다.
부모님의 만남을 시작으로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은 영채가 여름 방학 하는 때와 맞추고 틈 나는대로 신혼 살림을 보러 다녔다.
조금씩 결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청첩장*


 

영광이 의상실에서 밖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때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영채가 손을 흔들고 서 있다.


 

영광: 영채야!


영광은 차를 내오고 영채는 의상실을 둘러본다.


영채: 아줌마는?
영광: 약속 있어서 나가셨어. 점심 먹었어?
영채: 그럼, 시간이 몇 신데... 나 오빠한테 줄 거 있어서 왔어.


영채는 청첩장을 내민다.

영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영채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할 말을 한다.

 

영채: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요즘 바빠 죽겠어. 결혼 준비가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니까. 꼭 와 줘. 알겠지?

 


영광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청첩장을 보고 있다.


영광: 난 결혼 선물 뭐 해줄까? 드레스랑 턱시도... 아직 안 맞췄으면 내가 해주고 싶은데...


 

어느 늦은 밤,

영광은 직접 영채와 은현의 옷을 만들고 있다. 
꾹꾹 눌러 참는데도
영채의 드레스 위에 영광의 눈물이 떨어진다. 


 
*그 사람의 프로포즈*


 

 

영채와 은현이 서점에 갔다.
둘이 가끔 가는 데 영채는 영채대로 은현은 은현대로 보고 싶은 책을 보다가 나중에 만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은현이 영채 곁에 바짝 붙어 다닌다.

둘은 오늘 커플티를 입었다.


 

영채: 오늘은 왜 이렇게 졸졸 따라다녀?

은현: 응? 그냥...


영채가 요리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은현도 책을 뒤적인다.

'임신과 출산'

 

괜히 은현의 눈이 땡그래진다. 은현은 무슨 죄 짓는 것처럼 책을 한 장 넘겨본다.
태아사진, 그리고 출산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자 은현은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놀래버린다.


 

영채: 뭐 보는 데 그래?


은현은 책을 후다닥 덮고 저 쪽으로 가버린다. 은현이 보고 있던 책을 보자 영채는 웃고 만다.


 

밤 12시가 넘어 영채는 비디오를 켰다.
아까 헤어질 때 은현이 영채에게 테이프를 줬다. 밤에 혼자 보라고... 좋은거라고...
짖꿎게 웃으며 말하는 은현을 보며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보라고 했다.

 

 

<영채야~ 영채야~ 마누라야! 나 지금 어디게? 여기는 일본이에요. 호텔 좋지? 구경 시켜줄게~>


 

은현의 모습이었다. 일본에 갔을 때 찍은 모양이었다.

영채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은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제 샤워하고 자야지. 어머! 샤워하는 건 찍지 않겠어.>

 

은현은 일본에서의 자기 모습을 쭉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옆에 영채가 있는 듯 뭐라고 참 말도 많았다.

 

 

<영채야 이게 뭐냐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이 통에 넣으면 그 사람이랑 평생동안 사랑할 수 있대. 여기 이 종이들 보이지? 나도 여기 박영채 적었어! >

 

<이거이거 음식 봐... 아, 맞다 음식 투정하면 영채한테 혼나는데 그치?>

 

 

영채는 화면 안의 은현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 행복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기는 공연장, 사람들 봐~ 이 서방님 인기가 어느 정도 인줄 알겠지?>

 

매 순간
은현은 영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영채도 읽었다.

 

 

<박영채. 사랑해. 박영채는 나를 평생 좋아해줄거라고 믿겠어. 뱃살이 삼겹살이 되고 밥 너무 많이 먹어서 돈이 다 밥 값으로 나가도, 얼굴에 주름살이 마구 생기고 흰 머리가 생겨도 나는 박영채 좋아할거야. 계속 지금처럼 잘해줄거야. 

박영채야.
나랑 결혼해 줘.....>


 

영채는 혼자 대답한다.


 

영채: 네... 
 

  

* 그녀의 결혼식 *


 

영광: 그녀의 결혼식입니다. 모두 그녀에게,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멋진 남자에게 축하 인사를 합니다. 내가 손수 만든 하얀 드레스는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립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해줄 줄 알았습니다.
아직도 내가 애타게 좋아한다는 걸 아는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사랑에만 충실할 뿐, 난 눈에 보이지 않는가봅니다. 역시 그녀 답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난 더 그녀에게 애 닳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광은 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서 영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궁상을 떨어도 자신에게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쁜 일이 생겼다고 현이는 결혼식장에 오지 않았다. 영민도 남동생 노릇을 하느라 시종일관 바빠보인다.
그리고 영채도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영광이 온지, 안 온지도 모르는 듯 하다.

 

 

영광: 축하드려요.


먼저 은현이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영광은 어색하게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은현: 고맙습니다. 이렇게 와주시고, 옷도 멋지게 만들어주시고...


 

그러나 긴 인사를 하기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영광은 식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술을 마시기엔 너무 대낮이고, 집에 가기엔 너무 처량하다.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아 영광은 어쩔 줄을 모른다.
현이에게 전화가 왔다.


 

현이: 식은 다 끝났어요? 가보려고 했는데... 점심 안 먹고 지금 예식장 밖으로 나왔죠?


맞은편에 현이가 서 있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현이와 영광은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그리고 저녁 쯤 현이는 영광과 술을 마시러 바에 갔다.


현이: 친구는 이래서 좋은거예요. 혼자 있기 비참한 날, 그 비참함 나눠 갖잖아요. 아쉬운데로 내가 있으니까 좀 괜찮았죠?


영광은 말이 없고 현이만 혼자 주절거린다.
현이도 영광 못지않게 가슴이 아프다.

 

 

*신혼여행*


 

피로연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으로 호텔에 들어온 은현과 영채.
신혼여행은 내일 아침 제주도로 간다.


은현: 노는 것도 엄청 힘드네. 근데 영채야, 너 배고프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지?

영채: 힘이 하나도 없어...

은현: 룸서비스 시킬까? 나도 배고픈데...

영채: 떡볶이 먹고 싶다......

 

굳이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영채는 자기가 직접 나가 떡볶이를 사왔다.
전망 좋은 호텔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떡볶이를 먹여주는 모습이 재밌다.


 

은현: 영채야, 영채야... 우리 근데 애기는 몇 명 낳을까? 난 많이 키울 자신 있어.

영채: 난 많이 놓을 자신 없는데...

은현: 아, 대신 낳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영채는 사뭇 진지한 은현 모습이 웃겨 죽겠다.


영채: 도대체 얼마나 낳자고 대신 낳아 준다는거야?

은현: 줄줄이...

영채: 아~ 난 몰라.

은현: 마누라... 이리 와 봐.


도저히 분위기가 안 잡힐 정도로 은현은 뭔가가 어설프다. 피곤한 영채가 하품을 한다. 은현도 따라서 하품을 하더니 둘은 금새 조용해진다. 
 

다음 날
제주도.


비가 온다. 은현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몬다.
영채가 어디 가냐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다.
한 30분쯤 가니 은현이 차에서 내린다. 영채도 따라 내리니 집이 한 채 있다.


영채: 누구네 집이야? 이쁘다~ 여기 오면 온다고 말하면 돼지, 왜 말을 안하냐...

은현: 들어가자.

영채: 누구네 집인데?

은현: 가보면 알아.

 

영채는 은현을 따라 들어간다.
아직 누가 살았던 흔적이 없는 새 집이다. 영채는 집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영채: 무슨 별장 같은데...


통유리 창에는 바다가 보인다.


영채: 끝내준다... 오빠, 여기 누구 집이야? 하루 빌렸으면 좋겠다.

은현: 박영채 집.

영채: 뭐라고?

 

은현: 마음 같아선 내가 주는 거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래.

영채: 어머... 진짜? 선물 치고 너무 큰 거 아니야?

은현: 집 관리 잘 했다가 우리 나중에 늙으면 여기서 둘이 살자.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은현과 영채는 그 곳에 있었다.


 

*깨가 쏟아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영채는 다시 학교로, 은현도 은현대로 바쁘게 지냈다.

영채가 퇴근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영채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데 1시간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은현에게 전화가 온다.


 

은현: 뭐해! 안 나오고!

영채: 응? 나 우산 없는데 비가 완전 쏟아붓는다... 비 그치면... 근데 오빠 어디야?

은현: 빨리 내려와.

 

은현은 현관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다.


영채: 나 데리러 온 거야?

은현: 야, 그럼 내 마누라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냐. 이렇게 비까지 오는데... 빨리 가자.


은현은 조심조심 운전을 하는데 집 방향이 아니다.


영채: 어디가는거야?

은현: 오늘 같은 날 가면 아주 좋은 곳.


천장까지 온통 통유리인 서울 외곽의 한 까페.
위를 올려다보면 비가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질 것 같은데 빗방울은 하늘 어딘가에 멈춰선다.


영채: 와, 분위기 좋다. 이런 덴 어떻게 알아 낸거야? 혹시... 다른 여자랑 데이트 와 본 거 아니야?

은현: 헉! 어떻게 알았어?

영채: 나도 다른 남자랑 물색해 놓은 곳이 있는데 다음엔 내가 안내할게.


서로 마주보고 앉아 마시는 커피는 따뜻했다.
은현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추억을 나누고 싶었다.


저녁은 집에 와서 직접 해 먹는다.
은현은 영채 옆에 서서 이것저것 거든다고 거드는데 영 부산하고 산만하다.


영채: 지금은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데, 이것도 한 때라더라... 은현씨! 당신도 그럴거지? 나중엔 쇼파에 누워서 이거 갖다 달라, 저거 갖다 달라 막 이럴거지?

 

은현: 아니야. 나 쇼파에 눕는 거 싫어해.

 

영채: 아무데서나 방구 뿡뿡 뀌고, 안 씻고 그냥 자고, 밥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집안일은 거들지도 않고...! 남자들은 다 그런다던데!

 

은현: 얘는 어디서 그런 말만 듣고 와서 잔소리야... 난 안 그럴테니까 두고 봐.

 

영채: 말은 누가 못해!

 

은현: 어허! 나를 못 믿어? 지금도 설거지랑 빨래랑 청소랑 다 내가 하잖아!  나중에 애기 낳으면 애도 내가 볼 테니까 나를 그런 남자로 몰지마.


발끈하는 은현이 귀엽다. 영채는 웃으며 저녁을 준비한다.

이제 은현도 김치에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심지어 버터 바른 빵을 주면 느끼하다고 안 먹을 정도니, 이제 영채는 은현의 입맛까지 다 길 들여놨다.


 

*그대 떠난 후 *


 

마음속에서 영채가 떠난 건 아직 아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이지만, 그렇다고 영채를 잊긴 싫었다.
연락을 꾹꾹 참은 지 몇 달,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친구, 라는 걸 강조하던 현이와 조금 친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말을 트고 같이 저녁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사이다.
그렇지만 영광은 영채가 자신에게 그랬듯 현이를 이성으로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영광엄마는 점심을 먹다가 영광에게 말했다.


엄마: 아들, 우리 이태리 한 번 갔다오자. 기분도 전환 할 겸, 패션쇼도 보고... 요즘 아들 너무 기분이 쳐져 있어. 엄마 속상하게... 현이도 같이 가자고 할까?

영광: 현이는 왜 자꾸 껴 넣으려고 해... 공부하는 애를... 우리끼리 갔다 오자.


영광은 엄마와 함께 출국을 했고 엄마는 일주일 후에 그리고 영광은 그 곳에서 2년을 지낸다. 
 


*시샘*


 

2년 후.
영광은 그 곳에서 조금 더 실력을 쌓아서 돌아왔다.
그 동안 현이와 연락을 주고받던 영광은 현이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받아들인다.

살갑진 않지만 알면 알수록 속 깊은 현이를 좋아해보려 애썼다면 맞는 말일까? 

영광과 현이의 사이를 두 어머니도 환영했다.

그렇게 영광은 영채에 묻혀 있던 기억들을 조금씩 털어낸다.


영채와 은현은 아직도 신혼이다. 그리고 영민을 통해 영광과 현이가 사귄다는 소리를 듣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은현은 엊그제 공연을 끝냈다.

이제 과로로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다 영채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까닭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이는 한 때 였다.
한. 때.

 

영채: 이번 시간엔 서술형 답안 체크를 할 거예요. 1번부터 나오세요. 부분점수는 후하게 주려고 노력했으니까 아마 예상보다 점수가 높을 거예요.


 

영채는 학교에서, 그리고 은현은 지방 공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평범한 날이었다.


점심시간 후,
영채에게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다.


영채: 여보세요. 네, 은현씨가 제 남편인데 무슨 일이세요?


 

은현이 병원에 있다고 했다. 급하니 빨리 오라고 한다.
영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혼자 속으로 그랬다.

'또 쓰러졌구나. 그 약골, 이번엔 보약 한 재 지어 먹여야지.'


영채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영채: 환자 중에 은현, 이라고 응급실로 왔다고 하던데요.
간호사: 수술실에 갔으니까 3층으로 올라가보세요.


수술실?
 
영채는 조금 겁이 났다.
전화에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너무 무시했나.
영채는 계속 마음속으로 진정하자, 를 외치며 3층으로 올라갔다.

 

 

*꿈이었으면...*

 

 

영채: 어머니!


한국에 있던 시어머니는 내일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수술실 앞에 먼저 와 있는 은현의 어머니는 손에 염주를 굴리며 울고 있었다.


영채: 어머니, 오빠가 왜 수술해요?


교통사고였다.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운전을 하고 있던 기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옆 좌석에 있던 은현은 바로 병원으

로 실려 온 것이다.

영채는 정신이 없었다.

설마, 설마 했다.

잠시 후, 식구들이 병원으로 왔다.
수술은 끝없이 계속 됐고 영채의 눈에선 자꾸 눈물이 떨어진다.


 

의사: 뇌사입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영채는 웃으며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식구들은 초상이 난 듯 울고 불고 침울하다.
어제 아침,
잘 갔다오겠다고 이마에 한 키스가 아직도 생생한데 뇌사라니...
영채는 의자에 앉아 얼른 꿈이 깨길 기다린다.
밤이 되고, 그 다음 날이 되고.
영채는 꿈이 아님을 깨달으며 절망한다.


은현은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언젠가 영채가 우울해 했던 날이었다.


은현: 우리 마누라 왜 이렇게 우울해?


은현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영채의 우울함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 우울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자 은현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더니 영채를 불렀다.


은현: 영채야 이리 와봐.


영채는 은현 옆에 가서 앉았다. 은현은 웃으며 웃통을 벗었다.


영채: 뭐해? 옷은 왜 벗어?

 

은현은 가슴에 은채 귀를 대게 했다.


은현: 들리냐? 내 심장소리... 막 쿵, 쿵 거리지?


영채는 가만히 은현 가슴에 기대 있었다.


은현: 지금 이 심장은 박영채 하나 만을 위해 뛰고 있다! 근데도 우울해?

영채: .........

은현: 뭐 때문에 우울한 지 모르겠지만 얼른 풀어라. 자꾸 네가 우울해 하면 이 심장이 멎을... 지도..... 몰... 라......

 

 

영채는 울고 있었다.
날 위해 뛰고 있다던 그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데, 가망이 없다니...
곧 일어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다시 자기를 위해 멋진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불러줄 것만 같았다.
꿈이 아니라면,
분명 은현은 일어날 거라고 영채는 확신했다.

 

 

*바보야*

 

 

영채보다, 식구들보다 더 놀란 건 영광이었다.
그 소식은 영민이 들려주었다.
지금 누나가 거의 실신 직전에 있다고, 그리고 매형은 죽음 문턱을 왔다갔다 한다고...

 

그렇게 힘들게 보내줬으면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그러는지
영광의 눈동자가 희미해진다. 


영광: 어느 병원이야?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영채가 넋을 놓고 앉아있다.
영광이 영채 옆에 가서 앉았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영광의 얼굴은 더 멋있어졌다.

반면 영채의 얼굴은 형편없다.

 

영광: 바보야, 너 밥도 안 먹었다며. 얼른 나가자 밥 사줄게.


영채는 고개를 젓는다.


영광: 이러다 네가 죽겠다. 네가 힘을 내야 은현씨도 일어날 거 아니야. 빨리 일어나.

 

영광은 영채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해 식당으로 데려갔다.
한 술, 한 술 죽지 못해 뜨고 있는 영채가 안쓰럽다.
그러다가 영채가 헛구역질을 한다.


영광: 그것 봐... 하도 안 먹으니까 안 받잖아. 조금씩 천천히 먹어. 그러다 네 몸이 먼저 상한다니까.

 

 

국그릇에 영채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간호사: 박영채씨 들어오세요.


영광은 혼란스럽다. 영채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사랑하는데,
아직 사랑하는데 그 여자가 지금 절망 아주 깊숙한 곳에 빠져있다.
내가
꺼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일어나 이 새끼야...*

 

 

의사: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3개월 됐네요.

 

 

허...

 

 

영채가 다리에 힘을 놓는다. 가다가 풀썩 주저 앉은 영채가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영채는 링겔을 맞고 누워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영채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행복한, 꿈을 꾸나보다.

 

 

영채: 어머, 어딜 만져? 손 안 치워?

은현: 잠깐만...

영채: 아, 간지러워. 왜 이래 진짜.

 

은현: 이렇게 약간 뱃살이 있어주면 애기가 생겨도 더 좋으려나?

 

은현은 영채 옆구리살을 쿡쿡 찌르며 웃는다.


영채: 하지마, 진짜. 나 내일부터 확 굶어버린다.

은현: 왜, 내가 뭐 어쨌다고. 아, 우리 애기 얼른 보고 싶다 영채야.

 

영채: 뭐야, 나만 사랑하겠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웬 딴소리야?

 

은현: 너는 너고, 애기는 애기지. 너는 너 대로 사랑해 줄테니까 너무 샘 내지 마. 너무 뜸 들이지 말고 애기 생기면 꼭 나한테 빨리 말해줘야 돼. 알겠지? 여보~ 여보 애기아빠 됐다! 그렇게 말해줘. 애기아빠... 애기아빠... 그거 이름 이쁘지? 그럼 내가 우리 영채 저기 지구 끝까지 업어줄게.

 

눈을 뜨니 옆에서 속삭이던 은현은 없고 하얀 천장이 어지럽게 보인다.
영채의 눈에 눈물이 잔득 고여 있다.
그 옆에 은현의 엄마, 영채의 엄마가 있다.

모두 악몽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중환자실.

 

영채는 은현의 손을 잡았다.


은현: 이 나쁜 새끼야. 얼른 일어나. 나 평생 사랑한다면서, 결혼 하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고 있어... 네가 기다리던 애기 생겼어. 너 애기아빠 됐다구. 근데 여기서 뭐해. 얼른 일어나, 너무 많이 잤어. 얼른 일어나... 너 안 일어나면 나도 죽을거야.


 

일어날 생각이 없는 은현,
그렇게 시간은 잘 흘러간다.
여전히 은현은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잠만 자고 있었다.

 

 

*내가 넌 아니라고 했잖아*


 

힘겨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동안의 행복을 누가 질투라도 했는지, 너무나 커다란 충격과 함께 온 불행은 영채와 모든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영채의 임신과 은현의 뇌사상태.
이 문제는 영광에게 일대 사건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영광이 의상실을 뛰쳐나와 병원으로 간다.
의상실로 현이가 들어온다.


현이: 잠깐만,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지금 꼭 말해야 겠어.

영광: 빨리 말 해.

현이: 요즘 무슨 일 있어?

영광: 현이야, 미안해. 나중에 연락할게. 그리고... 나중에 얘기하자. 나 지금 바빠.

 

현이는 영광을 쫓아간다.
그리고 얼굴이 몰라보게 상한 영채와 그 소식을 듣고 말았다.
평생 행복할 순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나 큰 시련인데...

현이는 어쩌면 영광과 곧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고 느꼈고, 얼마 후 현이는 영광에게 이별 선고를 했다.


현이: 이렇게 쉽게 그래, 라고 대답하면 내가 뭐가 돼?

영광: 보내달라며...

현이: 한 번은 붙잡아야... 아니 됐어. 그래... 보내줘서 고마워.... 행복.....하길 바랄게.


 

영광은 어느 날 밤 영채를 찾아갔다.
부질없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영광: 영채야.

 

영채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이제 조금 부른 배를 움켜쥐고 영광을 쳐다봤다.


영채: 무슨 일로 자꾸 여길 찾아와?

 

영광: 내가 하는 말 오해 없이 들어줘 영채야.

 

영채: 해 봐.

 

영광: 어차피 은현씨는 죽을 거야.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이미 뇌는 죽었는데 지금 넌 뭘 기도하는거니? 빨리 하루라도 편한 곳으로 가게...


영채는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영광은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고 할 말을 계속했다.


영광: 빨리 은현씨를 편한 곳으로 보내고 나한테 와. 너 아이도 가졌잖아. 설마 그 몸으로 혼자 아이낳고 살 생각은 아니지?

 

영채: 다시 말해봐.

 

영광: 내가 그 아이들의 좋은 아빠가...


 

영채는 있는 힘을 다 손바닥에 쏟아 영광의 따귀를 때렸다. 그 힘이 얼마나 쎈 지 체격이 좋은 영광이 뒤로 밀려났다.


영광: 영채야.

 

영채: 너 아직도 나 좋아하고 있었니? 내가 넌 아니라고 했지! 너 제 정신이야? 나한테 너 지금 무슨 말 했는지 알아? 그거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지독한 소리야. 어차피 죽을 거 빨리 보내라고? 너한테 오라고? 웃긴다. 그거 때문에 자꾸 여기 왔니?


영광: 흥분 하지 마. 나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너 혼자 아이 어떻게 키우고 살래.

 

영채: 네가 뭔데 내 일에 참견이야? 혼자 아이를 키우든 어떻게 하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렇게 할 일 없으면 내 남편 빨리 깨어나게 기도나 해 줘.


영광: 제발 한 번만 나한테 기대면 안 되니?

영채: 죽었으면 죽었지. 남편 죽었다고 너한테 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가란 말이야!

 

 

너무 흥분한 영채는 또 그 자리에서 정신을 놓았다.

집으로 가는 길 영광은 사람이 보던 말던 서럽게 목놓아 운다.


 

*오고 감*


12시간의 산고 끝에 영채는 쌍둥이를 낳았다. 둘 다 건강했다.
아빠를 닮아서인지 길고 가는 손가락을 가진 두 남자아이는 참 우렁차게 울어댔다.
그렇게 기다리던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던 그 날 아침,
은현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에게 간다는 인사도 없이 오랜 사투 끝에 세상과 작별했다.


아이를 낳고 영채는 오랫동안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은현이 마지막 가는 길을 영채는 지켜주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 굳게 입을 닫은 영광이 있었다.


영채는 잠에서 깨 미친듯이 울어댔다. 지금이라도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하면 웃으며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사랑하던 사람은 이제,
그이를 빼닮은 아이 2명을 남긴 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렸다.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그 날 하루는 온통 영채 것이었다.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영채는 은현과 살던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주방에 가면 그릇 하나 깨지 않고 능숙하게 설거지를 하던 은현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꽤나 어울리던 앞치마를 두르고 평생 집안일을 도와 줄거라며 폼 나게 끼던 빨간 고무장갑이 보인다.

둘이 마주앉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맛있게 밥 먹던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본다.

 

둘 만의 침실,

쿵, 쿵 뛰는 심장소리를 들려주던 은현이 누웠던 침대와 베개에 영채도 누워본다.
아직 은현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하다.
그렇게 영채는 유령처럼 은현의 흔적을 쫓아다녔다.

 

은현이 자신에게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던 피아노, 같이 커피를 마시던 베란다 창가,
그리고 쇼파에 앉아 은현이 결혼 전에 건네 줬던 테이프도 꺼내 돌려 본다.


 
<영채야~ 영채야~ 마누라야! 나 지금 어디게? 여기는 일본이에요. 호텔 좋지? 구경 시켜줄게~>


영채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다.
화면 속,
너무나 건강하고 너무나 잘 생긴 은현이 영채 이름을 부르고 있다.


영채: 오빠, 나 여기 있어.


 

<나 골고루 잘 먹지? 결혼하면 나 맛있는 거 많이 해주라 영채야!>
 

 

영채는 비디오를 끈다.
그 감당 못 할 슬픔에 짖눌려 영채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은현씨*

 

은현은 어머니가 한국에 오면 들르는 절에 있었다. 밝고 환한 은현의 사진과 그의 뼛가루를 담은 함이 놓여 있다.
영채는 그 앞에 앉았다.


영채: 오빠. 나 왔어. 내가 오빠 아들 낳느라 오빠 가는 길 배웅 못 했어. 미안해. 그래도 우리 애기 너무 예뻐. 둘 다 오빠 닮아서.... 정말 잘 생겼어. 아... 그 말썽쟁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벌써 막막하다. 하늘에서 도와줄거지.?...
음... 줄줄이 낳자고 해 놓고 결국 두 명 밖에 못 놨네. 말은 그래도 나도 오빠 욕심 부리는데로 줄줄이 낳아주고 싶었는데... 좀 안타깝지만 뭐 그래도 다행히 한 명 보단 낫잖아 그치? 어떻게 외로울 줄 알고 쌍둥이인지... 신기해.

오빠. 오빠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잘 있으라고, 애기들 잘 키우라고 말 한 마디는 해 주고 가야 되는 거 아니였어? 너무 한다 진짜. 섭섭해 진짜.
나도 오빠 따라가고 싶은데... 그러면 우리 쌍둥이들이 너무 힘들겠지? 엄마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울먹울먹 영채는 계속 주절거렸다.


 

영채의 북받친 설움이 절간을 울렸다.
영채는 눈물을 연신 닦아낸다.

 

 

영채: 씩씩하게 살게 은현씨. 오빠 몫까지 아이들 열심히 키우면서 살게. 늘 곁에 있다고 믿을게. 거기서 잘 지내고 있다가 나 갈 때 마중 나와 있어야 해. 알겠지? 그래서 우리 하늘에서 만나면 다시 결혼하자.
그리고  다시 한 번 태어나서 애기들도 줄줄이 낳고 내 배가 삼겹살이 되고 오빠 지갑이 내 밥 값으로 다 털리고 주름살이 마구 생기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그 때 까지 같이 살자. 알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채는 하나하나 은현과 같이 했던 추억을 떠올린다.

사귀자고 했던 날.
그는 자신의 공연에 영채를 초대했었다.
이미 영채가 자신의 곡을 졸려하는 걸 알았던 은현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은현: 여러분, 제가 아직 솔로입니다. 저는 음악과 사랑에 빠져 있는 진정한 음악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도 남자인가 봅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환호성에 그는 몹시 쑥스러워했다.


은현: 원래 공연 중간이나 끝날 때 쯤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이 공연 도중에 잠이 들 것 같아서요...


은현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은현: 저에게 처음 잘해주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 여자는 지금 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텐데요.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싶으시다면 공연 중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를 찾아보세요.
이상하게 그녀는 제 음악이 그렇게 졸리대요...

 

 

구석에 앉아 있던 영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들이 자신인지 모를텐데도...


은현: 영채야, 영채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은현: 네가 졸던 말던 오늘 공연 하는 동안 난 너만 생각할거다... 공연 끝나고 보자. 내가 사귀자고 하면 ok해야 된다.

 


*쌍둥이 엄마*


영민: 꽤 엄마 티가 나네.

영채: 당연하지. 내가 이것들을 얼마나 죽도록 고생해서 낳았는데... 너는 아마 모를거다.

 

여전히 영광은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영채와 예전처럼 지내게 된 영광은 자주 영채의 집에 들렀다.


 

영광: 은주혁, 은민혁! 삼촌 왔다!  


영광은  두 아이를 참 예뻐했다.
그리고 영채도 여전히 좋아했다.


영광: 밤에 보채진 않아? 애기 땐 그렇다던데...

 

영채: 아니, 잘 자. 아주 기특해 죽겠어. 얘들이 날 닮았는지 아빠 CD만 틀어주면 금방 잠들어.


 

영광은 아기 옷 두 벌을 건넨다.


영광: 생일 축하해. 그런데 선물은 아기들거다. 내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은 없는데 제일 좋은 옷감으로 신경써서 만든거니까 예쁘게 입혀.

 

영채: 어머, 진짜... 그럼 오늘 오빠도 생일이잖아. 나 깜빡하고 있었어. 정신이 이래... 축하해, 근데 선물을 준비 못 했어.

 

영광: 됐어. 근데 얘네들 기저귀 갈아줘야 되겠는데!


 

그날 밤,
영채는 자신의 생일인지 잊고 있다가 영광 때문에 알았다. 이런 날이면 은현이 더 보고 싶다.
예전,
생일날 친구들과 파티를 하고 차 안에서 하던 서툰 입맞춤이 생각난다.

그리고 서랍에서 꺼내 보고 또 본다.
은현이 써 줬던 한 줄의 카드

 

 

<태어나 줘서 THANK YOU> 

 

지금도 하늘에서 날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영채는 가만가만 은현을 생각한다.


 

 

*그리고 3년 후*

 

영채: 여보. 나는 지금 제주도야. 이 집 알지? 우리 시아버지가 나한테 선물로 준 집. 나는 지금 여기서 두 개구쟁이와 살고 있어.

빨리 이 집에 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왔어.


주혁이는 오빠를 닮아서 피아노를 좋아해. 생긴 것도 오빠랑 똑같아서 가끔 놀랄 정도야. 아마 더 크면 오빠랑 구분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민혁이는 주혁이랑 완전히 반대야.
생긴 건 같은데 얘는 자기가 조금 동생이라고 얼마나 까부는지 몰라.

아이들은 이 집을 좋아해. 잘 뛰어놀고 잘 먹고 잘 지내.

 

영채는 두 아이와 씩씩하게 지내고 있었다. 먼저 가버렸지만 좋은 추억과 두 아이를 선물하고 간 은현을 추억하면서.

 

한 달에 두어 번,
그 제주도 집으로 영광의 소포가 배달되어 온다.
옷부터 잡다한 것들까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영광의 취미생활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영광을 삼촌이라 불렀다.


하늘이 유난히 깨끗한 날이다.


 

영채: 사랑해. 난 아직 은현씨를 사랑해. 저 두 아이들보다 솔직히 더 사랑해. 내 얘기 듣고 있지? 이상하게 아이들은 아빠 얘기를 물어 보지 않아.
혹시 당신이 나 몰래 와서 아이들이랑 놀아 주고 가는 건가?...
음, 아무튼... 오늘도 나랑 우리 아이들 잘 보살펴 줘.
내일 해가 뜨면
또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귀여운 쌍둥이 형제도, 아직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영채도 곤히 잠들었다.   

파도도 잔잔히 잠들어버린 고요한 밤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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