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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04 >

나비 |2005.01.25 17:10
조회 3,375 |추천 0

4


일찍 출발을 해서인지 도착한 시간은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리움에 헤맸던 스키장은 더 이상 낭만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사랑의 쟁취를 위한 결투장이었고, 얻지 못하면 뼈를 묻으리란 각오마저 들게 하는 곳이었다.

차에서 짐을 내릴 때 돕는 척 윤섭씨에게로 다가갔다.


“스키장 자주 오세요?”

“아니요. 요즘은 통 오지 못했습니다.”

“왜요? 스키 타는 것 싫어하세요?”


윤섭씨의 말을 채련이 날름 받았다. 나와 윤섭씨가 이야기를 할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바빠서 통 오지 못했어요. 워낙 촬영을 여기저기 다니니까 여행에 대한 그리움은 많이 생기지 않는 편이지요. 그래도 일 때문에 다니는 것과 같나요? 나오니 정말 좋은데요.”

“언제가 마지막이셨는데요?”


내가 물었다.


“음. 언제더라. 재작년인가? 아님 그 전 해인가? 잘 모르겠네요. 그 때 오자마자 친구 녀석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황급히 돌아간 일이 있었죠.”


그랬던 거구나. 그 때를 마지막으로 스키장은 다시 찾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괜히 그를 찾아 돌아다닌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올라 조금은 침울해졌다. 그리고 애타게 그를 찾아 헤맨 나를 그가 전혀 몰라보고 있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인어공주 이야기였다. 생명을 구해준 왕자가 자신을 몰라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곧 아름다운 형상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감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인어공주와 나 공통분모는 하나도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감상에 빠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 들어가기 전에 사진 찍어요. 도착한 기념으로요. 희야! 우리 사진 좀 찍어주겠니?”


채련은 내게 카메라를 건네더니 윤섭씨의 팔짱을 떡하니 꼈다. 순간 눈에 불이 일었지만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왜 그러고 있어? 사진 찍어달라니까.”

“그렇게 찍게?”

“좀 더 다정스럽게? 윤섭씨 옆으로 좀 더 오세요.”


윤섭씨조차 나의 이야기를 오해했는지 조금은 어색해하며 채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됐니? 찍어 줘.”


그것이 디카가 아니었다면 다리만 잘라 찍어줄 생각이었다. 문명의 이기란 때론 사람을 정직하게 만든다. 질투에 사로잡힌 채 카메라를 들었다. 1.8인치 작은 화면 속의 윤섭씨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었지만 기억해 낼 수 없었던 그 얼굴이 내게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나의 눈이 슬퍼하는 것일까? 눈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어!”

“문희씨! 왜 그래요?”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어머, 채련아! 미안해. 사진은 이따가 찍어줄게.”


윤섭씨가 내게 다가와 눈을 비비고 있는 나의 어깨를 잡았다.


“진짜 괜찮은 거예요? 어디 한 번 봐요.”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바로 20cm 앞.

그 얼굴 뒤로 기도 안찬다는 표정의 채련이 서 있었다.


“왼쪽 눈이요.”

“빨개진 것 같지는 않은데 많이 아파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김이 나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간질간질한 행복감. 나의 심장 박동수는 점점 빨라져 눈이 아니라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지겠죠. 감사해요. 참 자상한 분이세요. 여자 친구 분이 좋아하시겠어요.”


이미 사전 조사는 끝났지만 확인 차 물었다.


“여자 친구가 있어야 말이죠.”

“진짜 없으세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믿기지가 않네요. 왜 윤섭씨 같은 분이 솔로일까?”


채련은 또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나는 괜히 아까의 상황이 어색해서는 어서 방으로 가자고 했다.


“전망이 좋은 방이에요!”


새하얀 스키장이 훤히 보이는 방이었다. 가슴이 확 트인다고 할까. 무언가를 올려다보기보다는 내려다보는 것은 사람을 여유롭게 만드는 힘이 깃든 행동이다. 난 어릴 적 답답할 때면 외출을 하기보다 12층인 우리 집 아파트에서 내려다보기를 즐겨했었다. 사물들이 손톱보다 작게 보이는 것도 좋았고,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도 좋았다. 그리고 아직 더 내려갈 곳이 있다는 것에도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내려다본다는 것은 여유로운 행동이죠. 없던 여유가 생기기도 하구요.”


윤섭씨가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야? 아까 나의 눈을 들여다 볼 때보다도 더 짜릿한 느낌이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잠시 말없이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점심은 간단히 사먹고 스키부터 탈까요?”


침묵이 부담되어 한 마디 건넸다.


“얘는 운전하고 피곤하신 분을 볶아댈 일 있니? 조금은 쉬시게 해드려야지.”


채련이 어느새 우리 뒤에 와 있었다.


“정말 좋은 풍경이군요. 이런 풍경을 누리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겠죠.”


채련은 자신이 가진 특권을 누리는 듯 행복한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윤섭씨는 일단 쉬세요. 저희는 짐 좀 풀고, 옷도 갈아입고 할 테니. 한 시간 정도면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윤섭씨를 배려하지 못한 걸까?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배려할 줄 아는 채련과 비교되는 행동을 해버렸다는.


“아닙니다. 피곤하지 않아요. 아직 체력은 쓸만합니다.”

“움직임을 즐기시는 분이군요. 좋아요! 그럼 우리 식사하러 나갈까요?”


채련은 세련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나가기 전 화장을 고칠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내 짐이 모두 풀어져 있고 화장품도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채련이가 썼었나봐.’


별 생각 없이 립스틱을 열었는데 가장 아끼는 색상의 립스틱이 부러져 있었다.


“채련아!”


거실에 있던 채련을 불렀다.


“왜?”

“이거 니가 그랬니?”

“어, 이따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봤니?”


그녀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좀 심하잖아.”

“심해?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 넘어가주면 안되는 거니?”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사과는 했어야지.”

“야! 그거 몇 푼 한다고 여행까지 와서 그깟 일로 화를 내? 내가 서울 가면 새로 사줄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면? 립스틱이 아니면 다른 뜻으로 이러는 거니?”


우리의 싸움은 윤섭씨를 넘어 서로의 자존심 대결로 바뀌고 있었다.


“우리가 친한 친구는 아니라는 것 알아. 그래도 네가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난 네가 나와 친하게 지내고픈 생각을 갖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출발할 때부터 너는 내게 적대적이야. 왜 그러는 건데?”

“별 이유 없어. 니 말대로 여행 왔으니 우리 싸우지 말고 잘 놀다가자.”


채련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오면서 줄곧 그녀를 내 경쟁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채련이는 접어두고 그냥 윤섭씨의 마음을 얻도록 해보자. 이러다가는 채련이랑 싸우다가 끝나겠어.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 피하는 게 상책일지도 몰라.’


우리 셋은 곧 식사를 하러 객실을 나왔다.


“어머, 핸드폰을 두고 왔어요.”


채련이 핸드폰을 가져오겠다고 다시 돌아가는 바람에 처음으로 윤섭씨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저. 희씨!”

“예?”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왔다.


“아까 눈이 아프다고 했을 때 제가 희씨 눈을 봤을 때 눈물을 본 것 같았어요. 눈이 아픈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슬픈 일 있으세요?”

“눈물이라뇨. 아니에요.”

“분명 눈물 같았는데.”


이 남자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속 깊은 사람 같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걸까?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나요? 문희씨 얼굴이 낯이 익어요.”

“아니요. 만난 적 없어요!”


단 한번 만났을 뿐인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절대 가볍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평등하게 이제 처음만난 상태로 출발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단언을 하시네요. 왠지 섭섭한데요. 혹시 모르잖아요. 언제 만났을 지도. 다만 서로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죠.”

“저는 사람 기억 잘 하는 편이거든요.”

“그러세요? 저는 왠지 우리가 전에 만났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전에 뵜잖아요. 용준씨랑.”

“그래서 그런 걸까요?”


그의 표정에 아쉬운 빛이 감돌았다. 저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 때 채련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나타났다. 더 늦었다면 거짓말을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눈빛을 보며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기에.


“가요, 우리!”


채련은 우리 사이로 들어와 내 팔짱을 끼었다.


‘당신 기억 속에 내가 조금은 있나봐. 어떤 느낌으로 있는 걸까?’


나를 기억해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분명 좋은 징조라 생각이 되어 식당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너 용준씨한테 전화 안 해보니?”

“어? 바빠서 간 사람한테 무슨 전화를 해.”

“그래도 남자친군데 섭섭해 하겠다.”


남자 친구? 역시 채련은 내 사랑을 향해가는 발걸음에 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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