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전함과 불안함>>
홋카이도에 도착한 지나와 레이. 그리고 그들을 마중나온 남자.
짧은 스포츠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남자는 공항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레이에게 눈빛을 던지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전혀 말귀를 못 알아 듣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가 유창하게 일본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내 아이가 일본말을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타국에 와서 모르는 말만 쓰는 낯선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진작에 이곳으로 온다 그러면 일본어라도 조금 배워둘 걸 그랬나? 지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검정 색 차는 미끄러지듯이 조용히 어느 커다란 대문 앞에 멈추었다. 대문의 크기는 유키의 집보다 더 컸다.
문 손잡이에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놀란 그녀의 눈은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양복 입은 어떤 남자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검은 양복 입은 남자가 그 남자 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대문이 열리면서 그곳에서 서너명의 검정 양복이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그들은 모두 붕어빵처럼 똑같은 검정 양복에 똑같은 헤어스타일이었다. 무슨 조폭 영화라도 찍겠다는 건지...
초반부터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그녀는 주눅이 들어, 가지고 온 짐을 누군가가 들고 나르는지 깍두기 같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몰랐다.
여러종류의 나무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늘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화단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는 현관을 지나 막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바닥과 나무에 니스칠한 기둥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어서 오너라, 레이."
자연스럽고도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림머리를 한 중년부인이 넓은 방에서 나와 레이를반겨주었다.
여자를 보는 순간 지나는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유키의 어머니가 확실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레이의 가정교사 김 지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카오리에요."
카오리라는 여자는 너무나도 다소곳하게 90도로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했다. 오히려 살짝 인사한 그녀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카오리는 뒷따라 들어온 커다란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안색이 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지나는 얼른 보리를 밖으로 보내려고 했다.
"싫어요, 선생님! 보리, 저랑 같이 있을 거에요."
"하지만, 레이..."
지나는 안주인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봤다.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는 카오리를 향해 돌아서서 얘기했다.
"할머니. 저 보리랑 같이 있을 거에요. 보리 밖에 내보내면 안 된다구요. 여긴 일본인데..."
"레이. 그렇다면 할아버지 오시면 허락을 받자꾸나. 내 맘대로 할 순 없다."
카오리는 약간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있었지만 우아하고 지적여 보였다. 그리고 말하는 것까지 조용조용했다.
"이 쪽으로 오세요. 먼저 짐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보여드릴게요."
"아, 네."
"레이는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카오리는 일본어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앞치마를 두른 사십대의 여자가 재빠르게 나왔고 레이와 같이 어디론가 들어갔다.
카오리가 김 지나에게 안내해준 곳은 2층이었다.
또 하나의 거실을 두고 몇 개의 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지나에게 보였다.
커다란 창이 있는 넓은 현대식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혼자 쓰기에 너무 큰 침대가 있었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녀가 텔레비전에서나 봐 왔던 짚으로 만든 일본식 메트리스(일본-다다미)가 아니었다.
실내는 한국주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내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고 슬리퍼를 신는 것도 같았다.
방은 복잡하게 가구가 놓여있지는 않아서인지 깔끔한 이미지였다. 안주인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짐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 아뇨.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럼... 끝나시면 아래층으로 내려오세요. 아직 저녁식사시간이 되려면 조금 멀었으니까 간단하게 차를 마셔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카오리는 한번 더 허리를 구부리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나갔다.
일본 사람들은 사람들과 얘기를 하는 도중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예의이며,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고급스런 가구 안에 옷을 넣고 조금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방에서 나왔다.
아까부터 여기는 것이지만 침실이든 2층 거실이든, 유난히 꽃꽂이와 조각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장식품과 뛰어난 예술품이 지나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1층으로 내려온 지나는 마침 방에서 나오는 레이를 만났다.
빠삐용 줄무늬에 데님으로 만든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너무나도 귀여웠다.
두 사람은 이미 문이 훤히 열려져있는 넓은 거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다른 이미지였다. 현대식 가옥 안에 전통의 일본 가옥을 살린 '다디미 방'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카오리는 또 고개를 숙였다.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였다.
황량할 정도로 아주 넓은 거실은 유난히 큰 유리문이 눈앞에 있어 더 넓어보였다. 물론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시원함을 주기도 했다.
"이런 곳 처음 보시죠?"
"네? 아, 네..."
그나마 모두가 일본어를 쓰지 않아 그녀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카오리라는 이곳 안주인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다소곳하고 아름다운지... 낮은 테이블 둘레로 방석이 있었다. 카오리와 레이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앉자 찻잔이 다가왔다. 혹시나 처음 마셔보는 이상한 차를 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의외로 녹차를 건네주었다.
"저번에 유키와 통화를 했더니 레이를 가정교사와 같이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네..."
"만나서 반가워요."
카오리의 성숙하고 지적인 미소에 지나는 우쭐하며 미소로 답례했다.
"지금 남편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요. 출장가셨는데 예정보다 조금 일찍 오시기로 했답니다. 선생님을 만나시겠다는 군요."
"아, 네... 괜히 저때문에..."
"아니에요."
유키는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식사를 하다가 거실로 나갔다. 지금 집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임시로 새로 고용한 가정부는 내일 아침에 오기로 했다.
"여보세요?"
"나다."
어머니 카오리였다. 그는 두 사람이 잘 도착했는지 물었다.
"음, 그래. 이제 저녁 먹으려고 한다. 넌?"
"먹고있는 중입니다. 김 선생이 불편하지 않도록 잘 챙겨주십시오, 어머니."
"그래... 유키..."
"네."
"너도 같이 왔으면 좋을 걸 그랬다. 네 아버지도 많이 보고싶어하시는데..."
유키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다지 가정적이지 못한 아버지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을 보고싶어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화가 없었고 평범하게 여길 걱정이나 궁금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흔히들 느껴지는 정이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 사토 츠바사는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였고 유일하게 그의 아내인 카오리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무뚝뚝한 남자였다.
유키는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만이라도 좋아해줘서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이 한국에서 살고 레이를 한국에서 키우도록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유키... 네가 보고싶구나."
"..."
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도 어머니가 무척 보고싶었다. 7년 동안 한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사고로 병원에 있을 때조차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7년동안 두껍게 만들어진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식사를 대충 끝내고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그는 복도에서 멈춰섰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다른 곳으로 향해졌다. 바로... 김 지나의 방으로...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극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열려진 커튼 사이로 산으로 향하고 있는 햇살이 들어와 아직은 방 안은 환했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걸터 앉았다. 아직까지 지나의 체취와 체온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불을 부드럽게 쓸며 그녀의 체취를 흡수하고 싶었다. 그녀의 체온이 식지 않고 그의 몸안으로 들어와주기를 바랐다.
그녀와 한번 더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와 처음 가져본 관계는 황홀 그 자체였고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그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게 마법을 그에게 걸었다.
이 침대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희미한 달빛을 받아 은은한 자태로 그를 유혹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 그의 엉덩이를 강하게 조여오는 그녀의 육체는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탄과 희열을 느끼게 했다.
그는 그 희열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방학 끝나기 1주일 전까지 그녀는 일본에 있게 된다.
그 동안에 그는 그녀 생각을 지금처럼 계속 하게된다면 위험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매일마다 떠올려서 뭘 어쩌자는 건가.
유키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녀가 아들과 떠난지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며칠은 훌쩍 지나간 것 처럼 허전함이 전해져 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지?'
사토 츠바사는 매우 카리스마와 위엄이 있는 남자였다. 곱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는 검은 머리를 찾기 힘든 만큼 희었다.
굳게 다운 입술과 쌍거풀이 없는 가느다란 눈매는 차갑고 무뚝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필요한 말만 할 뿐 일부러 대화를 유도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화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지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문상대일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카오리는 수다스러운 여자는 아니었지만 식사 내내 그녀가 꺼내는 얘기를 세심하게 들어주었다.
지나의 시선은 또다시 움직였다. 바로 맞은 편에 앉은 남자였다. 레이와 그녀를 공항에서 이곳까지 데려다 준 남자였다.
유스케라는 이름 외에 그에게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도 그를 정확히 소개시켜주지 않아 일부러 그녀는 굳이 질문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곳의 가족인 게 분명할 테니.
"레이는 작년보다 키가 훨씬 큰 것 같구나?"
식사를 끝내고 다다미 방인 거실에서 차를 마시던 카오리가 슬쩍 레이를 쳐다봤다.
"네. 7센티나 컸어요. 아, 할아버지."
레이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일본어로 말했다. 츠바사의 건조한 눈동자가 손자를 쳐다봤다.
"오냐. 말하거라."
"보리를 집안에 둬도 괜찮겠죠?"
"..."
지나는 일본어로 대화하는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지만 레이의 입에서 '보리'란 말이 나온 것을 들었다.
"안 된다."
"???"
지나는 단호하게 명령하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허락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차갑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할아버지..."
"..."
"여기는 일본이라구요. 보리 혼자 밖에 있을 수 없어요. 겁먹고 도망가버릴 거에요."
"누가 여기 데려오라고 하던?"
유키는 분명히 츠바사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지나는 날카로운 남자 츠바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다문 입이나 눈을 보고있으면 차가운 이미지가 더 차갑게 느껴졌고 그 모습이 두 사람을 연결시길 정도로 닮았다는 것이다.
지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리의 주인은 그녀였지 레이가 아니었다.
"제가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허락해주세요."
"..."
츠바사가 아닌 다른 남자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그의 짙은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지나는 분위기가 결코 자기 쪽으로 우세하게 넘어올 리가 없다는 깨닫고는 더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츠바사란 남자는 너무 냉랭했고 무뚝뚝한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더 내뱉었다간 거실 벽에 걸려있는 긴 칼이 그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저건 진검일 거야.'
지나의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벽에 거대하게 걸려있는 두 세개의 진검으로 향했다.
그날 밤. 지나는 낯선 곳에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낯선 곳에 오면 하루 이틀 정도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 했다.
이 시간에 남의 집 안을 돌아다니면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잠이 잘 안 올 때는 데운 우유 한잔을 마시면 잠 자는 데 도움이 되었다.
1층으로는 내려왔지만 주방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주방을 찾은 그녀는 우유를 찾아야만 했다. 아까 레이가 우유를 마셨으니 아직 있을 것이다.
냉장고로 다가간 그녀는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손데는 것을 속으로 용서해달라며 속삭였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던 그녀는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이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
"아...읍!"
남자의 손이었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남자의 손이 그녀의 벌린 입을 막아버렸다.
지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상대방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이 어두운 것도 지겨워! 버튼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들어왔는데...'
그녀는 그의 손을 떼려고 얼굴을 틀고 손을 잡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더 가까이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낯선 남자의 향기와 손길에 그녀는 놀랍도록 충격을 받았다. 또다시 그녀가 비명을 지를까봐 상대는 쉽게 막은 입을 풀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소리치지 않는다면... 놓아주겠습니다."
그녀는 한국말을 듣는 순간 그가 유키일 거라고 여겼다. 목소리가 언뜻 비슷하게 여겨졌고 단단한 가슴이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향기가 달랐다. 이 남자에게서는 약간의 니코틴 냄새가 섞인 향수가 났다.
지나는 긴장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요, 김 선생."
한국말을 하는 이 남자는 누구지? 누구길래 그녀를 안단 말인가. 혹시 그 남자?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지나는 숨을 천천히 크게 들어마다가 내쉬기를 두어번 반복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계속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 시야가 익숙해지자,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의 얼굴 윤곽을 바라봤다.
"유스케?"
그는 유스케였다. 공항에서 이곳까지 데려다 준 남자이며, 같이 식사했던 남자였다.
"저, 저기... 한국말 하시는군요?"
"필요할 때만."
"한국말을 어떻게... 실수로 그 쪽에게 험담이라도 했으면 큰일 날뻔 했군요?"
지나는 멋쩍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죠."
그의 간결한 대답에 지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와 대화를 하고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자기 손에 들려있는 우유를 보여주며 데운 우유를 마시면 잠이 잘 온다며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했다.
"시력이 좋은가 보군요?"
"예? 아... 사실 버튼을 못 찾아서요..."
유스케는 잠깐 어디론가 움직이더니 주방의 조명을 켰다. 주위가 환해지자 그제서야 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옷차림이... 지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흰색의 얇은 셔츠를 입은 그는 단추를 완전히 열고 있었다.
벌려진 셔츠 사이로 그의 단단하고 근육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것을 본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이거... 어, 어떻게..."
지나는 전자렌지 쪽으로 걸어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우유 잔을 넣었다.
하지만 전부 일본 말로 뭐라고 적혀있는 버튼 중 어느 것을 건드려야 할 지 몰랐다.
그녀의 더듬거리는 말에 유스케가 다가왔다. 그가 팔을 뻗자, 그녀의 드러난 어깨와 팔에 스쳤다.
낯선 남자의 짧은 접촉에 그녀는 최대한 떨어져 있으려고 몇 발자국 물러나 우유가 데워지는 것을 바라봤다.
그 동안에 유스케는 뭣때문에 주방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나가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따가운 눈총에 지나는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뭐가요?"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세요?"
"쳐다보면 안 되요?"
"???"
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사람을 그렇게 뚫어지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일본에서는 예의란 걸 모르나?
"일본은 어떤지 몰라도 사람을 그렇게 이유없이 빤히 쳐다보는 거... 실례에요."
"알고 있어요."
간결하면서도 그의 말투는 깍듯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건방진 느낌을 받았다.
"그럼 왜..."
"예쁜 여자 얼굴 보는 것도 죕니까?"
"???"
전자렌지에서 '삑'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스케는 잔을 조심스럽게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잔이 약간 뜨거울 겁니다."
"괘, 괜찮아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지나는 우유잔을 두 손으로 거머쥐고는 그에게 돌아서서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역시나 열려진 그의 셔츠가 너무 그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재빨리 2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온 지나는 넓은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우유를 입가로 가져갔다. 한국에서 마시는 우유 맛하고는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은 우유 맛이 아니라, 조금 전에 만났던 이상한 남자, 유스케였다.
그가 입을 틀어먹았을 때 도둑인 줄 알고 얼머나 놀랐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유창하게 한국말을 잘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었다. 누가 보면 완전히 한국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남자로서의 매력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러나 김 지나에게는 아니었다.
순간의 떨림과 긴장은 그가 느끼게 했는지는 몰라도 사토 유키에게 느껴지는 긴장감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우유를 다 마신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낯설고 너무 넓은 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 약간 두려워 그녀는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 불을 켜놓고 자기로 했다.
누군가가 없어서 느끼는 허전함인지, 두려움인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심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한국에 놔두고 온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은 모두 가져왔는데... 레이, 보리,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그리고 속옷. 구두 하나, 샌들 하나.
'그래, 보리 밥도 들고왔지. 근데 뭐냐고?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한 거지?'
동인에게 전화를 안 하고 와서 그러나? 지 재영이과는 전날 통화했고, 영주에 계신 부모님께도 전화 드렸다.
유키는 글을 쓰다가 이메일을 받았다. 일본에서 날아온 이메일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유스케일 테니...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서 메일 창을 열었다. 일본어로 적혀져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잘 지냈냐, 유키?
난 레이 혼자 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 여자도 같이 왔더군. 레이 가정교사라던데...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갈 거 같냐? 예전에 있던 가정교사들 2주도 못 있고 그만 두더니만.
일본 여행에 레이와 같이 온 걸 보면 좀 다른 여자냐? 얼굴도 제법 예쁘고...
설마... 가정교사와 벌써... 하룻밤 잔 건 아닐테지? 아주 순진하게 생겼던데.
그녀한테 딴 맘이 없는 거면 좋겠다, 사토 유키.
혹시, 아직 결혼도 못한 친구를 위해서 애인하라고 보낸 건 아니냐?
궁금한 친구녀석은 오지 않고... 엉뚱하게 여자를 딸려 보내다니...
영영 나한테 네 얼굴 안 보여줄 작정이냐? 보고싶다, 유키.
- 너의 친구, 유스케가...
유키는 다른 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 쯤에 있는 한 줄의 내용이 신경쓰였던 것이다.
'혹시, 아직 결혼도 못한 친구를 위해서 애인하라고 보낸 거 아니냐?'
그는 두어번 그 문장을 읽고는 그 창에서 빠져나와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유스케 그 녀석이 지나에게 다른 마음이라도 품을 까봐 신경쓰였다. 그는 좋은 녀석이었다.
인물도 그런대로 남자답게 생겼고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격에 키도 컸다.
그런 그에게 지나가 안 넘어가리란 보장이 없질 않는가. 그리고 그녀에게는 현재 애인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녀를 버린 멍청한 녀석이 애인이었다니... 그 틈으로 유스케가 파고들 수도 있었다.
'이런, 젠장! 미치겠군!'
아직 하루가 지나려면 한 시간이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벌써 부터 마음이 혼란스러워서야 어딜 일을 하겠는가.
그는 지나가 떠나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생각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다. 모니터에 자꾸 한 여자 얼굴이 아른 거렸다.
김 지나... 그녀가 왜 자꾸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건가.
유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양주를 꺼내 마셨다. 오늘 일은 그만 하고 잠 잘 생각이었다.
가정교사는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한 시도 편안하게 해 준 적이 없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말썽을 피우는 여자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고 눈에 거슬렸다.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알 수가 없었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하는 심장이 그의 몸에 불을 지피도록 뜨거웠다.
'설마... 내일도 이러진 않겠지?'
유스케의 이메일을 본 것이 화근이지 싶었다. 한 줄의 문장과 유스케 그리고 김 지나.
레이와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에게는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김 지나.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유난히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자연미가 느껴질 정도로 예뻤다.
묘한 매력과 순수함이 그에게 띄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욕구를 참지 못 한 그로서는 그녀를 내버려두기 힘들었다.
하룻밤... 그녀는 분명히 잊으라고 했다. 성인들간의 실수라는 거지...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잊으면 커다란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잊을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의 관계는 화산 두 개를 놓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고 열정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열정적이었다. 서투른 손놀림으로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갈 때는 경험이 많은 닳아빠질 대로 닳은 여자들보다 훨씬 애로틱했으니까...
그런 그녀를... 유스케 그가... 노린다면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 이메일을 읽고나서부터 벌써 유스케를 의식하게 되었고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질투심에 몸이 굳어버렸다.
'날 시험하지 마, 유스케. 후회하게 될 테니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