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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남자 유키*** <#14. 뜻밖의 고백>

길스진 |2005.01.29 17:27
조회 5,003 |추천 0

#14

<<뜻밖의 고백>>

 

 

 

유스케는 세 번 정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그녀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주었다.

 

허공 속에 멍하니 띄운 눈동자가 누굴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한국에 남겨두고 온 남자친구라도 있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예?  아,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뭐라고 하셨죠?"

 

"잠깐 걷는 것도 좋을 거라고요."

 

유스케는 어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다.  그는 잠깐 돌아다니다가 근처에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좋아요!  전 걷는 거 무지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다리가 굵은 건지 몰라요.  흐흐흐흠..."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종아리를 슬쩍 내려다봤다.

 

당연히 그녀가 들어올린 스커트 아래로 늘씬하고 매끈한 그녀의 다리가 유스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했다.  모델해도 될 정도로 다리가 날씬하다고 했다.  그 말에 여자로서 지나는 괜히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비행기 태워줘서 고마워요, 유스케...씨."

 

그녀는 그의 이름을 거의 부른 적이 없었다.  다 큰 일본 남자이름을 부르는 것이 왠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호칭을 정확히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한국식으로 '씨'를 덧붙였다.

 

유스케는 피식 웃으며 거리로 나섰다.

 

레이는 자기가 보리의 끈을 잡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덕에 그들의 걷는 속도는 아이걸음에 맞춰야 했다.

 

"차라리 보리가 널 데리고 다니는게 빠르겠어."

 

지나의 말에 레이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가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바로 덩치 큰 보리였다.  녀석은 너무 힘이 센대다 제멋대 걸었다.

 

"그 쪽이 아니라 이 쪽이야, 보리!"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은 아이가 끌고다니는 개를 보고는 아키다(일본 토종개)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보리는 일본어로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품종이 진돗개이고 한국의 토종개이며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보리의 명석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몇 가지 녀석에게 명령했다.

 

지나는 레이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보리에 대해서 뭔가 자랑을 하고있다는 것은 알았다.

 

사람들은 보리의 재주에 박수를 쳤고 귀엽고 영리하다며 여기저기에서 칭찬이 쏟아졌다.

 

"낯가림을 할 줄 알았더니..."

 

유스케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저 녀석이 영리하군요."

 

"네.  고집이 세서 문제지만... 녀석 고집은 말릴 수가 없어요.  욕심대로 안 되면 낑낑거리면서 울기까지 해요."

 

지나는 유스케와 함께 보리를 놓치지 않고 앞서 걸어가는 레이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변 상가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점포마다 거의 크고 작은 고양이모양의 마네킹이 보였던 것이다.

 

사람보다 더 큰 고양이가 입구에 세워져 있거나 훨씬 작은 고양이는 음식을 진열해놓은 진열대 위에 있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하얀색이었으며 손짓을 하듯 한쪽 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일본에서는 고양이가 상징적인 동물입니다."

 

"상징적인 동물?  뭐 어떤..."

 

"행복 또는 행운을 기원하기도 하고... 이렇게 점포 앞에 두는것은 많은 부를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나는 놀란 얼굴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고양이 앞에 섰다.

 

"일본말로 '마네키 네코'라고 하죠."

 

"마네키...네코?"

 

"고양이 마네킹이란 뜻입니다."

 

"아-아..."

 

그녀가 귀여운 얼굴의 마네키 네코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행복과 부를 가져다준단다...

 

"선생님!  배고파요!"

 

앞서 걸어갔던 레이가 보리를 끌고 후다닥 달려왔다.  아이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모자는 언제 벗겨졌는지 없었다.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뭘 먹겠어요?"

 

유스케가 그녀에게 살짝 다가와 물었다.  그렇지만 일본 요리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는 그녀로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나만 믿고 따라와요."

 

그는 유명한 식당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각양 각생의 '스시'(한국어로 초밥)가 테이블을 장식했다.

 

유스케의 말이 홋카이도의 특산물이 각종 어패류와 라면 등이라고 했다.

 

고소한 성게와 생선알, 그것도 연어알 그리고 가리비와 전복 등을 초밥과 함께 먹는 맛이 마치 천국맛이라고 했다.

 

"음... 맛있는데요?  배 불러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지나는 즉석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여러종류의 생선초밥을 맛보며 짧은 감탄을 터뜨렸다.

 

테이블 한쪽에 앉은 보리조차 침을 흘리고 받아먹지를 않겠는가.  하긴... 이런 곳이니 원조 생선초밥을 먹어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아이스크림과 초콜릿도 유명합니다."

 

"어머?  그래요?"

 

레이는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라는 말에 집에 가는 길에 꼭 사가지고 가자고 졸라댔다.  유스케는 지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레이와 저때문에 돈 다 털리는 거 아니에요, 유스케씨?"

 

"두 사람이 먹어봐야..."

"뭘 모르시네?  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특히 요녀석은 끝이 없어요."

 

그녀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연어알로 만든 초밥을 녀석의 입에 넣어주었다.  녀석은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봤죠?"

 

 

 

 

유키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침실에 음악을 틀었다.

 

그는 평소에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본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준 CD가 듣고싶었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일본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의 내용은 역시나 사랑을 담은 애절함이었다.

 

끄려던 그는 메일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만에 유스케가 보낸 메일이었다.  며칠 전에 보낸 것 보다 조금 더 긴 내용이었다. 

 

메일을 읽어내려가는 그의 기분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 처럼 묘했다.

 

 

... ... 그녀가 초밥을 참 좋아하더군...  그리고 혼자 돌아다니게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 같아. 

 

말도 안 통하는데 말이지.  네가 보낸 손님을... 미아로 만들어선 안 되겠지?

 

유키, 아무래도 김 선생이 일본에 너무 흥미를 가져서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힘든 거 아냐? ... ...

 

 

아무래도 레이의 가정교사와 유스케와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마도 유스케가 지나의 안내원 노릇을 하고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레이가 여기저기를 지나와 같이 돌아다닐 수도 없을 테니... 유키는 화가 치밀었다.

 

이런 기분나쁜 질투심에 미칠 것만 같았다.  고의적으로 질투심이나 가지라고 녀석이 일부러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녀석에게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럼 자신이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는 모니터를 때려부수고 싶었다.

 

자신보다 유스케가 김 지나에 대해서 더 알고있다는 것이 싫었다.  그는 그녀가 초밥을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씨... 이런 기분 정말..."

 

그는 주먹을 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고 서재 안을 불안하게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우뚝 멈춰서고는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거칠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유키?"

 

카오리의 부드러운 음성이 매우 반기는 것 같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반가움이나 애정표현이 그에게는 불편했다.

 

"예..."

 

그는 그녀와 몇 마디 나누고나서 레이의 가정교사가 있는지 물었다.  괜히 김 지나란 이름을 쓰고싶지 않았다.

 

"어쩌니?  아까 외출하고 아직 안 들어왔는데..."

 

"외출요?  누구와 나갔다는 겁니까?"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화난 음성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더군다나 지나가 유스케와 단둘이 나갔다는 소리에 맥박이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머?  잠깐만, 유키!  지금 김 선생 들어오는 구나."

 

유키는 지나가 수화기를 전해받는 짧은 시간이 왠지 무척 길게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윽고 지나의 쾌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저, 지나에요."

 

"..."

 

그는 갑자기 자신의 입이 꿀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심장이 터질 것 처럼 쿵쾅거리더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얼른 책상 위에 있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그만 사래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기침을 해댔고 가슴을 두드리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짓이었다.

 

'눈물까지 다 나는군... 제기랄!'

 

그는 볼 사람도 없는데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후다닥 닦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댔다.

 

"나요."

 

"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사장님 감기걸리셨어요?  웬 기침을..."

 

"아, 아니오.  그냥... 나온 것 뿐이오."

 

말까지 더듬거리고... 멋지군, 사토 유키!  그는 최대한 냉정을 되찾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이 거기서 잘 지낸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나더군."

 

"그래요?  누가 얘기했을까?"

 

"좋아 죽을 지경인가 보군?"

 

그녀는 그가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밖에서 뭘 하다 들어왔는지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레이는 잘 지내고 있소?"

 

"그럼요, 사장님!  전 레이가 그렇게 일본말을 잘 하는지 몰랐어요!  저만 여기서 바본 거 있죠? 

 

식사하는 것도 힘들어요.  거기다 집안에서는 시끄럽게 굴지도 못 하고... 어디 나가려면 꼭 동행자가 있어야하고..."

 

"그 동행자란 유스케를 말하는 거군?"

 

"네, 맞아요!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잘 지내세요?  가정부는요?"

 

"..."

 

가정부가 있고 아무런 문제거리가 없다고 하면 그녀는 마음을 놓을 것이다.  유키는 까칠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는 그녀가 걱정할 만한 문제가 있다고하면... 어쩌면... 그녀가 한국으로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다지 좋지는 않소."

 

"어머?  왜요?  무슨 일이라도?"

 

역시나 그녀는 놀라며 물었다.

 

그녀는 양의 탈을 쓴 불여우인지, 불여우의 탈을 쓴 양인지... 그 어느 쪽이 그녀의 참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좀... 다쳤소."

 

"뭐, 뭐라구요?!"

 

뜻밖에 그녀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다.  하이톤으로 올라간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있었다.

 

"아... 괘, 괜찮소.  조금 다쳤을 뿐이오."

 

그녀가 그렇게 많이 놀랄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 했다.  그녀는 계속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물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끝까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설마 쉽게 이곳으로 온다고 하겠어?

 

"그냥... 좀... 손을 사용하기가... 아, 왼 손을 다쳤소.  내가 얘기했던가?  난 왼손잡이라고."

 

"아, 아뇨.  하지만 사장님께서 왼손을 사용하시는 건 봤어요.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운동하다 다쳤소."

 

그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뛰어난 연기력에 감탄을 터뜨릴 뻔 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순진하게 속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하며... 완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애인같아 조금 전 메일을 읽었을 때의 기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깁스했나요?"

 

"아, 그렇소.  고정을 시켜야 되니까..."

 

"어머!  세상에... 많이 아프겠어요!  그게 어째서 조금 다친 거란 말이에요?  글은 어떻게 하고요?"

 

"당연히..."

 

유키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에 쌓아둔 다른 책들과 디스켓과 CD를 내려다봤다.

 

"중단해야만 했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만 하면...

 

"세상에... 도대체 언제 다치셨죠?  그럼 아주머니는요?"

 

"이... 이틀 전이오.  가정부는... 아직 못 구했소."

 

그는 가정부가 의외로 쉽게 잘 구해지지 않더라고 말했다.  한 두명은 왔다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보내버렸다고 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연락을 해야죠!  그럼 식사는 어쩌구요?  씻는 거는요?  어머!  이런... 볼 일 보시는 것도... 힘드시겠네요?"

 

"..."

 

그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고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가 대답할 말을 기다렸다.

 

"사장님..."

 

"말해요."

 

"어쩌죠?"

 

"뭐가 말이오?"

 

아직까지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자 웃음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도와드리지 못 할 거 같아요."

 

"???"

 

"어쩌죠?  내일 온천가기로 했는데..."

 

"..."

 

유키의 표정이 조금 전과 180도로 다른 차갑고 딱딱하게 변했다.

 

'오... 온천에 간다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쥐고있는 수화기를 집어던지지 못해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이 아니라 다리라고 할걸 그랬다.

 

지나는 계속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에 오면 꼭 온천에 가봐야 한다고 유스케씨가 그러더라구요.  레이도 무척 좋아하는데..."

 

"..."

 

"사장님, 죄송해요.  도움이 못 되서..."

 

유키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쌀쌀맞은 투로 잇사이로 내뱉었다.

 

"괜찮소.  잘 갔다 오시오."

 

그는 집어들었을 때처럼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수화기는 제자리가 아니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침실로 갔다.

 

 

 

 

지나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옆에서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카오리는 아들이 다쳤다는 소리에 주방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레이도 달려왔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유스케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의심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유키가 어디를 어떻게 다쳤다구요?"

 

"아... 그게... 손을... 다치셨나봐요."

 

"뭐라구요?  손을?!"

 

카오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떨리는 손을 벌어진 입을 가렸다.

 

그녀가 심약하다는 것을 몰랐던 지나는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깁스를 하고계세요.  당분간 글을 못 쓰시나 봐요."

 

그녀는 카오리 못지 않게 놀란 레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온천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카오리가 말했다.

 

레이는 온천에 가는 것을 포기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다쳤는데 무시할 수도 없어 많이 속상했다.

 

카오리와 레이는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지나는 주방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역시 녹차같은 건강을 생각하는 차보다는 카페인이 든 커피가 그녀의 입에 맞았다.

 

유키의 통화를 뒤로 그녀는 마음이 부쩍 심란해졌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걸음에 그에게로 가고싶은 마음이었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는 다친 손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씻는 것도 먹는 것도... 하물며 글은 어떻게...  그녀는 걱정스러움에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너무 보고싶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가서 다친 손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나도 한잔 줘요."

"???"

 

어느새 유스케가 그녀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일어나 커피를 타서 그에게 주었다.

 

"유키 사장님은 좀 진한 맛을 좋아하시거든요."

 

"..."

 

"유스케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유스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김 지나의 입에서 '사장님'이란 말이 나오자 놀랐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스케라고 불러요.  유스케씨가 아니라..."

 

"네?  아, 하지만..."

 

"서로가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 안 들어요?"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있는 지나의 검은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까?"

 

"아, 아뇨.  절대로 그건 아니에요, 유스케씨... 아니, 유스케..."

 

그의 입꼬리는 살짝 움직였지만 그것은 절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며 유키가 걱정되느냐고 물었다.  사실 진심으로 묻는 말이었다.

 

아까 그녀가 전화를 받고 난 후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유키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당황했다.  그의 질문이 '걱정되느냐?'가 아니라... '그를 좋아해요?'라고 들렸으니까.  그것도 너무 선명하게...

 

"아... 그게... 무, 물론 걱정되죠!  저한테 월급주시는 분이신데... 아무래도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가 뭐... 그렇죠..."

 

그녀는 얼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지금의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했다.

 

유스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잘 자요."

 

"..."

 

그가 마신 찻잔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분명히 안 좋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 했다.

 

 

 

 

다음 날.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겨오는 유명한 온천에 도착한 김 지나, 유스케 그리고 레이와 카오리.  그들은 모두 혼탕으로 갔다.

 

오늘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지나는 남녀가 함께 탕 속에 들어가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수건으로 몸을 두르긴 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안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수건을 그녀는 꼭 부여잡고 뜨거운 물 속으로 차츰 들어갔다.

 

아직 레이와 유스케는 보이지 않았다.  카오리는 그녀에게 벽을 등지고 앉으라며 자기 쪽으로 손짓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조용히 발소리가 들렸고, 어디선가 레이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레이가 작은 수건을 걸치고 그녀에게로 오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물높이가 가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유스케가 들어섰다.  그는 아슬하게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 탕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물 위로 약간 올라온 그녀의 상체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계곡이 살짝 보였던 것이다.

 

지나는 뜨거운 온천 물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라고 속으로 우겨댔다.  유스케의 멋진 몸매를 보고 당황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오니 참 좋네요."

 

"일본에 사시는데도 자주 못 오세요?"

 

카오리는 웃었다.  일본에 산다고 해서 꼭 자주 온천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키 일만 아니었어도 여기 좀더 머물다 가시는 건데 그랬어요."

 

지나는 카오리가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외모만큼이나 마음까지 아름답고 고왔다.  부러울 정도였다.

 

"할머니!  목 말라요!"

 

레이가 뜨거운 물 속에 있기가 힘든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물 속에서 나갔다.

 

"오냐.  그래.  시원한 것 마시겠니?"

 

"네.  얼른요, 할머니!"

 

레이는 폴짝폴짝 뛰는 통에 수건이 흘러내려 남자의 자존심을 보이고 말았지만 개의치 않고 카오리를 불러댔다.

 

반면에 지나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돌려버렸다.  갓난아기라면 몰라도 10살짜리 남자아이는 그다지 작지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 누군가의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나는 고개를 들었다.

 

몇 미터 떨어져 있는 유스케가 입을 막고 웃고 있질 않는가.  그녀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김 선생님은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많군요?"

 

"네?"

 

그녀는 순진하다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했다.  차라리 멍청하단 소리가 나았다.

 

"누가 순진하단 거에요?"

 

"조금 전... 레이를 보고 부끄러워 했잖습니까?"

 

"... 나, 난... 그런 적 없어요!"

 

"그래요?"

 

그녀는 얼굴이 다시 화끈거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부 조명이 좀 밝은 것 같았다.

 

다른 때는 어두운 것이 싫더니만... 지금은 차라리 어두웠음 했다.

 

물 소리가 살짝 들리더니 유스케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는 조금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난 순진하지 않아!'

 

유스케는 그녀 앞에 서고는 수건을 두른 허리에 양 손을 얹었다.  왜 갑자기 폼을 잡고 그러는 거지?

 

지나는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아닌 것 같은데..."

 

"???"

 

유스케가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 움찔했지만 그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자, 긴장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긴장하지 말아요.  나까지 불안하니까..."

 

"나, 난... 긴장한 적 없어요!"

 

"그래요?"

 

그의 얼굴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느낀 지나는 몸을 뒤로 뺐지만 바로 뒤에는 벽이었다.

 

그리고 일어나 자리를 옮긴다해도 운동으로 발달된 유스케가 더 빠를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네?  아, 네..."

 

그의 대화로 지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묻는 질문에 다시금 긴장되었다.

 

"애인 없죠?"

 

"네?  아, 네...  현재는요."

 

"그럼... 임자가 없다는 뜻이군요?"

 

"???"

 

심장이 조금씩 속도를 올리며 뛰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얼굴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물었던 말에 더욱 가속을 붙였다.

 

"그럼... 키스해도 됩니까?"

 

"네, 네?"

 

유스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근히 내려왔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은 이내 그의 입술에 멈추었고 부드러운 동작에 당황스러웠다.

 

그는 놀랍도록 적극적이었고 그녀의 입 안으로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는 지나의 두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나는 주먹을 쥐고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유키처럼 단단하고 힘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그녀의 입술을 열렸고 그의 혀는 천천히 입 안을 탐색해 들어갔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동안, 지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자신은 사토 유키를 좋아했다.  좋아하지 않는 남자에게는 자신의 입술을 줄 수 없었다.

 

막 그의 손이 자신의 가슴으로 올라오자, 지나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그를 젖먹던 힘으로 밀쳤다.

 

"나, 난... 아, 안 돼요..."

 

"???"

 

그녀는 혹시나 수건이 흘러내릴까봐 꼭 쥐고는 굳은 안색인 유스케를 쳐다봤다.

 

"아, 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유스케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

 

그녀가 놀라 고개를 획 들자, 그는 용기를 내어 계속 말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말할 작정이었다.

 

"당신은 웃는 모습도, 지금처럼 당황하는 모습도 다 예쁜 거 알아요?"

 

"아, 아뇨..."

 

"혹시나 당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면... 키스같은 거 포기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나한테 기회가 생겨서 기뻤어요.  그래서 키스를 했던 겁니다."

 

"..."

 

지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척이나 난감했다.  이곳에서 만난 남자... 일본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너무 오래 있어도 안 되니 그만 나가죠."

 

유스케는 먼저 탕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오자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요.  갑자기 나오면 현기증이 날 수도 있으니까."

 

"고, 고마워요... 유스케..."

 

"떠나기 전에 생각해 봐요."

 

"...???"

 

지나는 조금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모델같은 뛰어난 몸매를 가진 그는 벌어진 어깨에 매우 다부졌고 허리로 내려오는 곡선은 힘이 느껴졌다.

 

'저런 몸매를 가지려면 무슨 운동을 해야하는 거지?'

 

그는 약간 하얀 피부인데 반해 그녀의 심장을 차지해버린 남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유스케보다 조금 더 큰 체격을 가졌다.

 

유스케보다 그녀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그녀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사람은 사토 유키였다.

 

'뭘 어떻게 하고있는 거지?  가정부도 없이 밥은 어떻게 먹고 있는 거야?'

 

그 후로 온천에서 보내는 지나의 마음은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다.  즐거운 사람은 레이와 카오리 뿐이었다.

 

유스케는 은근히 안색이 어두운 그녀를 신경쓰느라 말이 없었고 다른 때보다 더 자주...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같이 있는 지나의 눈동자를 찾았고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한국에서 혼자 있을 남자를 찾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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