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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11 >

나비 |2005.02.01 01:09
조회 3,537 |추천 0

11


“친구야! 희야! 너무 반가워. 우리 안본지 일주일도 넘었지?”


누가 봐도 예의상 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일년을 안 봐도 이상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가?”

“근데 무슨 광화문이야? 오기 너무 힘들었다. 요즘은 강남엔 아예 안 가나봐.”


마치 귀빈을 억지로 부른 듯한 저 모양새는 뭐란 말인가? 반가움은 잠시 채련의 얼굴엔 짜증스러움이 베어 나왔다.


“직장이 종로니 주말 아니면 안 가게 되지.”

“그래서 니가 감각이 떨어지나 봐.”

“무슨 감각?”

“니 가방이랑 신발 너무 언밸런스야. 그리고 머리 어디에서 했니?”

“응? 이대에서.”

“이대 냄새 풀풀 난다. 이대 가서 제일 싼 데 쿠폰 받아서 들어간 게 눈에 그려진다, 야!” 


‘지가 언제부터 감각 있는 여자였다고. 고등학교 시절 떡진 머리로 다녔던 게 누군데.’


채련이 처음부터 세련된 여자는 아니었다. 귀여운 외모였지만 그리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풍선에 바람 넣듯 나날이 가슴이 켜져 갔고, 입학 당시 맞췄던 교복은 거의 뜯어질 지경이 되었다. 하복에서 동복으로 바뀌기 직전이라 새로 맞춘다는 것도 억울했던지 그렇게 몇 주를 버티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가 피크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길을 가도 온 남자의 시선이 채련에게 쏟아졌다. 그런 시선 때문인지 채련은 변해갔다. 외모에도 신경을 부쩍 썼으며, 외설스러운 남자의 농담에도 적절히 받아칠 수 있게 뻔뻔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는 완전히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 세련된 외모에 가시 돋친 말로 무장한 여자로 말이다. 하지만 혜림이 앞에서 세련 운운하는 건 그저 성격 탓이려니 넘어가기 힘든 것이었다. 


“내 회사 동생이야. 강혜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채련입니다.”


채련은 악수를 청했으나 혜림이는 고개를 다시 조금 숙였을 뿐 악수를 받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들끼리 그런 인사가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근데 너 생각보다 빨리 왔다. 차 안 막혔었어?”

“지하철 타고 왔어.”


채련이는 혜림이가 자기 상대가 안 된다고 판단을 했던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니가 지하철도 타니? 많이 변했다. 예전에 들은 바로는 너 어디가든 남자들이 데려다 준다며?”

“그런 거 귀찮아. 니가 안 당해봐서 그래. 데려다주고 집에 가버리면 좋은데 친구랑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잖아. 그럼 미안해서 놀지도 못하거든. 잘 모르겠지, 그런 기분?”

“미안하다. 잘 모르겠는 걸.”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채련이. 어떻게 물을 먹인다?


“너 일요일에 윤섭씨에게 전화했지? 왜 한 거야?”


저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놀리는 것 같았다. 남자에게 일요일에 전화한 한심한 여자를 말이다.


“전에 윤섭씨가 전화를 해서 번호를 알려주잖아. 꼭 전화를 해달라고 말이야.”

“너한테 전화를 했었다고?”

“응. 너한테는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 때 스키장에서도 작업이 들어오더라구. 날 좋아하나봐. 저번에도 회사로 전화해서 만나자고 난리더라. 스키장에서도 집에 갈 때 날 따로 불러서 여운 있는 말을 했다니까.”


이쯤이면 열 좀 받겠지 했는데 채련은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하하.”

“······?”


순간 그녀가 마녀처럼 보인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을 비웃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다면 그녀는 상당한 기술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문희 너 도끼였구나. 남자들 그런 표현은 누구한테나 하는 거야. 하하하하 하하하.”


역시 이상한 그녀가 맞았다. 친구를 도끼라고 부르는 이상한 그녀.


“왜, 왜 웃어?”

“요즘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그 말을 들으니 윤섭씨가 더 멋져 보이는 데. 쑥맥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야! 넌 여기저기 찝쩍거리는 남자가 좋다는 거야?”

“여자를 모르는 남자보다는 그 편이 낫다는 거지. 바람둥이들은 만나는 순간만큼은 여자에게 최선을 다하니까.”

“채련! 너 웃긴다.”

“내가 볼 땐 네가 더 웃긴데.”

“뭐가 웃겨? 뭐가 웃기다는 거야?”

“용준씨 같은 남자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난 그거 보고 속으로 막 웃었다.”

“내가 언제 정신을 못 차렸다고 그래?”

“너 스키장 가면서 음식 주렁주렁 싸왔잖아. 그거 용준씨 주려는 거 아니었어? 요즘 남자들은 그런 거에 감동 안 해.”

“그럼 뭐에 감동하는데? 잘 아는 니가 좀 가르쳐 줘라.”

“몰라서 묻니? 얼굴이랑 몸매지. 요즘 몸매 잘 빠진 여자를 보고 뭐라는지 알아? 착하게 생겼다 그러는 거야.”


채련은 자신의 몸을 과시하듯 잘난 가슴을 들이밀었다.


“너 니 생각보다는 안 착해. 착각하지 마. 가슴만 조금 컸지, 다른 게 안 되잖아.”

“너보다는 착하니 걱정 말아라. 용준씨 나 차 안에서 흘끔거리는 거 못 봤어? 윤섭씨가 너한테 작업 들어왔다는 말 말고, 니꺼 관리나 잘 해라.”

“내꺼 아니야.”

“말 잘못했다. 당연히 니꺼 아니지. 너보다는 내 꺼에 가깝다는 게 맞겠다. 용준씨 날 보고 헐레레 하니까.”

“뭐야?”


내가 도끼라면 그녀는 왕도끼일 것이다. 아무 남자나 걸고넘어지기는.


“너 착하지 못한 건 인정해라. 안 그럼 왜 스물여섯이 되도록 연애를 한 번 못했겠니? 다 남자들이 보는 눈이 있어서야.”

“너 윤섭씨가 나한테 작업 들어왔다는 말 못 믿는 거야?”

“말이 되야 믿지. 너보다 내 어떤 점이 꿀리는데. 몸? 얼굴? 학력? 아님 직장? 윤섭씨가 널 택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용준씨도 마찬가지일걸.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너한테 매달리는 거야.”

“너 그 말 장담 할 수 있어? 윤섭씨에게 좋아 한다 고백 받으면 인정할 거냐구?”

“난 너 보고 싶어서 먼 길 왔는데 너랑 남자두고 싸우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뭐 그럴 일이 있다면 내가 무조건 이길 테지만. 네 자존심 다칠까봐 그런 유치한 내기는 할 생각은 없구. 아무튼 이런 자리 불편해서 더는 있기 싫다, 얘.”

“있기 싫으면 가시면 되잖아요!”


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혜림이었다. 맞다. 혜림이가 있었지, 하고 뒤늦게 생각하게 되었다. 채련의 말에 너무 흥분해서 혜림이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 후배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란 말야? 하지만 채련에게 가라고 말한 그녀의 말은 너무 의외였다.


“네 후배는 더 웃기는 구나. 처음 볼 때부터 실실 쪼개고 앉아있는 게 사람 짜증나게 하더니 여러 가지 하네.”

“그러니까 가라구요. 큰 가슴 달고 여기서 빨리 나가주세요, 네?”


혜림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나보다 더 무서운 얘였잖아.


채련이 나가고 나서도 혜림이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대리님! 왜 저런 사람이랑 친구해요? 대리님을 인간적으로 무시하던데. 제가 다 열 받아 못 참겠더라구요.”

“니가 봐도 그렇지?”

“그럼요. 정말 왕 싸가지 아니에요? 꼴에 남자들이 다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공주병에. 강남 타령은. 제가 강남 사는데 진짜 강남 애들은 안 저래요.”

“혜림씨 어디 사는데?”

“도곡동이요.”

“암튼 시원하게 말 한번 잘해줬다. 고마워, 혜림씨.”

“뭘요. 저는 그래도 친구 분인데 실수 한 거 아닌가 했는데.”

“아니야. 잘했어. 내 속이 다 시원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싫어서 악수도 안했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윤섭씨는 누구고, 용준씨는 누구고 어떻게 된 사연이에요?”


세상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 전까지 눈에 가시로 여겼던 혜림이에게 난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었고, 내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대리님 정말 대단해요. 그걸 어떻게 참았대요? 나 같으면 확 다 엎었을 텐데.”


스키장에서의 일을 이야기 해주자 혜림이는 거품을 물고 흥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정말 의외네요.”

“의외란 말은 좀 그러네. 내가 사나워보였다는 뜻이야?”

“그게 아니라 대리님 보면 할 말은 하고 사는 분 같아요. 그래서 좋아하는 건데.”

“내가 그래 보여?”

“네. 늘 당당하고 멋있어요.”

“고마워, 혜림씨.”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다니?”

“윤섭씨요. 확 뺏어 와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야 하는 거야? 난 윤섭씨 별룬데.”

“별루라고 해도 일단 뺏어 와요. 나중에 차는 한이 있더라두요.”


‘맞아. 이대로 가만히 있는 건 채련이 기만 살려주는 거야. 나중이야 어떻든 일단 윤섭씨의 고백을 받고 보자.’


“그럼, 어떻게 하지?”

“대리님이 먼저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해요. 상황을 보니까 만나자마자 고백을 받을 것 같은데요.”

“그래볼까?”


혜림이의 사주를 받아 바로 윤섭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 희씨?

“예.”


내 번호가 저장되어있던 모양이었다.


- 안 그래도 전화 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요?”

- 지금 어디세요?

“여기 광화문인데요.”

-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지금 뵐 수 있을까요?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지금이요?”

- 일찍 전화를 드리고 싶었는데 일이 늦게 끝났어요. 어쩌면 밤샘 작업이 될지 몰라 전화를 못 드렸어요.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는 일찍 끝났네요. 제가 지금 그리고 가면 되나요?

“잠시만요.”


만나자고 하려던 건 내 쪽이었는데 이 남자가 더욱 서두르고 있었다.


“지금 만나러 온다는데?”


조그만 목소리로 혜림이에게 물었다.


“알았다고 해요. 알았다고.”


크게 고갯짓을 하는 혜림이는 마치 극 연기를 지도하는 영화감독 같았다.


- 혜림씨!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윤섭씨가 날 불렀다.


“예.”

- 누구랑 같이 계시나 봐요.

“회사 동생하고 같이 있었어요.”

- 이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뵐까요?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시간은 얼마나 드리면 되지요?

- 한 시간 정도요. 차가 막히지 않으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구요.


전화를 끊고 혜림이와 난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했다. 혜림이는 지금 옷이 예쁘지 않다며 자신과 옷을 바꿔 입기를 권했고, 난 그대로 했다. 직장 상사를 위해 애쓴 혜림이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잠시 후 윤섭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고, 우리는 헤어졌다.


[대리님! 파이팅! 오늘 꼭 고백 받으세요!]


헤어지자마자 혜림이가 보낸 문자였다.


‘알았어. 파이팅! 고백을 꼭 받아서 채련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겠어.’


잠시 후 우리 둘은 분위기 좋은 스카이 라운지에 마주 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내가 물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해보세요.”


약간은 도도하게. 고백 받으러 온 여자처럼 굴면 안 되는 거야.


“드릴 말씀이 길진 않아요. 그래도 전화상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일단 들어보기로 하죠. 할 말이 뭐죠?”

“저 문희씨 좋아합니다. 정식으로 교제 하고 싶어요.”


윤섭씨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게임 끝났군. 녹음이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마치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유도해내는 게임이었다면 나는 좋은 성적으로 이긴 셈이었다.


“대답을 안 해주시는 군요.”

“예?”

“제가 말씀을 드렸으니 좋다, 싫다 말씀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구나.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달려왔을 뿐 그 뒤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저, 너무 갑작스러워서.”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드리죠. 내일 이 시간 다시 만났을 때 대답해 주세요.”


이 남자 너무 세게 나오는데. 쉴 틈을 주지 않는 그의 행동에 난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너무 빨라. 너무 빨라서 불안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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