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안 오는거지? ]
가혜의 통화내용을 듣고도 미연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 했다.
[ 안 와~ 절대 안와. 얘... 말은 잘 듣거든. 홍홍홍~ ]
가혜가 웃는 순간... 그 정훈인지 뭐시깽이인지 하는 놈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긴... 싫다는데 그러는 그 놈도 웃기고~ 알면서 아쉬울 때 이용하는 가혜도 나쁘고~
[ 야, 근데 왜 넌 아무얘기도 안 하냐. ]
가혜가 미연이를 향해 말했다.
이뇬이... 수맥도 없는데 삽질은~
[ 아서라, 가혜야... 미연이 보수적인거 알면서 넌 왜 그러냐...
자자... 우리 이거 다 마시고 자고 내일 또 놀아야지~ ]
최대한 부드럽게 마찰을 줄이도록 최선을 다한 문장이었다.
그렇게 3명이 일제히 술잔을 꺽어서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 나, 보수적이지 않아. ]
잉?? 이건 또 뭔 소리?
분명 미연이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런 미연이의 얘기에 가혜와 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 쟤... 쟤... 지금 뭐라고 했냐? ]
가혜가 나보다 더 어안이 벙벙한듯 나에게 되물었다.
[ 어? 어... 글쎄... 나도... 잘... ]
나도 황당하다네... 친구...
미연이 술도 많이 안 마셨을텐데...?
[ 나 보수적이지 않다고 했어. 나... ]
미연이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방 안에 긴장감이 휘~ 휘~ 돌았다.
[ 나 사실... 프리섹스주의자야. ]
벙~
어 벙 벙 ~
살다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군...
친구야~ 같이 황천길을 갈 때가 된기야~ 어~~야. 디~~~야...
이보다 더 놀랄 수는 없었다.
[ 야... 야... 너... 마... 말이...이... 되는 소리...르...를 해~ ]
가혜가 말까지 더듬었다.
[ 진짜야. 나 프리섹스주의자야. 아마 내 경험치가 너희의 몇배는 될껄?
내가 하나 물어볼까? 너네... 돈 받고 해본 적 있어? ]
힉!! 우린 미연의 질문에 질겁을 했다.
도리도리도리도리 !!
서.... 설마...?
[ 난 돈 받고 해본적도 있어. ]
엄마야~~~!!!
미연이의 그 충격고백 한마디에 나랑 가혜는 바닥에 쓰러졌다.
장난이라고 하기에 미연이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이 . 럴 . 수 . 가 . . . . . .
[ 뭐... 내가 너희에게 이쪽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한 적이 없으니까... ]
미연이가 피식 웃으면서 또 술을 한잔 꺾었다.
[ 뭐... 뭐야!! 너 지금까지 내숭이었다... 그거야? ]
가혜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 내숭이라니.... 난 말을 안 한 것 뿐이라니까... ]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미연이가 계속 실실 쪼갰다.
[ 뭐... 오늘 너희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젠 나도 입을 열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
가혜가 흥분한듯 또 무어라 하려고 하자, 난 얼른 눈짓으로 가혜를 막았다.
[ 미연아, 니 얘기를 좀 듣고나 얘기하자. 전혀 아는바가 없잖아. ]
[ 그러지... 뭐, 난들 처음부터 프리섹스주의자였겠냐... ]
미연이의 이야기는 한 동네에 살고있는 어느 망할놈의 새끼로부터 출발했다.
전교 1등
전국 고교 과학경진대회 최우수상 수상
고교 수학 올림피아드 금상 수상
전국 모의고사 전국 석차 13등인 인간...
그런 인간도...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
그것도 미연이의 학교에...
그것도 미연이의 옆집에...
[ 옆집 찬혁이는 이번에또 또 1등이라더라.
대체 미연이 넌 왜 똑같이 학원다녀도 성적이 이모냥인거니? 어?
니가 머리가 나쁘니... 엄마가 밥을 안 해주니... ]
또... 또... 시작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 늘... 시작되는 엄마의 넋두리...
솔직히 미연이의 성적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데 말이다...
반에서 12등 정도 하면 못하는거 아닌데... 물론 전교 1등과의 갭이 크긴 하지만...
[ 안되겠다. 너 내일부터 과외하나 더 시작하자. ]
[ 엄마!! ]
[ 왜! 넌 옆집 오빠 보기도 부끄럽지 않니? ]
엄마를 이길 수야 없는거였다.
결국 미연이는 과외가 하나 더 늘었다.
하필 옆집에서 사는 찬혁이란 인간 때문에 말이지...
미연이의 소리없는 비명이 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아악!!!
씩씩 거려가면서 방에 앉아서 미연이가 공부하는 척, 교과서 밑에
하이틴 로맨스 책을 감춰두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읽고 있었다.
수업시간에도 내공을 쌓았기에 엄마에게 들킬 확률은 10% 미만이었다.
- 이번 신청곡은 서울 구로동 반내리양이 신청하진 곡입니다. 저에게는...
- 툭.. 툭...
화들짝!
책상 앞 창문에 뭔가가 툭툭 부딪치는 소리에 미연이가 기겁을 했다.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말이지....
아씨... 뭐야?
미연이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미안~ 공부하는데 방해했나? 좀 심심해서... ]
바로 옆집 창문에서 찬혁오빠가 활짝 웃었다.
은테 안경으로 이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미연이의 이상형...
사실, 미연이는 찬혁오빠를 쪼금 동경하고 있었다.
잘난 남자는.... 어릴 때나, 늙어서나... 멋져보이는 법이다.
[ 아... 아니요... ]
무진장 소극적이었던 우리의 미연양...
그러고 보면... 어쩌면 내숭은 천성인지도 모른다. ㅋㅋㅋ
[ 뭐하고 있었어? ]
[ 라... 라디오 듣고 있었어요... ]
[ 그래? 난 라디오가 재미있니? 난 한번도 안 들어봤거든. ]
그래... 인간아... 전교 1등은 라디오도 안 듣고 공부하냐?
은근히 미연이는 속이 배배 꼬였다.
[ 고등학교 들어오니까 중학교때랑 공부하는게 좀 다르지? ]
[ ... 네... ]
[ 참, 우리반에서 미연이 너 예쁘다고 그러는 애들 몇몇 있더라. ]
제가 좀 예쁘기야 하져... 미연이가 속으로 씨익 웃었다.
[ 다음에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 공부 방해해서 미안. 안녕~ ]
[ 예... ]
고개를 푹 수그리고 미연이는 조심조심 창문을 닫았다.
[ 어머나...]
뱃속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긴장했던 다리가 풀리면서 미연이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옆집에 김치전 부친거 갖다주러 갔던 것 이후에 미연이는
이렇게 오래 찬혁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심장이 연신 콩닥거리고 있었다.
안녕... 그 마지막 발라드같이 부드럽던 목소리가 계속 미연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몰라... 아이...
[ 완전... 진짜 하이틴 로맨스네~ ㅋㅋㅋ... ]
가혜가 큭큭거리며 웃어댔다.
[ 맞아. 그래서 더 위험했지... ]
미연이는 가혜의 말에 미동도 없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 위험하다고...? 왜? ]
내 물음에 미연이는 웃기만 했다.
뭐야... 뭐야... 대답을 해줘야지~~
[ 우해미, 생각해봐... 어릴 때, 것도 고등학생인데 그 사랑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크겠냐~
쟤, 미연이는 하이틴 로맨스를 많이 읽는 타입이니 더더욱 위험하지...
자기 사랑도 그 소설일거라고 착각하기 딱 쉽잖아. 남자가 나쁜 놈이면... 끝이지 뭐.
그 찬혁이란 놈은 전교 1등이었다니... 뭐 거의 소설 남자주인공 감이잖아... ]
미연이 대신 가혜가 술술술 이야기를 풀어댔다.
아... 하긴... 난 대학가서도 그랬으니...
[ 가혜 말이 맞아. 가혜는 정말 고등학교때 만났다는 진성이가 정말 괜찮았던 케이스고...
나는 잘못만나서 인생 종칠뻔한 케이스고... ]
미연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집 앞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그러기 시작했어.
전에는 아는척도 안 했었는데... 조금씩 그러다보니 얘기도 하고... 슈퍼도 같이 가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이 되더라고... ]
지금 27세가 되어도 트레이드 마크처럼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미연이는
머릿결도 예술이었지만 최고 강점은 피부였다.
그, 뽀얗고 하얀 피부에 살짜꿍 오른쪽 광대뼈에 있는 조그마한 점은 미연이를 미치도록
귀여워보이게 만들었다.
여자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서면 꺾어진 50이라고 종쳤다고 그러는데...
미연이의 얼굴, 피부는 한결같았다. 고등학교때 풋풋할 때는 거의 죽음이었으리라...
저, 청순하고 귀엽고 발랄해보이는 이미지는 뭐 그랑프리감이었겠지.
솔직히 미연이는 우리 셋 중에서는 얼굴이 제일 나았다.
몸매는 가혜가 제일 낫고...
그... 그럼 난 성격인가? 제...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