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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23 >

나비 |2005.02.18 13:46
조회 2,669 |추천 0

23


- 제게 키스를 하려 하더라구요.

“······.”


‘왜? 용준씨가 왜? 왜 혜림이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는 거지?’


지잉-.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기계음 같은 잡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건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던 소리였다. 머릿속에선 그 잡음이 사라지지 않고 긴 여운을 갖고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혜림이의 방금 전 ‘키스를 하려 했다’ 는 소리도 아주 먼 곳에서 들린 소리 같았다. 옆집의 부부 싸움하는 소리, 영화관 뒷좌석에서 연인끼리 소근 대는 소리처럼 나와 상관없는, 그리고 듣기 싫어도 들리는 그런 잡음들 말이다.



- 대리님?

“······.”

- 대리님! 괜찮으세요?

“어, 당연히 괜찮지. 혜림씨 오늘 고마웠어. 혜림씨 아니었다면 나쁜 사람인지 끝내 몰랐을 거야. 헤어진다해도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정말 고마워. 목소리가 힘들게 들리네. 오늘 푹 쉬어. 내일 보자구.”

- 대리님!

“사실 나 기분이 별루거든. 우리 내일 만나 얘기해.”

- 예. 알았어요. 대리님도 푹 쉬세요.


난 혜림이의 통화 후에 멍하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채로 나와 상관이 없었으면 좋을, 아직도 먼 곳에서 들려온 소리처럼 느껴지는 혜림의 이야기를 한 데 모으기 시작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아진 얘기는 그것이었다.

용준씨가 혜림이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


‘하려 했는데 하지 않았다는 거야? 아니면 순순히 응했다는 거야?’


머리는 그 뒷부분을 상상하고 있었다.


‘아니지. 그건 필요 없는 상상이야. 용준씨가 혜림이에게 키스를 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야. 다 끝났어. 용준씨는 바람둥이였고, 난 그 사실을 알게 된 거고. 이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내가 피해를 본 것은 없으니 됐어. 괜찮아. 난 괜찮은 거라고.’


쉴 새 없이 스스로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바람둥이 남자에게 보기 좋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했고, 나보다 젊고 싱싱한 여자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매력 없는 여자, 나이든 여자, 늙어가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 날 뭉개고 짓밟았다. 마음이 잘 삶아진 당근과 감자 위로 트럭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으스러진 것이었다.



***


다음 날 일어난 내 모습은 마치 젖은 채로 잠들어 베게에 형편없이 비벼진 파마머리 같았다. 여러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에 빛나보이던 얼굴은 빛을 잃어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기분도 구겨진 종이조각 같았지만 출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 도착을 해서도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회사에 어떻게 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혜림이는 내 기분을 아는 지 먼저 어제의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기집애.’


다시 예전처럼 혜림이가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는 다른 상냥함과 발랄함, 싱싱함을 가진 그녀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가까스로 멍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때 생각나는 사람은 염치없게도 윤섭씨였다.


‘전화를 걸어볼까? 아니야. 매몰차게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해?’


전화를 걸지 말자고 하면서도 윤섭씨라면 전화는 받아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또다시 두꺼운 흙을 뚫고 싹이 나오듯 아주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생각이 나면서는 이상하게 오후 근무할 분량의 일도 없었다. 급하게 처리를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그 것은 다른 편의 연락을 받고 추진할 일이었는데 잠시 후 연락을 주겠다는 업체는 연락이 주지 않고 있었다. 무료하게 시간만 흘러갔고, 자연스레 전화기만 바라보며 갈등을 하고 있었다.


‘꼭 사귀는 것은 아니더라도 친하게 지낼 수는 있잖아. 술 한 잔 산다고 하면서 화해를 하자고 하자. 그것을 거절할 사람은 아니겠지.’


용기를 내 윤섭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섭씨, 안녕하세요? 희에요.”

- 무슨 일이시죠?

“잘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 드렸어요.”

- 희씨가 궁금해 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저편의 남자는 너무 쌀쌀맞았다. 하긴 친절히 전화를 받는다면 이상한 거지.


“오늘 시간 어떠세요? 술 한잔 사드리고 싶은데.”

- 희씨가 용준이보다 못한 놈한테 술 사줄 필요가 있나요?

“그게 저 전 윤섭씨랑 친하게······”

- 문희씨. 제가 먼저 몇 말씀 드릴게요.

“아, 예. 하세요.”

- 전 제가 좋아했던 여자들과 친구로 지내는 그런 놈 아닙니다. 문희씨는 오늘 무지하게 심심해서 저 같은 놈이랑 시시껄렁 떠들고 싶어 하시는 건가 본데요. 그런 전화 사양하겠습니다. 이젠 희씨와 저 전화 통화를 할 이유도 없는 사이라구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 말은 내 마지막 자존심을 뚫고 나온 말이었다.


- 좋은 게 좋다는 식. 저는 질색이에요. 희씨랑 저랑 나이차도 3살이나 나요. 지금 친구 먹자는 겁니까? 우리 나이에 굳이 이런 식으로 친구 만들 필요도 없구요. 전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참 별루네요. 먼저 끊습니다.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말아주시길 바래요.

“저, 윤섭씨!”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전화는 무참히 끊겼다. 뚜뚜뚜뚜. 전화를 끊고는 눈길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혜림이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


‘웃겨. 진짜. 쟤는 왜 남 일에 관심이 저리 많은 거야.’


“혜림씨! 뭘 봐! 일이나 하지 않고.”


날카로운 내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시선을 받으며 난 사무실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이게 뭐야. 이게. 갑자기 윤섭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잖아. 좋아했던 여자랑 친구로 지내는 남자가 아니다. 말도 너무 멋지잖아. 난 몰라. 이젠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겠지. 난 바보였어. 정말, 바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거울 속의 나는 정말로 못나 보였다.


***


퇴근 시간.

회사를 나서는데 문 앞에서 지키고 서있는 용준씨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염치로 여기로 와? 지금 사과를 한다고 내가 받아줄 걸로 아는 거야? 내가 제일 만만한 상대다 이거야? 피하지 않겠어. 면전에서 망신을 주고 말거야.’


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용준씨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용준씨!”

“어, 문희씨.”

“절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눈을 팔고 계시군요. 뭐 늘 한 눈을 파는 게 생활이실 테니까. 무슨 일이세요?”

“저, 문희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저 죄송한 이야기에요. 어······.”

“됐어요.”


용준씨의 말을 잘랐다.


“미안하다는 둥 죄송하다는 둥 그런 얘기 듣지 않을 거예요. 당신 마음이 내게로 모아지고 있다고 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제 당신 행동은 뭐예요?”

“들으셨군요.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저 문희씨 죄송해요.”

“저기여! 죄송하다는 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요! 이젠 죄송하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내 마음 당신을 떠나있다고요. 그래요. 뭐. 솔직히 어제 사과를 했다면 받아줄 마음이 없지는 않았어요. 그걸 아세요! 당신은 구제불능 바람둥이야. 평생 당신 마음 모아지는 일 없을 거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 이 여자 저 여자 떠돌며 그렇게 살라고!”

“정말 죄송해요. 문희씨.”

“죄송하다는 말 듣지 않겠다고 했죠. 전 할 말 끝났으니 가겠어요.”


용준씨는 고개를 떨군 채 나의 비난을 다 듣고 있었다.


‘진심으로 반성을 하는 건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하네. 그래도 할 수 없어. 바람둥이 남자는 정말 구제불능이니까.’


그렇게 돌아서 가는데 용준씨가 내 팔을 잡았다.


“문희씨!”


‘날 잡겠다는 건가? 어림없는 소리.’


“문희씨 말 다 끝났으면 제 말 듣고 가세요.”

“할 말이 남았어요? 염치도 없어라.”

“예. 저 염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문희씨에게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해요. 제 진심을 알려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더군요. 저 혜림씨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사랑하게 되었어요.”


‘지금 뭐라는 거야? 이사람?’


“예?”

“문희씨에게는 정말 죄송하지만 혜림씨를 사랑하게 되었다고요. 그 사실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두 분이 모르시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야 혜림씨에게 연락을 할 면목이 생기니까요. 문희씨에게 말씀을 드려야 혜림씨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고.”

“혜림이? 혜림이요? 혜림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준씨 마음을 받아주겠대요?”

“아니요. 제가 싫지는 않지만 문희씨 때문에 올 수가 없더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말씀드리러 왔어요.”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한 사랑에 빠지셨어요. 그것도 단 하루만에. 바로 며칠 전에 마음을 모으고 어쩌고 한 여자한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밝히러 왔다는 거죠, 지금? 정말 볼 상 사납군요. 이렇게 염치가 없는 분이라는 건 생각도 못해봤네요.”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잖아요.”

“죄송하다고요? 그 말이면 다 끝이 나는 줄 아시나보죠?”

“사실 우리 사이에 별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별일? 별일이라면 스킨쉽, 섹스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문희씨!”

“왜 여자 입에서 섹스란 말이 나오니 이상해요? 책임질 일도 안했는데 열 올리는 여자를 보니 신기한 가요?”

“제 뜻은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야할 사람은 나였다. 염치도 없는 남자를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것은 나였는데 저 남자가 날 떠나고 있었다. 난 더 이상 뭉개질 자존심도 없었다. 이미 다 구겨지고 찢겨진 것이었다. 그렇게 난 버려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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