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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25 >

나비 |2005.02.21 22:39
조회 2,908 |추천 0

25


월요일 저녁 7시 참빛 교육관의 풍경은 긴장감이 감돌긴 했지만 적잖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참빛 교육관은 15명이 회의하기엔 안성맞춤인 작은 회의실이었다. 9명의 참가자와  심사위원으로 보이는 2명의 남자가 기다란 원형 탁자에 둘러 앉아 서로 어색해 하고 있었다.


똑똑.

7시 5분. 회의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인사부 박부장님이 대꾸했다.


“저기 여기가 회사 모델 면접장이 맞나요?”


문을 빼꼼이 열고 참가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말했다. 여기가 면접장이 맞는지는 나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맞아요. 이리 앉아요.”


박부장님의 말은 내 조그만 기대마저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처음에 이곳에 모인다는 것에 의아했지만 그냥 여기서 모여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여태껏 구경은 못했지만 이 회사에도 분명 간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회의실은 있을 것이고 그곳으로 이동을 하겠지, 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었다.


“10명 다 모였군. 이제 시작할까요?”

“네.”


열명의 참가자들이 다소곳하게 대답을 했다. 둘러보아도 그리 예쁜 여직원은 없는 듯 했다. 있다면 혜림이 정도. 나보다야 혜림이가 낫긴 하지. 혜림이와 나란히 심사를 받는 자리에 있고 보니 또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일등은 힘들겠다. 혜림이가 있으니까. 나라도 혜림이를 뽑아줄 테지.’


시작도 하기 전 그녀 앞에서 패배의식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미향씨!”

“네.”


홍보부 이실장님이 질문을 시작할 모양이었다.


“미향씨 키 이거 맞아요? 168?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맞는데요.”


미향이라는 여자는 거짓 기재를 했는지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음. 다 한 번 서 볼까요? 한 번 봅시다.”

“저, 이실장!”

“예?”

“그럴 필요 있나. 미인대회도 아닌데 키가 뭘 중요해?”

“그런가요?”


박부장님의 말에 이실장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 명의 심사위원들도 의견을 모으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말만 거창한 모델선발대회는 심사기준도 없음이 분명하다.

대회라는 것은 30분 만에 끝이 났다. 참 싱거운 대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실장 결과를 발표하지.”

“예.”


결과가 나오는 것도 빠르기도 하지. 이런 점은 좋았다.


“문희씨!”

“예?”

“일등입니다. 앞으로 회사를 위해 수고해 주세요. 그럼 이것으로 대회는 마치겠습니다.”


대회가 끝났다는 말과 내가 일등이 되었다는 말에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건 좀 섭섭하네. 박수라도 치고 끝내지.”


박부장님도 그렇게 느낀 모양이었다.


짝짝짝짝 짝짝짝.

짧은 박수 소리와 함께 대회는 막을 내렸다.


‘내가 일등이 된 거야? 제주도도 아니고 하와이 여행권을 타게 된 거?’


그렇다.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내가 일등이 된 것이었다. 어이없는 대회였지만 사실이 그랬다. 기분은 나쁘지는 않은 정도로 동료들끼리 간식내기 사다리에서 꽝! 그러니까 돈을 내지 않고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꽝’이 나온 것 보다는 좋았다. 뭐 간단히 끝나긴 했지만 어려움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몇 십분 전 상황을 한 번 보자면 이런 위기가 있었다.


“문희씨!”

“예.”

“나이가 제일 많네요.”


박부장님.


“예.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회사에 몸담은 시간이 제일 길다는 것이겠죠. 시간이 긴만큼 애사심도 다른 이보다 깊다는 것을 자신할 수 있습니다.”


난 대답을 해놓고 흡족하여 표정관리도 도통 되지 않았다. 그것을 교묘히 은근한 미소로 바꾸어 가렸다. 그리고 또 위기상황을 굳이 꼽자면 바로 혜림이의 응답 시간. 내가 혜림이의 참가 사실을 몰랐듯 그녀도 나의 출현에 당황해하며 눈치를 보았다.


“강혜림씨.”

“네?”

“여기 참가한 이유가 뭔가요?”


그녀 내 눈치를 살폈다.


“별 이유 없습니다. 상품이 탐이 났어요.”


저건 나에게 일등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 순간 기분은 나빴지만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내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던 거겠지. 저렇게 착한 얘를 내가 왜 진작 용서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혜림아. 너의 진심 이젠 알 것 같아.’


진심으로 혜림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


어이없었던 대회만큼이나 회사 모델이라는 것은 실속이 없었다. 며칠 전 홍보부로부터 호출이 와서 가보니 사보에 쓸 올해의 ‘우리 회사 모델’이란 기사를 위해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매달 뽑는 ‘근면한 우리 사원’처럼 형식적인 기사가 될 것이 뻔했다.


“저기요.”

“예”

“제가 할 일은 뭔가요? 그러니까 회사 모델이 되면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 거죠?”

“별 거 없어요. 사보에 들어갈 기사에 실린 사진을 찍을 때 잠시 도와주시면 되는 거예요.”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예를 들면 저번 호에 실렸던 ‘힘찬 출근길’이란 기사 보셨어요?”

“예.”


잘 기억나진 않았지만 우리 회사의 매출이 오르자 사원들은 힘을 내게 되었고 출근길의 모습도 예전보다 힘차 보인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거기 실린 사진 있잖아요. 그런 사진 찍을 때 도와주시면 되고요. 또 메이크업 기사가 나올 때도 잠깐 모델이 되어 주시면 되는 거죠.”

“아, 예.”


그런 일에 하와이 여행권이라면 짭짤한 보수라고 할 수 있지만 왠지 섭섭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좋지가 않다. 생각해 보면 할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도 같다. 우리 회사 제품을 광고할 모델은 연예인이나 하는 것이고, 회사 달력에도 아이들 사진이 들어가니 회사 모델이 나올 일도 없는 것이고. 여전히 허전함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냥 할 일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지 이틀 후 바빠지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건지 홍보부로부터 호출이 왔다. 김병권부장님의 호출이었다.


“문희씨?”

“예.”

“지금 퇴근 하는 건가?”

“아직 퇴근 시간은 조금 남았는데요.”

“퇴근 준비해서 일층으로 내려와요. 나랑 갈 때가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어딜 간다는 거야?’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여기서 묻는 다는 건 예의 바르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될 위험이 있으니까. 서둘러 일층으로 내려갔더니 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일찍 왔네. 자, 날 따라와요.”


부장님은 밖으로 나가더니 검은 에쿠스 승용차로 다가갔다.


“문희씨. 타.”


그리고는 앞좌석에 타 버리는 부장님. 영문을 몰라 하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거기엔 회장의 친인척이라는 ‘건달이사’란 별명의 이사님이 앉아있었다.


“얘야? 모델이?”


이사님이 부장님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일단 가지. 박기사! 출발해.”

“예.”


‘어디로, 어딜 간다는 거야?’


너무나 궁금했지만 분위기에 눌려 말은 나와 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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