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30. 정보 유출 사건
그 주 주말.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친구를 만났다. 연미는 나오고 싶어 했지만 여전히 바빴고 준지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갔음에도 나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멀리서부터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친구. 반가웠다.
“준지! 머리 했구나! 전보다 차분해 보인다, 야!”
“그거 나이 들어 보인다는 뜻이지?”
“예전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네 나이보다는 어려 보여.”
불과 두 달 만에 준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곱슬거리던 짧은 머리가 차분한 단발로 바뀐 탓도 있었지만 말투하며 표정까지 음······,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갑자기 몇 살은 더 먹어버린 듯 했다. 웃음기가 없는 듯 보이기도 했고 나이든 여자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헤, 헤어졌다고?”
“놀라긴. 내가 헤어진다고 말했었잖아.”
“그렇긴 해도 난 헤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냥 고민을 하는 정도인줄 알았지.”
“생각보다 쉽더라. 어떤 절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어. 그냥 연락안하고, 얼굴 안보고. 그게 헤어진 거잖아.”
“현성씨가 잡지도 않아?”
“처음엔 잡더라. 날 다시 만나고 싶으면 음악하지 말고 다시 회사 알아보고 취직하라고 했더니 그 뒤론 연락이 없어.”
순간 카페라떼를 시킨 것을 후회했다. 좀 더 시원한 걸 마실걸. 카페엔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저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준지도 현재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한 남자와 헤어진 이야기. 바로 이 카페에서 현성씨와 처음 만난 이야기를 했었는데.
준지의 이야기는 진지했지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처음 만나고 헤어진 이야기 모두 방금 이 자리에서 준지가 만들어 낸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카페 밖을 나선 적이 없는 것처럼 중간 시간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가 사실처럼 느껴졌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이 원점에 돌아온 것은 같으니까.
“헤어지고 조금은 힘들더니 지금은 예전이랑 똑같아. 남자가 바꿨을 뿐이지 데이트하고 자기 전에 잘 자란 인사를 하고 자는 것도 다를 게 없거든.”
준지도 원점으로 돌아온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슬프게 들렸다.
“그새 사람이 생긴 거야?”
“약대 나와서 제약 회사 다니는 사람. 현성이보다 외모는 못하지만 성격은 좋아.”
“몇 살인데?”
“서른두 살.”
“어머! 나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차라리 그게 나아. 어린 애들은 아직까지 현실 감각이 없잖아. 근데 이혼남이다.”
“이, 이혼? 네가 뭐가 부족하다구 이혼남을 만나? 물론 사람은 봐야 알겠지만 나이 많다는 것도 난 마음에 안 드는데.”
“에구. 네가 내 친구라 날 좋게 봐주는 거지. 조건으로 보면 내가 훨씬 처지지.”
“준지야, 그래두······.”
“이혼 그거 별 거니. 내가 현성이랑 사귀었다 헤어진 건 괜찮고 이혼은 안돼? 괜찮은 사람이야. 아직 완전히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호감을 못 느꼈으면 안 만났지.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준지의 말에 따라 애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보다는 준지가 더 아프겠지. 현성이를 사랑했던 만큼 더 아프겠지.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보아도 자꾸 측은해 보여서 난 점점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준지가 눈치라도 챌까 하고 있던 참에 때마침 준지의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 식사하셨어요? ·····. 어머나! 아니에요. 술 안 마셔요. 주류 회사에 다닌다고 했었죠. 언제 술 마신다고 했어요. 하하하. ······. 예. 일찍 들어가려고요. 아저씨 걱정시켜드리면 안되잖아요. ······. 예예. 집에 가서 제가 전화드릴게요.”
준지가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물었다.
“세상에! 남자친구랑 통화하는 거 맞니? 너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안하잖아. 남자가 그렇게 깍듯이 하래?”
“그렇진 않지. 그런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내가 그냥 하는 거야.”
“너, 너. 아니, 관두자. 네가 좋다는데·····.”
“꼭 그렇게 날 팔아야 하냐고 말하고 싶은 거지? 너 말고도 그런 말 하는 사람 많아. 너까지 안 해두 돼. 넌 그냥 축복 해주면 안 되겠니? 사람마다 바라는 거 틀린 거잖아. 녹색 옷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파란 색, 하늘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 사람은 다 틀리다. 그 사람이 되기 전엔 누구도 이래아 저래라 해선 안되는 거야. 넌 찬기씨가 좋은 거구 난 안정된 사람이 좋아. 키 작은 남자는 절대 싫다고 하는 여자도 있잖아. 그런 거지.”
“아니야. 준지야. 너더러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해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지 염려하는 거라고.”
“네가 바라는 조건은 뭐야?”
“응?”
“너도 아무나 좋지는 않을 거 아니야. 최소한의 조건은 있겠지.”
“글쎄. 내가 바라는 것?”
“어느 조건도 적당히 빠지지 않는 그런 남자야?”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바라는 남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게 그런 원칙이 있었던가. 아주 예전에 내 사랑의 원칙은 이거다, 라고 세운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것마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노트 귀퉁이에 적혀있었는지 몇 년 동안 삼분의 일도 못 채운 일기장에 적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것도 불투명한 기억이었다.
“준지야, 진짜 후회 안할 자신 있어?”
“후회라. 지금 후회되는 건 현성씨랑 헤어져서가 아니야. 지금 만나는 아저씨랑 잘못되어서 후회가 들 수고 있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후회가 있다면······, 현성이 오빠랑 만나는 동안 좀 더 잘해줄 걸 하는 거다. ······. 웃기지? 내가 헤어져놓고 잘 해줄 걸 하는 후회라니. 한 번 더 웃어줄걸, 상처 주는 말 하지 말걸, 자존심 상하는 말 하지 말걸. 지금 그걸 후회하고 있어.”
“후회될 수 있지.”
“음악 한다고 했을 때 오빠한테 그랬다. 니 노래 누가 좋아해줄 것 같냐고. 내가 듣기에도 잘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인기 참 많겠다. 몇 명이 듣기 좋다고 하니까 들떠서 가수한다고 설치는 거냐, 그러면서 오빠가 중학교 때 샀다는 기타를 다 부셔버렸다. ······. 도움은 못 될망정 아끼는 기타나 부시고. 그 기타가 돌아오나. 그 오빠 입장에선 난 안 만났으면 더 좋을 그런 애일 거야.”
“설마, 아닐 거야. 준지야.”
“그 때 화가 많이 났는지 일주일동안 연락이 없더라. 그 이후로 화해하긴 했지만. 홍주야, 너 찬기씨 사랑한다고 했지? 넌 나처럼 모질게 굴면서 상처 주는 말 하지 마. 사랑할 때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밀고 당기기? 튕기는 거? 그거 후회만 남는 일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감정 표현하고 좋은 말 아끼지 않으려고 해.”
“어쭈, 쑥맥 홍주가 이젠 좀 아나보네. 너도 사랑한다 이거니?”
“그래, 사랑한다. 쑥맥 홍주 사랑 중이다!”
남자 친구의 눈치를 보며 일찍 들어가겠다는 준지를 보냈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걸어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그녀를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현성씨에게 가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게 답은 없었다.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은 이제부터 준지가 살아가는 것에 달린 문제일지도 몰랐다. 나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마주 앉아 있던 두 여자가 제 갈 길을 향해 가고 있는 풍경이었다.
언니의 통제로 회사는 침체되어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여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활기참으로 메워진 사무실에 난데없이 큰 소리가 들린 것은 점심시간이 한시간 남은 오전이었다.
“찬영씨 어디에 있어!”
부장님의 목소리였다.
“외근 나가서 아직 출근 전인데요.”
“찬영씨 당장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사무직 직원은 다 퇴근하고 외근 나갈 직원들은 지금 당장 외근 나가라고 지시해.”
“사무실을 비우란 말입니까?”
“그래. 찬영씨 말고는 모두 사무실을 나가도록 조치해!”
부장님 뒤편에 홍미 언니가 냉정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언니, 무슨 일이야?”
“이번에 출시될 새 제품 병 디자인이 하양주류 쪽이랑 똑같아. 하양주류에서는 오늘 출시됐고 아마도 스파이가 정보를 또 넘긴 모양이야.”
이번 출시될 상품이라면 복분자술이었다. 병모양은 찬기씨가 했던 세모난 디자인. 흔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출시된 하양주류의 병이 세모 모양이라는 건 역시 정보가 또 넘겨졌다고 볼 수 있었다.
“언니, 그런데 왜? 찬기씨가 혐의가 있는 거야?”
“너도 이만 퇴근해.”
“언니, 나도 회사 경영에 일부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아버지랑 나랑 부장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그만 들어가.”
“찬, 찬기씨가 혐의가 있는 거냐고, 응?”
“확실한 건 아니니 다음에 얘기 하자.”
대답은 안 해주었지만 찬기씨를 내부 스파이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난 당장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어디야?”
[지금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 급하게 들어오라고 하셨다면서.]
“그래. 나도 들었어. 저, 그게. 하양주류에서 오늘 출시된 술 봤어?”
[그랬어?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야?]
“몰랐구나. 그 병 모양이 우리가 출신 준비 중인 제품이랑 같대. 오빠를 스파이로 생각하는 분위기야.”
[······. ]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걸까? 그의 침묵이 난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야. 아무 것도. 급하니까 일단 빨리 들어가 봐야겠네.]
“오빠! 주차장으로 올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퇴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회사 직원들 모두 그 사실에 동요하고 있었다. 매번 제품 정보가 유출되는 회사, 거기다가 인지도가 더 좋은 회사가 가로채니 계획적으로 노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고,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회사가 받을 타격이 염려 되었지만 그보다는 찬기씨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설마, 설마 그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적. 날 만난 것도 계획적이었다. 난 속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부족한 것이 많은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그의 태도는 진심이 아니라 회사 정보 유출을 위한 계획된 행동이 아니었을까. 지하로 내려갈수록 그 의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내 차에 올랐다가 그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가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었다.
‘언니가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할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찬기씨가 범인인 증거가 잡혔다는 이야기일 거야. 난, 난 어쩌면 좋지?’
짧은 시간안에 그렇게 많은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가 범인일 거라는 생각은 점점 굳어갔고, 그게 사실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되었다. 초조함에 발을 구르고 있자니 그의 차가 들어왔다. 차는 서서히 주차할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의 차로 달려갔다.
“오빠!”
“왜 내려와 있어? 사무실에서 그냥 기다리지.”
“회사 직원들 모두 퇴근시켰어. 굉장히 심각한 분위기야.”
“당연히 심각하겠지.”
“오빠는 당황도 안돼? 오빨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
“오빠! 혹시 오빠가 한 일 아니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라도 솔직히 말해줘. 만약에 사실이라고 해도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면 오빠랑은 헤어질 생각이 없어. 오빠를 사랑해. 헤어지고 싶지 않아. 덮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언니가 증거를 갖고 있겠지만 발뺌하면 방법이 없는 증거일지도 몰라.”
“정홍주! 나 아니라고 했지! 날 못 믿는 거야?”
“오, 오빠.”
“진짜 실망스럽다. 내가 스파이라고 해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네 마음 고마워.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믿음 아니니? 어떻게 넌 사랑한다는 사람을 믿지를 못해! 한 번도 믿어준 적이 없지.”
“난, 그게 아니라.”
“퇴근하라고 했다면서 집에 가 있어. 난 올라가 볼게.”
그를 의심했던 건 미안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화를 내면서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도 내 의심은 가실 줄 몰랐다. 어떤 것이 사실일지. 그의 말을 다 믿어도 되는 건지.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싸늘한 주차장이었다. 짧은 소매를 입은 팔에 서늘한 공기가 맞닿아 추운 것 같았다. 아니, 마음이 추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