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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섭씨는 냉동실에 오래 넣어 둔 바나나 같은 폼으로 서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당황스러우면서도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처럼 뻣뻣하게 서 있을 수 있었으면, 간지러운 춤을 멈추고 그처럼 차렷 자세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난 계속 관능적인 춤을 춰야 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눈치 빠른 김부장님은 흥을 깨지 않으려는 듯 내게 계속 춤을 추라는 손짓을 보냈고. 나는 계속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부장님은 윤섭씨도 재빨리 자리에 앉혀 버린 덕에 윤섭씨는 앉아서 편하게 나의 춤을 감상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돼? 못 추는 척 내숭을 떨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추는 춤 잘 춘다는 것을 보여주자. 뒷수습은 후에 생각하자고. 춤도 못 추냐는 얘기를 듣는 것 보다는 낫겠지.’
“오래된 연인 그게 아니던 중요한 사실은 넌 내게 더 끌리는 것
너의 그녀는 지금 거울을 보며 붉은색 립스틱 화장을 덧칠하고
높은 구두에 아파하고 있을 걸
나는 달라 그녀와 날 비교하진 말아줘” ♪ ♬
노래는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좀 더 섹시하게 해보자.’
비장의 몸 훑기를 하는 순간! 윤섭씨는 그만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 너무 셌나봐.’
그제서야 술이 깨고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시키지도 않은 춤을 춘다고 했을까? 점잖게 노래 한곡 하고 말 것을.’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은 윤섭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건달 이사님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으로 인사하는 것은 나 같은 일개 사원과는 다른 대접이었다.
“능력도 좋으신 분이 인물도 훤칠하십니다. 저는 연예인이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요. 요즘 최고로 능력 있는 PD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건달이사의 인사를 이은 권이사님의 인사는 또 영광스럽다는 것이었다. 내게도 영광스럽다 하더니 즐겨 쓰는 인사방식인 모양이었다.
“여기 여자 분은 우리 회사 모델인 문희 대리입니다. 문대리 인사드려.”
“회사 분이시군요? 몰랐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하시는 분인 줄 알았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분? 날 술집 여자로 봤다는 말이지? 오호, 복수의 날을 세운다? 그리고 날 처음 본다고? 나도 바라는 바다. 정말 너무 창피해.’
“안녕하세요? 능력 있는 PD님. 오늘은 야근을 안 하시나 봐요.”
“귀한 분들이 불러주셔서 일하다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데 방해를 했군요. 일단 앉읍시다. 그리고 김부장! 아가씨 한 명 더 불러오고.”
새로 들어온 아가씨는 꽤 미인이었다. 젊고 잘 생긴 윤섭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애교 가득한 몸짓으로 술을 따라주었다.
‘뭐야? 딴 애들은 안 그런데 쟤는 왜 저렇게 가깝게 앉는 건데?’
윤섭씨도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지 조금 떨어져 앉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분명 그는 내가 차 버린 남자였다. 하지만 그 옆에 다른 여자가 앉아있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연거푸 마신 술은 취기를 더해 세상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난 바람이라도 쐴 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서 비척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입구에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겁니까?”
뒤에서 크게 소리를 친 건 윤섭씨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멋있긴 멋있다. 능력도 좋으면서 털털하게 굴었던 점도 마음에 들고.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마다했을까?’
“바람 쐬고 있어요. 술이 좀 오르나봐요. 윗분들 계신데 실수를 하면 안 되잖나요.”
아쉬운 마음에 잃어버린 점수를 뒤 늦게라도 만회해 볼 생각으로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말했다.
“바람 쐬는 거 말고. 아까 그 춤 말입니다. 이렇게 추던 거.”
윤섭씨는 내 춤을 흉내 내며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그 폼이 너무 우스워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하하하. 윤섭씨는 정말 춤을 못 추시는 군요. 몸치에요?”
“몸치라뇨? 아까 문희씨 춤이 이랬단 말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기다란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렇게 춤을 추고 있었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자리에 굳어 꼼짝을 못하시더군요. 너무 예뻐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고요?”
“참 내. 제가 문희씨인 줄 알아보고 놀란 줄 압니까? 정말 기이한 풍경에 놀랐다는 겁니다. 처음엔 문희씨인 줄도 몰랐어요.”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빛은 분명 날 알아보고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여자였는데 너무 예뻐서 몸이 굳어 버렸다는 거 아니에요?”
“미치겠네. 술은 도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많이 취하셨군요.”
“지금 제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나도 왜 그에게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와는 다시 싸우고 싶지 않은 기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취기가 그에게 맘껏 애교를 부리게 시키고 있었다. 취하면 본심이 나온다는데 이것이 나의 본심일까?
내 걱정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 내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두운 가운데 조명이 얼굴에만 비쳐서 인지 그의 얼굴은 탐스러워 보였다.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사실 내 이상형은 윤섭씨 형 윤태씨보다는 윤섭씨에 가까웠다. 자신감 있어 보이는 곧고 긴 코. 그리고 냉정해보이기도 하는 입술. 어느 하나 단정하게 생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눈썹 한 올 한 올까지 꼭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까 그 춤 말입니다.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시키던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우스운 춤을 췄단 말이에요! 정말 술에 취했군요. 당장 집에 가세요.”
“제 마음대로 갈 수 있나요? 직장 상사들인데. 그것도 만나기도 힘든 높은 상사들이잖아요.”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직장생활의 비애랄까, 그런 것을 말하는 내 어조는 무거웠다.
“그런 말 말고 당장 집에 가요!”
“안가요! 안 갈 거예요. 윤섭씨가 뭔데 저보고 집에 가라 마라에요?”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해요?”
“지금 걱정하는 거 맞죠?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거 맞죠?”
그에게 맞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해준다면 지난 일을 사과하며 내게 기회를 줄 수 없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내려가 버렸다.
‘이게 아닌데.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보다 솔직히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나봐. 항상 난 상대방의 마음을 재고 행동하는 건가? 그가 마음을 열어 줘야 내 마음도 열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
최근 들어 그를 그리워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를 다시 보자 그를 내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계략을 짜고 다가갔었지. 그 벌을 받은 거야. 그래서 눈앞에 있던 윤섭씨를 놓쳐버린 거라고. 이젠 솔직해지자. 윤섭씨가 날 싫다고 하더라도 용기 내어 내 진심을 전달해 보는 거야.’
하지만 다시 룸에 들어갔을 때는 내 마음을 전달할 수는 없었다. 내게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 속에 있었으니까.
“PD님! 저희 회사 이번 광고 말입니다. 엑스트라 필요하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귀사의 광고건은 검토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우리 문대리 조그만 역할이라도 시켜보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글쎄요. 아직 촬영전이긴 하지만 확답은 드리기가 힘들군요.”
“그러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죠. 문대리도 화장 잘 해 놓으면 보기 좋은 얼굴 아닙니까?”
건달 이사님은 무슨 생각인지 날 적극 추천해 주고 있었다.
“음. 한 번 보죠.”
윤섭씨는 내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마치 배추를 사러 고르는 사람의 폼 새였다. 그 눈빛이 너무 민망해서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어허. 문대리! 보시고 있는데 고개를 숙이면 쓰나. 얼굴을 들어보라고.”
회사 일이니 협조를 안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음. 문대리님 피부가 많이 상했네요. 평소에 술 많이 드시나요?”
태연스럽게 묻는 윤섭씨.
“아니요. 술을 즐겨하지 않는데요.”
“그럼 이제라도 그만 드시죠. 이런 피부로는 힘들어요. 당분간 금주하시고 맛사지도 좀 받으세요.”
“거 문대리! 평소에 관리를 하지 그랬어?”
건달이사님까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
“예. 앞으로는 관리 하겠습니다.”
‘이게 뭐람. 내가피부 관리하는 것까지 윗 상사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말이야. 윤섭씨가 분명 일부러 트집을 잡는 거겠지. 으. 쌓인 게 많았나보군.’
“저 이사님들. 이제 자리를 옮기시죠.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어, 이PD님 아는 곳 있습니까? 아마도 물 좋은 곳이겠죠? 옮깁시다.”
윤섭씨 말을 권이사님이 받았다.
“여기 분들 다 가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권이사님! 여자는 빼고 가죠. 그래야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하하. 그럽시다. 이PD님 놀 줄 아시는구만. 난 또 꽉 막힌 분인 줄 알았더니. 그럼 일어날까요?”
‘날 집으로 보내려는 배려? 그럼 혹시 아까 피부 이야기도 술을 못 먹게 하려고? 아닌가? 정말 나 때문에 재미있게 못 논다는 뜻인가?’
그의 정확한 의중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이사님의 차에 올랐다. 이사님의 지시로 기사가 집에 데려다 준다는 것이었다. 거절하기도 힘들어 탄 차는 윤섭씨를 떠나 집으로 향했고, 반대로 내 마음은 윤섭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