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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러브송 < 29 >

나비 |2005.03.08 01:13
조회 3,134 |추천 0


29


도착한 곳은 다른 곳보다도 유난히 나무가 많았다. 처음 간판이 보인 곳에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한참 들어가고 나서야 이층으로 된 레스토랑이 보였던 것이다. 그 많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작은 전등이 촘촘히 켜진 트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차안에 흐르는 경쾌한 캐롤. 그리고 멋진 나무 길. 정말 꿈꿔온 크리스마스다운 분위기였다.


나의 크리스마스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시끌벅적한 도심에서 미친 듯 술을 기울이는 것이 전부였다.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흥청거릴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에 기뻤던 20대초의 한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늘 공허한 기분이었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택시를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첫차를 기다리며 밤을 새운 다음날 동이 터오를 때면 이번 크리스마스도 외롭지 않게 보내서 다행이야, 하며 안도의 한 숨을 쉬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헤어질 때는 갑자기 외로움이 취기를 깨고 뱃속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섞여 피부에 닿는 외부에서 안팎으로 협공해 오는 것이었다. 


정적마저 도는 나무 숲길에서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예전의 크리스마스가 괴상스런 산타나 우스꽝스러운 루돌프가 그려진 엽기시리즈의 크리스마스카드라면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산에 눈이 내리는 밤의 풍경이 그려진 카드라고나 해야 할까? 아무튼 정말 크리스마스다운 풍경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주차하고 들어선 레스토랑 내부도 분위기가 좋았다. 각종 트리가 가득한 실내 장식.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손님들의 들떠있는 표정도 마음에 들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예. 이윤섭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아, 예. 이 쪽으로 오시죠.”


윤섭씨는 날 위해 예약까지 해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힐끔 쳐다보자 계면쩍어 하더니 오늘 같은 날은 이런 곳이 더 쌉니다. 시내는 바가지에요, 하고 작게 말했다. 자리에 앉자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에피타이저 음식이 나왔다.


“어? 우리 주문 아직 안했잖아요.”

“문희씨. 오늘 여기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대요.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는 아니고 여기 레스토랑 자체 행사죠. 그래서 다 같은 코스 요리가 나올 거예요. 저녁 8시부터는 라이브 공연도 있고, 캐롤 부르기 대회도 있고요.”

“너무 재미있겠어요! 저 때문에 예약까지 하신 거예요? 윤섭씨, 고마워요.”

“저, 그게. 회사 동료가 예약해 놓은 건데 못 가게 됐다고 아까 가라고 한 겁니다. 예약은 무슨. 아니에요.”


‘회사 동료였다면서 예약자 이름이 이윤섭? 윤섭씨 의외로 쑥스러움을 많이 타잖아. 너무 귀엽다. 거짓말을 하느라 얼굴도 빨개진 것 같은데.’


평소 같았으면 핀잔이라도 주었겠지만 그의 성의가 고마워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추운 날씨에 에너지를 많이 뺏겨서 일까 난 음식의 맛보다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자체로 너무 만족스러워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문희씨, 음식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잘 드시네요.”

“아까부터 절 문대리라고 안 부르시네요. 이제 마음이 풀리셨어요?”

“어험. 마음 풀고 안 풀고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언제 화냈습니까?”

“그게 아니라 윤섭씨가 윤섭씨라고도 못 부르게 했잖아요.”

“밥 먹다 말고 시비 거는 겁니까? 그럼 체해요. 우리 밥이나 먹고 싸우죠.”

“밥 먹을 때 할 말은 아니지만요 한 가지만 더 말할게요. 윤섭씨! 우리 사겨볼래요?”

“······.”


윤섭씨는 놀랐는지 먹던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역시 식사 중에 드릴 말씀이 아니었나봐요. 대답은 식사 후에 듣도록 하죠.”

“저, 여기요! 물 좀 더 주세요!”


윤섭씨는 물 한컵을 순식간에 비워 내고는 물을 또 연거푸 마셨다.


“식사 후에 말씀해달라고 했더니 식사는 안 하시고 물만 드시기에요?”

“알겠습니다. 일단 밥부터 먹죠.”


식사 중인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싫다고 말하려는 건가? 뜸을 굉장히 들이네.’


그에게 밥 먹는 동안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 나도 그의 대답이 부정적인 대답일까 걱정이 되어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후식으로 케잌과 아이스크림, 커피가 나온 직후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도 그를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역시 노래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곡이 끝나고 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문희씨! 용준이는 어쩌시려고요?”

“저 용준씨 만나지 않아요.”

“왜요?”

“사실 용준씨에게 차였거든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대요.”

“예? 푸하하하하.”


그는 아주 즐거운 듯 큰 소리로 웃었다.


“꿩 대신 닭이군요. 그 때 문희씨가 절 더러 용준이보다 못하다고 했죠? 이젠 용준이가 곁에 없으니 제게 오시는 거군요.”

“윤섭씨! 아니에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요. 제 선택은 실수였다고요.”

“그럼 지금도 실수하시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와 함께 이곳으로 오기 위해 예약까지 해둔 사람이. 그전에 회사에 요청해서 날 불러낸 남자가 왜 지금 와서 거절의 뜻을 보이려는 걸까? 하지만 흥분해서는 안 된다. 비꼬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서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될 것임이 자명한 일이니까.


“지금 당장 대답을 하시라고 하진 않겠어요. 제가 윤섭씨를 선택하기 위해서 세 번을 만나보고 결정한다고 했었죠. 저도 그대로 하겠어요. 절 세 번만 만나세요. 그리고 결정해 주세요.”

“자신 있다 이겁니까?”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라도 윤섭씨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


이제 나의 고백은 끝난 셈이었다. 이마저 그가 싫다고 한다면 지금 들리는 제 캐롤은 슬픈 노래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 캐롤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예. 좋습니다. 세 번! 대신 만나는 장소와 시간은 제가 정하겠어요.”

“예?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기쁜 나머지 지나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말았다. 인사 후엔 조금 창피해졌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 뭐죠?”

“다시는 전과 같은 춤을 남 앞에서 추지 말 것. 알겠습니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셨군요. 예. 좋아요.”

“크리스마슨데 술이 빠져서는 안 되겠죠. 문희씨! 와인 한 잔 하겠어요.”

“좋아요.”


빛깔 좋게 익어 술이 된 와인처럼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예쁜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


첫 번째 데이트는 예전처럼 심야에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영화를 굳이 보려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일을 위해서 최신영화를 봐야한다는 설명이었다.


‘정말 힘들게도 산다.’


며칠 그의 일정을 살펴보았더니 제 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없었다. 밤 12시가 넘는 것은 일쑤고 회사에서 자는 날만 일주일의 반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새해가 밝기 이틀 전날 두 번째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늘 그렇듯 일상적인 회사 업무를 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피 한잔이 생각이 간절해져 자판기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여사원 두 명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너 회사 모델 된 애 알지?”


‘잠깐. 저건 내 얘긴가?’


그녀들에게 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자판기 뒤로 몸을 숨겼다.


“음. 알어. 키만 삐쩍 큰 애?”

“걔 장난 아니래더라. 원래는 안 그랬는데 모델 되고 나서 시건방이 하늘을 찌른대.”

“요즘 옷 입는 것도 재수 없더라. 기껏 회사 모델 되니까 지가 무슨 모델인 줄 안다며?”

“그거야 사람들 이목이 신경 쓰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난 이해되거든. 근데 그거 말고 더 쇼킹한 거 있어.”

“뭔데?”

“걔 자기 광고 출현시켜 달라고 광고회사 PD랑 2차 나갔대.”


‘뭐야? 2차?’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더 들어보기로 했다.


“뭐? 지가 연예인이냐? 몸 팔아 광고 따게. 술집 년이 따로 없다.”

“요즘 일반인이랑 연예인이랑 술집 나가는 얘들이랑 구분이 없다니까. 다들 문란해서 말이야. 우리 회사에서도 술집 나가는 애들 있을 지도 모르잖아.”

“하긴 그렇다. 워낙 많으니 말이야. 그 많은 술집마다 여자들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많기는 많은가 보더라.”

“홍보부 원대리가 그러는데 홍보부에 부르지도 않는데 수시로 와서 김부장한테 알랑방귀 뀌고 난리래. 이사들 모인데 가서도 술집 애들이랑 같이 춤추고 그랬다더라.”

“그럼 이사들 2차도 나갔을까?”

“당연하지. 그랬으니 그 얼굴에 광고 내보내 준다고 한 거 아니겠어?”

“야! 니들 뭐야?”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

“니들 내 얘기 한 거 맞지? 내가 뭐 어째? 2차를 나가? 니들이 봤어? 니들이 봤냐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넘어서 살점들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조심해도 말이 나오는 조직생활이라고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유언비언들. 이번엔 지독한 유언비어와 맞닥들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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