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나누어 가졌던 나를 기억하느냐...
너를 담아 세상을 품었던 내 눈을 기억하느냐.....
너를 그리워해 하루가 멈춘 듯 애태우던 내 심장을 기억하느냐...
손 내밀어 그 얼굴 한번 스쳐보지 못했던 내 서러움이....
쉴 새 없이 비워지든 술잔에 내려앉았던 것을 기억하느냐...
세상 속에 던져져 오직 너 하나를 원했던 사람을 기억하느냐...
마른 장작처럼 타 들어가던 나를 니가 살려내지 않았느냐...
그 푸른 미소 한 자락으로 내 심장을 뛰게 하지 않았느냐...
단 한번도 내 영혼의 안식을 허락지 않았던 하늘이...
너를 통해 나를 쉬게 허락해 주었다.
그런 너를 홀로 두고 가야했던 내 마지막을 니가 짐작하지 않기를 바랬다.
이미 영혼의 떨림까지 나누어 가진 니가 모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만은 가져가지 않기를 간절히 간청했다.
이미 한 심장으로 세상을 살아낸 사람들이기에...
부질없는 간청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끝까지 그리 바라고 염원했다.
니가 내 마지막 심장의 통곡소리를 듣지 못하기를....
니가 내 마지막 그리움을 가져가지 못하기를....
나를 보내고 긴 날을 견뎌낼 너를 나 또한 짐작하지 않으려 했다.
생으로 가슴을 저밀 그 그리움도 흘려 외면하려 했다.
니가 흘려낼 그 눈물들이 산을 허물어뜨릴 폭포수가 될 것을 ...
모른다 하고 떠나오려 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가져갔고.....
나 또한 너를 가져와 지금의 내 앞에 세웠다.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제 내게 의미가 되지 못한다.
내가 하늘을 움직여 지금을 가져왔다.
나 이외의 누구도 너를 범할 수 없다.
너에게 속한 모든 곳에 내 염원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조차도 범할 수 없는 경계다.
동준이 별장으로 가기 전에 한필중의 사무실에 들렀다. 종두의 빈자리를 꽤 차고앉은 태수가 갑작스러운 동준의 출현에 놀라 꺼내놓는 말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너 이제 아주 간이 부은 모양......”
태수의 입에서 그 말이 채 다 흘러나오기도 전에 동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책상을 발로 밀어부처 태수가 앉은 자세 그대로 책상과 함께 벽 쪽으로 밀려나 가슴이 압박당한 채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차피 시궁창에서 함께 뒹굴며 사는 인생이라 너 나한테 칼 갈면서 사는 것도 그냥 봐줄만 했다. 근데......이젠 안 되겠다. 너 따위 허접스러운 새끼 때문에 그 가슴 놀라게 하는 일 다시는 만들고 싶지 않다.”
- 내 여자 앞에서 니가 휘두른 칼이 나를 죽이기 전에 그 여자를 죽인다.
이제 부터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다.
동준이 발로 밀치고 있던 책상에 더욱 힘을 주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태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눈 속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 있는 동준의 눈빛에 그 심장이 서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평생을 그 존재 앞에 비굴함을 숨겨온 탓으로 끝까지 그 두려움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직도 그 어설픈 칼질로 나를 보낼수 있다고 생각하니. 처음부터 너한테는 그런 권한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일을 없다."
“헛소리 하지마 새끼야, 내가 살아있는 한은 니 목줄 따고 말테니...그전에 니가 죽여라..그럼, 죽여 봐 이 개새끼야.”
동준이 책상에서 발을 치우며 차가운 냉소를 흘려냈다.
“한사장....자기 몰래 커미션 받아가며 일한 너 알면.....뭐라 할까.”
동준의 말에 애써 붙잡고 있던 냉정함이 태수의 눈에서 삽시간에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입술이 작게 경련처럼 떨리고 있었다.
“무슨....개소리야...어디서 무슨 말을.....”
“니가 토해내지 않고 혼자 삼킨 그것들....니 목숨 값이다.”
동준이 이미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태수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면 한필중에게 흘리는 그 한번으로 자신을 치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쥐고도 자신이 휘두른 칼을 두 번이나 받아낸 그 존재의 무게감에 태수의 심장에 고여 있던 분노와 피로 물든 열등감들이 한줌 모래가루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력감-
자신의 어떤 것으로도 그 존재의 털끝하나 흔들 수 없는 무력감이 온 몸을 도는 피처럼 태수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자괴감에 그 심장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눌러 가슴을 도려내는 아픈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평생을 자신 앞에 우뚝 선 그 존재의 광채를 사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버텨낸 그 삶이 한순간 아무런 의미 없는 허무감으로 그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알고 있었냐?”
“니가 한사장 밑에 들어왔던 그때부터...”
“씨팔새끼...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왜....가지고 놀고 싶었냐? 평생 니 뒤나 쫒다 개 같이 죽어 나자빠질 마지막을 알아 한방에 보낼 날만 기다리고 있었냐? 씨팔...좃같은 새끼..”
“더 이상 나 보지 마라. 이만큼 했으면 니 인생 많이 허비하고 살았다. 니 말대로 더럽게 얽힌 악연이다. 그러니 이제 보는 일 끝내자.”
“무슨 뜻이냐?”
“한사장.....절반 이상은 알고 있다. 이미 눈치 채기 시작했으니 너 어떻게 사용할지 계획중 일거다. 떠나라. 다시는 이곳도.....나도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결국 완전한 패자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태수의 가슴에서 그 불씨를 연명하고 있던 한줄기 용암마저 빛을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두려운 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듣고는 평생 자신을 괴롭히며 용서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존재의 울림을 듣고 싶었다.
“왜,...도대체 왜 지금까지 나를 봐주고 있었던 거냐? 너한테는 치워버릴 가치조차 없는 그런 인간밖에 되지 못했냐? 지금까지 갈아댔던 내 칼이 너한테는 그렇게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벼운 것이었냐? 그래서 놀이삼아 그렇게 두고 봐줄 만큼 하찮고 재미있었냐?”
동준이 피식 웃으며 자괴감을 들어내는 태수를 응시했다.
“그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이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내 존재 확인시키는 니가 가끔은 나쁘지 않을 만큼 긴장감도 됐었다.”
“개새끼!”
“떠나라. 내가 가지고 있는 파일 열게 되면 니가 했던 거 전부다 들어나게 된다. 시간...얼마 없다.”
동준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나가며 작게 흘려 말했다. 오랜 세월을 자신으로 굴욕감속에 세월을 버렸던 태수에 대한 연민이 묻어 있었다.
“살아남아라. 그리고...다시는 보지 말자.”
문을 열고나서는 동준의 등에 태수의 독백 같은 한마디가 스쳤다. 어렴풋하게 자신의 귓전을 맴돌고 지나는 그 한마디에 동준의 입가이 작은 미소를 걸리다 사라졌다.
“......그래, 너 잘났다....나쁜 새끼..”
어린 시절 한껏 미운 눈을 하고서도 그 경계마저 우정이라는 선상에 놓여있던 그때 늘 동준에게 습관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깊은 존재감에 끝도 없이 좌절을 느끼면서도 그 곁에 서고자 했던 한 남자의 서러움이 고이고 있었다.
- 나쁜 새끼...
재수 없는 새끼...
너도 살아남아라..
니가 없으면 이를 갈아댈 내 목표가 사라진다.
평생토록 내가 미워할 수 있게 꼭 살아남아서 내 인생 무료하게 하지 마라.
동준이 떠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집안일을 하던 진서가 불현 듯 새벽의 가슴 뭉클한 사랑을 떠올려 마루에 웅크리고 앉았다. 더위를 가라앉힌 호수의 바람이 그 아련한 가슴 떨림을 한층 더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달빛아래 서 있던 그 알몸의 나신이 자신의 몸처럼 낯설지 않아 야릇하면서도 한없이 편안해 눈물이 났었다. 늘 그랬다. 그로 인해 가져지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두 가지 빛을 함께 뿜어내고 있었다.
몸이 다 자라버린 어린 남자처럼 그 속에 아이의 맑은 영혼이 있어 세상의 허물을 다 밀어낼 듯 사랑만을 쏟아냈다. 그러다 또 다시 세상 무게가 모두 옮겨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렸다. 그를 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담아내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 존재 속에 너무도 큰 부딪힘이 있어 사랑으로 가슴 벅찬 그 속에도 늘 다른 경계가 날을 세우고 있었다.
습관처럼 무릎을 감싸 앉은 채 그 위에 얼굴을 파묻은 진서의 눈 속으로 그 새벽 자신을 담아 보던 동준이 영사되고 있었다. 하나의 몸으로 깊게 진동하며 사랑을 나누던 모든 순간에 눈을 열어 자신을 보던 그 몸짓과 시선을 진서의 온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코끝으로 이마 선을 따라 내리며 입술과 턱을 부벼대던 그 부드러운 몸짓이 불어드는 바람과 함께 진서를 휘감아 한순간 온몸이 소리 없이 울려댔다. 깊을 잠을 자지 못하는 자신의 등을 밤새 썰어주며 그 시선 속에 세상에 없는 사랑을 전하던 동준을 느껴 또 다시 진서의 눈 속에 젖은 그리움이 흘러내렸다.
함께 있어 마주보고 있어도 그립고 아까운 사람이었다. 눈을 감아도 심장이 그를 보아 하나처럼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그의 말대로 오직 그 사랑만을 믿어 다른 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수없이 고개를 쳐드는 두려운 그림자를 자신을 놓지 않는다는 그 하나의 믿음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한필중이 동준을 기다리며 정원을 서성이는 지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처럼 널브러져 이틀째 방을 나오지 않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차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라는 것에 또 한번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동준의 차를 보자 들고 있던 호수를 던진 채 달려가는 지윤의 발걸음이 가볍고 들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는 동준의 엷은 하늘빛 셔츠가 그 기운을 선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침울하고 무겁게 내려 깔렸던 예전의 무게가 더 이상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한필중이 그것으로 동준이 하나의 결론을 들고 왔었을 짐작하고 있었다.
지윤이 이상하리만치 달라져 있는 동준의 느낌에 짐짓 놀라 다가서든 발걸음을 멈추고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몸은...좀 어떠니?”
“괜찮아요. 잘 지냈어요.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동준의 변화에 지윤이 의아해 하며 대답을 하면서도 자꾸 그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으....응....별일 아냐....넌 걱정했던 것 보다 좋아 보이는 구나.”
“나중에 얘기해요. 사장님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자신에게 한결 부드럽고 편해진 얼굴로 말을 건네는 동준의 태도에 진서의 가슴이 알 수 없이 흔들렸다. 늘 바라고 꿈꾸어 오던 일이였는데도 정작 동준에게서 그것을 보자 반가움보다는 서늘함이 먼저 밀려오고 있었다. 동준이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지윤이 그 궁금증을 물었다.
“동준아! 무슨 일이야...너?”
동준이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내가 당신 많이 괴롭혔잖아요. 이제 안 그럴 여구요. 일 끝나고 함께 나가요.”
동준을 만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데워지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그 웃음이 왠지 알 수 없이 낯설었다. 한필중이 들어서는 동준을 보며 아무 일 없는 듯 웃어보였다. 동준 또한 늘 그렇듯 작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무게가 없는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각자의 심중에 무엇이 담겼는지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서로를 가늠하고 있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네. 세상사는 거 가벼운 쪽으로 눈을 돌리니 생각보다 쉽게 답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한필중이 동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달라져 있는 그 기운이 진정으로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만들고 있는 또 다른 연막인지 알기 위해 그를 읽으려 애쓰고 있었다.
“파일들은......”
“동준이 소파 옆에 내려놓았던 서류가방을 테이블위로 올려놓으며 힘이 실린 목소리를 내놓았다.
“원본 아닙니다.”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종두 형이 갚고 있는 선생님 부채 그만하게 하십시오.”
“그건 합법적으로 내가 받을 수 있는 돈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보증을 선 것도 나와는 아무런 연관 없이 생겨난 일이고 난 다만 그 부채를 인수한 것뿐이다.”
동준이 대학 시절 그 일로 종두와 함께 한필중의 사설에 얽혀 들었다. 김조환이 학교를 퇴직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받았던 은행융자와 처음부터 다른 생각으로 김조환을 끌어들여 담보와 보증을 서게 한 동료에게 사기를 당해 그 모든 것들을 떠안았다. 김조환의 구속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동준을 보았던 한필중이 자신에게 넘어온 그것들을 미끼로 종두와 동준을 함께 낚았다.
“지금까지 종두 형이 한 일로도 충분히 그 대가는 치러졌다 생각합니다.”
“또 뭐냐....니가 제시할 조건 전부 말해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저 이외의 제게 연관된 모든 것에서 손 때 주십시오. 어떤 일로든 누구에게든 사장님 그림자 보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떠나겠다는 말이냐?”
“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의 모든 것들을 잊고 싶습니다.”
한필중이 담배를 피워 물며 몸을 일으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지윤이 초조한 듯 정원 앞을 서성이며 두 사람이 낼 결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필중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 떠나겠다는 동준의 말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 더욱 깊은 허무감에 빠지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니?”
“어차피 처음부터 잡초로 타고난 삶이라면 다른 곳에 심는다 해도 열매가 열리지는 않을겁니다. 이제 그걸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이상하구나. 뜨겁게 반항하며 나를 거부하려 하던 니 눈빛이 더 그리운걸 보니 나도 이제 늙어가는 모양이다.”
한필중이 문득 그 여자아이의 눈빛을 떠 올려 동준에게 물었다. 분명 하나처럼 닮아있던 그 존재를 쉽게 털어내지 못할 걸 본능으로 알았었다.
“그 아이 너한테 여자가 아니라고 했던가! 쉽게 놓을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짧은 시간에 정리가 된 모양이군.”
“......잠시....다른 욕심 내본 걸로 충분합니다. 여자하나에 목숨 걸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한필중이 동준의 얼굴에 잠시 흐린 빛이 머물다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니가 약속을 지킨다면 내가 니 조건을 굳이 뒤엎을 리 없다.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원본을 가져오지 않았니?”
“제가 떠난다 해도 여전히 남은 사람들에겐 안전한 보류가 필요합니다. 때가 되면 종두 형이 가져다 드릴 겁니다.”
“나를 믿지 못해서니?”
“이곳에서 믿음은 늘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도박 같은 것입니다. 저를 걸고 하는 도박은 그 대가만큼 제가 치르면 되지만 더 이상 제가 있을 곳이 아니니 필요한 모든 안전선을 확보해두고 싶습니다.”
“술 한 잔 하겠니?”
“아닙니다.....함께 나가서 저녁 먹을까 합니다.”
“...그래, 그래라. 니 사고소식 듣고 재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데리고 나가서 바람도 좀 쇄고 쉬게 해 줘라......이제 내가 이런 거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서류는 내일 바로 처리하겠다. 니 비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일주일 정도면 모두 정리하고 나갈 수 있을 거다.”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한필중이 정원으로 나가 지윤을 마주한 동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고개를 쳐들어 그 상황들을 꽤 맞춰보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라 여겼던 일이 너무도 쉽게 방향을 털어버린 동준으로 인해 한순간에 풀리고 있었다. 그 낯선 분위기에 석연치 않은 느낌이 묻어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무심함을 버린 동준에게서 사람의 향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윤이 운전을 하고 있는 동준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다 사이드를 잡은 동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다 놓았다.
“고마워. 내가 잘할게.”
“......뭐 먹을래요. 맛있는 거 먹어요.”
지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듯 따스하게 내놓는 동준의 말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이상해요?”
“그래, 딴사람 같아서 낯설어. 너무 좋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이상하게도 다른 두려움이 생기네.”
“딴생각 하지 말아요. 오늘은 아무생각 말고 좋은 것만 해요.”
동준이 계속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윤을 보지 않고 있었다. 부드럽게 내놓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 얼굴이 조금씩 경직되고 있었다.
“저녁 먹고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당신 춤추는 거 좋아하잖아. 술 한 잔 하고 거기 갈래요.”
한적한 야외로 빠져나온 두 사람이 산속 가든에 차를 세웠다. 동준이 차에서 내려 지윤의 차문을 열어주자 내려서던 지윤이 동준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벼운 키스를 했다. 잠시 그대로 멈춰서 지윤의 포옹을 받아내다 작게 흘려 말했다.
“미안해요.”
지윤이 팔을 풀며 동준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뭐가?”
“내가.....당신 많이 힘들게 했던 거......다 잊어요.”
“앞으로 함께 살면서 나한테 다 갚아주면 되잖아.”
“.........”
지윤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소한 말조차 흘리지 않고 답을 하고 있는 동준을 보는 그 눈이 기쁨으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음 같은 심장으로 자신을 보아온 동준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 찬 서리가 걷혀나고 봄볕 같은 따스함이 머물러 있어 앞으로의 날들을 꿈꾸게 하고 있었다.
동준이 지윤의 그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길고 깊은 한숨이 그 가슴을 휘돌아 호흡 속에 부서졌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조일만큼 보고 싶었다. 자꾸 생각이 말라가는 머릿속이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흔들의자에 몸을 묻고 진서를 무릎에 앉혀 가슴에 품었던 그 체온이 여전히 온몸에 남아 있어 초가을의 날씨에도 한기가 들었다. 함께 한 공간속에서 영혼을 나누어가진 듯 같은 몸과 가슴으로 느끼고 가졌던 그 모든 것들이 동준을 잠식하고 있었다. 심장을 갈라버릴 듯 한 그리움이 몸을 마비시켜 들어오는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동준이 반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놓자 지윤의 눈빛이 금방 좀 전의 설레임에서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왜, 그만 먹니. 입맛이 없어?”
“점심을 늦게 먹었어요. 괜찮아요. 어서 먹어요.”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니가 정말 나한테 온다는 거. 이제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
동준이 아무 말 없이 연민어린 눈으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 그 존재의 부담스러움만 생각했을 뿐 그 마음을 보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슴에 뜨거운 심장을 품게 된 지금에서야 지윤의 아픔 또한 살아있는 것임을 알아가고 있었다. 동준이 담배를 피워 물자 주머니에서 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정재였다. 목소리 속에 초조함이 묻어있었다.
“형, 어디야?”
“나중에 통화하자. 지금 식사중이다.”
“형, 다시 생각해. 너무 위험해. 무모한 짓이야. 한사장 아버지 하고도 관계돼 있어. 우리 쪽에서 찾아보면 한사장 약점 찾아서 견제할 사람 있을지도 몰라. 다른 방법 찾아보자.”
동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짓으로 지윤에게 양해를 구했다. 식당 밖으로 나와 선 그 얼굴이 일순간 굳어지며 정재의 말을 한번에 일축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한사장 그렇게 만만히 생각할 사람 아냐. 너 내말 잘 들어. 아무것도....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부탁한 일 그것만 생각해.”
정재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전해졌다.
“형 잘못되면.....내가 어떻게 진서를 봐. 끝까지 말리지 못한 거...그렇게 둔거...진서가 알면.....”
“걱정하지 마라. 꼭 진서 곁에 돌아간다. 그러니까 너....다른 생각하지 마라.”
“형....제발...”
“끊자......정제야!”
동준이 정재를 부르고 잠시 말없이 있었다.
“고맙다.”
동준이 지윤을 데리고 곧바로 호텔 바로 갔다.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지윤이 전과 달리 어떤 것도 선뜻 캐묻지 못하고 동준의 기분만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온 그 행운이 날아갈까 두려워 동준의 웃음만 붙잡은 채 생겨나는 불안감을 누르고 있었다. 동준이 연거푸 두 잔을 비우고 잔을 들지 않고 있는 지윤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신도 한 잔해요.”
지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동준의 마음을 물었다.
“...아직....마음을 다 결정하지 못했니?“
“그렇게 보여요.”
“모르겠어. 갑자기 변한 지금 니 모습이 전부인지 두렵다.”
“한번도 당신 알려고 한적 없는데......나 때문에 힘들었던 거 미안해요.”
“왜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하니. 지금처럼 이렇게 나 봐주면 그런 것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
동준이 술잔을 비우면서도 취하지 않는 정신이 불편했다. 차라리 그 밤을 통째 술 속에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흐릿한 정신 속으로 그 하나가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와 생각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술로 반쯤 정신을 놓은 동준이 호텔방까지 부축돼 올라가 침대에 쓰러졌다. 동준의 셔츠를 벗겨내 그 몸을 애무하던 지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굳어있는 동준의 몸에 한순간 한기를 느꼈다.
“이러면서....그 마음을 어떻게 바꿨니?”
동준이 몸을 일으켜 지윤을 안았다. 벽시계를 응시한 그 눈 속에 술기운을 밀어내는 차가운 이성이 번뜩였다.
“아니에요. 술이 좀 과해서 그래요.”
지윤을 안은 팔에 힘을 준 동준이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 이제부터 나는 이기적인 한 인간이 되고 싶다.
내 것만을 위해 세상을 뒤집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허망하게 내가 너를 보냈고..
니가 나를 떠났다.
한번이면 족하다.
그 피 끓는 고통은 한번이면 족하다.
이제 그냥 물러나지는 않는다.
세상에 눈감고 귀를 닫을 것이다.
오직 내가 가질 너만을 생각할 것이다.
너를 향한 내 날개가 불속에서 뜨겁게 타들어 간다 해도...
마지막까지 너를 품어 욕심내볼 것이다.
그 뜨거운 의지로 세상을 무릎 꿇게 해볼 것이다.
아무도 나를 욕할 수 없다.
하늘이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니가 나를 품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