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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남자 유키*** <#28. 가을의 키스>

길스진 |2005.03.25 01:48
조회 5,181 |추천 0

#28

<<가을의 키스>>

 

 

 

"진짜예요?  진짜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랑 결혼하시는 거예요?"

 

지나는 침대에 걸터앉고는 천진난만하게 웃고있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사실 그녀는 유키와의 결혼을 아이에게 어떻게 털어놓을까 너무나도 고민되었다.

 

과연 새엄마로 자신을 인정해줄지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모두 그녀만의 쓸데없는 고민에 지나지 않았다.

 

레이는 그녀의 목을 끌어당기며 그녀에게 안겨왔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뽀뽀하며 좋아라했다.

 

"정말... 내가 새엄마로 좋은 거니?"

 

"그럼요!  난 그전부터 아버지하고 선생님이 결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이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지나는 아이를 포근히 감싸안으며 아이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한참동안 레이는 자지 않고 그녀와 유키와의 결혼에 대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전날 밤, 어느 시골교회에서 유키와 나누었던 얘기의 일부분을 말해주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결혼하자는 얘기를 들었고 그녀는 승락했다고.

 

그리고 손에 끼워진 반지를 들어보이며 그전부터 그가 결혼을 하고싶어했다고 아이에게 슬쩍 말해주었다.

 

그녀가 레이 방에서 나오자, 사토 유키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한동안 녀석한테 시달려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지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기 전 차 한잔 하겠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주방으로 갔다.

 

"당신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소?"

 

지나는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다가 놀라 눈을 들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전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키는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내일 오전 중으로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빠른 시일내에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뵙고 결혼날짜를 정해야했다.

 

"일본에는..."

 

"그건 신경쓰지 마시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지나는 과연 그의 부모님이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해줬을지 궁금했다.

 

분명히 그의 어머니, 카오리는 그녀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으니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했다.

 

"저기... 일본의 어머님 말씀은..."

 

유키의 딱딱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날아왔다.

 

"당신과 결혼시킬...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그 여자가 바로 당신이오."

 

"네?"

 

놀란 그녀와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덤덤하게 행동했다.  편안하게 차를 마시고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난 처음부터 내 어머니와 무슨 일을 꾸미고있었는지 몰랐소.  알기 전부터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어머니와 생각이 다르다고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소.  결혼은 내가 하는 거니까.  당신하고 말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아래층 정리하고 2층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무슨 말이냐며 그녀가 그를 쳐다봤다.  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싱크대에 갖다놓고 돌아섰다.

 

"2층 내방으로..."

 

"아, 아뇨."

 

유키의 숱 많은 눈썹이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그는 거절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는 남자였다.

 

"결혼전까지 그대로 있겠어요.  그,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키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유심히 쳐다봤다.  그녀가 이미 그에게 순결을 주었고 그리고 아기까지 가지긴 했지만 더이상 혼전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좋소.  그렇게 하시오.  대신 전에 쓰던 방으로 옮기도록 해요.  왜냐면 가정부를 새로 들일 거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당신은 이제 더이상 이집 가정부가 아니오.  알겠소?  나와 결혼할 여자이지, 가정부가 아니란 말이오.  내 아내 될 여자가 넓은 집안을 청소나 하고있는 꼴 보기싫소."

 

"그전에는... 뭐, 그런 꼴이 보기좋았나보죠?  새삼스럽게..."

 

"그 혀 함부로 놀리면 후회한다고 했을 텐데?"

 

"..."

 

유키는 걸음을 옮겨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당신이 혼자서 이 집을 관리할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소.  화가 날 정도로..."

 

그는 그녀를 천천히 자신의 품으로 당기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숙이려하자, 그녀가 그를 피했다.

 

"그새 나에 대산 사랑이 식기라도 했나?"

 

약간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그녀는 기분나쁘지 않았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오늘만 내방에서 자는 게 어떻겠소?"

 

"네?  아, 아뇨.  어제 같이..."

 

"어제는 여기가 아니라 바깥이었지."

 

"마, 마찬가지죠."

 

"하지만 난 지금 당신을 원해."

 

지나는 그가 조금씩 끌어당기는 것을 막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를 밀었다.

 

"아뇨.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흠...  고집 한번 세군.  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고집이 센 거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들어요."

 

지나는 그가 방심할 때 얼른 뒤로 물러나 자신의 찻잔을 치웠다.

 

"내일 전화드려요.  난 이번 주 내로 가길 원하니까."

 

"알았어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나는 지갑을 꺼내 그 속에 오랫동안 넣어둔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그녀.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는 가족 사진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최근들어 집에 전화를 자주 하지 않아 지금쯤 부모님께서 매우 서운해하시고 적적해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귀었던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면 많이 놀라실 것이다.  그분들은 그녀가 그 남자와 잘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가 유부남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받으실 것 같아 걱정이었다.  아마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하실지도 모른다.  특히 아버지는...

 

지나는 사진을 지갑 사이에 다시 끼워넣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있다가 부모님한테 가지."

 

"네?"

 

지나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 유키가 갑자기 내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무슨..."

 

"당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하, 하지만... 전, 아직..."

 

"전화 안 드렸소?"

 

지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께 유키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라 내내 한숨만 내쉬고 방에서 나왔다.

 

사귀던 남자에게 차인 것도 분하실 텐데 그분들에게 결혼할 남자가 유부남이란 것을 알면 극도로 분노를 터뜨리실 게 분명했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레이는 기사한테 얘기해놓겠소."

 

"자, 잠깐만요."

 

"뭐요?"

 

"아, 저기..."

 

그가 노려보듯이 쳐다보는 바람에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만 다물어버렸다.

 

"아뇨... 아무것도..."

 

유키의 전화를 받은 기사가 도착했다.  기사는 자신 없는 동안에 아들녀석을 잘 돌볼 것이다.

 

"준비 다 됐소?"

 

"네.  조금 전에 집에 전화드렸어요.  오늘 그리로 간다고요."

 

"잘했소.  갑시다."

 

두 사람은 대문 앞에 세워져있는 차에 올랐다.  이제 사토 유키는 외출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렇게 밝은 대낮에.

 

"왜?  내 얼굴 보고 부모님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할까봐 걱정되오?"

 

기어를 바꾸며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유부남이라서?  그러고보니 완전히 일방적으로 당신만 손해군, 그래.  유부남에 얼굴하고 몸뚱아리에 엄청난 상처.  그리고 새아버지란 사람이 일본인인데다 성격까지 마음에 안 드실 테니까."

 

"..."

 

"하지만 장점도 하나 있지 않나?"

 

유키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옆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다.

 

"돈은 많지."

 

지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의 쓴 미소와 약간 치켜져 올라간 입 꼬리 뒤에 보이는 그의 심정이 언뜻 보였다.  애써 그런 농담같은 말로 푸념하고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지나는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설마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는 이유가 돈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으음...  나의 거대한 능력때문 아닌가?"

 

"네?  거, 거대한 느, 능력이라니..."

 

유키의 미소가 무얼 뜻하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고개를 획 돌렸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해.  내가 생각해도..."

 

"유키씨!"

 

그녀가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날카롭게 그를 불렀다.

 

"흠... 당신 무슨 생각하는 거지?  난 내 직업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건데..."

 

"뭐, 뭐라고요?"

 

유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빨랗게 익은 그녀의 볼살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순진한 그녀를 놀려먹는 것도 재미가 솔솔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짖궂게 말했다.

 

"당신도 제법 응큼한 생각을 할 줄 아는군?"

 

"유키씨!  그만 해요!  그만 날 놀려요!"

 

그녀가 제법 화를 내는 바람에 유키는 그녀에게 음악CD를 골라보라고 했다.

 

쀼루퉁한 얼굴로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려다가 이내 CD를 몇 장 고르더니 그에게 하나 내밀었다.

 

"발라드를 좋아하오?"

 

"네."

 

유키는 그녀가 고른 CD를 넣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국내 발라드를 휘어잡고 있는 가수들을 모아놓은 CD였다.

 

그는 이런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클래식이나 재즈를 좋아했다.  발라드는 왠지 궁상맞아보여 기사에게도 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지나처럼 이런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난 당신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군.  당신 이름과 나이 그리고 생일밖에 모르지.  가족관계가 어떻게 된다고 했소?  여동생 하나 있다고 했던가?"

 

"아뇨.  남동생이예요.  올 해 법대 1학년이예요."

 

"군대는?"

 

"아직요.  저번에 통화할 때보니까 내년에 가야한다고 하더라고요.  녀석이 신체 하나는 참 튼튼하거든요."

 

"당신 부모님께서 안타까워하시겠군."

 

"안타까워하시는 게 아니란 돈있으면 군대를 못 하게 하고싶으실 거예요."

 

유키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 말은 부모님이 아들을 엄청나게 아끼신다는 뜻인가?

 

"두 분이 동생을 많이 아끼시거든요."

 

그렇다면 딸이 누구와 결혼을 해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겠군, 그래.  그는 그녀의 힘없이 중얼거리는 말 속에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은 어떻게 다녔소?  부모님이 보내주신 거요?"

 

"누구?  저요?"

 

"음."

 

"저 보기보다 똑똑해요.  대학 때 장학생이었어요.  불론 아르바이트하며 책값을 벌어야했지만..."

 

"그럼 집에서 돈을 안 받았다는 거요?  일절?"

 

그의 미간이 상당히 구겨졌다.  그는 그녀의 집안사정을 얘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동생 학비는 보태실 거 아니오?"

 

"네... 아들이니까요.  그리고 저희 집 그렇게 넉넉치 않아요."

 

"그러니까 가정형편도 안 좋은데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이거로군?"

 

지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그녀가 대학에 가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딸년까지 대학보낼 수 없다고 했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슨 대학이냐, 고등학교까지 보내준 것만도 어디냐며 화를 내셨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공부를 열심히 했고 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도 거의 장학생으로 다녔어요.  이 정도면... 제 머리 똑똑하죠?"

 

그녀의 마지막 말에 유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머리 돌머리라고 한 건 취소하겠소.  부모님 가게는 어떤 거요?"

 

"작은 식당이예요.  아주 작은..."

 

"그걸로 생활하시는 거요?  동생 학비에?"

 

"지금까지는 동생 학비를 제가 보태줬어요."

 

"뭐?"

 

유키는 정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차선을 2차선으로 바꾸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지나는 그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는 얘기를 하기 싫었다.

 

생활비야 어머니가 일을 나가서 버틸 수 있었지만 동생의 고등학교 학비를 교사생활하면서 그녀가 보태야했었다.

 

유키는 그녀가 대답하기를 꺼리는 것 같아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되겠지만 지금 그녀의 감정을 흐려놓기 싫었다.

 

지나의 부모님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 들렀다.

 

지나도 괜히 부모님과 첫대면에 그가 불편해하거나 기분이 상해 저녁을 거를 수도 있을 것 같아 밖에서 먹고들어가는 것에 찬성했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서 난 고기와 채소라 모두 좋아요."

 

가든에 들어간 두 사람은 오리백숙을 먹었다.  지나는 그가 싫어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오리를 요리한 음식을 잘 먹었다.

 

"다음에는 여기보다 잘하는 집으로 내가 데려가주겠소."

 

"네?  아... 별로에요?"

 

"개개인의 입맛에 맞추기란 힘든 법이지."

 

 

 

 

김 지나는 대문에서 두 사람을 반겨주는 중년여자에게 다가가 살며시 끌어안아주었다.

 

그새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과 흰머리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누구...신지?"

 

지나는 차에서 선물꾸러미를 가지고 내리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결혼할 사람'이라고 짧게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정 고옥은 고급스러워보이는 차에서 내린 남자를 올려다봤다.  검은 양복에 우람하게 키가 큰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얼굴에 있는 길다란 상처가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라고 써놓은 것 같았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까지 낯선 사람에게는 상당한 반감을 주었다.

 

"아... 드, 들어오세요."

 

고옥은 총총 걸음으로 가게 안쪽에 있는 집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누가 와?"

 

허스키하면서도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렸다.

 

사토 유키는 가게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안에서 들리는 대화소리에 귀기울였다.  남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대충 성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저, 들어오세요."

 

지나가 약간 열린 방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고는 그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방은은 그다지 넓은 편이었지만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방안이 순식간에 좁아지는 것 같았다.

 

"처음뵙겠습니다.  유 설경입니다."

 

지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 설경?  갑자기 지어낸 이름인지 아니면 그의 한국이름인지 몰랐다.

 

자그마한 체구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김 용운은 자신보다 몇 배나 되는 남자를 올려다보더니 시선을 얼른 돌려버렸다.

 

지나는 아랫입술을 얼른 깨물며 속으로 기도했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차를 좀 내오죠."

 

고옥이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 용운은 걸걸한 목소리로 물을 달라고 했다. 

 

"앉거라.  천장에 구멍을 뚫어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용운은 몸을 틀어 측면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지나는 부모님에게 절할 분위기가 결코 아니란 것을 알고 유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저, 결혼하려고요."

 

"그래, 들었다.  같이 온 사람이 너하고 결혼할 사람이더냐?"

 

"네."

 

그러나 용운은 딸의 눈을 차갑게 쳐다보기만할뿐 유키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에 그어진 상처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라도 하듯 용운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좋은 사람이예요, 아버지."

 

"난 네가 우진이하고 결혼할 줄 알았다."

 

지나의 심장이 덜컹했다.  이 자리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그녀는 옆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제가 떠나라고 했습니다."

 

유키가 자신감있는 목소리로 용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따님과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여자에게는 금방 실증나는 타입이었죠."

 

"뭐라?  우진이가?"

 

용운은 지나를 노려보듯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됐어요, 아버지."

 

"뭐 하는... 사람인가?"

 

"글쟁이입니다."

 

유키가 용운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를 도전적으로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잠시 후, 고옥이 세 사람이 마실 차와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지나는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나마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생겨 불안한 마음을 놓았다.

 

"글쟁이라고?  그것 가지고 돈벌이가 되나?"

 

"아, 아버지..."

 

"한달에 몇 천만원에서 몇 억 정도 벌고 있습니다.  그 이상일 때도 있고요."

 

용운과 고옥의 시선이 동시에 유키에게로 집중되었다.  엄청난 수입에 두 사람은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음... 부모님은 다 계시는가?"

 

김 용운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다르게 경계심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오래 전에 어머님이 이혼하시고 재혼하셨습니다.  새아버지는 일본분이십니다."

 

"뭐?  일본?"

 

"그리고 전... 열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뭐, 뭐라고?  지, 지금... 지금 뭐라고?  뭐가 있어?"

 

용운의 목소리가 집안이 떠나갈듯 울려댔다.  독이 바짝 오른 눈으로 유키를 노려봤다.  새아버지가 일본인에다 유부남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지나 입 있으면 대답해봐!"

 

지나는 두 손을 꼭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아버지를 쳐다봤다.  예상했던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들으신... 대로예요."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기껏 대학을 갔더니,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자식있는 놈한테 시집을 가?"

 

"여보.  대학은 지나가 노력해서 간 거지 뭐...  우리가 뭐 보태줬다고..."

 

"..."

 

용운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지나 너, 혹시... 애 가졌냐?"

 

지나는 놀란 눈으로 용운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결혼하는 거... 아니예요, 아버지."

 

그녀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와 찻잔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두손을 꼭 거머쥐고 있자, 유키는 그녀의 한 손을 잡아 자신의 다리 위에서 거머쥐었다.

 

"부족한 게 많고 못마땅하신 게 많으시겠지만 전 따님하고 결혼하고싶습니다.  제가 원해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가정교사로 있다더니... 혹시 이 남자 집이었냐?"

 

지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학교선생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김 용운은 남은 물을 들이키고는 곰곰히 생각했다.  처음부터 딸자식을 잘 키우고자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만 보내줘도 괜찮은 남자만나서 시집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나는 꼭 선생님이 되고싶다며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물론 딸아이가 대학가는데 차비 한번 보태준 적은 없는 부실한 아버지였으니까.

 

그런데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비록 유부남이긴 해도. 

 

남자의 옷은 아주 고급슈트였다.  그가 차고있는 시계만 해도 몇 백만원에서 천만원이 훨씬 넘는 고가시계일 것이다

 

"식을 올린다해도 그리 해줄만큼..."

 

"결혼식 준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제가 합니다."]

 

유키는 의외로 얘기가 쉽게 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나의 부모님은 딸자식보다 돈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올 10월달 안으로 식을 올렸으면 합니다."

 

그말에 용운과 고옥이 또다시 유키의 거친 면상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무섭고 험한 얼굴이었다.

 

그것은 결혼승낙을 받으러 온 남자의 말이 아니라 이미 결혼은 정해졌으니 그리 알고 제날짜에 참석만 하라는 뜻이었다.

 

유키는 더이상 시간을 끌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에 죽치고 앉아 두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싶지도 않았다.

 

"따님과 결혼하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보.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지나가 사랑한다잖아요."

 

고옥은 지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정말 강제로 결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아무리 지나가 자립적으로 자라왔다지만 결혼할 때 드레스 하나는 해줘야할 것이다.

 

"그래도... 애 한복이나 드레스같은 건 우리 쪽에서..."

 

"어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은!  우리가 그런 돈이 어딨어?"

 

김 지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리 예상한 대로 아버지의 반응이 나오리라 생각은 해두었지만 유키가 앞에 앉아있는데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끔찍하게 싫었다.

 

유키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두분에게 폐가 안 되도록 준비할 테니 염려마십시오.  그럼 허락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으음..."

 

용운은 괜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예비사위의 시선을 피했다.  아들녀석만 장가를 잘 보내면 될 터이니 딸의 배우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날짜는 저희가 알아서 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나는 유키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막상 허락을 받았지만 썩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축하를 받을 결혼도 아니었다.  

 

사토 유키는 결혼식 전에 양가부모님과 상견례는 생략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용운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며 대꾸했다.

 

"식만 잘 올리면 됐지, 뭐."

 

"그리고 양가친척을 모시는 것은 피했으면 합니다."

 

지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을 것이다.

 

"그거야 뭐... 신랑의 모습이 좀... 그러니 그러는게 편하겠지.  암...  딸 시집보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하지."

 

유키와 지나는 두 시간 정도 채 안 되서 그곳에서 나왔다.  지나는 더 빨리 나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극구 반대하실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위될 남자의 수입에 넘어가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유명하다는 것까지 알게되면 더 좋아할 것이다.  아마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실 것이다.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자, 유키는 그녀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벨트를 메어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시동을 켜고 차를 몰았다.  몇 분 동안 두 사람은 음악만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키는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도착하면 밤중일 것이다.

 

"레이냐?  저녁은?"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먹었다.  양치하고 잠자리에 드는 거 잊지 않았겠지?"

 

"네.  선생님하고 같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

 

"조심해서 오세요, 아버지."

 

"음..."

 

그는 옆에 앉아서 아직도 말문을 닫고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흠칫 놀랐다.

 

지나는 울고있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아니 소리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고 울고있었던 것이다.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잠깐 차를 세워야할 것 같았다.  한적한 시골길은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난 당신이 항상 밝은 모습이라 상처같은 건 없을 줄 알았소."

 

"..."

 

"그런데... 아니군..."

 

지나는 손등으로 젖은 뺨을 훔쳐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목구멍을 치고올라왔다.

 

유키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코를 풀었다.

 

"오우, 미안해요.  손수건 비쌀텐데..."

 

그녀는 이 와중에도 비싼 손수건을 버려놓은 것을 신경 썼다.

 

"그래봐야 닦는 데 쓰일 뿐이오."

 

"하지만... 코를 풀진 않을 거 아니에요?"

 

"오늘은 예외라고 해두지."

 

"난... 난, 정말..."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때문에 그녀는 더욱 울음이 북받쳐왔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녀는 부끄러웠다.

 

돈많은 남자가 사위된다니까 얼씨구나 좋아라하며 딸의 결혼을 찬성하는 부모님이 싫었다.

 

어려서부터 하나뿐인 남동생에게만 모든 애정을 쏟으시고 딸의 장래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으신 부모님이 정말 부끄러웠다.

 

드레스걱정하시는 어머니 마음을 지나는 이미 알았다.  유키 앞에서 괜히 꺼내본 예의상 말이라는 것을...

 

유키는 안전벨트를 풀고 상체를 돌려 그녀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울더라도 자신의 품에 울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가 힘들 때, 마음의 문을 닫고있을 때 유일하게 다가온 여자였다.

 

물론 계기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진심으로 다가온 여자란 것을 알기에 그녀를 감싸주고 싶었다.

 

"미안해요.  우리 아버지... 엄마... 미안해요.  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쉿!  그냥 울고싶으면 울어요.  그냥 울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유키는 들썩거리는 지나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쓸어주었다.

 

차츰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고 들썩거리는 그녀의 몸은 사그라졌다.

 

"난 여자들이 우는 것에 익숙치 않소."

 

지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쳐다봤다.  덕분에 우울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셔츠가 젖었어요."

 

그녀의 눈물에 유키의 셔츠는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셔츠보다는 아직도 젖어있는 지나의 눈동자에 관심있었다.

 

"당신 눈에 고인 눈물부터 말리시오."

 

그의 말에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그의 손이 제지시켰다.

 

그녀의 손을 내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젖은 눈가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잠시 감고있는 틈을 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은 눈을 입술로 닦았다.

 

놀란 그녀가 당황해 움츠려들자, 유키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아직 채 닦이지 않은 그녀의 눈물이 뺨에서 느껴졌다.  그는 키스하는 동안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녀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고 싶은 욕망이 밀고 올라왔다.  하지만 차 안에서 그녀를 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몸이 자유로워지면서 그들 사이의 간격 또한 공기가 통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에서 자유자제로 움직여 그녀를 흥분시켰다.  어느덧 지나의 머릿속에는 슬픔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키와의 키스를 하는 순간을 즐기고싶은 욕망분이었다.  그녀의 팔이 그의 목에 둘러지며 더욱 그에게 밀착되었다.

 

"당신과 오늘 같이 자고싶어."

 

유키의 입술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키스를 했다.  감미로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키스였다.

 

언제부턴가 그의 왼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손은 짙어가는 키스의 농도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의 신음소리에 그의 손이 지나의 옷속으로 파고들어와 브래지어를 건드렸다.

 

"이런..."

 

유키는 이성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고 깃털같은 입맞춤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욕망이 그를 지배할 뻔 했다.  그녀를 이런 곳에서 가지고싶진 않았다.  그녀는 그를 위한 여자여야 했다.

 

은밀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에 세워둔 차 속에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침대위에야 했다.

 

"당장 가지고싶을 정도로 당신을 원하지만 참겠소.  그 정도로 당신은 가치 있는 여자니까 말이오."

 

유키는 그녀의 안전벨트를 다시 메어주고 자기의 벨트도 메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지나는 벌어진 상의 단추를 채우고 핀으로 고정시킨 머리를 풀었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것을 보고 유키는 그냥 풀고있으라고 했다.

 

"당신은 긴 머리를 늘어뜨려놓은 것이 더 매력적이오."

 

뜻밖의 그의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는 그녀는 머리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평소 그에게 이런 칭찬을 듣지 못한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말에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목덜미가 보이도록 머리를 높게 묵은 것도 날 매료시키지만 말이오."

 

"..."

 

지나는 그의 말에 화끈거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소리나게 웃었다.

 

"차안에서 당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려면 그런 짓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네?"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거.  붉어진 얼굴로 그런 행동을 하면 나더러 어쩌란 거요? 

 

당신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건 사실이지만... 제발 좀 날 유혹하는 짓은 그만 둬요."

 

 

 

 

이틀 후에 유키는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카오리였다.

 

그녀는 아들이 진짜 가정교사와 결혼할 건지 재차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유키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싶지 않았다.

 

"이달 세째주 토요일에 결혼식입니다.  오셔서 축하해주시면 좋겠지만 억지로 부탁드리진 않겠습니다.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유키!  정말 멋대로 하려는 거니?"

 

"제 결혼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제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마음대로 하셨잖습니까?"

 

"사토 유키!"

 

"이미 결정된 거니 그리 아십시오.  먼저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일어나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이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지나의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뒤따라 아들녀석의 소리도 들렸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느껴졌다.

 

넓은 마당에서 지나와 아들이 공차기를 하며 놀고있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 보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 공을 차지하려고 했다.

 

단순히 공차기를 하는 것인데도 그들은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즐겁단 말인가.

 

"앗!  아버지다!  아버지, 같이 놀아요!  오세요!"

 

유키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아들을 쳐다봤다.  저런 단순한 놀이에 끼워주겠다는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 원고가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하던 차였지만 공차는 것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침대 위에서 몇 시간이나 격렬하게 운동하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어느 틈엔가 그의 남성이 단단해지며 저절로 그의 눈길이 아들에게서 공을 빼앗으려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요즘 레이는 학교에서 축구를 배워 더욱 남자아이처럼 씩씩해졌고 여름동안에 태운덕에 피부도 까무잡잡해져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비명소리는 계속 유키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비겁해요, 선생님!  손으로 하는 게 어딨어요?"

 

"여긴 경기장이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죠.  공차기니까 손이 아니라 발로 해야한다니까요!  선생님, 안 돼요!"

 

지나는 레이의 고함소리를 무시하고 손으로 공을 잡고는 저만치 도망가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자, 간다!"

 

그녀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상대편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며 뛰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보리가 뛰어드는 바람에 공을 미쳐 차지 못하고 레이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보리!  너  자꾸 이럴래?  아까도 그러더니!  너 누구편이야?  비겁하게..."

 

"비겁한 건 주인이나 개나 똑같군."

 

지나는 획 돌아섰다.  현관에서 유키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뭐라고요?  내가 뭐가 비겁하다는 거죠?"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지금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턱을 치켜들고는 도전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유키는 그녀 앞에 멈춰섰다.

 

"비아냥?  그게 뭐요?"

 

"작가가 그런 말을 모른다는게 말이 되요?  쳇!  아버지라고 아들 편을 들다니!"

 

"그러니까 내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았잖소."

 

돌아서서 보리와 놀고있는 레이에게 가려던 그녀가 돌아섰다.

 

"뭐라고요?  무슨 부탁요?"

 

"나와 같이 자는 거."

 

지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를 쳐다봤다.  다행히 유키의 말을 아이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곳에서나 시도때도 없이 '나와 같이 잡시다'라는 말을 해대는 그에게 따끔하게 소리쳤다.

 

"지금 미쳤어요?  애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 말을..."

 

"내가 뭐?"

 

그녀는 유키의 성격이 이렇게 짖궂을 줄 몰랐다.  아이처럼 개구쟁이 눈빛으로 반짝거리며 그녀에게 농도짙은 말을 할 때면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선생님!  가요!"

 

뒤에서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는 놀라 돌아서서 공을 차며 달려오는 아이 앞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공은 그녀의 키 높이만큼 훌쩍 날아가더니 유키에게 갔다.

 

재빨리 유키는 그 공을 가슴으로 받아서 땅에 드리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씩 웃더니 소리쳤다.

 

"두 사람이 어디 붙어봐."

 

"못할 줄 알고요?  준비됐지, 레이?"

 

지나는 자신감있게 아이에게 물었다.

 

"선생님만 잘하시면 돼요!"

 

"뭐라고?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 아니지?"

 

"아뇨!  절대로... 아, 선생님 공 와요!"

 

"뭐?"

 

지나는 유키가 차내는 공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재빠르게 공을 차면서 반대편 미니 골대쪽으로 몰고갔다.

 

"어서 막으세요!"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키가 살짝 찬 공은 지나의 치마 아래로 지나쳐 골대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일대 영!"

 

유키는 미소를 지으며 혼자서 주먹을 쥐어보이며 마당을 뛰어다녔다.  지나는 공이 들어간 것보다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으아!  속상해!  선생님 그것도 못 막으시면 어떻게 해요?  아주 살 찬 건데!"

 

"레이... 미안.  담번에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유키는 그 후로 세 골이나 연속으로 공을 넣고말았다.

 

아이의 속상해하는 것 같아 지나는 묶었던 머리가 풀어진 것도 모르고 더 힘차게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유키에게서 공을 빼앗기 여념없었다.

 

그러나 성인 남자 한 사람을 상대로 여자 한명과 아이 한명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도저히 힘과 기술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는 것 같아 지나는 그의 두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신체는 아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다.

 

"절대로 안 돼요!  레이 어서 가!  내가 잡고있을 테니까!

 

"축구가 아니라 레슬링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렇게라도 해야겠어요!"

 

지나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놔주지 않았다.  진로가 차단된 유키는 그만 아들에게 첫 골을 빼앗기고 말았다.

 

레이는 어디선 본 듯한 골 세레머니를 하며 비명을 터뜨렸고 지나 역시 그를 놓아주며 좋아라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음 골은 유키가 넣었지만 또다시 지나의 노력으로 레이는 또다시 골을 넣었다.

 

유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기가 막히다며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는 골을 양보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는 지나에게 달려들더니 그녀를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맸다.  그리고 레이의 발에서 공을 빼앗아 골대를 향해 달렸다.

 

"으악!  내려줘요, 유키!"

 

"가만히 있어!  레이!  뭐하냐?"

 

레이가 날쌔게 달려와 그에게서 공을 빼앗으려고 발을 여기저기 뻗어댔지만 소용없었다.

 

유키는 그녀를 어깨에 둘러 맨 채로 가볍게 골대 속에 골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공도 그렇게 똑같이 넣어버렸다.

 

"그만해요!  어지러워요!  그만!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이제 그만해요!"

 

유키는 아들에게 공을 내려놓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라고 했다.

 

"저 녀석 발도 닦아주고."

 

"네!"

 

"혼자 씻을 수 있지?"

 

"그럼요!  보리야, 가자!"

 

레이는 쏜살같이 달려오는 보리와 함께 집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이제 그만 내려줘요.  어지럽다고요."

 

그러나 유키는 지나를 둘러 맨 채로 2층으로 올라갔다.  지나는 발버둥을 치며 그의 등을 주먹으로 휘둘러댔다.

 

"가만히 안 있으면 창문 밖으로 집어던질 수 있소."

 

"그러니까 내려놔요!  게임은 끝났잖아요!"

 

그는 자신의 침실 옆에 있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욕조 안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녀는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했다.  유키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벽쪽으로 밀치고는 자신의 단단한 몸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살을 지그시 눌렀다.

 

정신없이 그의 키스에 젖어드는 동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샤워기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지근했던 물은 곧 적당한 온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옷은 이내 물에 완전히 젖고 말았다.

 

하지만 지나는 자신의 옷이 젖었는지 물이 따뜻한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유키의 혀가 밀고들어와 한없이 그녀의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리자,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젖어서 옷을 벗기기란 쉽진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견뎌내는 것이 더 쉽지가 않았다.

 

그녀 옷을 모두 벗기고 나서 그는 그녀의 손을 풀러 자신의 바지벨트로 갖다댔다.

 

지나는 천천히 그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셔츠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가 옷을 벗기는 동안 결코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옷을 벗기기 쉽도록 바지와 팬티를 직접 벗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물로 비벼주며 서로를 탐닉해갔다.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남성이 그녀의 복부를 거침없이 공격해왔다.  그녀는 이미 벽에 몰린 상태라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의 남성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도저히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그녀를 흥분시켰고 그녀의 욕망을 끄집어냈다.

 

유키는 흥분으로 부푼 그녀의 젖가슴을 거머쥔 채로 그녀의 몸속으로 밀고들어갔다.

 

그녀는 이미 젖어있었고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있었다.

 

"아아..."

 

그녀의 비명을 키스로 막아버렸다.  이어서 그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키스를 퍼부으며 움직임을 서둘렀다.

 

점점 그가 속도를 올리자 지나는 거의 그에게 매달렸다.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둘러 그를 꼭 껴안고 매달렸다.

 

그녀 또한 그의 움직임울 느끼며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를 안고 몸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욕실에서 거칠게 울렸다.  마지막으로 그가 열정을 쏟기전 그녀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넣고 신음을 토해냈다.

 

유키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소."

 

그의 손이 젖은 그녀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조금 풀어주고는 그녀의 몸을 씻어주었다.

 

아직도 그녀의 흥분된 가슴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유키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가슴에 키스했다.

 

"음..."

 

그녀의 짧은 신음을 듣고 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격력했던 사랑놀이는 그의 애무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입술 사이로 그녀의 젖꼭지를 물고 살짝 잡아당겼다가 혀로 부드럽게 핥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쏟아지자 그의 혀가 바쁘게 움직였다.  때로는 단단한 이로 곤두 선 젖꼭지를 깨물기도 했다.

 

"여기서 두번째로 당신을 가질 것 같아."

 

유키는 입술을 떼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의 성감대는 여러군데라 찾는 것이 매우 재밌을 거야."

 

그는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젖은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지나는 아직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 잘 몰랐다.

 

꿈만 같은 애무와 사랑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수건을 쥐어주었다.

 

"상부상조해야지."

 

"네?"

 

그는 그녀가 몸을 닦아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무슨 뜻인지 깨달은 그녀는 머뭇거렸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도, 돌아서요."

 

그가 돌아서자 그의 넓은 등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그의 몸은 매우 단단하고 매력이 넘쳤다.

 

"뒤에만 닦을 셈이오?"

 

"네?  아, 아뇨.  도, 돌아서세요."

 

처음에는 그의 상체에 난 많은 상처자국과 화상자국에 가슴아프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도 닦아야지."

 

그가 가슴을 가리켰다.  지나는 천천히 그의 가슴을 닦아주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갈색의 젖꼭지에 시선이 갔다.

 

"여자하고 다르게 조그맣군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건드렸다.  상처가 난 가슴을 지나 작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약간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봤다.

 

"여자하고 비슷한 걸 느끼는 건가요?"

 

"거긴 내 성감대요."

 

"아... 그, 그래요?"

 

"손으로 만져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키스해주는 것을 더 좋아하지."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고개를 숙여 그의 젖꼭지에 입술을 갖다댔다.

 

"으..."

 

그의 신음소리를 듣자 지나는 왠지 모르게 흥분이 일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는 아주 살짝 혀를 내밀고 그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 큰 신음이 들렸고 그의 몸이 꿈틀거렸다.

 

"진짜군요?"

 

"날 놀리는 거요?"

 

유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서 동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지 재영의 말을 듣는 순간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언제 결혼한다는 말은 안 하냐?"

 

"언제하는데?"

 

"세째 주 토요일.  15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토요일이야?  일요일에 하지."

 

동인은 그녀가 결혼하는 날이 토요일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나가 결혼하는 것이 속상한데 그녀는 그것보다 토요일에 결혼하는 것을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마 마셔.  아무리 네가 이집 사장이라지만 그런다고 여기 있는 술 팔지 않고 네가 다 마실 작정이야?"

 

"됐다, 그만해라."

 

"그만 마셔.  너 취했어."

 

"마시다가 그냥 집에 들어갈 거야."

 

재영은 종업원을 부르려다가 관뒀다.  한창 바쁜 시간에 사장을 집에까지 데려다줄 한가한 종업원은 없었다.

 

"동인아.  일어나.  집에까지 바래다줄게."

 

"그래주면 고맙지."

 

"그래도 너네 집이 바로 코앞이니까 다행이다."

 

그녀는 동인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그를 부축했다.

 

"야.  나 먼저 들어간다.  오늘만 수고해라."

 

동인은 카운터를 보고있는 친동생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지나 축하해줄 거지?"

 

재영은 가게에서 나와 길을 걸으며 동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동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재영은 그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다.

 

술에 취해 벽에 기대어있는 그의 뺨을 몇 번 두드렸지만 그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나원 참..."

 

그녀는 그의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열쇠를 꺼내 열쇠구멍에 꽂아넣었다.

 

문을 열고 그를 간신히 집안으로 부축한 다음 침대에 눕혔다.  그의 신발까지 벗기면서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원수같은 친구를 노려봤다.

 

"자식... 어지간히도 퍼마셨네."

 

침대에 걸터 앉은 그녀는 동인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숙여 귀를 갖다대자 그 말소리가 정확히 들렸다.

 

"지나야... 김 지나..."

 

그가 사랑하고 있는 여자, 김 지나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는 동인의 뺨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동인아.  나, 간다."

 

그때 그의 손이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그녀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지마."

 

"..."

 

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영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 대신으로 있어주기는 더욱 싫었다.  그것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나, 안 취했어."

 

"그만 자라.  내일 전화할게."

 

그러나 동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있으면서도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고... 가라."

 

"술 취한 거 맞네.  헛소리하지 말고 자, 인마."

 

"너, 나 좋아하잖아."

 

재영은 맥박이 쉴새 없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있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잘 자라."

 

"지 재영!"

 

동인은 눈을 뜨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가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조용히 자라."

 

그러나 그녀는 신발을 신기도 전에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무슨 짓을 할 건지 눈치 채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를 공격해왔다.

 

거친 키스에 재영은 너무 놀라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되찾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로 선명하고도 큰 소리였다.

 

"지나를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날 끌어들일 생각 마!"

 

"..."

 

"나쁜 자식!"

 

동인은 욱신거리는 뺨을 매만지며 그녀를 쳐다봤다.

 

"재영아..."

 

"입 닥쳐, 개자식아!  네가 받은 상처를 나한테 줄 셈이야?  내가 그 상처를 받아야 돼?"

 

그녀는 그에게 거침없이 쏟아붓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동인은 닫힌 문을 힘없이 넋을 놓고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충동적인 짓이었다.

 

아무래도 재영에게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며 침실로 돌아섰다.

 

 

 

 

"드, 드레스요?"

 

지나는 레이의 침실을 정리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어서있는 남자는 베이지색의 얇은 니트를 걸치고 있었다.

 

"결혼하려면 당연히 드레스를 맞춰 입어야지."

 

"그건 알아요.  하지만 산다는 건 말도 안 돼요.  하루만 입고말 건데 빌리면 되지..."

 

"싫소."

 

"왜요?"

 

"내 아내한테 남들이 걸쳤던 드레스를 입히란 말이오?"

 

지나는 베개 커버를 씌우기 위해 침대로 돌아섰다.  

 

"다들 그렇게 해요.  당신이 돈많은 남자란 건 알겠지만 그런식으로 돈 자랑할 필요가 있어요?  그럴 돈 있으면 나한테 직접 줘요."

 

"뭐?"

 

"차라리 그 돈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확 내버리게요."

 

"난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무슨 드레스를 한번 입는데 사입다니... 그게 말이 돼요?"

 

"한번 있는 결혼이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요.  굳이 그걸 강조할 필요없다고요.  그리고 조촐하게 올리는 식이니만큼 검소하게 해요.  제발 유난 떨지 좀 말고요."

 

"누가 유난을 떤다는 거요?  아, 결혼식이 너무 초라하다 이거요?  그래서 실망해서 드레스고 뭐고 다 귀찮다는 거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럼 내말대로 해요.  한 시간 후에 갈 거니까 준비하시오."

 

유키는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찔러넣은 후 돌아서 갔다.

 

지나는 입구를 노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저 남자의 고집은 알아줘야했다.  거기다 제멋대로이기까지 했다.

 

항상 명령하는 말투에 건방지기까지했고, 이렇게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정도로 멋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레이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제멋대로인 남자는 벌써 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차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지금 칭찬이오?  아님 비아냥거리는 거요?"

 

"비아냥요?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지나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뒷자리에 올라탔다.  이따라 유키가 올라탔다.

 

"그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군."

 

"당신은 항상 맘대로에요.  결혼식 날짜도 혼자서 일방적으로 15일이라고 정해버리고."

 

"어차피 올릴 결혼식이오.  꾸물 거릴 이유가 없었소."

 

"그렇다고 나하고 상의도 하지 않고 정해버려요?  뭐든지 혼자서 정하고 나한테는 통보만 하는군요?"

 

"아예 결혼 전날까지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것보단 낫잖소?"

 

"뭐라고요?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노려봤다.  도저히 대화가 안 되는 남자였다.  그녀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결혼 날짜도, 드레스도, 거기다 우리 집에도 멋대로 전화해버리고.  정말 바쁘셨겠어요, 유키씨.  혼자서 이것거젓 다 하려면 말이죠."

 

그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유키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뭐라고 해도 결혼식 날짜는 그 날 외에는 바꾸지 않을 것이며 신부의 웨딩드레스도 대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드레스는 지나 마음에 쏙 들었지만 문제는 심플하면서도 단조로운 디자인에 비해 판매하는 가격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에게 얼마 주고 계산했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유키는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지나의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을 휘감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슴굴곡이 절반이나 보였고 그녀의 잘록한 허리선을 고스란히 돋보여주었다.

 

허리춤에서 넓고 부드럽게 퍼지는 드레스자락 끝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그 드레스에 부케까지 들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어느덧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내 말 들었어요?"

 

유키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쀼루퉁해있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듯 했다.

 

"뭐라고 했소?"

 

"우리 레이의 옷을 사입혀줘야 된다고요.  내 드레스를 살 게 아니라."

 

"알고있소.  그건 신경쓰지 마시오.  아, 다음 주 되면 가구가 새로 들어올 거요."

 

"뭐라고요?  가, 가구요?  갑자기 무슨 가구요?  옷장하고 침대같은 거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는 그가 멀쩡하게 쓰고있는 가구까지 새로 바꾼다니까 결혼이 실감나기도 했지만 과소비라고 여겨졌다.

 

침대며 옷장이며 레이 방의 책상까지도 모두가 거의 생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뭐가 불만이오?"

 

그는 그녀의 퉁퉁한 볼살을 검지로 건드렸다.  그러자 지나는 그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럴 돈있으면 주방에 싱크대다 바꾸지 그랬어요?"

 

하긴... 남자들은 주방을 사용하는 시간이 적었고 행여 유심히 주방을 살피는 남자들은 아주 드물었다.

 

"하여간에 여자들이란..."

 

유키는 앞서서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쉬지 안고 투덜거렸다.

 

얼마 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레이가 그녀에게 오늘 숙제에 대해서 뭐라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선생님."

 

"음?"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건 왜 묻지?"

 

레이는 소파에 앉고는 보리를 불렀다.  그리고 녀석의 털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선생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내가?"

 

"네."

 

지나는 아이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굳이 변명하지도 않았다.

 

"미안.  그래, 무슨 숙제라고?"

 

 

 

 

"당장 건너오너라."

 

유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었다. 

 

"싫습니다.  제 결혼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유키!  너 이런 식으로 결혼을 굳이 강행하겠다면 손해라는 거 모르니?  그 선생을 가족으로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해?"

 

"제 아내로만 인정하면 됩니다.  레이의 엄마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유키는 수납장에서 양주 하나를 꺼내어 잔에 따랐다.  며칠 동안 술을 안 마셨는데 다시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 술생각이 났다.

 

"이런 일로 통화하는 거 매우 싫습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아버지도 그렇고 내가 결혼식에 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거라."

 

"네.  기대 안 합니다."

 

건너편에서 딸칵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유키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독한 양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이런 전화를 두번 다시 받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들은 훼방꾼이나 다름없었다.  자식의 결혼을 마음대로 정하질 않나...  그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지나의 투덜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결혼식 준비를 제멋대로 정했다며 화를 냈다.

 

드레스를 빌리지 않고 비싼 돈을 주고 샀다고 화를 냈고, 결혼하는 날짜도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정했다고 소리쳤다.

 

멋대로, 마음대로 정해놓고선 부모님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너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유키는 술잔을 든 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몇 시간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있어 지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제 결혼은 1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레이는?"

 

"제 방에서 책읽고 있어요."

 

"당신은?"

 

유키는 거실 소파에서 빨래를 개키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곁에 앉기도 전에 그녀는 개켜놓은 옷을 들고 일어났다.

 

"잘 거예요."

 

그녀는 레이 방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옷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너무 늦게 자면 안 된다, 레이."

 

"네."

 

지나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유키의 옷을 들고 올라가려다가 따라오는 그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들고있던 옷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옷장에 정리하실 줄 아시죠?"

 

"나보고 하란 거요?"

 

"못한다는 말씀 마세요.  전 피곤해서 들어가 잘 거예요."

 

"얘기 좀 합시다."

 

"내일요."

 

"난 지금 해야 되오."

 

지나는 돌아섰다.  이미 그의 손에 있던 옷들은 소파에 떨어져있었다.  기껏 잘 개켜둔 옷인데...

 

그녀가 그를 노려보자, 유키는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미안하오."

 

지나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가 왜 사과를 한단 말인가.

 

유키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자체가 익수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았다.

 

그러나 지나에게는 사과를 꼭 해야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멋대로 해서 미안하오.  드레스나... 15일에 결혼식을 하기로 정한 것도... 그리고 당신 집에 전화를 한 것도 미안하오."

 

지나는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축복받지 못하는 결혼이란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결혼이 마치 그의 계획으로만 진행되고 그의 명령에 의해서 억지로 강행되는 것 같아 매우 불쾌했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억지로 결혼에 이끌리는 것은 싫었다.

 

지나는 흐트러진 옷들을 다시 개켜 유키에게 주었다.

 

"고마워요.  지금이라도 이해해줘서 다행이예요."

 

"화가 풀렸소?"

 

"네."

 

"그럼..."

 

유키는 그녀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키스해도 되는 거요?"

 

"네?"

 

"오늘 하루종일 당신 눈치보느라 키스하고싶은 걸 꾹 참고있었소."

 

그는 그녀를 한손으로 끌어당기고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처음에는 입술끼리 와닿는 부드러운 키스였고 이내 그의 뜨거운 혀가 들어오면서 키스의 농도는 짙어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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