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애 련{열 아홉번째}

이야기 상자 |2005.04.11 14:56
조회 2,586 |추천 0

세준은 태림이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들어섰을 때 병실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첫 눈에 김진만 사장의 아래서 일하기는 아깝다는 걸 느꼈다.
 "오셨습니까?"
 "그래. 태림이는?"
 윤수의 눈에 세준을 향했지만 김진만 사장은 윤수가 소개시킬 가치가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 있었다.
 "쉬고 계십니다."
 "들어가지."
 세준은 문을 열어주는 윤수를 향해 작은 목례를 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태림은 잠들어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여 놀랐다. 그녀를 보지 않는 몇 달 동안 이렇게 야위어져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세준은 뭔가 잃어버린 느낌에 한동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골에 내려가 있다는 태림이 보고 싶어 그녀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운 것과 그녀를 다시 그의 인생 안으로 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녀를 다시금 그의 인생 안으로 들인 다는 것은 다시 한번 세준 자신을 김진만 사장에게 노출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와 다신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깨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절 왜 여기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저에게 이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김진만 사장의 얼굴에서는 야비한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고, 세준은 그가 뭔가 히든카드를 쥐고 있다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 졌다.
 "우리 회사가 먼저 개발한 상품 때문에 자네 회사가 많은 타격을 입었다는 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 부하직원 잘 못 둔 자네의 부덕함 탓이지."
 세준의 주먹은 굳게 쥐어졌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세준은 김진만 사장의 뻔뻔함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김진만 사장은 분명 세준이 누가 범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게."
 태림은 아버지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리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말이다. 그건 죽기 보다더 싫은 태림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 엄마라는 미끼가 남아 있었기에 태림은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싫습니다."
 "싫다."
 "네. 싫습니다. 이미 집을 나간 사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받아 들어야 할 이유가 제게는 없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흔들리는 건 죽기 보다 더 싫은 세준이었다.
 "이 아이 얼마 전에 납치를 당했다네."
 "납치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가 왜 그렇게 기운이 소진되어 보이는 이유를 알자 그의 눈이 확장되었다. 태림이 무서움에 떨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왜 김진만 사장은 태림이 하나도 지키지 못했을 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갈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 뿐인 따님을 알아서 잘 보호 하셨어야죠. 이미 제게서 떠난 사람의 안전을 제게 책임지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김진만 사장의 살기 어린 눈은 세준의 당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뜻이 역력했지만 세준도 그도 서로에게 쉽게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아이를 가진 아내를 버리는 것 자네의 그 잘난 윤리에도 어긋난 짓이 아닌가."
 화가 났다. 태림과 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는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화가 났다. 열심히 살아왔다.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태림이 돌아온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환희 마져 느끼고 있었지만 세준은 김진만 사장과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만을 생각하고 곱씹었다. 

 "자고 있지 않다는 것 알고 있다."
 저 관찰력을 다른 곳에 사용했더라면 아버진 분명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준의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되었지만 태림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원수처럼 바라보았다.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절 왜 보내려고 하시는 거죠.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게요. 아이도 제 힘으로 키울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이제 저희들 좀 놓아주세요."
 "내일 퇴원 수속을 할거다. 최군이 널 데려다 줄 테니 걱정 할 것 없다."
 태림이 세준과 아버지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정말 그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정 서방에게 내가 당한 일을 이야기 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아무리 대한 민국 최고의 전자 회사 사장이라고 해도 국가에 찍히면 정 서방 삶은 지옥이 될 테니까 말이다. 명심해라. 난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태림은 아버지의 협박에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런 협박도 지겨워요. 이 세상에 아버지란 존재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세준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아버진 이미 간파한 모양이었다.
 "뭐야? 다 죽어갈 것을 살려 놓았더니."
 김진만 사장은 태림이를 때릴 기세로 손을 치켜올렸지만 윤수와 함께 간호사가 들어오자 머뭇거리더니 나가버렸다.
 
 태림은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버진 이번엔 세준과 엄마를 빌미로 태림을 세준의 집으로 보냈다.
 "아가씨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엄마 좀 돌봐 주실래요."
 "걱정하지 마십쇼."
 "고마워요."
 태림은 엄마의 안전을 부탁 할 정도로 윤수를 믿었다. 아버지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그들 모녀의 사람이었다.

 퇴원 하는 날 세준은 오지 않았다. 당연히 태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기사는 많이 야윈 태림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그 답지 않게 묻지 않는 말까지 말했다.
 "오늘 사장님은 외국에서 중요한 바이어가 방문에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네."
 우스웠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집이었던가?
 사실 엄마가 있는 집보다 세준과 함께 했던 집을 더 그리워하며 꿈꾸어 왔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집은 처음 집에 들어갈 때와 별만 다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태림은 거실에 앉아 있는 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렸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건 싸늘함뿐이었다. 이럴 거였다면 이런 처참한 기분이 들 거였다면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흠음."
 "...."
 김기사는 처음처럼 조촐한 태림의 짐을 이층까지 올려주었다.
 "작은 사모님 이게 뭐예요."
 아주머니는 태림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요리 저리 살펴보더니 우유와 과일들을 챙겨와 태림이 먹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제가 알아서 먹을 게요."
 "안돼요. 알아서 먹었다는 게 이 모양이라면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알만해요. 배속에 사장님 아이도 있다면서요. 그러니 더 신경 써서 먹어야 해요."
 아주머니의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미순 언니처럼 태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 이 아련함을 느끼게 했다.
 "회장님 내외분이 저러시는 건 이해하세요. 사장님이 좀 고생을 하셨거든요. 아이도 있으니 곧 풀리실 거예요."
 "...."
 
 "어쩌다 납치를 당했지?"
 태림은 처음에는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그가 벗는 옷을 받았다.
 "...쇼핑 나갔다가요."
 별다른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였기에 지키고 싶었다.
 "몸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었다는 사람이 쇼핑을 할 기운이 있었다는 게 놀랍군."
 그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가슴속에 담아 두었고, 그것이 꼭 뭔가에 언친 것처럼 태림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다시 그들은 처음처럼 소파와 침대에 각자의 자리를 마련했고, 쓸쓸한 밤을 지내기 시작했다.


 "6개월치고는 배가 부르지 않은 편이구나."
 "네."
 천을 감고 지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하긴 초산이라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세준이 가졌을 때 배가 많이 나온 편은 아니었으니까."
 배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초리가 불편에 손으로 가리고 싶었지만 태림은 견디어 냈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다는 걸 알 거다. 워낙에 실망을 크게 시켰어야지."
 시어머니가 태림에게 잘해주었던 건 태림의 외할아버지에게 태림의 시아버지 집안이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만약 시아버지가 지금의 시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태림의 엄마하고 결혼했을 지도 몰랐었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준이 널 다시 받아들인 이상, 그리고 네가 우리 집 자손을 가진 이상 당분간은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
 '감사합니다.'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 낳고 몸조리가 끝나거든 곧 발로 검정고시 준비해라. 무성전자 사모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세준이가 들을 이유가 없지 않니."
 "네."
 언제나 세준의 걱정뿐인 시어머니였지만 그래도 미운 마음을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다들 태림의 학교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로 약속을 했는지 회사에서 돌아와 태림에게 양복을 건네주던 세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이 낳고 나면 복학해라. 학교에다가는 손을 써 놓았으니 문제없을 거야."
 학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동기간에도 그녀가 결혼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 괴롭혔다. 그런데 어린 동생들과 공부하면서 그 시선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싫어요. 그냥 검정고시 준비할게요."
 넥타이를 풀던 세준의 손이 멈췄고, 그의 시선이 양복 상의를 손에 든 채로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만 내려다보는 태림에게 꽂히었다.
 "무슨 소리야. 그래도 검정고시보다는 복학이 더 낳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검정고시 보라고 하셨어요."
 세준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태림에게 그런 말을 먼저한 어머니에게 짜증이 났지만 목소리에는 그런 기색을 들어내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야."
 "그냥 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부터 검정고시 준비할게요."
 세준은 당장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아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태림이가 학교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아 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단 한번도 고집을 부린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세준은 답답해 찾아간 사람은 태림이의 담임 선생님이었고, 태림이 사라졌을 때 가장 걱정하고 찾는 것에 열성을 보였던 은경을 만났다. 그들은 태림이 사라지자 찾아다니다가 김진만 사장이 시골로 보냈다는 말을 믿고 포기했고, 세준은 자신을 떠나버린 태림은 찾지 않았다.
 그녀라면 태림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준의 말에 태림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은경은 잠깐 주저하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태림이가 집을 나가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2학년 학생이 조용히 와서 화장실에서 좋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으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우리 반 학생들 같다면서요."
 세준은 은경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사실 저희 반에 오공주파라고 불량한 애들이 있었거든요. 전 그 애들이 다 싶어 급히 화장실로 갔는데, 그 아이들에게 당하고 있는 학생인 바로 태림이었어요."
 세준은 그 당시 태림의 다리에 멍이 들어있던 걸 기억해 냈다. 태림은 체육시간에 다쳤다고 했었고, 그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은경은 목이 탔는지 앞에 있는 물을 세준이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후우, 다 제가 부덕한 탓이죠. 태림이가 집에는 말하지 말라고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을 하던지 차마 연락할 수 없었어요. 태림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태림이에게 전학이야기도 했었거든요.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아이들은 태림이 결혼한 사실과 미팅을 한 것을 알고 태림을 괴롭히고 있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은경은 충격을 받은 세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항상 태림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유정에게서 흘러나온 말이에요. 태림이가 가출한 뒤로 오공주파 아이들과 이야기를 했거든요."
 세준은 항상 고귀한 척 하면서 태림이가 집을 나간 뒤 자신의 주위에서 맴돌던 유정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태림을 못 움직이게 붙잡고 태림이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고 유부녀가 되었으니 처녀와는 다를 거라면서......."
 세준의 눈은 완전한 충격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하지만 세준은 자신이 한 짓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난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도 나중에는 후회를 많이 했어요.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웠던 짓이었는지를 깨달은 거죠."
 
 세준은 거의 회사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었지만 태림의 선생님이었던 은경을 만나고 온 뒤 독한 양주를 잔에 가득 따라 마신 후 또 한잔을 따른 상태였다.
 "사장님 작은 사모님을 모셨다는 분이 뵙기를 청하시는 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세준은 그 방문객이 윤수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세준은 윤수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진실 되고 강직한 눈빛은 김진만 사장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눈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사장님도 알아야 하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세준은 태림을 걱정하는 윤수의 마음이 의심스러웠지만 표현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뭡니까?"
 "아가씨가 집에서 나와 어디서 지냈는지 알고 계십니까?"
 더 이상 충격적인 이야기와 태림에게 미안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듣더라도 은경을 만나 충격이 가신 뒤이기를 바랬지만 그건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았다. 태림이가 없어지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도 힘들었지만 그런 일에 더욱더 자신을 몰아 붙였고, 휴식은 거의 취하지 않아 아버지 마저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적어도 태림이 김진만 사장의 휘하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쥐어 주었으니 당분간은 태림을 함부러 하지 않을 거라는 최면을 걸면서 지내왔다.
 "시골에 가 있지 않았습니까, 쇼핑하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납치를 당한거고요."
 하지만 윤수의 눈빛은 세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
 "아가씨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의 댁에서 나오시자 마자 셋방을 얻으셨고, 바로 의류 공장에 취직하셨습니다. 김진만 사장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가씨를 데리고 오거나 다른 보호조치는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준은 윤수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아 의문조차 달지 못했지만, 윤수가 김진만 사장의 지시 없이도 태림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림은 그를 위해 우리 회사 신 모델 디자인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까?"
 윤수는 굳은 얼굴로 세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건 사모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장모님을 말입니까?"
 세준은 그 말에 김진만 사장이 태림을 때리던 일이 기억났다. 마치 집에 있는 미친 강아지를 때리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때리던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세준은 태림이 그렇게 맞고 지냈다면 장모님 역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네. 김진만 사장은 사모님을 미끼로 아가씨에게 그 일을 시켰고, 아가씨는 사모님의 안전을 위해 그 모든 걸 감수했습니다."
 "왜 그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그건 자신을 탓하는 소리였다.
 '왜 그때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왜 태림을 그렇게 몰아 세웠던 거야?'
 윤수는 현명하게도 세준이 자기 자신을 탓하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저 역시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이 두차례 아가씨의 학교에 가는 걸 모셔다 드렸지만 목적이 그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그녀를 이해했더라면,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태림이 납치라는 무서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세준의 머리를 무겁게 말들었다.
 "그럼. 납치는? 그것 역시...."
 "그곳에서 미순이라는 아가씨를 만났고,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힘든 노동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다 미순씨는 시위에 가담했고, 아가씨는 미순씨와 같이 지냈다는 공장장의 신고로 인해 안기부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공장장은 여러 여공들을 건들고 있었고, 아가씨도 넘봤지만 미순씨가 있어서 뜻을 못 이루고 있다가 미순씨가 사라졌는데도 아가씨가 강력하게 거부하자 신고를 했습니다."
 김진만 사장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 공장장 역시 죽여버리고 싶었다.
 기필코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세준은 태림이 단칸방에 살면서 콩나물 시루 같은 공장에서 하루 종을 일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도 한번 들어가면 만신창이가 되어 나온다는 곳에 태림이 며칠 동안 갇혀 지냈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아 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그동안 장인은 뭘 했답니까?"
 하지만 윤수의 눈에는 세준과 김진만 사장 둘 다 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럼 사장님은 뭘 하셨습니까? 아가씨는 몇 일 동안 계속 되는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미순씨가 눈앞에서 윤간 당한 체 자결하는 모습까지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것도 김진만 사장님의 딸이라는 것이 아가씨가 그들에게 당하기 전에 밝혀져 가장 약한 고문 중에 하나였을 겁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