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 놀이터에는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따스한 볕만 아니라면 약간의 한기를 느낄만한
날씨였다. 초봄이 그렇게 왔는데도 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은우처럼 현서 역시 봄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놀이터 가장 자리에 있는 화단에는 어느새 개나리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앞 벤치에 명선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볕을 쬐고 있었다.
-어지럽지 않아요?
곁에 와서 앉으며 현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무는 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명선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볕이 좋아. 이러고 하루종일 앉아 있을수도 있어.
명선의 말에 현서는 대답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런 봄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아직도 마른
가을처럼 바스락거렸다.
-나도 한 대만 줘 봐.
담배를 꺼내 건네자 명선이 받아 피워 물었다. 금연한 지가 일 년이라 그런지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오랜만에 피워도 맛은 여전하네. 이래서 담배 끊기가 힘들지.
웃으며 명선이 담배 연기를 내뿜자 현서는 답답한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은우는 좀 어때?
-그냥 그래요. 근데 선배, 은우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항상 자기 손으로 내 머릴 깎아 주는 녀석이 그걸 잊고 있었나봐요. 그 녀석이 골라 준
옷도 기억을 못하더라구요. 그냥.....건망증이겠죠?
-지금 제 정신이겠니? 그 정신으로 뭘 볼 수 있을 것 같니? 너무 걱정 하지마.
명선의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까. 현서는 안도의 숨을 짤막하게 내쉬며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런 현서를 물끄러미 보다 명선이 말을 꺼냈다.
-처음 은우 봤던 날 기억난다. 검은 긴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어. 그날 걔가 파란색 원피스를 입었던가? 암튼 치마를 입었는데 하늘하늘 거리는 게
내 맘까지도 설레게 하더라. 참 이쁘게 생겼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
명선의 말에 현서는 오래 전의 은우를 떠올렸다. 낯을 너무 가려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었던 은우는 늘 혼자였다. 어쩐 일인지 그런 그녀에게 선뜻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져도 다가서지 못했다. 그저 뒤에서나 훔쳐 보곤 쑥덕거리는 일로 흘려 버리곤 했었다.
-참 이쁘다 그러면서도 사실 난, 걔가 무서웠다. 그런 것 있잖니. 걔는 분명히 화사한데 그래서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은데도 주위가 너무 어두워. 검은 그림자를 끌고 이리저리 다니는
애처럼 항상 걘 어두웠어. 곁에 있다가는 나까지 그 어둠 속에 갇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단 말이지. 아마도 걔가 혼자였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일거야. 볕이 나질 않았어. 걘
사시사철 겨울 같았고, 음지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고, 늘 어둡고 습한 것처럼 보였어.
그와 반대로 걔 얼굴이 넘 하얗다는 게 더 섬뜩했었다.
명선의 말이 여기서 끊어지고 피워 물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 껐다. 현서는
가만히 그 담배 꽁초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 니가 은우 곁에 있는 게 싫어. 걘 너무 어두워. 니 인생까지도 어둡게 만들어 버릴 거야.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게 되도 반드시 피해야 할 사람이 있어.
그만 은우 보내라. 너 지금 꼴이 어떤지 아니? 은우 끌어 들이는 순간부터 니 몰골이 형편
없다는 거 알고나 있니?
명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현서는 안다. 애초에 은우가 그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니 나이 벌써 서른 둘이다. 적은 나이도 아니고 이젠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도 꾸리고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 누리면서 살아야 될 거 아냐? 언제까지 은우 뒤치다꺼리만 할래?
사랑은 동정이 아냐.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선배?
현서의 물음에 명선은 할 말을 잠시 잃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그게 누구한테 좋은 사람인지 말해 봐요. 우리 부모님? 아님 주위 사람들?
적어도 내가 좋으면 그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선배는 은우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럼 선배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마른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다 현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며 말을 꺼냈다.
-선배, 나도 요즘 헷갈려요. 내가 정말 은우를 사랑하기는 하는지. 선배 말대로 동정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다른 건 다 모르겠는데 그건 알아요. 내가 지금 은우를 버릴 수 없다는 거.
나까지 은우를 외면하면 걔, 정말로 죽어요. 자꾸만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은우를 내가 등
떠밀게 되는 일이에요. 사랑 같은 거 생각 안 해요 이제. 당장은 그냥, 은우를 어쨌든
살려야겠단 생각만 해요. 걔가 살고 싶도록 만드는 거요. 죽음으로부터 멀리멀리 떼어 놓는
일만 생각할래요. 그러고 난 다음에 좋은 사람을 생각할래요.
현서의 말에 명선은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서야.
-알아요, 선배가 뭘 걱정하는지. 그래서 항상 고마워요. 고마운데, 은우 모른 척 하란 얘긴
하지 마요. 선배가 나라면, 선배도 그렇게 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거 내가 더 잘 알아요.
현서의 말에 명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한 마디 툭 던졌다.
-너랑 얘기 안 해 임마.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밑반찬 몇 가지도 같이 넣었으니까 잘 챙겨
먹어. 너 말대로 은우 지키려면 너부터 건강해야 하지 않니? 저도 당장 죽겠습니다 하는
얼굴로 누굴 지킨다고. 나중에 은우 안정되면 그때나 얼굴 보러 올게. 나, 간다.
명선이 손을 흔들며 걸어 나가자 현서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선은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괜히 툭툭 치며 앞서 걸어갔다.
-꼬시러 왔다가 쟤 꼬임에 내가 넘어갔네. 하여튼 차명선, 너 입방정이야.
툴툴대며 명선의 모습이 사라지자 현서는 그녀가 놓고 간 쇼핑백을 내려다 보았다.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다. 누이 같고, 어머니 같은 사람.
사랑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사랑이 그렇게 쉽사리 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오는 것들은 죄다 믿을 게 못됐다. 사실 사랑이 뭔지도 몰랐다. 누가 그걸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이란 하나의
숙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같은 숙제를 반복하고, 엉터리 답을 써댔다가 다시 지우고.
그러다 가슴은 너덜너덜해질쯤에서야 성숙이란 단어로 그것들을 모조리 포장해버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리고서는 결국 또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평생을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
사랑에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끝이 나는 사람의 감정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희수는 그런 은우에게 사랑이 아니라 가족 같은 것이었다. 지붕을
이고 있는 하나의 기둥. 그 기둥을 빼버리면 나머지 기둥까지도 모조리 중심을 잃고 지붕은
곧 내려 앉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심정을 얘기하라면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아니였던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희수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말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용기였다. 그래서 오 년이란 시간동안 미적대고 있지
않았던가. 등본에 파랗게 찍히는 동거인이란 글자 따위가 살아오는 내내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몸 속 혈관을 돌아 다니며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다면 아마도 어머닌 비웃었을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저 지나가다 엎어져 난 상처 하나일 뿐인데 말이지.
최숙희란 이름 아래에 동거인이란 낙인이 찍힌 채로 같이 붙어 있긴 끔찍하게 싫었다.
매번 성이 다른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란 분들은 계절 바뀌듯이, 마치 먼 길을 돌아 잠시 숨을
돌릴 휴게소인냥 머물렀다 이내 떠나버렸다. 은우는 그런 남자들보다는 어머니를 더 경멸했다.
최숙희란 이름 아래에 자신의 이름이 버젓이 찍혀 있는 것조차 끔찍해서 독립을 했지만 자신의
최숙희란 여자의 자식이 아닐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결혼이란 것 앞에서는.
-이번엔 진짜야. 정말 이 사람하고 제대로 살아 볼 생각이야. 축하 해줄 거지?
매번 뻔뻔하게 나오는 어머니의 태도에 은우는 더욱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말인데, 돈 좀 해주라. 이것저것 살림도 좀 사야 되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몸이
이래서 일이라고 제대로 해봤어야지. 그래도 결혼인데, 빈 몸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니.
정확하게 다섯 번째 남자와의 결혼식 사진이 떼어진 벽에 여섯 번째 결혼 사진이 걸린 지
육개월 만에 남자는 어머니를 떠났다.
-아무리 내가 맷집이 좋다고 해도 평생을 맞고 살 생각을 하니 눈 앞이 깜깜하더라.
시퍼렇게 멍자국을 남긴 어머니의 왼쪽 볼을 들여다 보면서 은우는 다시 죽음을 떠올렸다.
수면제를 한 가득 털어 넣었을 때는 정말이지 이대로 깨어날 수 없기를 바랬다. 위세척을 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죽음의 선택도 그녀의 결심대로
되진 않았다. 삼십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은 없었다. 늘상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지기만 하는 삶. 제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하더라도 이건 정말이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은우는 현서의 뺨을 후려쳤다.
-니가 뭔데 내 생명까지 끼어 들어? 날 좀 그냥 내버려 두란 말야, 제발.
애시당초 현서를 찾지 않았던 것이 옳았을까. 매번 현서에게 짐만 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 밀려오는 수치심은 견딜 수 없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은우는 쇼파에 몸을 묻고 앉아 있었다. 멍하니 베란다 밖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현서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쇼핑백을 풀고 찬거리를
냉장고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손을 씻고 거실로 나왔을 때까지도 은우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은우야.
은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머뭇거리다 그가 돌아서자 그제서야 은우가 입을 열었다.
-현서야.
뒤를 돌아보자 은우는 여전히 베란다로 시선을 두며 말을 꺼냈다.
-숨 막혀. 여기 오래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죽기로 작정하고 손목을 그을 땐 언제고 지금은 죽음에 대해서 두렵다는 것일까. 현서가
머뭇거리다 은우 앞에 와서 섰다. 그 사이에 너무 말라 버린 은우의 몸은 작은 계집아이
몸과 같았다. 무엇이 저토록 무섭게 은우를 마르게 하는 것일까. 몸 안의 수분이 몽땅 다
빠져 나가버린 사람 같았다.
-여기서 나갈래.
은우는 완강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입을 다문 채 그저 여기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그녀의 행동에 서운함이 먼저 들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무슨 설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었던가. 우정을 시간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십 년을 함께 살았고,
첫 만남은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던 사이었는데 아무런 한 마디도 없이 지금 그녀는
무조건 떠나겠다고만 말을 한다. 현서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