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피우유 소녀
이야기 하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무척 소중한 이야기라서 이 글을 쓰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되신다면 이 글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잊어버려주세요.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주시고, 우리는 서로 마주친 적이 없는 것으로 치고 살아가도록 하지요. 그것이 타인의 기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이 글을 장난으로 여기거나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농담거리로는 삼지 말아주세요.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사랑이야기 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아주 진부한 것이라서 색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지요.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책 속의 사랑 이야기도, 영화 속의 사랑 이야기도, 노래 속의 사랑이야기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삶의 배경으로만 생각했었으니까요. 잘 생각해 보면 사랑이야기라는 말처럼 모순된 말도 없을 것 입니다. 사랑은 두 사람만의 감정, 그리고 내밀한 언어의 교환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삼자가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 될 수 없는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울고, 웃고,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드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또다시 할까 합니다. 이 글의 유용성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느끼고 망설여지지만 지금 불안한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야기로 만들어지면 흔들리거나 잊혀지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받으면 이 감정이 안전하게 지켜 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나의 기억에 의지하는 그녀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 수도 있고, 같이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들락거리는 편의점이었고, 그 편의점은 학교 앞에 있는 것이어서 똑 같은 교복에, 똑 같은 풋풋함을 입은 수많은 학생들에게 물건을 건네었으니까요.
이런 가정을 일단 접어두고, 그녀를 기억하게 된 처음 시점은 어느 봄날 화요일 오후 2시였습니다. 책을 일고 있는 나의 앞에 한 소녀가 다가왔습니다. 열중하고 책을 보던 중이어서 그녀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한 여자아이로 인식되었을 뿐입니다.
“아저씨 커피우유 없어요?”
소녀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내 직업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잠시 우유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를 훝어보고 “마침 커피우유가 다 떨어졌네요.”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여자아이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편의점 음료코너를 기웃거리더니 뚱한 얼굴로 문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료수가 없는 나인지라 목이 마른데(추측이지만) 좋아하는 음료수가 없다고 밖으로 나가버린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간단한 인상착의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단발머리에, 조금 키가 크고,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아직 애 띤 얼굴. 이 정도로 말이지요.
다음날 아침 이 ‘커피우유를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편의점에 왔습니다. 쌀쌀한 봄바람에 얼굴이 붉으스레해진 그녀는 200ml짜리 커피우유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사실 그녀가 다시 커피우유를 내밀기 전까지는 그녀의 존재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커피우유유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 커피우유 소녀!’라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나는 나의 일상의 침식 속에서 떠오른 기억의 파편에 반가움을 느끼며 거스름 돈과 함께 약간의 관심 어린 눈길을 그녀에게 건네었습니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우유를 받아 들고는 그것을 음미하며 꼴깍꼴깍하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능수능란하게 종이팩을 뜯고, 팩의 주둥이를 가지런하게 하고, 한 손을 허리에 대고 한 손으로는 우유를 집어 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우유를 마시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나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우유회사 사장이었다면 당장에 그녀를 CF모델로 쓰라고 버럭 소리를 지를 만큼 그녀는 완벽하게 커피우유와 어울리는 소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