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악!”
치열한 전장 속에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그 치열한 전장이라는 곳에서는, 한 사람이 수천의 대군을 맞서 싸우고 있다. 아니, 싸우는 것의 범주를 넘어서 도륙하고 있다.
그의 표정은, 괴이한 미소를 흘리며 희열에 찬 얼굴이다. 살인을 즐기며, 혈향에 전율하고, 전투에 몸을 내던지는.
하지만, 일대 수천의 전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곧, 그의 몸에 창칼이 쑤셔박아지며, 그의 몸이 기울고 곧 바닥으로 몸이 누가 집어 던진 것처럼 나동그라졌다.
그가 넘어지고 난 후에도 그의 몸에 병기가 틀어박히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창칼에 난자당하면서도 괴이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곧 크게 웃었다. 죽어가면서도, 크게, 박장대소하며.
“크허허헉!”
연의 눈이 번쩍 띄어지며 몸이 용수철에 튕겨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장에 달린 거울을 쓱 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쓱 훔쳤다.
“후우우, 놀랐다. 꿈을 꾸긴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네. 악몽이었으니 깨어났겠지만.”
연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는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출발이 여덟시 반이라고 했었지.
연은 그 예복 입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것과, 땀을 많이 흘려 옷이 축축한 것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어쩌겠는가, 예복은 하나뿐인걸. 자신의 바보같음을 한탄하며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장식검을 들고 자신의 막사를 나섰다.
아침안개가 희뿌옇게 껴서 시야를 방해받는데다 안개가 습기를 머금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축축한 옷이 더욱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괜히 바닥의 돌을 냅다 차버린 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유식의 막사로 향했다.
유식의 막사는 밖에서 언뜻 보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개미 기어가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마치 옛날부터 비워져 있던 막사처럼.
연은 천을 헤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조용해도 안에 유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의 예상과는 달리 막사 안에는 잘 정돈된 이불과 책상, 의자와 책상 위에 놓여진 책 비슷한 것과 뒤집어진 메모지 외에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은 의자에 앉은 후 책 위에 있던 메모지를 들어 뒤집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메모를 읽던 연의 표정이 갑작스레 경직되었다.
-연아, 이 메모를 보고 있느냐? 그럼 분명히 나는 이미 출발했겠구나. 나와 사사가와 군은 임무를 발령받고 새벽에 이 곳을 떠났단다. 급한 임무인데다가, 네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 키우리디스 교육관이 깨우지 않고 가자고 하여 부득이하게 너에게 알리지 않고 출발하게 되었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고.
연아, 이 메모를 보고 있다면 책도 거기에 있겠지? 그 책은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전투법을 써 놓은 기술집 비슷한 것이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네가 생명을 해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책에 검술을 써 넣지 않았다. 예부터 전해져 오던 우리나라의 고유 무공이라는, 사신무(四神武)를 써 놓았단다. 검술인이 갑자기 무슨 사신무냐, 유치하게 사신무가 뭐냐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단다. 나 자체도 맨 처음 사신무를 접했을 때 어린애 장난이라고 생각하였지.
하지만, 사신무는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사신무에 대해서는 책에 언급해 놓았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구나. 호위가 바쁘기도 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난다면, 혹시 부탁할 수 있다면 맨 처음에 있었던 숙소로 와 주지 않겠느냐? 우리의 숙소는 그 곳으로 판정되었단다. 나중에, 언제든지 오거라. 항상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연아, 너는 내가 인정한 유일한 내 제자이고, 유일한 일풍류의 후계자란다. 그 책에는 조금이지만 검법도 마지막에 써 놓았으니 혹시 검을 쓸 일이 있거든 그것을 보고 연습했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만 줄이겠다.
“사, 사부님...”
연은 메모지를 움켜잡고는 눈물을 흘렸다. 비록, 제자 인정을 받은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연은 그를 십년 이상 섬겨온 스승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 점은 유식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연은 책을 들어올렸다.
[사신무]
라고 물론 써 있지는 않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에게]라고 써 있을 뿐, 제목만 보면 편지 종류인 듯한 모습의 책이다.
“사신무라...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네 신수(神獸)들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하필 사신무인가.”
연은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사부님이 남겨주신것인데, 불평을 하다니. 그건 안되지.
연은 그 책 첫 장에 유식이 남긴 메모를 꽂아넣고 책을 덮은 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자신의 장식검을 들고 유식의 막사를 나섰다.
아직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닦으며 류헤이가 만나달라고 했던 것을 상기하고는 그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유식의 막사에 들어가기 전과는 달리 조금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의 막사도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같이 떠났을테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연은 류헤이의 막사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검 한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분명히 그가 쓰던 검이리라.
그리고 바로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들어 읽은 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물이다. 잘 아껴 쓰도록. 부러지면 죽는다. 너에게 주었으므로 이제 내 물건이 아니지만, 만약 함부로 다루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네 왼손을 베어버릴 테다.
“...그다운 말투로군. 뭐, 이래야 류헤이 씨겠지만.”
연은 피식 웃고 그의 편지를 잘 접어 검자루에 묶은 뒤, 검을 들어올린 후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데 시퍼렇게 광을 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류헤이 씨.”
연은 검을 다시 집어넣은 후, 한쪽 허리에 검을 차고는, 류헤이의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화린의 막사로 향하려던 그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곧 방향을 돌려 천막 가운데의 광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까닭은 없지.
한가운데에는 역시 쪽지와 함께 종이 한 다발이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용케 아침이슬과 안개에 젖지 않은 걸 보니, 키우리디스가 뭔가 해 놓은 모양이지.
연은 세 번째로 메모를 들어올렸다.
-스크롤을 찢으면 곧바로 자동으로 디멘션 게이트가 열린다. 우리는 임무 때문에 먼저 출발하니 알아서 갈 수 있도록.
이라고 써 있다. 연은 픽 웃으며 스크롤과 메모를 함께 들고 쫘악 찢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시커먼 구멍이 떡 하고 나타났다. 연은 갑자기 나타난 디멘션 게이트에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깜짝이야, 갑자기 나타나다니. 그런데, 디멘션 게이트를 이렇게 쉽게 열 수 있다니 놀라운데.”
디멘션 게이트 스크롤.
마족중에서도 중상위 이상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스크롤이다. 당연히 그가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이에 속한다.
연은 거침없이 디멘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처럼 차원의 통로를 이동하지 않고, 그냥 한번 빛이 번쩍 하더니 곧 그는 임시 숙소가 아닌, 어두컴컴한 하늘과, 검은 물, 그리고 거대한 성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거대한 성처럼 거대한 문을 양 옆에서 두 사람, 아니, 두 마족이 지키고 서 있었다.
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두 마족이 들고 있던 창을 연의 목에 겨누며 소리쳤다.
“정지! 누구냐!”
“인간 따위가 마계에 들어오다니, 간이 부었구나!”
연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 그게 아니라...”
“문답무용(問答武勇)! 마계에 올 정도면 꽤나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지? 어디, 실력을 증명해 보아라!”
두 마족은 곧바로 각각 그의 몸과 명치로 창을 내질렀다.
빠르기는 화살과 비슷한 속도로, 쾌격(快擊)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엄청난 속도였다.
연의 향상된 동체시력으로도 겨우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연은 한번 더 기겁하며 오른손에 들린 장식검으로 두 창을 왼쪽으로 쳐낸 다음, 오른쪽으로 몸을 피하며 다시 소리쳤다.
“저, 제 말좀...”
하지만 그의 말은 다시 두 마족의 외침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호오, 인간주제에 꽤나 빠르군!”
“그러니까 왔겠지, 자아, 이번에도 한번 막아보아라!”
그들은 뛰어오르며 창을 내리쳤다. 자세하게 보니, 창 끝에 검이 길게 달려있군. 창인줄 알았더니 언월도(偃月刀)였나?
위에서, 내려치는, 공격. 그럼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지.
연도 냅다 소리쳤다.
“일풍류(一風流) 상단(上段) 교룡격(蛟龍擊)!”
언월도를 내려치는 마족들, 어느새 장식검을 내려놓고 류헤이의 일본도를 발도로 뽑아드는 연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연의 검이 상대를 이빨로 뜯어제끼는 용처럼, 그들의 무기를 박살낸 후, 그들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목에 미세하지만, 상처가 났다.
둘은 땅에 내려선 후, 놀란 눈초리로 연을 바라보며 목을 쓰다듬었다.
쓰리다. 한낱 조그만 인간 꼬마 녀석이 우리 대마족에게 상처를 남겼다. 미세하긴 하지만, 정말 죽이려고 했으면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연도 만만치 않게 운이 좋았다. 만약 그의 검이 롱소드의 장식검이나, 류헤이의 일본도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검의 날카로움이 그를 살린 것이다.
연도 그걸 아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꽂아넣고, 장식검을 들었다.
“누구냐, 넌? 보통 인간이 아닌 듯 싶군.”
“그러니까, 용건이 있다고 하려고 했는데...”
“...미안하군. 요즘 마계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말이야. 하지만, 네가 수상한 사람이라도 우린 이미 막을 수 없다. 마계는 강자지존(强者至尊),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까.”
두 마족은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걸 본 연은, 소설이나 신화에서 극악(極惡)으로 묘사된 마족들도, 실은 그리 나쁘지 않고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에 난 뿔 정도랄까.
“에...”
“뭐, 용건이 있다면 들여보내주지. 하지만 신원은 밝혀야 해.”
“아, 예. 저는 키우리디스 교육관님의 조에 편성된 사신입니다. 이쪽으로 오라는 명을 받고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방금 도착했습니다.”
두 마족은 연의 얼굴을 토끼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 그럼 네가 그 마공녀님을 호위할...”
“마공녀님...이요? 아, 예. 맞습니다. 교육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두 마족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몰라뵈고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제 오신다고 했는데, 오늘 오셔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마계의 법칙이 강자지존, 약육강식이라고 했던가. 강자에게는 깍듯이 대하는구나.
연은 당황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들의 설명을 들은 후에 그들이 열어준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는 허리정도의 마족부터 천장에 닿을 듯한, 신장이 4미터는 되어 보이는 마족까지 다양한 크기의 마족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연은 숨가쁘게 돌아다니는 그들을 숨가쁘게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쿵
“으앗.”
“어이쿠.”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연은, 가슴께 키의 마족과 부딪혔다. 하지만 넘어진 것은 연이고, 그 마족은 잠시 주춤했을 뿐이었다.
연은 급하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냐.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무슨 볼일인가, 마왕님의 성채에?”
“아, 그...마공녀님의 호위로 왔는데요...”
“마, 마공녀님의 호위?”
그가 크게 소리치자 주위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며 시선이 연에게로 몰렸다.
무안해진 연은 얼굴을 가리며 그 마족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 예, 그건...”
하지만 그의 말은 곧 뒤에서 걸어오는 누군가가 한 말에 잘려버리고 말았다.
“...남궁 연인가?”
예의 그 타이즈 마족인가. 하지만 파란색 눈을 가진 그 마족은 타이즈가 아닌, 가죽 바지에 긴 부츠, 거기에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 마족은 차가운 시선으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예. 저, 맞습니다.”
“마공녀님의 호위가 되었으면, 마공녀님과 원로 장로님들, 마왕님을 제외하고는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마라.”
“아.”
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 마족은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뭐하나, 작업에 복귀하지 않고? 그렇게 넋놓고 보고만 있을 건가?”
그러자 곧바로 모든 마족들이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연과 부딪힌 마족도 연에게 한번 꾸벅 인사하고는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파란 눈의 마족은 연에게 손짓하였다. 손가락을 까딱이는걸로 보아 오라는 뜻이겠지.
연은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갔고, 그는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 연은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그가 느낀 것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반갑다. 마공녀님의 호위대에 입사한 것을 축하한다. 그럼 일단 마공녀님을 만나뵈어야겠지? 이쪽으로.”
다른 마족들에게는 냉랭하지만, 몸을 부대끼는 호위 조원들에게는 인자한 모양이다. 아마 그가 대장이겠지.
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한쪽 귀퉁이로 걸어가며 활발하게 말했다.
“이봐, 너무 겁먹지 말라고. 우리들도 꽤나 실력이 있거든. 마공녀님께서 너를 선택하셨을때, 우리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도 너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네 실력은...아직 모르지만, 잠재 능력을 느낄 수 있는 나는 너의 잠재능력을 높이 사, 반대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에우리카 케레스 드 미아첼. 호위 부대의 수장을 맡고 있지.”
“아, 예, 그...”
그...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차가운 인상이 사라진 얼굴은 미인의 얼굴이었다. 연은 그 얼굴이면 마공녀의 아름다움과 맞먹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지구 전체에서 이만한 미녀는 찾아볼 수 없을걸,
“대장, 또는 수장, 아니면 에우리카라고 불러. 이왕이면 이름 쪽이 좋은데, 편하게 부르도록.”
“예, 예. 에우리카 씨.”
에우리카는 미소를 짓고-지은 듯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아 실제 표정은 알아볼 수 없다-계속 말을 이었다.
“이쪽으로 쭉 가면 마공녀님의 방이 나온다. 가서 인사드리고, 정식으로 호위대 편성을 받는 거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공녀를 다시 만나는 건가.
“그 후에는...”
에우리카의 목소리가 음침하게 깔렸다. 연은 움찔하더니 떨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계란 곳에 처음 온, 꼬마 인간. 유일한 인간. 얼굴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오렌지색 머리와 황금빛 눈이 묘한 매치를 이루며 신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꼬마 인간. 에우리카는 왠지 이 녀석은 다르다 하는 느낌을 받으며 몸을 돌려 그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환영식을 하는 거지. 아, 그런데 누가 머리 만지는게 싫어?”
“예? 아, 아뇨. 별로.”
“그렇지?”
에우리카는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인간 기준에서는 성인 비슷한 나이일텐데, 동안(童顔)인가, 아직 귀여운 듯 하군.
그녀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열고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공녀님, 남궁 연이 도착하였습니다.”
안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에우리카는 연에게 턱짓을 했고, 연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격려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휘황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긴, 마왕의 딸이니까.
마공녀의 방은 분홍색 일색이었다. 천장, 바닥, 심지어 침대와 그 위에 드리워진 휘장까지도. 누가 소녀의 방은 분홍색으로 꾸며야 한다고 주장한거야? 뭐, 본인이 좋으면 상관없겠지만.
침대의 휘장이 걷히더니, 곧 파자마를 입은 에메랄드 빛의 눈과 분홍색 머리-머리 때문에 방의 색깔을 분홍색으로 했는지도 모른다-를 가진 소녀가 걸어나왔다.
연은 급히 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소녀는 조용하지만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버님의 성채에, 제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7번째 대원 남궁 연. 제 이름은 엘레니어스 라이르츠 슈크릭크트 헤게모니움. 엘렌이나 엘레나라고 불러주면 감사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