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7) 사랑은 타이밍이다.
10년 만에 다가온 폭염이라고 떠들어 대던 기상 캐스터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4월 말 날은 여름날씨처럼 폭염으로 휩싸였다. 이른 더위에 은행 안은 에어컨 도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저, 통장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근처 책방 아르바이트생이 신애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신애는 평소와 다름없는 사무적인 태도로 일을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바쁜 시간은 아니지만, 신애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일을 처리했다. 일종의 쾌감이었다. 저번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진행하면 할수록 무언가 가슴속에서 뿌듯함이 자리 잡았다. 신애는 통장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 신애에게 알바 생이 무언가 하나를 내 밀었다. 캔 커피였다. 제법 시원해 보이게 캔 커피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매달려 있었다. 신애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살짝 들어올려 앞에 서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캔 커피를 내민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잘 알지도, 그렇다고 말을 제대로 해본적도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캔 커피를 내밀 이유 따위는 없어보였다. 신애는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셔요. 더워 보이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손님.”
신애는 마지막 손님이라는 단어에 제법 힘을 주어 말을 하며 더욱 재빠르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본 진아가 방긋 웃으며 ‘제가 마셔도 될까요?’ 라고 말했다. 진아는 사람을 배려하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진 아이 같았다. 항상 자신 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진아의 성격상 아마도 앞에 서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무안함을 감추어 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신애는 아는 척 하지는 않았다. 그 상황을 모면하려 더욱 더 일을 재빠르게 처리할 뿐이었다. 진아의 말에 남자는 시원해 보이는 캔 커피를 진아에게 넘겼다. 다른 사람에게 주목 받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더욱이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된 자신의 마음속에 누군가 들어오는 일 또한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은 한 강 이라는 사람만으로도 벅차다고 신애는 생각했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매일 은행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항상 신애에게 캔 커피를 건넸다. 분명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는 행동 같았다. 어떨 때는 그 남자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날 때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진아가 신애에게 물었다.
“언니는 바람피울 생각 없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엔 책방 알바 생이 언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나보다 한참 어린걸. 그리고 바람이라는 건......”
신애는 진저리가 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바람.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는 단어였다. 그 바람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애를 태우고, 속앓이를 했는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잘 생각해 봐요. 언니 연애도 오래했잖아요. 다른 남자친구 만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신애씨는 다른 남자가 매달리고 매달려도 눈길한번 안줄 여자라는 거 몰라? 신애씨와 바람이라는 단어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진아의 말에 뒤에 앉아 스포츠 신문 낱말 맞추기에 여념이 없던 유대리가 말했다. 유대리의 말에 진아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10년 동안 한 사람을 사귀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에요? 결혼해도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너무 오래 산 부부 같은 느낌 날 것 같은데요?”
“그거야 모르지.”
유대리는 선을 봐서 결혼한 사람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연애한번 변변히 못해본 그가 선본지 한 달 만에 결혼에 성공했다. 아직까지 그는 신혼인 마냥 부인과, 자식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진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하면 안 좋지 않냐고……. 그 물음에 대답하던 유대리의 대답은 잊을 수 없었다.
[아니, 아직도 연애 기간 같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향후 10년간은 아마도 그 여자와 연애하느라 정신없을 것 같은걸?]
그 말을 하면서 유대리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머무는 것 같았었다. 진아의 말에 신애는 변변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며칠 전부터 알바 생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태연할 여자가 몇이나 있을까? 신애는 자꾸 자신의 시선이 책방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은행 앞 통유리 너머로 알바 생이 지나갈 때면 의도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그날 저녁 집으로 향하던 신애는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는 듯한 느낌에 걸음을 재촉했다. 나중엔 제법 뛰듯이 걷는 그녀의 앞에 불쑥 책방 아르바이트생이 그녀의 걸음을 막아섰다. 은행 앞에서부터 따라온 듯 남자의 얼굴에는 작은 땀방울들이 송송 베어 나왔다. 마치 그가 건넸던 캔 커피 표면의 물방울처럼 그는 그런 모습으로 신애의 걸음을 막아섰다. 남자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었다.
“저, 저, 저랑 연애 합시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신애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마 저 말을 하기위해 수만 번을 연습했겠지? 라는 생각이 신애의 머릿속에 들었다. 신애는 문득 자신이 처음 우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도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처럼 확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사랑하면 모두 똑같은 수순을 밟는 것인가? 신애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한때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신애는 이럴 때 취해야 할 행동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는 단호하게 대답해야 그 사람이 미련을 끊는다. 너무나도 잘 아는 공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그런 가혹한 시련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신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보잘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사람도.......”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반쪽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한 강은 슬쩍 신애의 곁에 다가서며 그 알바 생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 어디서도 흥분이나, 분노, 그런 감정들은 없어보였다. 마치 아는 동생 달래듯 그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 저......”
“지금 물어볼 생각이지? 그럴 거라면 하지 마. 이 여자 임자 있는 여자니깐.”
한 강은 방관자의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고해바치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이가 본다면 아마 신애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고해바치는 사람으로 비춰질 정도였다. 한 강의 말에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에 당황함이 역력했다.
“세상의 반이 여자야. 너무 실망할건 없잖아.”
남자에게 한 강이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어깨를 추욱 내리고선 걸음을 돌렸다. 다른 말은 없었다. 마치 패배를 인정해 버린 패잔병처럼 그 남자는 그렇게 돌아섰다. 그가 다 돌아서자 한 강이 입을 열었다.
“진짜 남자네!”
“네?”
“저 사람 말이야. 진짜 남자라고.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는 저 신사적인 태도. 정말 멋지네!”
한 강은 그 남자를 정말 존경한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며칠 전 자신에게 그렇게 통보하듯 사랑한다는 말을 쏟아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 강은 태연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동안 연락 못하다 그냥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태연히 행동하고 있었다. 신애는 문득 그로 인해 고민하면 밤샌 며칠이 아까워 졌다. 자신만 몸 달아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신애는 한 강을 쳐다보았다. 그때 한 강이 신애를 보며 말했다.
“사랑은 타이밍이야!”
“그게 무슨…….”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없었다면, 저런 애송이에게 그동안 공들인 여자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 안 그래? 풋.”
한 강은 제법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사라진 모양으로 웃음 지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또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이제는 완전 박신애 스토커가 다 됐어.”
“그럼 은행 앞에서부터 날 쫓아온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쫓아온 것은 어수룩하게 자신을 낮춰서 사랑을 느끼는 남자에게 단념시키는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니었어. 제법 용기 있게 돌진하는 남자의 순정을 쫓아온 거지.”
한 강은 팔짱을 끼고선 신애를 바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악당을 물리친 만화 속 주인공처럼 당당함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부족한 여자라는 건 사실인걸요.”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부족해. 완벽한 사람이란 없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지는 않아.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 대긴 해도 말이야.”
“그건……. 내 성격.........”
“아냐. 됐어. 그만 말해. 당신의 성격 탓 이야기는 이제 지긋하니깐 말이야! 어때? 저녁 사는 거 말이야!”
“무슨 일로 내가 저녁을 사야 하는 건가요?”
“뭐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나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지 않겠어?”
한 강은 마치 예전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도 안 되는 호기를 부렸던 것처럼 그렇게 신애에게 다시 말도 안 되는 고마움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 강의 태도가 싫지만은 않은 신애였다. 아니 어쩌면 그런 핑계로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만약 그가 정식으로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면, 또다시 고민에 빠졌을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한 강은 그녀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고백 이야기는 아주 없었던 일처럼 한 강은 다시 그의 충실한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신애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애써 자신을 위해 그러리라는 것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 걸까? 라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뭐가 먹고 싶은데요?”
“가자.”
신애의 말에 한 강이 먼저 앞서 걸으며 말했다. 신애는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문득 신애는 ‘이렇게 한 강을 만날 줄 알았으면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을 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은행 유니폼 차림이었다. 신애가 유니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의 앞에서 아니 한 강의 앞에서 유니폼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는 게 새삼 부끄러운 신애였다. 신애가 자신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걷는 한 강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야겠어요. 지금 옷차림으로써는.......”
“어디 멀리 갈 것 아니니깐 그냥 와.”
한 강이 뒤 돌아 보며 말했다. 앞서 걷는 듯 했지만 그는 신애의 행동에 신경 쓰고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순간 신애는 우현이 떠올랐다. 항상 자신이 쫓아가기 바쁘게 걸어갔던 사람. 등 밖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 가끔 감싸 쥐는 신애의 손을 귀찮다는 듯 매몰차게 내 쳤던 사람. 그 사람과 한 강은 다른 사람이었다. 한강은 신애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그는 신애보다 앞서서 걷고 있었지만 때때로 신애를 뒤 돌아 보고 신애가 멀어지지 않도록 걸음을 늦추기도 빨라지기도 하였다. 신애는 그런 그의 배려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신애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넓고도 듬짐해 보이는 등이었다. 문득 그의 등에 기대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어. 박신애. 혼자 너무 앞서가지 말란 말이야. 그러다가 상처 받는 것은 너라고.]
신애는 자꾸 마음을 품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연신 그의 손에 시선이 갔다. 그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신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신애는 한 강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자꾸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의 사랑을 부정하고 있었다.
[10년동안 좋아한다고 믿었던 사람도 순식간에 뒤돌렸어. 그런데 이 세상에 아직 사랑이 있다고 믿는 거야?]
신애의 마음 한편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신애는 두려웠다. 이렇게 다가온 한 강이 어느 날 불쑥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버린다면, 정말 평생 사랑을 불신하게 될 것 같아 그게 두려웠다.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우면서도 눈이 자꾸 그를 향했다. 그의 손에 향하고, 그의 입술에 향하고, 그녀의 심장이 두근대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신애의 가슴이 한 강을 볼 때면 두근대었다. 어느 날은 아련히 젖어들기도 하고, 어떤날은 미친 듯 뛰기도 했다. 신애는 여전히 마음속에서 그의 사랑을 인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하고 있었다. 문득 신애는 자신의 운명을 실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한 강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자신의 손을 지금 이 순간, 다른 순간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신애는 주문을 걸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 그의 사랑을 인정하자, 신애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였다. 한 강의 커다란 손이 신애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쥔 것은.
“어서와. 이렇게 느려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 신호등 바꿨다. 뛰자!”
신애는 그에게 손이 잡힌 채 신호등을 향해 뛰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신애는 자신의 옆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한 강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당신이 내 인연일까요?]
그런 신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강이 횡단보도를 건너 뛰어가며 신애를 힐끔 보며 말했다.
“사랑은 타이밍이야! 딱 그 타이밍에 딱 그런 행동을 해주었으면 할 때 그게 사랑의 시초거든!”
신애는 자신의 마음속을 한 강이 꿰 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을 그가 눈치 챈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한 신애였다.
“아까부터 당신 손을 잡고 싶었는데 완벽한 구실이 없잖아. 하지만 이보다 완벽한 구실이 어디 있어? 안 그래? 깜박이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손을 잡았다. 말이야!”
한 강은 신애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꼭 신애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이 신애가 원하는 남자가 되어주고 있었다. 항상 곁에 있어도 허전하고 외로움을 느꼈던 우현의 곁과는 달랐다. 한 강은 그녀를 끊임없이 챙겨주고 그녀를 감싸주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신애는 불안했다. 한 강이 자신에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우현에게 받은 상처가 다시금 되살아나 그녀를 힘들게 했다.
[나 또다시 상처받으면 어쩌죠? 사랑이란 거, 이제는 믿지 못하겠어요.]
신애는 한 강을 바라보며 그렇게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한 강의 넓은 등에 기대고 싶으면서도 한 없이 그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인지……. 신애는 자신의 마음조차 알 수 없었다.
“불안 한거야?”
신애의 어두운 표정을 읽었는지 한 강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신애는 아무 말 없이 땅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에 한번 데이면 사랑을 불신하게 되지. 하지만 곧 다시 믿게 될 거야. 다시 빠지면 맹목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사랑이니깐.”
“우리 나이에 사랑 타령만 하는 것도 웃긴 거예요.”
“나이가 들든 안 들든, 우리도 사람인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불신과 믿음이 공존하게 되어있어.”
“가끔 당신은 사춘기 소년 같은 말을 해요.”
“이래 뵈도 로맨티스트인걸.”
한 강은 신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맞잡은 손의 따스한 온기가 신애의 손바닥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신애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믿음직한 손이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 세상 어떤 근심도 사라질 것만 같은 마술과 같은 손이었다. 신애는 묻고 싶었다. 한 강에게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 왜 자신같이 모자란 여자를 채워주려 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신애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그런 신애를 잡고 한 강이 향한 것은 학교 앞 분식집이었다. 조금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가게 안은 한가했다.
“나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켜도 돼?”
“그럼요.”
“뭐 먹고 싶어?”
“저는…….”
“뭐 먹고 싶냐니까?”
“제가 결정해서 먹은 적이 없어서 못 고르겠어요.”
“그럼 그동안은 누가 결정해 줬는데?”
“우현이요. 우현이가 먹고 싶은 게 곧 제가 먹고 싶은 거였거든요.”
“당신은 상당히 줏대 없는 여자였나 보군. 좋아. 오늘 당신 먹고 싶은 게 생각날 때 까지 시키지 않고 있겠어.”
한 강은 정말 그럴 거라는 듯 팔짱을 끼고 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애는 난감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그럼, 떡볶이…….”
“뭐 딱히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은 걸 시켜서 조금 그렇지만, 한번은 봐주겠어. 언제까지 남이 결정해 주는 걸로 살수 없는 거잖아. 당신도 당신만의 생각이 있을 테고. 이제부터 그런 연습을 하라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화나면 화난다고 하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하고.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버릇을 들이란 말이야.”
한 강은 핀잔을 주듯 신애에게 말하고는 아주머니를 향해 ‘여기 떡볶이 이인분이요!’를 외쳤다. 신애는 한 강의 말이 밉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야단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밉지 않은 까닭은 그 내면에 그녀를 위한 그의 마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