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오해의 불씨는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놀러 가고 싶다.”
한참을 정신없이 일하다 조금 한가해 지자 진아가 의자에 눕듯 기대며 중얼거렸다. 진아의 말에 신애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완연한 여름의 한 가운데 였다. 어느새 파릇하던 잎들은 무성한 짙푸른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얇은 긴 팔 차림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짧은 옷으로 갈아입고 바쁘게 거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은행 안은 좀더 온도가 낮추어 진채 윙윙거리는 에어컨 소리로 시끄러웠다.
“정말 어디 시원한 곳에서 일주일 정도 쉬었다 오면 원이 없겠네!”
뒤에 있던 유대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정말 어디서 여행 바람이라도 부는 것인지 신애 역시 이런 날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더운 날 지친 일상에 찌든 하루였다. 더욱이 이렇게 더운 햇살이 가득한 날이면 이국적인 에매랄드색깔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날이었다. 신애는 은행 벽에 걸려있는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5분만 있으면 퇴근 시간이었다. 신애는 슬슬 소지품을 핸드백에 챙겨 넣으며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워서 그런지 손끝으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날이었다. 잔뜩 쳐진 꼴을 하고 은행 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개 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애야, 놀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강이 선텐된 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신애가 한 강의 곁에 다가 와 물었다. 신애의 물음에 한 강이 일어서려는 듯 하다가 다리가 저린지 다시 앉아 다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글쎄, 내가 워낙에 시간개념이 없어서.”
아이처럼 웃는 한 강을 따라 신애가 같이 미소를 지었다. 서 있는 신애를 향해 한 강이 손을 내 밀며 투정을 부렸다.
“좀 잡아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봐.”
신애는 한 강이 내민 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잡지는 않았다. 한 강이 어서 잡아달라는 듯 다시 한번 신애를 향해 쭉 뻗은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신애가 한 강의 손을 잡았다. 한 강은 그렇게 잡은 신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날씨가 너무 좋지?”
한 강이 말처럼,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해는 아직 하늘에 떠있었다. 아직도 환한 대낮처럼, 밝은 날에 신애가 웃으며 말했다.
“꼭 땡땡이 치고 돌아다니는 학생 같아요!”
“그래? 참, 오늘 나 차 안가지고 왔어!”
한 강이 말에 신애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신애의 얼굴을 쳐다보다 한 강이 먼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키스해 버릴 지도 모르니깐.”
수줍어하는 그의 말에 신애가 피식 웃었다. 더운 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그 둘을 스쳐 지나갔다. 맞잡은 두 손 사이로 땀이 배어 나왔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그때 온 버스를 향해 한 강이 뛰어 갔다. 버스에 타자 신애가 한 강에게 물었다.
“어디 갈꺼예요?”
“아니, 오늘은 그냥 너랑 같이 버스를 타고 싶었어.”
한 강의 말에 신애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둘이 앉을 수 있는 의자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 강이 여전히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신애가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바람 사이로 그녀의 머리칼이 기분 좋게 날렸다. 서로 말이 없었다. 한 강도 그녀도 서로 말 없이 그렇게 가는 버스 안에서 같이 앉아있었다. 불편 하지 않았다. 전혀 불편함 없었다. 침묵이 다가오면 서로 무엇인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따위는 서로 없었다. 서로 그렇게 맞잡은 손만으로도 충족감이 일어났다. 한 강과 신애는 한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창 밖에 스쳐지나가는 여름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한 참이 지난 후 신애의 머리가 한 강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져 왔다. 한 강이 신애가 불편하지 않게 어깨를 살며시 내려 주었다.
[이 사람이 날 배려하는구나.]
신애는 옆에 있는 한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래 만나지 않았지만, 오래 만난 것처럼 자신을 배려하는 그가 무한히 고마웠다. 신애는 고맙다는 말 대신 꽉 잡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었다. 한 시간 가까이 버스에 타고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내리고, 타는 걸 지켜보면서 둘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자신들 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 차가 신애의 은행 앞편으로 돌아왔다. 둘은 버스에서 내렸다. 어느새 해는 저쪽 산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어두컴컴해진 길을 따라 신애와 한 강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많이 길어졌지?”
“그러게요. 오늘은 은행 안에 앉아있는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휴가 때 갈래?”
“어디로요?”
“바다 보러 가자!”
한 강이 신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한 강의 표정을 보며 신애는 불안했다. 자꾸만 그에게 빠져가는 자신이 불안했고, 그럴수록 그가 의심스러워 지는 자신이 불안했다. 어느새 다 온 신애의 아파트 앞 현관에서 한 강이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벌써 10분째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 한 강을 향해 신애가 웃으며 말했다.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거예요?”
“놔 줘야 하는데……. 아쉽잖아.”
한 강이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신애에게 말했다. 그러다 결심한 표정으로 신애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강이 씨도요…….”
수줍어하며 말하는 신애의 대답에 한 강이 눈이 똥그래지며 되물었다.
“뭐라고?”
“뭐가요?”
“방금 뭐라고 했냐고.”
“강이 씨도요 라고 했잖아요!”
“그거 알아? 처음 인거 말이야. 당신이 내 이름 부른 게 처음이야.”
한 강이 뛸 듯 기뻐하며 어리둥절해 있는 신애를 향해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한 강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신애는 자꾸만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우현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것에 한 없이 기뻤던 적이 있었다. 기뻐하는 한 강을 뒤로 하고 신애가 계단을 올라섰다. 2층까지 올라가 계단 창문으로 내다보니 한 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서 가요.”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한 강의 외침에 신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뒤 배란다로 향했다. 한 강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보면 자꾸만 내 모습이 떠올라요.”
그때 신애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핸드백을 뒤져 핸드폰 액정을 보니 ‘우현’ 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신애가 핸드폰을 조심히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지금 집 앞이야. 잠깐만 나와봐.]
일방적인 그의 말이었다. 말을 마친 우현의 핸드폰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신애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꺼버린 그의 태도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신애는 끊겨버린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한 강과 헤어진 참에 딱 시간 맞추어 온 우현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우현이 설마 자신을 기다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우현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우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신애는 황급히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는 우현이 서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우현이 신애를 먼저 알아보았다.
“왔어?”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신애가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처음이었다. 헤어진 이후 이렇게 둘이 같이 서 있은 것은. 10년 동안같이 지냈지만, 왠지 모를 서먹함이 둘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우현은 담배 필터가 보일 때 까지 담배를 빨아대었다. 순간 신애는 자신도 모르게 우현의 담배를 향하는 자신의 손을 억제하고 있었다. 버릇이었다. 좋지 않은 담배 뭣 때문에 피냐고, 무언가 한 마디 해야 할 것만 같은 익숙함이었다.
“잘 지냈어?”
우현의 물음에 신애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신애는 우현을 바라보았다. 많이 마른 듯한 그의 모습에 신애의 마음역시 좋지 많은 않았다.
“나 간다.”
신애는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서는 우현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를 잡으면 한 강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로써 쓸쓸히 돌아서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 까지 보아줄 뿐이었다. 한참을 서 있던 그녀가 뒤를 돌아 집으로 향하던 그때 한 강이 멀찌감치 떨어져 신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신애는 은행문 앞에 연락도 없이 서 있는 한 강을 보았다. 한 강은 잔뜩 초췌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끌고 주변 생과일 전문점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앉자마자 신애가 잔뜩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한 강은 고개만 가로 저을 뿐 말이 없었다. 둘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한 강이 간간히 그녀를 보며 입술을 움찔 거렸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한 참을 망설이던 한 강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난 사이 신애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한 강의 지갑으로 향했다. 처음엔 그냥 한번 시선이 간 것뿐인데, 한참이 지나도 그가 오지 않자, 펴보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신애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자신을 유혹하는 그 지갑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펴보고야 말았다. 한 강의 지갑 첫 번째 칸에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그의 지갑에 다른 여자와 다정스레 찍은 그의 사진을 보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녀였다. 한 강이 들어오는 것을 본 신애가 황급히 지갑을 닫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두근거림의 끝에는 한 강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 지고 있었다. 앉아있는 동안 신애의 머릿속에는 한 강이 왜 자신을 만날까? 다정스레 찍은 여자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수도 없는 질문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 한 강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에 우현은 왜 만난거야?”
질책스러운 말투였다. 그의 말투는 다감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잔뜩 꼬인듯한 그 말투에 신애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봤어요?”
“그래…….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거야?”
그의 말에 신애가 앞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우현과 같이 있는 자신을 봤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우현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상태였고, 한 강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강은 자신에 대한 불신어린 말투였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말투로 그녀에게 캐묻고 있었다. 신애는 그것이 싫었다.
“................”
“왜 대답이 없어?”
“당신이 지금 내가 그를 잊지 못한다고 믿고 있고, 그러면서 나에게 묻는 거잖아요. 내가 잊었다 해도 믿지 못할꺼잖아요.”
“제길!”
신애의 대답에 한 강이 낮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처음이었다. 한 강이 욕하는 모습,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신애는 놀라웠다. 한 강의 태도에 신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와 그를 오해하는 거예요?”
“오해할 만 한 행동을 하고 있잖아!”
한 강의 고함소리에 생과일 전문점에 있던 학생 몇 명의 시선이 그와 신애에게로 향했다.
“날 믿지 못하는 거예요?”
“이건 믿고 못 믿고 하는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에요. 당신이 날 믿지 못하니깐 이러는 거잖아요!”
“당신이 날 못 믿게 만들고 있잖아!”
한 강이 잔뜩 화가 난 말투로 되받아 쳤다.
“믿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뭘?”
“됐어요. 그만 하죠.”
신애가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창 가로 돌려버렸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날 다 아는 듯한 말투로 말하지 말아요! 고작 우리가 만난지 3달도 채 되지 않았잖아요.”
“기간으로 따지는 건가? 그럼 10년 동안 만난 우현이라는 그 작자는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겠군!”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당신에 대해 내가 단단히 오해했어요!”
“나에 대해 착각을 했다는 건가? 그래 당신 마음대로 해!”
한 강이 격양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신애는 나가는 그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한 참을 그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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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많은 분들이 리플 달아주셔서 기운이 났습니다. 글이 안풀려서 하루종일 우울함의 극치를 달렸었거든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