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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24> 나를 살려낼 단 하나의 심장 (완결편)

초록물고기 |2005.05.13 00:36
조회 1,423 |추천 0

 

사람을 두고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클럽을 나가던 진서가 늦게까지 남아있는 새 회원 때문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커룸까지 모두 정리를 끝내고 나오자 방금 전까지 운동을 하고 있던 회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트레이닝 차림의 젊은 여인이 급하게 빠져나와 옆 건물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인이 다가가자 입구에 세워져 있던 차의 검은 창문이 내려지고 지윤이 하얀 봉투를 건넸다. 

 

  “키는...”

 

여인이 봉투와 클럽 열쇠를 교환하고 사라지자 지윤이 탈의실 쪽으로 세어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또 다시 세상이 자신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 가방을 들고 나온 진서가 문 쪽을 향해 걷다 약간은 매캐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해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었다. 이중문이 모두 바깥에서 잠기도록 돼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더 심해져 돌아보았다. 탈의실에서 세어 나온 연기가 이미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사색이 된 진서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다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 연결 음이 들리지 않자 그 얼굴에 하얀 공포의 전율이 번지기 시작했다.

인화성이 강한 내부의 합성자재들이 따다닥 소리를 내며 화기 속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코를 찌르고 목을 태울 듯한 가스들이 호흡 속으로 빨려들었다. 다시 입구 쪽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사무실과 식당가들은 모두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구조를 청하며 문을 두드리다 급한 호흡으로 패까지 흡입된 가스에 머릿속이 혼미지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가 창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나 주저앉은 다리가 이미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사무실 문 앞까지 다다른 지윤이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떠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그 의지마저도 내려앉는 눈꺼풀과 함께 닫히고 있었다.

지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의 저편으로 자신을 옮겨놓으려 할 때 뭔가가 그 몸을 들어 올렸다. 희미하게 사람소리가 들려왔고 타들어가든 호흡 속으로 맑은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옮겨라.”

 

사내들이 진서를 데리고 나간 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한필중이 옆 건물의 사람들이 놀라 신고를 하고 떠들 썩 해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 조용히 빠져나왔다.      

한필중이 몇 년 전 지윤이 잠시 요양을 했던 병원의 담당의를 만났다. 지윤의 병적인 집착과 그로인해 생겨날 수 있는 변화의 위험성을 전해 듣고 몇 가지 서류를 받아 자신을 찾아왔던 김형사에게 전화를 했다.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날 것을 예감했다.


지윤이 섬진강의 과수원을 시가보다 더 지불하고 손에 넣었다. 그리고 호시탐탐 먹이를 놀이는 들짐승처럼 진서 곁을 맴돌며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 밤 붉은 화마가 입을 쩍 벌린 불기둥 속에 진서를 던져 넣어 자신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재물로 써려했다.

한필중이 그 모든 것을 눈치 채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여 그 목줄을 옭아맬 동화 줄을 얽어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미련했던 사랑을 갈기갈기 씹어 삼켜 분쇄시켜 버린 그였다. 그 사악한 심장 속에 녹슬고 저주받은 자신의 뼈를 깎아 대못을 쳐 넣을 것이었다. 그리고 검은 피를 쏟아내며 처절하게 꺼꾸러지는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는 결코 용서하지도 참아내지도 못할 분노였다.


세 시간을 달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타고 오르자 진서가 차창을 열고 맑은 공기를 깊게 호흡했다. 농장 입구에 다다라 정재가 더 오르지 않고 입구에 차를 세웠다.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고 가벼워 보이는 진서가 한편으로는 더 걱정되고 있었다.

 

  “좀 걸어요.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산장이 나오니까 차는 여기 세울게요.” 

  “그래요. 공기가 좋아서 걷는 것도 괜찮아요.”

 

초여름의 바람이 상쾌하게 코끝으로 불어들었다. 그 바람에 진서의 하늘빛 원피스자락이 하늘거리며 농장의 풍경 속으로 스케치 되었다. 아주 잠깐 길옆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을 뿐 늘 그곳을 오르던 사람처럼 너무도 익숙하게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정재의 발걸음이 자꾸 처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진서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

산장 아래 정자에 이러러 잠시 멈춰선 진서가 깊은 숨을 들이켜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뒤따라 온 정재를 돌아보며 엷은 웃음을 흘려냈다.

 

  “올라가 봐요. 난 담배한대 피고 올라갈게요.”

 

첫 계단을 밟아 올라섰다. 살며시 눈을 감아 길고 흰 손을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 시간 손길을 받은 나뭇결이 매끄럽게 흘러 사람의 흔적을 그 속에 스며 담고 있었다. 부드럽게 흔적을 스치며 발걸음을 옮겨놓던 진서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을 감고도 보폭의 간격과 나뭇결 사이의 옹이마저도 손끝이 알아 흐름을 타고 있었다. 눈을 감아 시선을 닫아버린 감각이 코끝으로 스치는 유채 향을 다른 빛깔로 느끼게 했다. 동준이 세상의 빛을 닫아버린 그 순간부터 함께 배워온 느낌이었다.

    

  - 같은 움직임으로...

    같은 보폭으로...

    당신 흔적위에 내가 있었습니다.

    눈을 열어 보지 않아도 온몸이 그 기운을 알아 심장으로 가져온 빛깔을 저 또한 배웠습니다.

    당신이 손끝으로 보기 시작한 그날부터...

    당신 손길 스친 모든 곳에 내 손끝이 닿았었고...

    당신 시선 흐르던 모든 풍경을 내가 담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켜보던 정재가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그 작고 섬세한 움직임을 그대로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 입가에 실바람 같은 미소가 일다 부서졌다.


  - 당신이 그를 느끼는군요.

    짧지 않은 시간을 그토록 평온하게 견뎌낸 이유가 이것이겠지요.

    내가 차마 당신 원하지 못한 이유 또한 이것이겠지요.

    당신 사랑한 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그가 다르지 않음을 이제야 비로소 완전하게 받아들입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재촉하지 않던 발걸음이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그 짧은 순간이 천상의 문을 여는 것처럼 긴장으로 저려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 있었다. 진서가 산장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문소리에 시선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심장이 서로를 바라보아 주위의 모든 것이 물러나고 있었다. 오직 서로에 대한 존재감으로 채워진 가슴이 금방이라도 둑을 터트리고 넘칠 듯 물살을 쏟아내 누구도 먼저 입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굵게 웨이브가 져 어깨까지 늘어져 있던 머리가 말끔히 정돈돼 예전의 그로 돌아가 있었다. 약간은 더 수척해진 얼굴이 간밤의 깊은 혼란을 짐작케 했다.

그리움으로 채워진 하루가 모여 태산 같은 일년이 흘러도 또 다시 처음인 냥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것처럼 수없이 단련하고 연습한 태연함이 쉽게 그 얼굴에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입술이 경직되고 목줄이 조여 파르르 떨리는 심장의 진동만이 호흡으로 새어나고 있었다. 

 

  “.....들어와요......오는 길이 좀 험하죠.”

  “아뇨....괜찮았어요.”


동준이 익숙하게 자리에서 빠져나와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며 다시 말을 건넸다.  

 

  “커피...괜찮죠.”

  “.......네.”

 

주전자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위에 올려놓은 동준이 냉장고 문을 열고 과일 바구니를 꺼냈다. 그 모습을 뒤따르고 있는 진서의 시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다 접시를 내려놓고 과도를 든 동준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할게요.”

 

동준이 다급함이 묻은 그 목소리에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뭔가를 들킨 듯 알 수 없이 불안해 움직임에 더 많은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괜찮아요....그냥 있어요.”

 

동준이 익숙하게 과일을 깎아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진서에겐 호흡을 멈추고 있는 것처럼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동준이 다 깍은 과일 접시를 탁자로 옮겨 놓고 돌아설 때 문이 열리고 정재가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약간은 과장된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형 그동안 말끔해 졌네. 손님 온다고 신경 좀 썼구나.”

  “그래. 간만에 시내까지 다녀왔다.”

 

안으로 들어오던 정재가 싱크대와 탁자 중간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의자를 지나오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한쪽으로 당겨놓았다. 그것을 본 진서가 놀라 무슨 말을 하려다 목으로 삼키고 동준을 보았다. 이미 과일 접시를 두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발 짝 이상 당겨진 의자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곳에 손을 뻗어 싱크대의 위치를 가늠한 다음 주전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진서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동준이 가늠해 놓은 곳에 주전자가 없자 당황해 하며 다른 쪽으로 팔을 움직였다. 등 뒤의 진서를 의식해 조금씩 몸이 굳어가고 있었고 이마와 등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만 하세요”

 

어느새 진서가 동준의 뒤로 다가와 있었고 동준이 놀라 뻗은 팔을 거두다 주전자 손잡이를 쳐 뜨거운 물이 그대로 손목으로 쏟아졌다. 동준의 신음소리와 진서의 비명이 함께 흘러나와 정재가 놀라 그쪽으로 달려왔다. 동준의 팔을 잡아 싱크대로 데려간 정재가 찬물로 상처를 식혔다.

 

  “형, 구급상자 어디 있어?”

  “글쎄.....모르겠는데...”

 

진서가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와 동준이 팔을 담그고 있는 통 속에 쏟아 부었다. 그리곤 너무도 익숙하게 소파 옆 서랍장을 열고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정재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진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서씨...어떻게...”

 

정재의 놀란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낸 진서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제지했다. 동준이 팔을 데인 것보다 진서가 놀란 것에 더 마음이 쓰여 쓰라린 것을 재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보지 않아도 니 호흡의 떨림을 안다.

     그 큰 눈이 놀라 당황했을 것도 안다.

     얼음을 쏟아 부어도 이미 내 가슴이 뜨겁게 꿈틀거려 데워진 심장이 식지 않는다.

     너구나.

     니가 맞구나.

     내 속에 들어찬 너의 심장이 주인을 알아...

     너를 본 나는 처음처럼 몸이 우는구나.

     이제 날을 새는 것조차 의미를 잃었다.

     살아 있는 모든 날들을 너를 비워내려 한들....

     내게 무슨 소용이겠니.

     내 속에 나 보다 더 많은 니가 살고 있는데..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말없이 상처에 화상 연고를 펴 바른 진서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눈에 아픔이 배어들어 또 다른 슬픔이 고이고 있었다. 어른거리는 눈동자에서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어 참아내고 있었다.

 

  “정말로.......미안한 게 뭔지 알아요.”

  “............”

 

동준이 퍼뜩 말을 하지 못하고 그 목소리 속에 떨리는 다른 슬픔을 먼저 읽어냈다.

 

  “진서씨...난....”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 당신은 나 그렇게 부르지 않아.”

 

동준이 가슴으로 붉은 피가 고이고 있었다. 그토록 단련하고 담금질해 적당히 견뎌내 주리라 믿었던 자신이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뼈 속까지 차오르는 아픔으로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미안해요....기억하지 못해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낸 진서가 그 눈에 다른 빛을 살려내 동준을 응시했다. 그리고 담담하고 침착한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곱 계단 올라서면 난간에 당신이 표시해둔 옹이무늬가 있고....문을 열고 들어서 소파까지 아홉 걸음, 소파에서 싱크대까지 여섯 걸음, 싱크대 앞에 나무의자, 돌아서면 가스렌지....옆으로 커피포트, 팔 뻗으면 도마 칼....이 집안의 어떤 물건도 일년 전 그 자리에서 한번도 옮겨진 적 없고 바뀐 것도 없어요. 정재씨가 그 의자 옮겨놓은 게....기억을 잃었다는 저 사람에겐 너무도 치명적일 수 있네요.”


암흑의 벽속에 갇혀 버린 시선보다 더 까맣게 변해버린 동준의 머릿속이 빙빙 돌며 멀미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려와 잠시 동안 말을 잃은 사람처럼 어떤 소리도 단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씩 찾아든 이성 속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이 처절하게 알몸을 드러내 진통하고 있었다.

 

  “너.........설마........니가...”

 

동준이 온몸에서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와 재대로 서 있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 걸음을 그대로 옮기다 탁자에 부딪혀 몸을 위청이었다. 온몸에 기억된 그 방안의 물건들조차도 어디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었는지 아무런 위치감도 방향감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재가 동준의 어깨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자 동준이 여전히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너 알고 있었니?”

  “나도.......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떻게....진서씨가...”

 

동준이 이미 모든 연극을 포기한 듯 시선을 들지 않은 채 작게 정재에게 말을 내었다.

 

  “정재야, 잠시만........자리......비켜줄래.”

 

정재가 나가고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던 동준이 거추장스럽게 둘러치고 있던 굳은 껍질을 벗어내고 있었다. 열려진 입술로 목이 멘 말들이 끊어질 듯 아프게 흘러나왔다. 진서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원망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격앙되고 있었다.

 

  “너....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나를 보면서....진서야...진서야....진서야!”

 

몇 번을 그 이름을 부르다 조여 오는 심장의 통증을 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동준이 혼잣말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나를......이렇게 만드니.”

 

자신 앞에 와 있는 진서를 알면서도 동준이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하고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으려 주먹을 쥐었다.  

  

  - 오래전 그때는 내가 어리석어 너를 놓았었다.

    너를 그렇게 두고 온 나를 단 한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 어리석은 후회를 아는데...

    죽어도 죽지 못하고 잊어도 잊어지지 않는 것을 아는데...

    어찌 너를 그 속에서 살라 하겠느냐.

    나는 차라리 내 앞에서 외로운 너를 지켜보기로 했다.

    나를 보고 사는 것이 내게 더 큰 짐이라 여긴다면...

    그 짐보다 그리움이 더 무거운 것을 알아 다시 나를 찾기를 바랬다.

 

다가선 진서가 동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손끝으로 전해진 그 한번의 체온이 동준의 굳은 몸을 풀어내 목까지 차올라 있던 일년 동안의 회한을 뜨거운 서러움으로 흐르게 했다. 

 

  “당신이 틀렸어. 왜 아직 모르니.”

 

  - 니가 틀렸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니 속에 살아있는 나를 버리려 하는 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나를 다시 살려내는 것 만큼이나...

    부질없고 허망한 바램 인 것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너를 내가 품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는 내 마지막 염원이다.

    나는 하나밖에 모른다.

    붉은 피를 쏟아내며 흩어지는 내 영혼 속에 너를 각인시켰고...

    그런 니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수 천길 바위가 네게 가는 나를 막으려 든다면...

    나는 한 방울 물이 되어 천년을 꿰뚫어 그 바위를 부술 것이다.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이냐.

 

진서를 안은 동준의 가슴이 비로소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손끝이 천천히 볼과 이마를 어루만지며 감은 눈을 스쳐 내려와 작게 떨리고 있는 입술에 닿았다. 단 한순간도 기억에서 놓은 적 없었던 그 얼굴을 손끝으로 기억해 떠올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내가 잘못했다...진서야...내가.....틀렸다.”


동준이 일년 전 병실에서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정재의 말에 아무런 갈등 없이 수술을 포기했다. 집도했던 김과장이 시력회복과 약간의 기억손상을 감수하는 쪽으로 희망을 걸고 동준을 설득했었다. 그러나 동준이 한조각의 기억조차도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수술을 포기했다.

의미를 잃은 날들로 평생을 채워가는 것이 시력을 잃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임을 굳이 맞이하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자신 속에 각인된 진서의 모든 것들이 그가 살아있는 존재가치였다. 그 어떤 것이라도 잃어버리고는 숨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세상에서 눈을 닫는 그것으로 진서의 기억을 붙잡았다.    

그러나 정작 암흑 속에 갇힌 자신을 진서에게 줄 수 없어 세월의 무게 뒤에 숨었다. 애써 자신을 속여 가며 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정재에게 그 모든 짐을 내려놓으려 했었다. 그 마지막을 확인해 진서가 돌아설 이유를 찾게 하려 했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었음을  다시 살아나는 가슴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진서를 안았던 팔을 풀며 천천히 몸을 때어낸 동준이 그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흘려 말했다.

 

  “차라리 원망하고 미워하지 그랬니.”

  “당신은......세상에서 눈을 닫으면서까지 나를 붙잡았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내가....”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어낼 것 같은 그 깊고 지독한 그리움들이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심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뼈를 녹여 내, 살을 저며 내 버텼던 그 날카로운 칼날 같은 날들이  한줌모래가루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수렁 속에서 한쪽 날개를 찾아 단 한 마리 새처럼 가벼운 날갯짓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사람 제게 주십시오.

   저를 그 사람에게 주십시오.

   다음 생에는 한 쌍의 날개를 달아 원 없이 창공을 날아오르게 해주십시오.

   원 없이......

   창공을 날아 오르게 해 주십시오.


긴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동준의 무릎을 베고 있던 진서가 어느 듯 잠속에 빠져 들었다. 동준이 잠든 진서의 손을 감싸쥐어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자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정재가 과수원을 들어서는 지윤의 모습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이 어떻게...”

 

지윤이 싸늘한 조소를 입가에 걸고 여유롭게 그 시선을 받아 넘겼다.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이곳이 제 소유인거...”

  “무슨 말이야. 어째서 당신이....?”

 

지윤이 산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정재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 갔다.

 

  “전 주인이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참...내가 말한다고 했던가! 산장임대는 그대로 유효하니 그렇게 불편한 얼굴 하지 말아요.”

 

동준이 잠이든 진서를 소파에 눕히고 그 가슴에 살며시 얼굴을 묻어 심장의 파동을 느꼈다. 작고 미세하게 살아있는 그 심장이 어떻게 그토록 깊은 통증을 이겨내며 자신을 지켜봤는지 믿을 수 없어 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미쳐가던 그날부터 어린 아이처럼 발을 때어 세상을 익히던 그 모든 것을 함께 보고 견뎌낸 사람이었다. 동준이 집안의 보폭을 익히며 가구와 의자에 수없이 부딪혀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때로는 그 처절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악을 쓰며 손에 집히는 데로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히스테리를 부리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었다. 수 없이 반복되는 그 무너짐의 날들을 호흡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보아야 했을 그 가슴이 얼마나 피로 얼룩졌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두려웠다.

진서의 가슴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올리던 동준이 산장 밖의 말소리에 얼굴근육이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 얼굴이 더 싸늘하게 굳어져 문을 열려던 손끝이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한필중이 찾아와 진서의 사고를 말했을 때 동준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에 살기를 느꼈었다. 지윤을 살려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차라리 그 심장을 발기발기 찢어 내버리고 싶었다. 문을 나서는 동준에게 지윤이 태연하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우리...꽤 오랜 만이지...이렇게 또 보게 되네.”

  “...........”

  “이곳이 저승보다 괜찮았던 모양이구나...얼굴이....”

 

동준이 난간도 잡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와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지윤의 뺨을 후려 갈겼다.

 

  “넌.......내가 만난 인간들 중 가장 최악이야. 손으로 치우기조차 역겨운 쓰레기야.”

 

반가워할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큰 분노 또한 생각지 않았던 지윤이 동준이 클럽 일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왜....왜 이래. 아무리 반갑지 않아도 이건....너무 한거 아냐?”

  “다시는....너 같은 오물이 내 인생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어.”

 

지윤이 동준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또 다시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을 일으키며 다른 변수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 과수원 안으로 지프차 한데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서는 한필중과 형사를 본 지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한필중보다 빠른 걸음으로 세 사람 앞에 이른 형사가 잠시 동준의 얼굴을 살펴보다 지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지윤씨....당신을 한영빌딩 방화사건 및 윤진서 살인교사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지윤이 몸을 휘청거리며 뒤따라 온 한필중을 응시했다. 분노의 열기로 고사된 감정들이 그 눈에 말라붙어 있었다. 한필중이 지윤을 바라보면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을 자신에게서 털어내려 하고 있었다.

 

  “비열한 인간.”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멈춰야 할 때를 모르는 인간은 낭떠러지가 되서야 그 끝을 알게 되지.”

 

자신의 팔목에 수갑을 채우는 형사를 보며 맥없이 웃음을 흘리던 지윤이 동준을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그년 불속에 던져 버렸어. 다 태워서 재만 가져다 줬어야 하는데...아직 숨 줄이 남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너 못가지면 그년도 너 못 가져.”

 

지윤의 앙칼진 목소리가 고요하게 흐르던 산속을 뒤흔들었다. 동준이 계단을 올라 산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람소리에 깨어난 진서가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왔어요?”

 

동준이 진서에게로 다가가 그 귀를 감싸 막으며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나가지 마라. 지금은......아무것도........보지 말고.....듣지 마라.”

 

차에 태워진 지윤이 차가 출발하자 다급히 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나서는 동준 곁에 진서가 서 있었다. 놀란 눈이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때지 못했다.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 지윤이 의자 옆에 열려진 봉투 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다 떨리는 손끝이 그것을 더 들고 있지 못하고 힘없이 놓았다.

방화사건이 있던 그날 건물주차장에서 여인을 만난 사진들과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병력과 의사의 소견서들이 주르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담당형사가 백미러로 그것을 지켜보다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이미 남편 되시는 분이 금치선자 신청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물론 변호사를 선임하시겠지만 그쪽으로 판정을 받는 게 더 유리할 겁니다. 안 그럼 살인교사혐의가 그대로 적용될 겁니다.”


과수원을 둘러보던 한필중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동준에게 내밀었다. 그 얼굴에 예전과는 다른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농장 계약서다. 클럽도 니 이름으로 해뒀다. 눈을 잃은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거지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이런 것 밖에 없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더는 그 곳에 얽힌 어떤 것도......”

  “안다. 하지만 니가 받아줬으면 한다. 너를 더 일찍 놓아주지 못한 내......미안함이니...내게도 그 무게 털어낼 기회를 줘야하지 않겠니.”

  “죄송합니다. 다시는.....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는 처음부터 건방진 놈이였다. 한번도 내 발아래 내려선적이 없었지....그래서 니가 마음에 들었었다. "

 

한필중이 정자 쪽을 바라보며 엷은 웃음을 바람 속에 흘려보냈다. 진서의 하늘빛 원피스 자락이 작은 바람결을 타고 있었다.      

 

  - 너는 끝까지 잘난 놈이구나.

    그렇게도 모질게 세상이 때어 놓은 사람을....

    결국 가졌구나.

  - 제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제 사람이 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애써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필요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서로가 아니면 한번의 날갯짓도 허망한 몸부림에 불과한 불구의 영혼입니다.


다음날 산장을 내려온 두 사람이 고성으로 향하던 길을 돌려 해연사에 올랐다. 동준이 빛을 잃은 후 처음으로 오른 산길인데도 그 높고 낮음의 깊이를 짐작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진서야! 이 길은 보지 않아도 발이 먼저 아는 것처럼 올라가진다.”

 

  - 당신이 수없이 올랐던 길입니다.

    나를 보내고 이 산의 모든 것을 담으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몸이 익혀 발을 내딛던 길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당신과 내가 처음 올랐던 산길이에요. 그리고 당신이....홀로 수없이 밟았던 길이기도 하구요.”

 

오르는 동안 한순간도 동준의 손을 놓지 않았던 진서가 법당 앞에 이르러서야 잡았던 손을 풀어 합장을 했다. 대웅전에서 불공을 마치고 나오던 주지스님이 기다렸던 사람을 맞은 듯 합장을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반겼다.

 

  “함께 오셨군요. 방으로 드시지요.”

 

동준의 불편한 걸음을 한눈에 알아본 주지의 눈길이 더 깊고 아련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맑고 푸른 차향이 금방 방안으로 번져 동준이 이상하리마치 편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육신의 불편함은 몸에 익혀 받아들이면 그 또한 더 많은 것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빛을 거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을 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보살님께는 부처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입니다. 이제 굳이 눈으로 담지 않아도 모든 것들이 가슴에 와 형체를 보입니다. 그 방법을 이 사람이 알게 해 주었습니다.”

  “사람에게 하늘이 막아놓은 길은 없습니다. 다만 멀고 험한 길에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그 이유를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만든 아집일 뿐입니다.”

 

찻잔을 비워낸 주지스님이 두 번째 잔을 채우며 부처님의 온화한 그림자를 그 속에 띄웠다. 이미 세상의 다른 빛이 얼굴 가득히 내려앉은 동준을 보며 천상의 법계마저도 사람의 염원 앞에는 하나의 기운에 지나지 않음을 허허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진서가 가방에서 서책을 꺼내 주지스님 앞에 내 밀었다.   

 

  “다시 이곳에 두고 싶습니다. 이제 그 긴 세월의 흔적이 아닌 지금의 사랑 그 하나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어떤 것도 이미 정해놓은 길이 아니니 지금을 만든 것 또한 두 분의 의지입니다. 지친 몸을 쉬지 않고 힘겨운 길을 견뎌내셨으니 그 기운으로 더 많은 기쁨과 깊은 사랑을 채워 가실 거라 여깁니다.”


파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동준이 굳이 보지 않아도 그 대문을 열고 들어서 쏟아질 호수의 검푸른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친 세상 속에서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린 영혼이 비로소 쉴 곳을 찾아든 듯 힘겨웠던 날들이 아련한 기억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선 동준이 호수에서 불어드는 맑은 기운을 깊게 호흡하며 손을 뻗어 진서의 뒤로 다가가 그 어깨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담 너머로 흘러든 어둠이 마당 아래로 내려깔리고 있었다. 마루 끝의 불빛에 그 고개를 다 들이밀지 못한 짙은 어둠속에 여름밤의 모호함이 소리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진서가 몸을 돌려  동준과 마주 했다.

  “당신이 몸으로 다시 세상을 배우던 그날부터 나도 함께 시작했어요.”

  “응...?”

 

진서가 살며시 눈을 감아 두 손으로 동준의 얼굴을 감쌌다. 잠시 그렇게 손끝으로 동준을 느끼다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가 코끝으로 선을 거어며 입술에 닿아 멈추었다. 동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다 이내 그 입술이 진서에게 닿았다. 조심스럽게 입술 선을 어루만지던 혀끝이 뜨겁게 진서의 입속으로 파고들어 오랜 동안 그리움으로 묻어 두었던 또 다른 사랑의 몸짓을 불러내고 있었다.

 

갑자기 동준에게서 몸을 때어낸 진서가 뒷짐을 진 채 맨발로 마당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을 감아 온전한 자신의 감각 속에 몸을 내 맡겼다.

 

  “지금 나는 오직 감각으로만 당신을 보고 있어요. 그래서 더 가깝고 섬세하게 당신을 느껴요. 이리와 봐요.”

 

동준이 맨발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진서의 목소리를 따랐다. 서로를 빛으로 품어가진 심장이 등불처럼 빛을 발켜 암흑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동준이 잔신 앞에 멈춰서 있는 진서를 따스하게 끌어 안았다. 너무 벅찬 심장이 좋은 것조차도 두려운 듯 차마 마음껏 원하지 못하고 그 목덜미에 코를 묻어 뜨거운 눈시울을 삼켜냈다.


  - 세상보다 더 큰 가슴과 사랑을 품은 이 여인이 제 사람입니다.

    제가 치룬 어떤 대가도 아까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제게서 세상 빛을 거두고 이 여인을 주시려 했다면...

    그것 또한 한줌의 원망조차 필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미 서로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미 서로의 가슴으로 세상을 느낍니다.

    이 여인이 제 심장입니다.   

    저를 살려내 세상에 세울 수 있는 단 한줄기의 생명 빛입니다. 


 

매화꽃 흩날리는 그 나무아래 봄볕보다 더 눈부신 종현이 웃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을 가져와 잘게 부수어 그 입가에 머금었고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대지의 살아있는 정기가 그 눈에 가득했다.


  매화 속에 서 있는 너는 누구냐...

  진정 내 사람이 맞느냐..

  이렇듯 귀하고 보배로운 사람을 내가 탐내도 되느냐...   

  세선인 듯 천인인 듯 그리 웃지 마라.

  이리 내 앞에 서 있는 너를 보고도 나는 감히 손을 뻗어 가지지 못한다.

  눈을 들어 그 고혹한 선광과 마주하면 심장이 얼듯이 제 호흡을 잃는다.

  강인함 뒤에 감춰진 수려한 단아함이 사람 속에 숨겨진 내 뜨거운 피를 깨어나게 한다.

  사람으로 다가와 바람 같은 내 영혼을 취해가져 너는 나의 정인이 되었다.

  정인이 되어 네게 흐르는 마음이 끝도 없이 세상을 삼켜 니가 내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하나의 사람으로...

  하나의 정인으로...

  또 하나의 세상으로...

  니가 나를 품어갔다.

  또한 내가 너를 내 심장에 심었다.

  이제 그 뿌리가 온몸으로 뻗어 나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 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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