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九미尾호狐
프롤로그 2 : 두 번째 만남
하릴없이 가만히 앉아있으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몰려드는 나른한 오후다.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여름을 맞아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찾으시던 별장으로 내려와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보내는 중이다. 아버지와 내 취향이 비슷한 것인지 나는 이 별장이 마음에 든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집안 안팎에서 조여 오는 중압감을 벗어나기엔 더 없이 좋은 장소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영악스러워지는 근우와 신경전을 벌일 일도 없고,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유산 문제로 매일 같이 찾아오는 김 변호사의 성마른 얼굴도 보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도 날로 히스테리가 심해지는 새엄마의 간섭을 받지 않아 좋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아버지의 안식처이기도 했던 이 별장은 내게도 유일한 해방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이제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주말만 지나면 개학을 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남은 며칠이라도 맘 편히 지내면 그만이다. 늦은 밤까지 게임을 하느라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에 잠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11시쯤 일어나서 아침을 겸한 점심으로 삼계탕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더위도 시킬 겸 통풍이 잘되는 서재에서 책을 읽던 중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문득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그 얼핏 어린 강아지가 내는 울음소리 같았지만, 조금 더 구슬픈 느낌이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서는 별장지기인 백씨가 어떤 강아지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 내가 들은 울음소리는 이 녀석의 것이었나 보다.
“뭐에요? 아저씨.”
“아이구, 도련님. 주무시는 것 같던데, 이 녀석 때문에 깨셨군요. 이런 녀석은 처음 보시죠? 여웁니다. 새끼 여우.”
“여우요?”
강아진 줄 알았더니 여우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씨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느 강아지와는 확실히 달랐다. 백씨의 말대로 정말로 여우인 듯했다. 별장에서 기르고 있는 알래스카 말라뮤트인 장군이보다 체구는 작아도 딴에는 야생여우라고 성깔이 있었다. 경계의 눈빛을 뿌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들리는 말로는 해병대에서 25년간 근무했다는 백씨의 억센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도 쳐보고 이를 드러내보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하, 성깔이 보통이 아니네. 요즘은 정말 이런 녀석을 보기 힘들죠. 도련님도 동물원에서나 봤지, 직접 보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죠?”
여우라…… 동물도감이나 동물원이 아닌, 실제로 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지 싶다. 정말 처음인가? 음? 아니, 두 번째였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네. 여우는 처음……?”
으르렁거리던 여우가 나와 시선이 부딪치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백씨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어디서 나셨어요.”
“조금 있으면 도련님 다시 서울에 올라가실 테니까, 그 전에 맛있는 꿩고기라도 드시게 하려고 덫을 놓았었는데요. 아니 잡으려는 꿩은 안 걸리고 이 녀석이 걸렸지 뭡니까.”
그런 거였군. 나는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요. 여긴 민가도 많아서 이런 위험한 녀석을 그냥 풀어주기는 그렇고…… 동물원에 기증이라도 할까요? 어차피 이 근방에는 이 녀석의 먹잇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두면 양계장이나 습격할 게 뻔하거든요.”
“그럼 그러세요.”
난 이미 여우에게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다시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한, 두 걸음이나 떼었을까.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내 발목을 붙드는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그냥 바람이려니, 하고 지나치기엔 그 느낌이 너무나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몸을 돌려서 백씨의 손에 뒷덜미를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는 여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우는 나를 보고 있었다.
여우의 눈동자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맑은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아주 간절히.
백씨는 장군이의 견사 앞에 박혀있는 철심에 사슬로 연결된 목줄을 가져와 여우의 목에 단단히 채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우는 반항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간단한 작업을 끝낸 백씨가 별장 뒤로 돌아가자, 구석의 그늘진 곳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장군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견사의 철망을 긁으며 여우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여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군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끈질기게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움쩍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여우의 시선을 받았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여우에게 다가갈 수도, 마구 짖어대는 장군이를 진정시킬 수도…… 그냥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여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도 장군이가 문을 부수고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나 마냥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컹! 컹!
거의 그레이트 피레니즈와 맞먹을 정도로 덩치가 큰 장군이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견사의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여우에게 달려들었다. 짧은 사슬에 묶여있는 여우로서는 장군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장군이가 아가리를 한껏 벌리며 여우의 목덜미를 물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어깨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은 뭐지?
축축하다. 바닥이 젖어있어. 검붉은 얼룩…….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붉은 액체는 또 뭘까? 혹시 피? 이게 피라면 누구의 피지? 여우가 흘린 건가? 피는 내 셔츠에도 붉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그럼 내가 흘린 피구나.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피를 흘리는 거야.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이겠지.
장군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를 일깨운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그렇게 순하던 장군이가 이를 드러내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대상은 나? 분명 나는 아니다. 그럼…… 그 대상은…….
여우!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는 여우가 내 품안에 안겨 있었다.
그랬나? 내가 뛰어들어 장군이로부터 여우를 보호한 것이다. 어깨의 통증은 장군이에게 물린 것이고. 하지만 왜? 모르겠다.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주위를 빙빙 돌며 틈을 노리던 장군이가 다시 한 번 도약을 하기 위해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입가에는 내 피를 질질 흘리며 장군이가 몸을 낮게 웅크렸다. 곧 달려들 기세다.
이럴 때, 백씨는 어디에 있는 거지!
컹! 컹!
장군이가 그 커다란 몸을 허공에 띄었다. 순식간에 햇빛이 가려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장군아, 안 돼!”
차갑다.
뭔가 차가운 것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자 강렬한 통증도 함께 느껴졌다. 장군이에게 물린 어깨의 상처. 피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렇게 순했던 녀석이 왜 그렇게 갑자기 난폭하게 돌변을 한 거지? 정말 착한 녀석이었는데…….
그래! 장군이는?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장군이를 찾았다.
“자, 장군아…….”
장군이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다. 어떤 공격을 당한 것인지 배가 뚫려 있었고 내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참혹한 모습이었다. 나는 욕지기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백씨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뒤쪽으로 여우를 묶었던 사슬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여우는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어떻게 풀었을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사슬을 주워들었다.
“도망쳤나.”
바로 그때다.
별장 오른편 풀숲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있었다.
키 작은 수풀 사이에서,
여우가 처음 보았던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없이 깊어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로.
“너, 안 다쳤니?”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여우에게 다가가려고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몸이 무거웠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동시에 몸의 중심을 잃었다.
나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여우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우를 계속 볼 수가 없었다. 스르륵 눈이 감기려한다.
피를 많이 흘린 주제에 무리하게 움직인 것이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지며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다시 의식을 잃어갔다.
그런 나를,
여우는 그때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란 언제를 말하는 걸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