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눈을 뜬 희채는 잠옷바람으로 쫑쫑쫑 인혁의 방으로 갔다.
오늘은 인혁을 데리고 쇼핑을 갈 생각이였다.
인혁의 방문을 노크를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노크를 했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자 희채는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
침대는 단정히 정리가 되어 있었고 인혁은 없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준섭이 보였다.
“아빠! 인혁오빠 못 봤어요?”
“인석아! 아무리 애인이 좋아도 그렇지. 일어나자 마자 인혁이부터 찾기냐?”
무안해진 희채는 준섭을 와락 끌어안으며 볼에 입맞춤을 했다.
“Good Morning."
주방쪽에서 여정이 차를 내오면서 희채에게 눈을 흘겼다.
“다큰 애가 아직도 잠옷만 입고 돌아다녀?
해가 중천인데 모닝은 무슨 모닝...
인혁인 아까 아침 일찍 나갔어.
볼일이 있다고.“
차를 마시며 샐쭉해진 표정의 희채가 투덜투덜 인혁의 흉을 보았다.
준섭과 여정은 그런 희채가 감사할 따름이였다.
무결이 나영과 약혼을 하고 그 충격으로 다시 뉴욕으로 출국하던날 두 사람은 그녀의 마음고생이 안쓰러워 잡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그랬던 희채가 예전의 딸로 돌아와 눈앞에 있으니 이보다도 감사할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준섭과 여정은 70년대 스크린 최고의 스타였다.
숱한 히트작을 내었고 여정과 같은 작품을 한 여배우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의 결혼은 모든 사람의 관심속에 치루어 졌고 얼마후 희채는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희채는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희채의 인생에 무결이 전부임을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희채의 맘이 항상 걱정이였다.
아무래도 인혁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으리라...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희채는 정원에 나가 농구공을 들고 슛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릴적 준섭이 희채와 무결을 위해 만들어준 농구대였다.
그 때의 무결이 생각나자 그 앞에서 공을 던져 넣으면서 고이는 눈물을 막으려 희채는 주문을 외웠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한참을 그렇게 주문을 외우면서 공을 던졌다.
골대를 빗맞은 공이 튕겨나가자 희채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렇게 주저 앉아 하늘을 쳐다보던 희채 위로 농구공이 지나갔다.
“골인~!”
희채가 뒤를 돌아보자 기분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혁이 서 있었다.
“어디갔었어?”
“어때? 내 폼이 그럴싸하지 않았나?”
“어디갔다 왔냐구?”
“우리 희채양 내가 보고 싶었던게로군.”
희채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인혁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인혁이 그녀에게 달려들고 그녀를 어깨위에 매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럽다 외치며 까르르 웃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놀리며 웃는 인혁의 목소리가 정원을 가득 매웠다.
인혁이 희채를 내려 놓으며 다시 공을 집어 들었다.
“굶고 있을수는 없잖아 일해야지..
너도 알잖아..나 뉴욕에서는 꽤나 잘 나가는 모델이였어.“
“다시 일 시작할려고?”
“그래야지..
우리 희채 일 시작하면 내가 옆에서 지켜야 되니까.”
슛폼을 잡는 인혁 뒤로 간 희채가 공을 뺐어 들고 공을 던졌다.
둘이 넘어갈 듯 웃으며 농구를 하는 모습을 준섭 내외가 흐뭇한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여정이 준섭의 팔짱을 꼈다.
“그런데 여보! 인혁군 낯이 익어요.
당신은 안그래요?“
“무슨? 그럴 리가 있나?
태어날 때부터 뉴욕에서 살았다 했는데...“
“그러니까요...이상해요...
그런데 느낌이 굉장히 낯익어요...“
“구김이 없는 청년이라 그럴게야.”
고개를 끄덕이던 여정이 희채를 불렀다.
희채가 뛰어와 헐떡거리며 앞에 서자 준섭이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어 보이며 인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두 사람이 다닐려면 필요할 것이라며 차키를 내어주자 희채는 준섭에게 안겨 뽀뽀 세례를 퍼부어 댔다.
이 순간은 아무것도 부러울게 없는 네 사람이였다.
준섭이 차키를 내어주자 희채는 인혁을 기어이 끌고 나갔다.
신나게 쇼핑을 즐기고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들어오자 거실에 성진과 인경이 와 있었다.
순간 희채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비틀하는 희채는 인혁이 팔로 감싸 안아 옆에 섰다.
희채가 인혁과 같이 인사를 하자 준섭이 인혁에게 성진 내외를 소개했다.
성진은 한국 굴지의 Ja엔터테이먼트의 회장이자 무결의 아버지다.
인경의 부친이 회장이였던 시절 부친의 눈에 들어 인경과 결혼을 하고 쟁쟁한 아들들을 다 재치고 회사까지 이어 받았다.
성진이 다가와 희채를 안아주며 반겼으나 희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굳어 있는 희채를 보며 인혁은 옷을 갈아 입고 오겠다 하며 희채를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잠시후 거실로 내려오자 무결과 나영이 도착했다.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희채가 자리에 앉았다.
“무결이 오래간만이다..나영이는 더 이뻐지는 것 같구나..허허
인혁군 인사하지 윤회장 아들 무결 군이네..이쪽은 희채 여고동창인 나영양이고
나영양 어버님은 의원을 지내고 계시지
그리고 이쪽은 우리 희채 보이 프랜드 강인혁군.“
세사람이 인사를 주고 받고 있었지만 희채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결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만 느끼고 있을 뿐이였다.
눈물이 흐르려 했지만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당당히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인혁의 옷자락을 몰래 부여 잡고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고 무결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렇게 그리웠던 사람이다.
그녀의 인생에 전부였던 사람이다.
무결의 편안한 모습을 보니 그녀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나영이 눈에 들어 왔다.
승자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나영이 희채를 보고 있었다.
희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고만 싶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끝으로 그녀의 감정이 인혁에게 흘러 들어 왔다.
가만히 그 손을 잡아 주며 희채에게 미소를 짓자 그녀 역시 조금은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인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의 모습 하나 만으로 이렇게 무너지는 희채가 참기 어려웠다.
여정이 식사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며 들어서자 장황했던 감정의 기류들이 정지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이 빗줄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혁이 희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이~레인맨 아가씨 당신 구름이 당신을 위로하려 오신거 같은데...?”
인혁이 이끄는 대로 2층으로 올라간 희채는 옷을 갈아 입고 농구공을 들고 내려 왔다.
거실안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쳐다보자 둘은 실례합니다를 크게 외치고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희채는 인혁과 함께 시원한 빗줄기를 맞았다.
인혁이 희채를 불르고는 공을 그녀에게 던졌다.
공을 받으든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인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참지 말고 지금 울어
니 구름이 비님으로 니 눈물 가려줄려 하는거 같으니...
내가 니 눈물 다 받아 준다고 약속했잔아.
지금 니가 계속 눈물을 참는다면 내가 들어가서 저 자식을 죽여 놓을지도 몰라.“
참았던 희채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이 빗줄기와 함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둘은 정원을 누비고 다니며 농구를 하며 비를 맞았다.
희채는 한없이 편안했다.
그가 있음이 첨으로 감사했다.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며 둘은 다 아까의 감정들을 다 씻어냈다.
집안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여전하구만 희채는..”
“저게 우리 딸 매력이 아닌가...허허허”
“인혁군이라 했지?”
“뉴욕에서 모델을 했었다 하더군..”
무결은 창가로 다가가 둘을 쳐다보며 그 자리에 굳었다.
그 자리에서 걸음을 옮길수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희채의 저 미소는 자신을 향하던 것이였다.
그래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럴꺼라 의심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녀가 귀국을 했을 때 그녀가 그를 잡고 한번이라도 돌아오라 했다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녀 곁으로 돌아갔을 무결이였다.
그러나 희채는 아무런 말없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버렸다.
6년전 쪽지 한 장만 그에게 남겨 놓은채 떠나버린 그녀를 그때의 그 감정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 갔었지만 무대을 무결만큼이나 사랑한다 했던 그녀였다.
기다려 달란 말을 뒤로한채 돌아와 나영과 약혼을 한건 투정이였다.
자신만을 보아주지 않은 희채에 대한 무결의 투정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내것이라 믿었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해 있음에 피가 끓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너한테 내 마음 다 주고 내 가슴이 텅비어 버렸는데..
그래서 내 가슴이 이렇게 시린데...
것도 모자라 니가 내 마음을 죽여 버렸다.
내가 시체가 된 마음을 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