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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쉬 메리골드(Mash Marigold) - [02]
-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그렇게 몇일이 지났다. 개화기간 동안 무궁화의 지고 핌이 계속되 듯,
태양과 달도 뜨고 짐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지금 마침 태양이
커다란 산을 벗 삼아 빼꼼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는 중이었다.
붉은 빛을 토해내는 해는 밤이 서서히 개어가는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
침대에 누워 이불을 가지런히 몸위로 덥고 느릿느릿 눈동자를 움직이며
천장을 바라보는 나경의 눈은 밤새 한 잠도 자질 못한 것인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였는지는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수면제가 없으면 편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분명 온 몸이 피곤에 찌들어 무겁고 힘들고 지치기만 하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도 잠시 선잠에 드는 것 뿐,
깊이 잠에 드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경은 살짝 상체를 일으킴과 동시에 몸을 비틀며,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는 담배 갑에서 담배 한 개피와 라이터를 집었다.
“후우….”
주저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금세 매캐한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아 방 안을 메웠다.
한 두어번 담배연기를 내뿜던 나경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어 커튼이 축 늘어져 있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유난히도 조용한 방 안에는 실내화 끄는 소리가 조금은 과장되어 울렸다.
어느새 창문앞에서 걸음을 멈춘 나경은 부들부들한 소재의 커튼을 거칠게 걷어냈다.
커튼을 걷어내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따사로운 햇살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잔잔한 햇살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아주 좋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어중간한 미지근함이.
“……….”
창문을 열까하다 생각을 고쳐먹고 나경은 손을 내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쭉쭉 뻗은 도로와 아직 새벽은 새벽인지라 그리 많지 않지만
도로 위를 쉼없이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이리저리 불쑥불쑥 높은 건물들.
삭막했다. 창문을 열면 그 삭막함이 나경을 감싸돌아 소름이 끼칠 것만 같았다.
나경은 연기를 연거푸 뿜어내며 벌써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타고 있었다. 물론 바람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속도높여 더 잘 타겠지만.
담배를 낀 손가락 마디가 뜨끈해져오자 나경은 그제서야 창문 밖에 대한 시선을 떼고
빙글 돌아 재떨이가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담배꽁초가 수두룩한 재떨이에 짜리몽땅한 담배필터를 짓이겼다.
하지만 나경은 담배를 지져끄자마자 다시 재떨이 옆에 있던 담배 갑을 쥐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입새에 담배를 능숙하게 문 나경은 낮게 읖조리며 욕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늦은 저녁, 엄마에게서 불쑥 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예상했듯이 언니에게 듣지 못한 그 말을 들으러 오라는 것이였다.
귀찮음이 온 몸을 들쑤셨지만 그래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욕실안에선 바닥으로 내려치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후 달칵 소리와 욕실문이 열리더니 나경이 모습을 들어냈다.
하얀 실크 가운을 걸치고 아직 물기를 머금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나오는
나경의 모습은 그 어떤 여자의 모습보다 도발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하지만 언듯 스치는 눈동자는 아름다운 빛을 잃은지 오래였다.
.
.
.
“재인씨, 지금 무슨 말이야? 헤어지자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후우, 미안해.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내 맘도 조금만 이해해주라.”
“싫어! 내가 왜 이해해야해, 그리고 왜 재인씨랑 헤어져야 하는데!”
“나도 어쩔수가 없어. 후우,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해. 정말이야. 진심이고….”
굵은 웨이브 머리의 여자는 지극히도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자신의 앞에 놓여진 물 잔을 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분명 카페 안은 에어컨으로 인해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지만,
여자는 사막 한 가운데라도 온 듯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난 누구에게도 재인씨 양보 할 생각 추어도 없어.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하지?”
“유진아….”
“왜 갑자기 헤어지자는 거야! …혹시 오빠 여자 생겼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유진아, 그게 아니라…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피치못할….”
“그 사정이 여자 생긴 것 밖에 더 있겠냐고!
나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재인씨 좋아했어. 알고 있지?
난 돈이 없어서 그런지 나한테는 돈 많은 남자가 필요했어. 그것도 무척이나 절실히.
하지만 내가 집안도 변변찮은, 거기에 그럭저럭한 평범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거의 내 인생을 다 포기했다는 말과 같은 거였어! 알고 있기는 한 거야?”
“……미안.”
재인은 무슨 변명의 말이라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이내 조용히 미안 이란 말로만 매듭지었다.
유진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축축히 고였다.
하지만 고개를 빳빳히 들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부릅뜸으로서
절대 눈물을 그냥 흘리게 내버려 둘 모양은 아니었다.
“유진아, 정말 미안해….”
“미안하단 말로 해결 될 것 같아! 아무리 요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게
쉽다지만 이렇게 가벼운 미안하단 말로 뭐든게 다 해결 될 것 같으냐고!”
“…미…안해.”
“듣기 싫어! 정말 꼴보기도 싫어! 재인씨한테 다 받친 내 순정은 다 뭐야!”
“……….”
“사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어. 하도 내가 조르니까 어쩔수 없이 재인씨가 나 사귀어준거.
사랑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불쌍해서 사귀어 준거 알고 시작했어.
그런데, 그런데… 난 언젠가는 재인씨가 날 사랑해줄줄 알았어.
그게 몇 년이 지나고, 몇 십년이 지난뒤라도 날 사랑해줄줄 알았어!
근데 이렇게 질질 끌다가 헤어지자라는 말로 쉽게 끝날줄은 몰랐어! 아니 상상도 안해봤어!”
악에 바친 듯 유진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바람에 카페 안의 이목은
모두 재인과 유진에게로 주목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사람들 시선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유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은 위태롭게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찰나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주 고요한….
하지만 그 정적은 재인이 손을 들어 유진의 눈물을 다정스레 닦아주는 걸로 산산히 깨어졌다.
“나쁜 놈!”
“…미안해.”
“재수없는 놈!”
“…미안해.”
“파렴치한 놈!”
“…미안해.”
“개 같은 새끼!”
“……미…안해.”
유진이 무슨 말을 꺼내어도 재인은 애잔한 웃음과 함꼐 미안하단 말을 되풀이했다.
고동색 눈동자엔 따뜻함과 다정함을 듬쁙 담고선….
잔인했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다정한 웃음을 보여주는 그 남자는.
하지만 그런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듯도 싶었다.
영원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할 듯도 싶었다.
“유진아,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은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일꺼야.”
“……….”
“너는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야.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그건 내가 보장할게.”
“…나 정말 많이 좋아했어. 내가 동생이라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오빠란 말 대신에 재인씨라는 말을 쓸 만큼.”
“알아. 내가 다 알아. 그런데…….”
“알아. 사랑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
그래서 나는 평생 재인씨 동생이란 타이틀로 남아야 한다는 거.
지금 나 울지말고 오빠한테 잘가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재인은 유진에게 손수건을 건네었고,
유진은 그 손수건을 받아들였다.
“행복해야해. 그 여자가 누군지 묻지는 않을 게.
알게 되면 나 분명히 쫓아가서 머리카락을 다 쥐어 뽑아놓을지도 모르니까.
하아, 오빠 먼저 일어나주라. 난 여기 조금 있다가 나갈래.”
“아니야, 데려다줄게.”
“원래 차인 날에는 혼자 있어야 되는거야.
그 어떤 여자가 자리를 찬 남자에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겠어.”
“유진아….”
“얼른 가. 나 지금 최대한 보내주려고 애쓰는 중이야.
조금 있음 나 맘 확 변해서 재인씨 바지가랭이 붙잡고 질질 늘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얼른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냥 앞으로 가. 곧장.”
재인은 계산서를 들고 주저주저 일어섰다.
하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유진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연약하게만 보이는 건지….
하지만 재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독하게 먹고 카페를 나섰다.
달랑, 경쾌한 종소리만이 재인을 배웅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재인은 급히 유리창을 안을
훑어보여 유진이 앉아있을 테이블을 찾았다.
하지만 주머니에서 신나게 울려대는 휴대폰에 아쉽게 눈길을 거두었다.
“아, 네. 집사님.”
- 도련님, 사모님께서 지금 급히 찾으십니다.
그 뒤로 짧은 필요한 몇 마디를 주고 받고 전화는 끊겼다.
재인은 작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힐끔 카페를 바라보고는 이내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여자가 생긴거라면 생긴거였다.
아무리 정략약혼이라지만 분명 여자와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약혼은 재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대신 부모님이 내놓은 조건이었다.
부모님은 알고 계셨다. 재인은 절대 이 약혼을 거부 하지 않을 것임을.
아니, 절대 하지 못할 것임을 말이다.
재인은 주머니에서 커피맛 사탕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어내 입안으로 쏘옥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커피맛과 커피향으로 조금이나마 우울한 기분이 풀어지는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