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九미尾호狐
주희
무엇일까? 부드럽고 따듯하다.
그렇듯 기분 좋은 질감이 눈꺼풀을 간질인다. 아련하게 기억하는 엄마의 손길 같다.
그리고 좋은 냄새. 오래 맡고 있으면 나른하기까지 하다.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싫지 않은 향기가 후각을 예민하게 자극하며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한다. 고집은 그만 피우고 이제 일어나볼까. 슬쩍 눈을 떠본다. 어라, 그런데 여기는 어디?
“어머, 일어났어요?”
제법 귀에 익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 선우는 잠이 덜 깬 탓에 눈을 비비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뭐에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약해.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쓰러져서. 나 혼자서 여기까지 데려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이 여자는…… 그래 생각났다.
내게 연락처를 주었던 당돌한 스튜어디스 아가씨, 이름이 한주희였었나. 선우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그리고 짧게 내지르는 탄성. 자신이 해놓고도 어딘가 어색하다.
“아아.”
“아아? 뭐가 아야.”
주희는 두 볼을 잔뜩 부풀리며 추궁하듯 선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선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10평 남짓한 복층 구조의 원룸이었다. 선우는 2층의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침대 옆 작은 수납장 위에 선우의 재킷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언뜻 오른쪽 벽면에 걸린 미키마우스 시계도 보인다.
현재 시각은 10시. 햇빛이 들이치는 것으로 보아 밤은 분명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오전 10시.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정말로 난감했다. 선우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언제 여기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정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나요?”
선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희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고, 오른손에는 플라스틱 국자를 쥐고 있었다. 요리를 하던 중이었나? 선우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주희는 문득 자신의 손에 국자가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아차, 하며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 정신 좀 봐, 찌개를 올려놨었지.”
주희는 급하게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밑을 내려 보았다. 주희는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일어서다가 선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속상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주방으로 가버렸다. 2층에서는 주방은 사각지대에 해당해서 좀 더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 한다. 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뭐해요?”
선우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밥하는 중인 거. 어쨌든 손님인데 밥도 안 먹이고 내칠 수는 없잖아요. 난 그 정도로 매몰찬 사람은 아니라고요.”
“아, 예. 저기 그런데 혹시…….”
“혹시, 뭐요?”
주희가 국자로 국물을 떠서 간을 보면서 물었다.
“어제 내가 무슨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았나요?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너무도 식상한 멘트. 주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래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네. 아무것도.”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로?”
“네, 정말로.”
“흐음.”
주희가 갑자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 정말 배 째라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선우는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기억나지 않는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그쪽이 나한테 아주 몹쓸 짓을 했어요. 알아요?”
“네, 네? 내가 몹쓸 짓을 했다고요? 주희 씨한테?”
“후음, 그래도 내 이름은 기억하시네. 뭐, 아주 최악은 아닌걸.”
“아니 정말로 내가 나쁜 짓이라도 했나요? 그래요?”
선우가 정색하며 물었다. 주희는 입을 다물고 진지한 얼굴로 선우를 응시했다. 선우는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주희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어제 기내에서 봤을 때랑은 또 다른데요? 정말 의외야. 이런 순진한 면이 있을 줄은. 난 그쪽이 닳고 닳은 선수라고 생각했는데, 무늬만 선수였나? 일은 무슨 일,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엥? 장난친 거였어요? 그럼 내가 아무 짓도 안한 거죠? 그렇죠? 아닌 거죠?”
“네, 아닌 거예요.”
“그렇죠?”
“네, 그래요.”
주희에게 재차 확인을 한 선우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놀랐어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을 까봐. 그런데…… 킁킁, 이게 무슨 냄새죠. 어어!”
선우가 코를 킁킁거리다가 놀란 얼굴로 주희의 뒤쪽을 가리켰다. 주희는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찌개!”
잠시 후, 식탁에 앉은 선우는 수저를 들고 새카맣게 타버린 뚝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 제때 불을 껐으면 꽤 괜찮은 김치찌개가 되었을 법했지만, 지금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바짝 쪼려진 김치들이 바닥에 늘러 붙어있었다. 마주 앉은 주희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조심스럽게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맛있게 끓어주려고 했는데 그만…….”
“아니에요. 이것도 꽤 맛있을 거 같은데요, 어디 보자.”
선우는 밝게 웃으며 젓가락을 뚝배기로 뻗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김치가 잘 떨어지지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주희는 여전히 젓가락을 물고 선우의 고군분투를 지켜보았다. 결국 김치를 떼어내는데 실패한 선우는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듯 농담을 건넸다.
“아아, 이 김치는 뚝배기를 무척 사랑하나 봐요. 둘이 서로 떨어지려고 하질 않네.”
“지금 그거 농담이라고 한 거예요?”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선우가 말을 얼버무린다.
“됐어요. 이건 내가 봐도 최악이야.”
주희가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뚝배기를 번쩍 들더니 내용물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털어넣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나서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스튜어디스라 그런지 정말 동작도 빠르다. 선우는 그저 입맛을 다시며, 주희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주희는 뚝배기를 싱크대의 설거지통에 던져놓고는 홱 고개를 돌려 선우를 쳐다보았다. 선우의 몸을 날카로운 시선이 폭풍처럼 한차례 훑고 지나간다.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한 그녀의 행동에, 선우는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도 괜히 긴장되었다. 꿀꺽,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또, 또 왜요?”
주희가 갑자기 덥석 선우의 손을 잡는다.
“우리.”
“네, 네?”
의미심장하게 웃는 주희.
“나가요.”
“나가요? 어디로?”
“그야 당연히 아침 먹으러 가는 거죠. 배 안 고파요? 난 무지 고픈데.”
주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안에는 또 다른 생명도 자라고 있는데.”
풋! 마침 물을 마시던 선우가 입안에 있던 것을 내뿜었다. 덕분에 주희는 물세례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선우는 아, 하며 멍청히 입을 벌렸고 주희는 이를 악물고 낮게 신음하며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았다.
“이젠 정말로 나쁜 짓 하나 했네. 그렇죠?”
주희의 말에 선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요, 이대로 나갈 수 없으니까 옷 좀 갈아입게.”
주희가 성큼성큼 붙박이장으로 향하자, 선우는 얼른 등을 돌렸다. 하지만 현관의 전신거울을 마주보고 있어서 옷을 고르고 있는 주희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선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천장에 시선을 두었다.
“어머나,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하시네요? 그래도 매넌 있군요. 그럼 조금만 그렇게 있어요. 금방 갈아입으니까. 아, 그냥 기다리기 심심할 테니까 음악이나 듣고 있어요.”
주희의 말이 끝나자, AV의 스피커에서 곧 생소한 멜로디의 곡이 흘러나왔다. 여성 보컬들로만 이루어진 그룹 같았는데, 오랜만의 귀국이라 그런지 가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곡은 나쁘지 않았다. 경쾌하면서도 뭔가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선우는 리듬에 맞춰 고개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노래가 마음에 드나 봐요?”
“네, 오늘 처음 듣는 거지만 나쁘지 않네요.”
“처음? 아, 몇 년 만에 귀국을 하는 거라고 했었죠.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교포들도 가요 많이 알던데, 너무 했다. 혹시 가요를 싫어하나요?”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 예전에는 제법 많이 들었어요. 뉴욕에선 공부를 한답시고 허송세월을 보내느라고…… 그런데 이 그룹 이름이 뭐예요?”
“아, 요새 한창 뜨고 있는 더 뮤즈라는 애들이에요. 예전의 조성모처럼 한동안 얼굴 없는 가수로 유명했죠. 얘들 뮤직비디오도 정말 죽이거든요. 아, 조성모는 알죠?”
옷을 다 갈아입은 주희가 선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소매가 없는 카키색 탑 위에 그물 형태의 카디건을 걸치고, 달라붙는 스타일의 블루진을 입었다.
“조성모 알죠. 그런데 더 뮤즈라…… 음악의 여신들? 그룹 이름도 나쁘지 않네.”
“맞다. 오늘 어디 방송국에선가 처음으로 공개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하던데, 그게 어디였더라. 흠,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네.”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나도 갑자기 배가 고파졌거든요. 우리 배부터 채워놓고 생각하죠.”
“나야 대환영이죠.”
주희가 싱긋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좋아요. 밥값은 그쪽이 쏘는 거죠?”
“그럽시다.”
선우가 흔쾌히 대답했다.
“와, 화끈하네요?”
“몰랐어요?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하하.”
“이야, 몰랐어요. 하하!”
선우가 먼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는 동안, 주희는 음악을 끄기 위해 AV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막 전원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나를 기억해줘.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 선우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끄지 말아 봐요.”
“네? 왜 그러는데요?”
주희가 무슨 일인가 싶어 선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선우의 시선은 스피커에 못 박혀 있었다. 주희는 선우에게 뭔가를 말을 건네려다가 생각을 고치고 자신도 말없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사랑하는 그대, 나를 기억해줘. 나를 잊지 말아줘. 나 언제나 여기 있으니……
선우는 우두커니 서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스피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리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자,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주희에게 물었다.
“이 그룹, 더 뮤즈라고 했나요? 오늘 언제 방송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