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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66화

피바다 |2005.07.12 23:58
조회 298 |추천 0

  범천의 죽음으로 동방이 발칵 뒤집혔다.

  목이 떨어져나간 범천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침마다 세숫물을 챙기는 시녀였다. 아침 일찍 범천의 침실 문 앞에서  기척을 기다리던 그녀는 몇 번이고 새로 세숫물을 갈아 와도 범천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의아한 생각으로 문을 열었고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피로 물든 이불과 목에서 뿜어져나간 피의 자국으로 기이한 무늬를 새긴 벽면을 보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주변을 지나던 시녀들과 침실로 통하는  외문을 지키던 호위병들이 막 교대를 하려다말고 달려왔다. 그들은 밤새 소리없이 일어난 참극에 대경실색했고 곧 지국천은 이 모든 상황을 보고 받았았다.

  동생의 부고를 전해들은 지국천이 미친 듯 달려 범천의 성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 철저하게 폐쇄되어있던 침실을 열고 들어선 지국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동생의 동강 난 시신 앞에서 울부짖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지국천의 통곡은 그칠 줄 몰랐고, 그의 슬픔은 깊어서 누구도 그를 달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비통함이 얼마나 큰지 그는 울부 짖는 동안 미친 사람처럼 지껄여대거나 동생의 이름을 외쳐불렀다. 하지만 끝날 것같지 않던 그의 절규는 마침내 사그라들었고 지국천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냉정한 표정으로 최고의 수사관들을 불러모았다.

  " 반드시 찾아내라! 아우의 몸을 갈라도 좋아. 누가 한 짓인지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내 그 놈을 반드시 찾아 아우의 시신 앞에서 갈갈이 찢으리라!"

  그는 무시무시하게 소리쳤다. 지국천의 보좌관들은 그 날 처음으로 지국천의 얼굴에서 극에 달한 분노를 보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지국천은 마치 악마같았다. 그의 눈빛이 타들어갈 듯 이글거렸다.

  하지만 자애롭고 배려가 깊은 지국천은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인데도 남편의 죽음을 접하고 쓰러져 의관들의 보살핌 속에 몸져 누워있는 범천의 왕비를 생각해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몫임을 알았다. 보좌관들을 대동하고 그녀의 침실로 향하던 지국천은 뜻밖의 장소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을 만나고 말았다. 그는 범천의 성에 홀연히 나타난 설무랑이었다. 

  지국천은 아들 설무랑의 등장에 온 몸을 휘감고 있던 슬픔마저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같은 성에 살면서도 계절이 바뀔때까지 한번도 마주친 일 없는 설무랑이 범천의 성에 나타난 것은 뜻밖이었다. 설무랑도 아버지와의 예상치못한 대면에  당황한 듯 굳은 표정으로 앞에서 멈추어섰다. 보좌관들이 먼저 설무랑을 향해 인사했고 지국천과 사이가 좋지 못한 설무랑이지만 그들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어색하게 아버지 지국천에게 몸을 숙여 예의를 표했다. 참으로 어색한 부자간의 상봉이었다.

  " 네......가 어쩐...일로?"

 설무랑의 인사에 더욱 당황한 지국천의 입에서 지나치게 솔직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설무랑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고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 숙부님의 비보에 제가 달려오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오리까?"

  지국천은 설무랑의 말에 이어갈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혈육간의 도리로써 조카가 숙부의 부고를 듣고 달려오는 건 누가 보아도 당연했다. 지국천만 엉뚱한 질문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지국천은 설무랑의 그 대답이 주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지국천이 멍하니 선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자 설무랑은,

  " 소자, 숙부님의 마지막을 뵈어도 될런지요? 어릴 적 저를 끔찍이도 이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뵈러옵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아..그..그래."

  지국천은 여전히 넋 빠진 표정이었고 설무랑은 가벼운 목례를 끝으로 그와 보좌관들을 스쳐지나갔다. 지국천은 옆을 스치는 설무랑에게서 문득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범천의 죽음을 다시금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설무랑의 등장과 범천의 죽음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으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설무랑이 범천의 침실 입구로 다가서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보초병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막아섰다. 설무랑은 당당한 보랏빛 눈동자로 그들을 주시하면서,

  " 숙부님을 뵈러왔다."

  서로 눈길을 주고 받던 보초병들은 설무랑의 거침없는 태도와 보랏빛 눈이 말해주는 그의 신분에 머뭇머뭇 가로막은 창을 거두고 길을 터 주었다.

  설무랑이 침실로 들어섰을 때 동방의 내노라하는 수사관 다섯 명은 살해 현장에 남아있을 단서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범천의 죽음은 분명 비극이었지만 수사관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부와 영예를 안겨 줄 기회이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에 설무랑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수사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던 중 젊은 수사관 한 명이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창가에서 서성이는 설무랑에게 다가오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 이곳은 수사관 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젊은 수사관 역시 설무랑의 보랏빛 눈동자로 그의 신분을 짐작할 뿐,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 잘 알고 있다."

  설무랑의 스스럼없는 대답에 수사관은 말문이 막혔다. 그 목소리가 워낙 크고 분명해서 다른 수사관들의 시선을 모았다.

  설무랑은 팔짱을 낀 채 창틀에 기대어 서서 수사관들을 향해 물었다.

  " 그래서 당신들은 무엇을 찾아냈지?"

  "............"

 다들 이 난데없이 등장한 남자의 행동에 경계의 눈초리만 보낼 뿐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 동방군 최고 사령관의 목을 가장 원하는 자가 누굴까?"

  " 마족이나 수라족이죠. 특히 장수가 되길 원하는 야심 많은 군졸이나 동방군의 전투력에 골머리를 썪고 있을 장수들. 사령관의 목숨이라면 그 대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만치의 가치니깐." 

  젊은 수사관이 설무랑의 질문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경계를 풀면서 대답했다.

  " 자네가 범성의 보안과 방어체계, 그리고 미로식 구조에 대해 안다면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을걸세. 아마 마족 조무래기라면 숙부의 침실을 찾기도 전에 시체가 되어 아침을 맞이할테지. 이건 필시 천계인의 소행이다. 그것도 범성의 구조에 익숙하거나 그 정보에 접근이 쉬운 자. 동방군 내부인의 소행이거나 아니면....고급귀족이란거지."

  설무랑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 왕의 시신을 살펴보았나?"

  수사관들은 설무랑의 단호하고 논리적인 말투에 빠져들어 그를 쫓아낼 생각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범천의 침대 가까이 있던 수사관이 고개를 돌려 범천의 시신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범천의  떨어져나간 머리는 흰 천으로 덮여있었고 이불과 벽면이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다.

  " 오른쪽 어깨."

  수사관이 말했다. 설무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 맞아. 심하게 짓눌렸지. 그리고 가슴엔 피멍이 들어있어. 범인은 엄청난 무게의 거구이거나 그 만큼의 중량을 가진 갑옷을 입는 사람일거다. 나는 후자일거라고 봐."

  " 칼을 쓴 흔적 때문이군요."

  시체 가까이의 수사관이 다시 해석했다. 설무랑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 그래. 목뼈를 단 번에,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잘라낼 정도의 솜씨는 평소 칼을 신체 일부처럼 다루는 사람이지. 그는 아마 실력있는 장수이거나 생과 사를 몇 번이고 오간 무사일거다. 그리고 또 하나..."

  설무랑은 창틀에서 몸을 떼내면서 젊은 수사관을 바라보며,

  " 보초병이 밤새 지키고 있던 외문과 침실의 내문 사이에는 밀폐된 복도만 있어. 보초병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고 버젓이 살아있지. 범인은 왕과 안면이 깊은 자다. 그리고 그는 문이 아니라..."

  " 창을 통해 들어왔군요!"

  젊은 수사관이 설무랑의 추리가 놀라운 듯 소리쳤다.

  " 하지만 여긴 3층이야. 창틀에는 밧줄을 묶은 흔적따위 없었어."

  다른 수사관이 반박했다. 

  " 왜 반드시 밧줄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나? "

  설무랑은 눈빛을 빛내며 귀 귀울이는 젊은 수사관을 향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씩 웃었다.

  " 나머지는 자네들 몫이다. 숙부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으니 이제 다시 자신의 일을 하시게."

 설무랑은 범천의 시신으로 향했다. 잠시 그를 멍하니 주시하던 수사관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설무랑은 범천의 머리를 덮은 흰 비단천을 집어들었다. 공포에 질렸지만 범천의 마지막 얼굴은 익숙한 것을 대면한 표정으로 멈추어있었다. 설무랑은 낮은 목소리로,

  "  어차피 가야할 길을 조금 일찍 가신 것 뿐이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시죠. 어쨌든 이로써 그 녀석이 내 편이라는건 분명해진겁니까,숙부님?"

  그는 흰 천을 다시 내려놓고 유유히 침실을 나왔다. 정확한 동작으로 경례를 하는 보초병들을 뒤로 하고 복도를 걷는 설무랑의 손에는 침실에 들어설때만해도 보이지 않던 손때 묻은 붉은 유리옥 장식이 들리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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