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쓸던 바람이 소예의 목덜미를 스쳤다. 소예는 숨을 죽인 채 낙엽을 많이 떨어내고 거의 앙상해 진 나무들 사이에서 움직임을 찾아내려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살을 잰 활을 당긴 팔에 긴장을 유지한 채 날카롭게 사방을 주시했다.
조금 전, 그녀의 화살에 놀라 달아난 '포효'는 분명 근처에 있었다. 워낙 몸이 빨라 그녀의 화살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낙엽 위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보면 꽤 큰 상처를 입었음에 틀림없었다. 위장술에 뛰어난 포효는 울긋불긋한 낙엽색에 몸을 동화시켜 소예의 눈을 피해있었다.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오자, 포효의 특유의 냄새마저 아련해졌고 소예의 긴장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상처를 입고 사나워진 포효는 더욱 위험했다. 그녀가 먼저 움직임을 찾아내지 못하면 포효는 어디선가 눈 깜짝할 새 튀어나와 그 날카로운 이로 소예를 단번에 물어뜯어 삼킬 것이다.
마계의 괴수였던 포효가 산을 넘어 천계 북쪽 변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하지만 번식력이 빠른 포효의 수는 급격이 늘더니 겨울이 되자 먹이를 찾아 사람 사는 마을에까지 출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근에는 포효의 무리가 변방 인근의 크고 작은 부락을 집단으로 공격하여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사람의 얼굴에 양의 몸을 가진 포효는 날카로운 이와 사람의 눈으로는 잡아내지 못할 빠른 움직임, 무시무시한 발톱을 가졌고 그 덩지가 황소만했다. 게다 아기 울음소리를 내어 밤에 사람들을 꾀어다 잡아 먹기까지 하는 악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예는 변방이 오랫동안 조용한 틈을 타 포효 사냥에 나섰다. 그녀는 홀로 사냥에 나섰고 그 날은 사냥에 나선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 소예는 새끼 포효들의 무리를 발견했다. 검을 빼 순식간에 여섯이나 되는 새끼 포효들을 제거했지만 새끼들의 비명 소리에 달려온 어미 포효가 더 큰 문제였다. 뒤에서 습격한 어미 포효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화살을 날렸지만, 그것이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어미 포효는 머리를 굴려 자신의 몸을 숨기고 단번에 소예의 숨통을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 쐐에에엑!"
소예의 눈이 일순 번뜩이면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서 화살이 뻗어나갔다.
" 꾸에에엑!"
막 소예에게 달려들던 포효가 그 화살에 등을 뚫리었다. 하지만 포효는 멈추지 않고 무서운 기세로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소예는 재빠르게 다음 화살을 재어날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으며 그녀의 코 앞까지 왔던 포효는 뒤로 튕겨나갔다. 낙엽 더미에 쓰러져 거친 숨을 내 쉬던 포효가 삐죽삐죽 날카로운 이 사이로 검은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마침내 숨소리마저 사그라지자 소예의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죽 흘렀다.
그녀는 경계를 풀지 않고 검을 손에 단단히 쥔 채 포효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포효는 분명히 죽어있었다.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힌 채 갈빛 털에 낙엽이 엉킨 채로 숨이 끊어져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포효의 몸에 박힌 화살 3개가 모두 자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예는 고개를 들어 쓰러진 포효의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쏘아낸 화살은 모두 3대. 그런데 마지막에 쏜 화살 한 대가 엉뚱한 나무에 박혀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놀랐다. 아마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세 번째 쏜 화살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소예는 포효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포효의 가슴과 어깨에 박힌 것은 분명 녹촉(鹿蜀)의 붉은 꼬리깃을 단 소예 자신의 화살이 맞았다. 하지만 포효의 목을 뚫으며 치명타를 입힌 화살은 처음보는 화살이었다.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윤기 흐르는 튼튼한 검은 말 위에 올라 앉은 흑갈색 피부의 강한 눈매를 가진 남자-설무랑이었다. 소예는 설무랑의 등장에 내심 놀랐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사냥감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댄 설무랑에게 공공연하게 불쾌한 시선을 던졌다. 관지와 비영의 약혼식날 보여준 그의 호의에 소예의 경계심이 많이 풀린 건 사실이었고, 설무랑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분명 포효에게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그녀의 무너진 자존심이 그를 용서치 않았다. 설무랑은 엄연히 자신의 사냥물을 가로챈 셈이다.
" 정말 빠른 놈이군. 한 발만 늦었어도 큰 일 날 뻔했어. 괜찮은거야?"
설무랑은 소예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에서 내리며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었다. 그것이 소예를 더욱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예는 눈 깜짝할 새 화살을 재어 설무랑의 얼굴을 노려 활을 튕겼다. 설무랑은 본능적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고, 화살은 그의 볼을 스쳐 뒷 편 나무 기둥에 박혔는데 화살에 실린 소예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굵은 나무가 뿌리 위쪽까지 둘로 쪼개져 쩍 벌어지는 것이었다. 설무랑의 말은 훈련이 잘 되어있음에도 화살이 귀를 째는 듯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등 위를 스치자 놀라서 뛰어 올랐다. 설무랑은 말고삐를 당겨 말을 진정시키며 자신도 당황하여 외쳤다.
" 도대체...뭐...뭐야?"
" 네 깟 놈이 끼어들 정도로 내가 약해보였어? 네가 감히 나를 농락하느냔 날이다! 북방군의 장군인 내가 포효 한 마리 상대 못하여 네 놈의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고!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다!"
소예는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설무랑은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를 납득하고 표정을 풀었다.
" 그럴리가 있겠어?"
소예는 여전히 잡아 먹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무랑은,
" 내가 널 약하게 보다니, 우습게 보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하고."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네가 충분히 포효를 잡아낼 것이란 건 알고 있었어.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니깐. 하지만 나도 모르게 활을 당기고 말았던 거야. 포효가 달려드는 순간 네 아름다운 피부에 포효의 더러운 발톱 자국이 생기면 어쩌나 순간 눈이 뒤집혀버린거지."
소예는 설무랑의 그 말에 더욱 노기를 띄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철저히 농락한다고 생각했다.
" 죽여버리겠어!"
소예는 화살을 손에 쥐고 달려들었고 설무랑은 급한대로 그녀의 양 팔을 잡았지만 그녀의 힘에 뒤로 죽 밀려나버렸다. 돌부리에 걸려 낙엽위로 쓰러진 설무랑의 얼굴로 소예는 지체없이 화살촉을 내질렀고 설무랑은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말 위험한 아가씨로군.'
설무랑은 소예를 뿌리치며 옆으로 굴러 간신히 그녀에게서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예의 또다른 공격에 대비하여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녀의 다음 행동을 살폈다. 하지만 소예는 씨근거리면서도 더 이상 공격할 마음은 없어보였다. 소예는 분노를 간직한 채 돌아섰다. 설무랑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소리쳤다.
" 너는 강해, 바보 공주같으니!"
설무랑이 소리를 빽 지르자 소예는 놀란 눈으로 돌아섰다.
" 너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야. 나는 천계 최고의 장군인 너를 존경하고, 네 그 탁월한 전술과 전투 능력이 미치도록 부러워. 한 번도 네가 여자라 장군으로써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적 따윈 없단 말이다.내가 본 수많은 장수들 중 넌 단연 으뜸이니까."
" 뭐....?"
설무랑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소예는 자신도 모르게 반응해버렸다.
" 하지만....또한 너만큼 아름다운 여자도 본 적이 없어. 네가 가진 숨 막힐 듯한 그 매력을 왜 인정하지 않는거야? 난 그저 진심으로 그걸 말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설무랑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진지해서 소예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 아름답다고 나약한 건 아니야. 너는 강하고 또한 아름다워. 네가 얼마나 눈부신지...너는 왜 모르는거지?"
소예는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름답다라는 말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그 말은 그녀에게 '너는 여자다','너는 무력하다'의 의미일 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말은 단지 강하다는 것이었다. 두려울 정도로 강하여 누구도 무시하지 않는 장군만이 그녀가 되고픈 것이었다. 그런데 설무랑의 말은 왠지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소예는 설무랑의 말에 설레었고 수줍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심경에 더욱 당황하여 홱 돌아섰다.
" 한 번만 더 쓸 데 없는 소리 지껄이면 그냥 안두겠어. 머저리 같은 놈!"
그녀는 소리치고 빠르게 떠나버렸다. 설무랑은 그런 그녀의 뒷 모습을 보고 알듯 모를 듯 미소지었다.
" 오셨습니까? 늦으신 듯 합니다."
소예가 자신의 군대로 돌아오자, 젊은 비서관이 달려나오며 인사를 전했다. 소예는 그에게 대꾸도 없이 말고삐를 부하에게 건네고 자신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비서관은 자신이 처리할 일을 찾다가 소예가 어떤 포획물도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의아해졌다. 맛이 특별한 포효의 고기와 가죽을 기대했던 비서관은 영문을 모른 채 아쉬운 입맛을 쩝 다셨다. 그리곤 이 사실을 다른 장수들에게 알리러 방정맞은 걸음걸이로 달려나갔다.
소예는 숙소로 돌아와 활과 화살통을 벽에 걸고 지친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시녀가 씻을 물과 수건을 들고 왔지만, 소예는 귀찮은 듯 아무데나 두라고 손짓으로 일렀다. 그리고 그녀를 물리면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당부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설무랑을 생각했다. 왠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욕망과 그녀가 애써 거부해 온 진심을 그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감동을 주고 혼란을 주었다. 설무랑의 모든 말과 행동은 진심으로 보였지만,그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는 반면 소예는 자신을 흔들어버리는 그가 밉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정말 당신은 내게 그걸......줄 수 있을까?'
소예는 버릇처럼 설무랑의 제안을 떠올렸다. 관지와 비영의 약혼식이 있던 날, 설무랑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던진 그 제안을 소예는 종종 되새기곤 했다. 너무나 엄청난 제안이지만 설무랑에게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말은 무게가 있어 소예의 가슴에 무겁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관지의 얼굴이 문득 스쳐지나가자 소예는 생각을 접었다. 모든 걸 접고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으로 소예는 몸을 길게 뻗었다. 그 때, 비서관의 목소리가 그녀의 휴식을 침범하여 들어왔다.
" 대장군님, 소인 비서관 망상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 내 오늘 피로하여 일찍 쉬고 싶다고 일렀다. 물러가라."
소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비서관의 목소리에 더욱 짜증이 몰려왔다. 비서관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러나지 않고,
" 허나 장군님. 기이한 일이 벌어졌기에....."
소예는 비서관을 앞서 뛰다시피 걸었다. 저만치서 장수와 군졸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고 그녀가 다가가자 다들 길을 내며 비켜 섰는데 그들의 가운데가 뚫리며 나타난 것은 설무랑이었다.
소예를 발견한 설무랑은 천진하게 웃으며 손인사를 건넸고 소예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는 다섯마리의 훌륭한 말을 뒤에 세우고 서 있었는데 그 말들은 각각 죽은 포효를 묶어 달고 있었다. 흉악하고 거친 포효를 열 마리씩이나 잡아온 낯선 사내의 등장은 아주 가관이었다.
설무랑은 말문이 막혀 자신을 쳐다보는 소예가 할 말을 찾기 전에 선언하듯 말했다.
" 북방군의 소예 대장군께서 잡으신 사냥물입니다. 제가 수거하여 왔습니다."
" 오오!!!!!"
군졸들이 새삼스럽게 소예를 돌아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포효사냥을 떠났던 소예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막 그 소문이 장수들 사이에 퍼지면서 그녀의 위신이 떨어지고 있던 차 설무랑의 등장은 장수들에게 씁쓸한 일이 분명했다.
터져나오는 감탄사와 설무랑의 뻔뻔하고 능글맞은 웃음에 소예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데, 설무랑이 다시 나섰다.
" 장군, 이 고기에 술 한 잔 대접 받아도 되겠소? 먼 길 오느라 지쳐버렸습니다."
" 그...그리하시오."
소예를 얼결에 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던 잔치가 소예의 군막에서 열리게 되었다.
===2주간의 몽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몸을 추스렸습니다. 오랜 시간의 여행 뒤에는 반드시 몸살이 찾아왔는데 어쩐 일인지 돌아와서도 생기가 넘칩니다. 아마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대자연에 머무르며 그 기운을 받아왔기 때문인가봅니다. 아직도 그 때의 시간들이 꿈만 같습니다.
몽골은 바람과 꽃향기가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도 자유로왔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화이팅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