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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사랑해버리자 [1]

*우연* |2005.08.18 13:03
조회 884 |추천 0

1. 이별, 하다

 

지지리 궁상이다. 아침부터 줄곧 생각해봐도 이건 지지리 궁상 바보같은 짓이다. 멍청하긴. 이렇게 하루종일 생각을 하고 또 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상을 주는 것도 아니며 잘했다고 칭찬 받을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칩부터 꼬박 하루를 이러고 있다. 생각해보니 아침, 점심 두 끼나 걸렀다.

 

 이런 젠장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밥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내 배가 조용할 때도 있었군, 마치 대단한 사실이라도 발견한 듯 채원은 헛기침을 해댔다. 꼬르륵. 대견할 일도 아닌가보다. 역시 예외적인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채원은 옆에 놓인 두루마리 화장실을 둘둘 풀어냈다. 팽하고 코를 풀어댔다. 막힌 콧속이 뻥하고 뚫린 기분이다. 이런걸 보고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하지. 채원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에 코를 꾹꾹 눌러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은 살짝 쓰린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까 좋은 화장지를 써야한다니까. 꼭 이런 재활용 화장지만 사와서 사람 코까지 아프게 만들어. 채원은 거울을 들여다본다. 퉁퉁 부은 눈에 빨개진 코까지. 이런 망가진 모습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개자식. 채원은 머리띠를 집어 들어 있는 힘껏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쭈삣거리며 수많은 잔머리칼이 빠져나와 하늘위로 솟구쳤다. 무슨 놈의 잔머리는 이렇게 많은건지. 한마디로 징글징글 하다.

 

잠긴 문고리를 돌려 거실로 나갔다. 한 살 어린 동생 지원이와 그녀의 엄마 둘이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고 있다. 문소리가 나자 휙하고 고개를 돌려 문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채원을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다 울었냐?”

 

감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들어있지 않는 저 말투. 채원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내렸다.

 

“정신 나간 것. 지지리 궁상이지”

 

역시나 지지리 궁상이라고 생각하나보다. 채원은 털썩 지원의 옆에 들어 누웠다. 지원은 혀를 한번 끌하고 차더니 무릎 사이에 끼워둔 베게를 휙하고 던져주었다.

 

“배고파”

 

“무슨 배가 고파? 뭘 대단한 일을 하고 왔다고 밥타령이냐? 가서 더 울지그래!”

 

빈정대는게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듣고 있어야 한다. 채원도 지금 막 방에서 나오기 전에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채원의 염장을 지르기라도 마음을 먹었는지 목소리 큰 채원의 엄마는 여전히 궁시렁 거리고 있다. 기찻통을 구워먹었나. 채원은 베게에 한 쪽 귀를 깊게 파묻었다

 

“야. 다른거 틀어봐”

 

괜히 지원에게 신경질이다. 지원은 내팽겨치듯 리모컨을 채원 앞에 던져두고는 자기 방으로 횡하니 들어가 버린다. 기집애. 성질머리 하고는. 이럴때 가만 옆에 있어주면 좋잖아. 꼼짝없이 늙은 여우 잔소리를 다 들어야한다. 어차피 한번은 들어야할 잔소리라 이왕 들은거 지금 다 들어버리자고 마음먹은 채원이다.

 

“밤새 니 그 곡하는 소리에 잠을 못잤다. 무슨 지 애비가 죽었다고 서럽게 울어대?”

 

곡하는 소리라니?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단 말이야? 또 오버액션이다. 오너가 울고 갈 오버액션에 채원은 흥하고 콧방귀를 뀐다. 철썩.

 

“아파!”

 

순간적인 통증이 휙하고 지나가자 채원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흥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성질 급한 저 늙은 여우가 찰썩 채원의 엉덩이를 시원하게 갈겼다.

 

“어디가 흥이야? 내가 없는 소리했냐?”

 

“그런다고 왜때려?”

 

“니 그 펑퍼짐한 엉덩이를 좀 때렸다고 지금 눈을 부라리는거야? 아이구. 야야. 니 엉덩이는 펑퍼짐하고 살도 많아서 그 정도로는 아프지도 않는다.”

 

채원은 가만 늙은 여우를 노려보았다. 가만 들어줄려고 했는데 어찌된게 벅벅 채원의 심장을 긁어댄다. 사실 어젯밤 울기는 좀 울었다. 곡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니 좀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 소리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저렇게 귀한 큰딸 잡아먹을 듯 닦달하는 건 또 뭐람. 물론 아침부터 밥먹으라고 문 두들이는 걸 무시를 하기는 좀 했다. 점심 먹으라고 문을 두들이는 것도 소리 버럭질러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젯밤 실연 당하고 들어온 딸에게 저럴건 또 뭐람.

 

“뭘 노려봐? 하여튼 기집애가 싸가지는 없어서.. 그러니까 니가 뭐냐. 그래 그 실연이나 당하고 오지”

 

“엄마!”

 

실연이라는 소리에 채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엄마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딸의 아픔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저렇게 비위를 살살 건들어 주는게 어딘지 모르게 얄밉다. 그리고 실연이나 당하고 오지는 또 뭐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실연을 당한게 당연하다는 거야?

 

“알았다. 아이고 귀청이야. 이 기집애야. 애떨어지겠다!”

 

채원이 버럭 소리를 질러대자 이정도만 해야겠다 생각한 모양인지 그녀의 엄마는 슬쩍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괜시리 지원을 불러댔다.

 

“왜?”

 

방에서 채 나오지도 않고 문 기둥에 반쯤 몸을 걸쳐 얼굴만 내밀고 지원이 물었다. 부르면 냉큼 달려 나와야지. 어디서. 채원은 그런 지원도 못마땅하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보지만 그다지 재밌는건 하지도 않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연신 밥달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배가 고파 기어 나온건데 그리고 늙은 여우의 잔소리도 꾹 들은건데 금방 소리를 질러댔으니 밥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다. 채원은 괜한 리모컨만 탕탕 두드려댔다.

 

“가서 돼지고기 좀 사와. 뒷다리 살로 반근만 사와”

 

“왜 나만 시켜. 언니보고 가라 그러면 되잖아.”

 

지랄. 이렇게 부은 눈으로 어딜 가라는 말이야? 동네방네 나 어제 실연당했소 이렇게 알리고 오란  말이야.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걸 꾹 참았다. 그다지 자랑거리는 아니니까.

 

“니 언니 몰골이 넌 눈에 들어오지도 않냐? 저런 얼굴로 어딜 내보내?”

 

컥. 숨을 들이 쉬던 중인데 그만 턱하고 목에서 걸린 기분이다. 채원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실연당한 몰골이라 집밖으로 못 내보내겠다는 말인거야?

 

“얼른 갔다와. 잔말 하지말고, 거기 신발장위에 돈 있지? 가져가. 반근만 사와”

 

늙은 여우는 돼지고기, 그것도 뒷다리살 반근을 강조하고 있다. 뭐 뒷다리살이 맛이 없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다. 어쨌든 목살이나 다른 부위에 비하면 값이 저렴하다는 거다. 구두쇠. 그것도 항상 반근이다. 저 안쪽 위장이 기름이 들어온다고 소리치며 좋아할 때쯤 언제나 끝나버리는 것이 언제나 미지근한게 뒤끝 안좋은 그런 찝찝한 기분이다. 뭐랄까. 화장실가서 볼일보고 휴지가 모잘라 그냥 대충 거시기 한 기분? 채원은 푸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딸년 밤새 징징 짠게 안쓰럽긴 한 모양이지. 고기를 다 먹여주려고 하는걸 보니.

 

 어쨌든 채원이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지원은 툴툴대며 문을 나섰고 늙은 여우는 주방에서 무언가 부스럭 거리고 있다. 일요일 저녁인데 왜이리 따분한건지. 채원은 거실바닥에 엎드리고 누워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밤새 울어댔으니 머리가 아플만도 하지. 거기다 배가 이렇게 고프니 아마 내 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거지. 어쩜 자기가 뇌라는 사실을 망각했을지도 몰라. 밥만 달라고 보채는게 생각을 할 마음이 없잖아. 채원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짓눌렀다. 윽하고 소리가 나올뻔했다. 밥은 안먹었는데 힘은 여전하다.

 

“그렇게 누워서 빈둥거리지만 말고 좀 씻어. 밤새 울어대고 나와서는 씻지도 않고 뭐하냐? 넌 니 눈가에 번진 그 마스카라 찌꺼기도 안보이냐?”

 

냉장고 문을 열고 뭘 찾는지 한참을 부시럭 거리던 늙은 여우가 배깔고 누워있는 채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스카라 찌꺼기는 또 뭐야? 그런 표현이 있기는 한거야? 채원은 손으로 눈을 쓱 비볐다. 손가락에 까만 마스카라 찌꺼기. 늙은 여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 묻어 나왔다.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 눈물에 다 지워졌을 줄 알았는데. 끈질기다. 얼마전에 물에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화장품 가게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그 육중한 몸을 배배 꼬아가며 징그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예산이 훨씬 초과되는 그 마스카라를 사지는 않았을거다.- 권한 마스카라를 집어들고 나왔는데 역시나 물에 지워지지 않나보다. 성능 실험은 했으니 이번 여름에 바닷가에 갈일 있으면 이 마스카라를 잔뜩 발라야겠다. 채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지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안봐도 뻔하다.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위에 툭하고 내려 놓고는 채원 옆에 와서 털석 주저 앉는다. 채원은 조금전에 지원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다리 사이에 끼워둔 베게를 지원을 행해 발로 툭 차밀어 내준다. 지원은 냉큼 베게를 집어들고는 채원 옆에 들어 누웠다.

 

“괜찮냐?”

 

염병할. 채원은 휙하고 몸을 돌려 지원을 향해 등을 돌렸다. 괜찮으니까 살아있지. 안 괜찮으면 살아있겠냐고 말을 해주려다 말았다. 그래도 지딴에는 걱정된다고 하는 말일테니.

 

“내가 뭐랬어? 그 자식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안든다고 말했지? 무슨 남자가 향수 냄새 풀풀 풍기면서. 안봐도 비디오지. 바람둥이야. 스타일봐. 옷 잘입겠다. 잘생겼겠다. 거기에 말빨은 좀 좋아? 배배 꼬아가며 눈음웃 쳐댈때부터 알아봤어. 싸가지.”

 

“니가 뭘 알아?”

 

“그래도 지 남자친구였다고 두둔하는 거봐. 재수없다.”

 

지원이 말이 틀린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까지 채원이 알았다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거다. 채원이가 그 남자를 지원에게 소개시켜 준 날, 집에 돌아오는 길내내 지원은 궁시렁거렸었다. 분명 바람둥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귀에 딱지가 내려 앉지 않은게 다행이였다.향수 냄새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둥,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린 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지만 채원은 지가 부러워서 저러는 거지 하고는 한 쪽 귀로 모조리 흘려버렸다. 하루보고 뭘 알아.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 몰라서 저러는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원이 말이 다 맞았다. 너 그러다 큰 코 다친다. 적당히 좋아해라. 아무리 말을 해도 채원이 들어먹어 주질 않자 지원이 마지막 경고인냥 했던 말이다.

 

사실 어제 그 자식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나서 먼저 떠오른 건 지원의 그 경고였다. 적당히 좋아할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적당히 좋아할걸.. 스스로에게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 채원은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넌 그래서 안돼. 사랑이 뭔지도 모르잖아? 그저 좋으면 정신 못차리고”

 

지원이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한마디를 한다. 사랑? 그게 뭐냐? 그러는 넌 얼마나 잘 알고? 꼭 지들고 모르면서 말만 번지르하지. 채원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걸 또 꾹꾹 참는다. 사랑이 뭔지 채원이 모른다고 하는건 틀린 말이 아니니까. 저 기집애는 꼭 맞는 말을 하고 저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대는게 특기다. 내가 한 마디도 못하고 당해야 하는게 아마도 통쾌할테지. 채원은 말은 못하고 끙끙 앓는 자신이 분하고 억울해 이를 뿌득 갈았다. 지원은 도 아무말 없이 눈을 감고 있더니 부릅 눈을 뜨고는 채원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뭐야.

 

“바람핀거 맞지?”

 

“몰라”

 

“그럼 왜 헤어졌는데? 이유가 있을거잖아.”

 

집요한 기집애. 그래 바람폈다. 걔가 바람핀거 이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 판 엎어버리고 왔다. 미친놈. 개자식. 있는 욕 없는 욕 시원하게 다 뱉어주고 왔다. 너 한번만 더 내 눈에 뛰면 그때는 너 제삿날인줄 알아라. 소리 고래 고래 지르고 있는 힘껏 뺨한대 갈겨주고 왔다. 어쩔래? 속이 시원하냐? 이렇게 지원에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싶다. 채원은 말똥 말똥 지원을 바라보았다.

 

“너 울고 불고 매달렸지?”

 

헉. 채원은 도둑질 하다 걸린 사람마냥 숨을 멎었다. 심장이 있는대로 쪼그라 들더니 이내 채원의 등판에 탁하고 들러 붙엇다. 켁켁.

 

“누가 울고 불고 매달려?”

 

주방에서 저녁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던 늙은 여우가 쏜살같이 거실로 달려나왔다. 귀도 엄청 밝다.

 

“지금 채원이가 울고 불고 매달렸다는 말이냐?”

 

다시 한번 확답을 들어야 속이 편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지원에게 되물었다.

 

“몰라”

 

지원은 짧게 그리고 감사하게 대답해 주었다. 늙은여우가 채원을 휙하고 노려보았다. 채원은 쿨럭 헛기침을 해댔다. 울고 불고 난리친걸 알면 분명 저 손에 들린 국자로 내 머리를 내리칠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내가 한 두 번 당해?. 꼭 저렇게 국자를 들고 나와서 저러는 이유가 뭐야? 차라리 주걱을 들고 나올것이지. 그게 덜 아프고 좋잖아. 채원은 늙은 여우 손에 들고 있는 국자를 바라보며 혼자 생각했다.

 

“하여튼 그런 꼬락서니만 보여봐. 그냥. 죽을 줄 알아. 누가 너보고 남자 다리 붙잡고 울고 불고 매달리라고 배아파 낳아 준줄 알아? 정신 나간 년들이나 지 싫다는 놈들 다리춤 붙잡고 질질짜고 늘어지지. 정신 나간 것들.. 쯧쯧”

 

그녀는 다시 한번 채원에게 세뇌를 시키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신 나간 년... 그게 바로 나라니. 채원은 웩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싶어졋다.

 

“엄마 말 들었지? 나도 니가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 나도 그런 여자들 질색이야”

 

지원은 채원을 향해 눈을 바로 뜨고 또박 또박 말을 했다. 채원의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채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나도 질색이야. 그런 여자들. 그게 나였냐? 짜증나..

 

“밥들 먹어!”

 

주방에서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조금전부터 고기 냄새가 솔솔 풍겨와 채원의 콧속을 헤집고 하루종일 굶김 뱃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제야 밥을 먹으라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전까지 지원의 칼날같은 공격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꼼짝없이 당한터라 사실 배가 고픈 내색도 하지 못했다. 남자 때문에 밥도 안먹고 질질 짜기나 하더니 이젠 배가 고픈가보지? 분명 이렇게 재수없게 말했을 테니까. 채원은 느릿하게 일어나  아직까지 누워있는 지원을 바라보다 발로 툭툭 지원의 몸을 건들었다. 지원이 실눈을 뜨고 채원을 올려다 보았다.

 

“밥먹으라잖아”

 

“알아”

 

싸가지하고는. 언니가 밥먹으라고 알려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저렇게 싸가지 없이 대답할건 없잖아. 재수없어. 채원은 휙하고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탁위에 차려진 밥을 보자 뱃속에선 난리가 났다. 전쟁이다. 채원은 자신의 배를 한번 쓱 하고 문지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고기는?”

 

“누가 안주냐?”

 

채원이 젓가락을 들고 그녀가 내려 놓는 접시를 바라본다. 빨갛게 양념된 뒷다리살 불고기. 사실 늙은 여우가 잔소리는 많지만 요리 솜씨하나는 끝내준다. 양파와 피망이 보기 좋게 함께 볶아진 불고기를 보자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채원은 허겁지겁 자신의 굶은 배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큭. 웃음이 나왔다. 어젠 그렇게 죽네 사네 난리를 치곤는 오늘은 배가 고프다고 이렇게 밥을 밀어넣고 있다니.

 

“밥 먹는거 보니까 살만은 하나보네”

 

지원이 의자를 꺼내 앉으며 말했다. 그럼 죽으랴? 채원은 아무말 없이 상추에 고기를 얹져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실연 당하고 와서 밤새 울어대다가 미친 듯이 밥먹는거 그거 너무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실연 대책법아니니?”

 

지원이 젓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넣으며 말했다. 꼭 밥도 숟가락으로 안퍼먹고 저렇게 젓가락으로 깨작되지. 지가 공주야? 고상한 척 하기는..

 

“죽을 것처럼 울어대다가도 배가 고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밥을 먹고 그런데 웃긴건 꼭 밥을 비벼먹더라 그것도 양푼 가득.”

 

지금 니 눈에는 내가 밥을 비벼 먹고 있는 걸로 보이냐? 채원은 자신의 밥그릇에 불고기 양념 넣고 쓱쓱 비빈 밥 한 숟가락을 얼른 입에 넣었다. 누가 실연 당한 여자는 밥을 비벼 먹는다고 그래? 그리고 그런 우스운 통계는 대체 누가 낸거야? 지지리 할 일도 없나보지.

 

“그거 나도 봤다. 티비 속 공통점 뭐 그런거 보니까 그거 나오더라.”

 

늙은 여우가 옆에서 거들어댄다. 울고 불고 질질 짜던 여자가 꼭 집에 들어와 양푼째 밥을 비벼 꾸역 꾸역 먹어대지. 눈가에는 마스카라가 잔뜩 번져있고 콧물은 쉴새없이 들이키면서 나쁜 놈, 죽일 놈, 그렇게 곱씹어 가면서 숟가락 듬뿍 밥을 퍼서는 그렇게 먹어대는 모습. 채원도 티비에서 많이 보았다. 그럼 지금 자신이 그런 여자의 모습이라는 이야기? 채원은 얼른 물컵을 들어 입을 헹궜다.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체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채원은 이렇게 구박을 받으며 밥을 먹어야 하는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김치가 맛있게 삭았다. 먹어봐”

 

늙은 여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치 접시로 향하는 젓가락. 채원은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린 젓가락임을 알아채는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맛있네”

 

입에 김치를 넣고 우걱 우걱 씹으며 채원은 늙은 여우에게 한마디 건냈다. 맛있네. 맛있네.
웃기게도 밥은 정말 맛있었다. 눈물이 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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