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휘청거리듯 흔들리는 일상
언제나 그렇듯 금요일은 들뜬다. 내일부터 쉴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채원은 기분이 그냥 좋았다. 이젠 봄이라고 다들 놀러갈 계획을 세우나보다. 소풍이라. 채원은 달력을 힐긋 쳐다보았다. 벌써 한달이나 지났다. 처음 얼마는 너무 힘들어 항상 울다 잠들었다. 그러다 익숙해지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밥 잘먹고 잘 웃고 잘 노는 그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거다. 그것이 감사했다. 채원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직 업무 시작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그때 옆자리 은주가 의자를 돌려 채원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일급 비밀인데.. 최팀장. 유부장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래.”
채원은 동그란 눈으로 은주를 바라보았다. 은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다. 대단한 씹을거리 하나를 구해온 기쁨이겠지. 채원은 은주의 갑작스런 이야기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팀장이라면...
“최팀장 재수없지 않냐? 가벼워보이구 결국 봐. 분명 최팀장이 꼬리쳤을걸.”
그래 그랬을거야. 나도 동감이야. 저 최팀장이 야시시한 옷차림으로 다가가 유부장 어깨를 주물거렸겠지. 저 빨간 손톱봐. 저렇게 긴 손톱으로 머리는 감아지나 몰라.
“유부장은 결혼도 했는데.. 미쳤어”
그래.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 무서워. 부인 있는 것들이 밖에 나와서 바람피우질 않나, 애인 있는 것들은 양다리를 걸치지 않나. 하여튼 잘난 얼굴 하나 믿고 까불다가 언젠가는 큰 코 다친다니까. 채원은 쓸데없는 종이를 착착 찢어 신경질적으로 휴지통에 던지듯 넣었다.
“난 정말 바람피우는 남자들 이해가 안돼.”
은주는 혀를 끌끌차고는 의자를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람피우는 놈들, 그래 그런 것들은 인간이 아니야. 강민준. 너도 인간은 아닌거야.
채원은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위에 엎드렸다. 유부남이 되어가지고 바람을 피워?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러고 보니 애기 돌이라고 한게 얼마 안됐잖아. 내가 그때 돌반지도 사갔는데. 그럼 뭐야? 갓난 아기 둔 사람이 바람을 피워? 미쳤어. 미쳤어.
채원은 엎드린 상태로 빼꼼히 보이는 최팀장을 노려보았다. 다 저 최팀장때문이지. 채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 꼬리 아홉 개 달린 최팀장이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최팀장은 연신 거울에 얼굴을 묻고 화장을 고쳐대고 있었다. 도대체 몇겹을 바른거야? 채원은 손톱으로 최팀장의 얼굴을 쓱 긁어내리면 손톱 자국이 남을 것 같은 짙은 화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왜 저런 여자가 좋은걸까?. 채원은 엎드린채로 책상위에 놓여진 거울을 당겨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 자세히 보니 눈가 주름도 보인다. 언제 주름이 생긴거지? 채원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만져본다. 인제 곧 여름이라고 얼굴이 이렇게 푸석한걸까. 채원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화장 고치기에 연염이 없는 최팀장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화장을 해야하나. 채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민준씨 여자친구예요.’
갑자기 그 여자의 얼굴이 채원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여자에게서도 화장품 냄새가 났어. 향수 냄새와..
“뭐하니?”
은주가 엎드려 있는 채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채원은 조금의 행동 변화 없이 은주의 얼굴을 초점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남자 소개시켜줄까?”
뜬금없이 웬 남자? 채원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은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주는 싱글 싱글 웃으며 살짝 눈을 찡그려보였다. 콧잔등에 가는 주름이 두어개 잡혔다. 남자는 무슨. 이제 남자면 지겨워. 사랑따윈 하지 않아.
“괜찮은 남자야. 한 번 만나봐라”
“싫어”
채원은 딱잘라 싫은 마음을 내비췄다. 조금전까지 남자들을 속물이라고 생각했어. 속이 느글거린다구. 바람이나 피우는 남자들에게 목메기 싫어. 다시. . 사랑에 빠지면 난 아마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을래. 유부장을 봐. 그리고 민준일 봐. 남잔 다 그래. 준이도 그랬을지 몰라.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날 붙잡으려고 한건지도 몰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그 집요하고 끈질긴 집착. 그런거야. 채원은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나주기는 싫고 남주기는 아까운 그런 못된 심리. 하긴 남자만 그런 거는 아니지만.
“무슨 생각하는거야?”
멍하게 있는 채원을 보며 은주가 묻는다. 은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끝을 돌돌 말고 다시 풀고를 반복한다. 그것은 은주의 버릇이다.
“아니”
“너도 어차피 민준이 잊으려면 빨리 다른 사람 만나는게 제일이야. 사람이 살다보면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런거지 뭐 안그래?”
민준. 그 이름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어쩐지 그 이름만 들으면 가슴이 내려앉고 심장이 줄어들어. 지난 토요일에 그렇게 앓았는데 마음을 비웠는데도 이렇게 그 이름을 들으면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 돌부리에 툭하고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야. 넋나간 표정으로 밥을 먹다가 돌덩이 깨문 기분. 그런 기분이야. 채원은 마치 돌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쓸어 만졌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냥 이제 남자 싫어서 그래”
“바보. 남자가 왜 싫어? 세상의 반이 남자라구.”
“치.”
채원은 그냥 피하고 웃고 만다. 은주는 그런 채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쌜룩거렸다. 세상의 반이 남자라는 건 나도 안다구. 그리구 그 반의 하나인 내 인연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요즘 나는 느끼고 있어.
“그러지 말고 만나봐.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내가 장담한다구”
도대체 왜 은주 너가 안달이니. 상처 받은 사람은 난데. 보기 좋게 차이고 온 사람도 나고 남자가 징그러운 것도 난데 왜 니가 좋은 남자라고 호언장담 하면서까지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하는거니. 채원은 아침에 감고 왔는데도 머리가 간지러운 듯했다. 그 사이 화장을 다 고친 최팀장은 엉덩이를 흔들며 유부장에게로 다가갔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건지. 최팀장은 유부장 책상에 손을 짚고 엉덩이를 반쯤 내밀고는 연신 킥킥 거리며 웃어대고 있다.
“남자들은 저래야 넘어오는 거야?”
채원이 은주에게 최팀장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힐긋 은주가 고개를 돌려 최팀장을 바라보고는 혀만 끌끌 내찬다.
“저건 좀 너무하는거지. 꼬리 아홉 개 달린 불여우. 재수없다. 남자들이 다 눈이 잘못된거야. 어떻게 저런 여자에게 휙하고 넘어가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긴 유부장도 원래 재수없잖아. 끼리끼리 논다구. 옛말 틀린거 하나 없다니까. 안그래?”
은주의 말에 채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꼬리가 하나라도 있을까 모르겠네. 채원은 갑자기 자신의 꼬리뼈가 간질 간질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처럼 응큼한 생각을 하면 꼬리가 길어나는 걸까? 큭. 채원이 자신이 생각하고도 웃긴지 푸하고 웃어버렸다.
“기집애 뭘 혼자 웃고 그래. 너 남자 소개해 주면 만나기다 아라찌?”
“싫대두”
채원은 두 팔을 책상에 괸 채 턱을 받쳤다.
“후회하지 말고 만나봐. 정말 근사하니까”
그렇게 근사하면 너가 만나라. 난 마음 없어. 사실 그렇다. 아무리 잊었노라 소리쳐도 그게 생각처럼 되느냐는 말이야.. 아무리 입으로는 강민준 너 이 자식 내가 너 다 잊었다. 너 개미 눈물만큼도 안보고 싶고 안그리워. 잘먹고 잘살아라. 이렇게 외쳐도 실상 마음은 그렇지가 않는데 그걸 어쩌란 말이야. 그래도 가끔은 그 자식과 함께 다녔던 거리를 지나면 눈물이 날 것 같고, 그 자식과 함께 듣던 음악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지는데. 사람 잊는게 그렇게 쉬우면 이별에 아파한다고 누가 그래. 사랑이 끝나면 이별이 있다고 굳이 그런말 안해도 되잖아. 이별이 아픈거라고 하는건 잊어야하는 게 있기 때문인걸. 나의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는 그런 기억들을 꺼내어 탈탈 털어낸다는 게 젖은 빨래 널 듯 그렇게 쉬운일이 아닌걸. 이렇게 겉으로 웃는게 실은 웃는게 아니야. 아직도 전화벨이 울리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 만약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내게 잘못했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걸. 어쩌면 좋으니. 그런데 이런 가슴으로 내가 누굴 만나겠니. 이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그래.. 그건 너무 나쁜 짓이잖아. 은주야. 난 그래. 난 적어도 지금, 아직은 아파. 채원은 은주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의 웃음이 웃음이 아닌 눈물인 걸 니가 알아주길 바란다는 건 내 욕심이야.
“맘 바뀌면 이야기해”
“그럴게”
은주는 컴퓨터 키보드를 타닥 타닥 두드려댔다. 채원은 거울을 한번 들여다 보았다. 내 눈이 조금만 컸어도 좋았을텐데.. 아니면 내 코가 조금만 높아도 좋았을텐데.. 돈 벌면 성형수술이나 할까보다. 채원은 가늘게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잠시 멈춘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잠시후 채원의 전화가 밝은 빛을 뿜으며 반짝거렸다. 문자가 왔나보다. 지원이였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간단한 내용이였다. 그래도 지딴에도 걱정이 되긴 한가보다. 채원은 그런 지원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알겠다고 지원에게 답문을 보내주었다.
***
지원을 만난건은 회사가 끝나고 나서였다. 먼저 도착한 지원이 채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채원을 보자마자 지원이 얼굴을 붉힌다. 기다리는 거라면 질색하는데.. 죽었다.
“왜 인제와?”
역시나. 지원은 채원에게 또다시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채원은 미안하다고 두어번 말해주고 씩 웃어보였다.
“배고프다. 밥 먹자. 뭐 먹을래?”
채원이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선택권을 지원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채원을 보고 지원도 아무말 하지 않는다. 포기한거겠지. 아니면 너도 배가 많이 고팠든지. 안그래? 채원은 지원에게 살짝 잉크를 건내준다. 이건 서비스야! 훗.
잠시 고민하던 지원이 채원의 손을 이끌고는 근처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스파게티 먹자구? 야. 난 밥이 좋다. 채원은 졸졸 지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무지 배고프더라. 너 기다리느라 더 허기져”
무슨. 얼마나 기다렸다고 생색은.. 채원은 의자에 앉으며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지원을 보며 픽 웃었다. 하긴 나도 그래. 나도 아까부터 배가 고팠었어. 근데 뭘 먹지?
메뉴판을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메뉴로 주문을 하고 잠깐 수다를 떨고 있는데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로 놓여졌다. 맛있겠다. 채원은 코를 킁킁거리며 스파게티 냄새를 위장 깊숙이 밀어 넣어주었다. 어서 먹자고 난리다.
“나가자”
갑작스런 말이였다. 먹음직스런 스파게티를 바라보며 포크를 든 채원에게 지원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엄청 무겁게.. 채원은 어리둥절 지원을 바라보았다, 뭘 나가자는 말이야. 음식은 이제 막 나왔다구. 우린 지금부터 이걸 먹어야 하는건데 나가자니. 지원아 잊고 있나본데 난 아직 한 입도 먹질 못했다구.
“나가자구”
지원이 가방을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이게 무슨 어이없는 행동이냐고. 난 이 스파게티를 먹어야해. 갑자기 일어서는 널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니. 정말 깬다. 채원은 포크를 쥔채 지원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았다. 지원은 채원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안먹고 가자고 그러는 거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금 난 배가 몹시 고프다구. 넌 내 뱃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니? 음식을 주문하고 나가는게 말이 되니? 갑자기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야?
“민준이 와있어. 금방 왔어. 그런데도 밥이 넘어갈거 같아?”
지원의 말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민준이라고? 채원은 들고 있던 포크를 뚝하고 떨어뜨렸다. 누가 와있다는 거야? 그 자식이 여기 와 있다구? 채원은 멍하게 지원을 바라보았다, 지원이 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리곤 채원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입을 연다
“저 여자야? 예쁘네. 돈도 많다더니 진짠가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이야.”
지원은 맞은편, 민준과 그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채원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지난번 지원에게 이미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준 채원이다. 이렇게 보게 될줄 알았으면 말해주지 말걸, 지원이 자신과 그 여자, 민준의 새로운 여자와 비교하고 있는게 너무 싫었다. 나도 알아. 내가 그 여자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건.
“근데 쟤 싸가지 없어 보여. 안그래? 너한테 그럴만 해. 이마 튀어나온 거 봐, 질투도 강하겠네. 저런 스타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지원은 앞에 놓인 콜라잔을 들어 한모금 삼켰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조사하는 형사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채원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라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두 사람이 음식을 주문하고 그 음식이 막 나오자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섰다. 민준을 한번 본 적이 있는 지원은 그 두 사람을 쉽게 알아보았다. 함께 온 여자가 채원이 말한 그 여자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잠시 지원은 고민을 했고 아무래도 여기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채원을 떠나 지원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지원이 채원에게 언니 대접을 안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채원이라면 지원은 끔찍하다. 지원의 말투가 원래 딱딱 끊어지는 스타일이라 채원에게 다정다감하게 말해주진 못하지만 채원이 저 자식과 끝내고 온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뻥하고 채이고 들어온날, 문 걸어 잠그고 우는 채원 덕에 지원은 잠 한숨 잘 수가 없었다. 바보같은 기집애. 진작 말했을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지지리 궁상이긴. 그러면서도 지원은 좀더 강하게 말리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더 났다, 저 맹한 채원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만 해도 속이 상했다. 채원은 지원과 다르게 사랑이라면 무조건 믿는 바보다. 그래서 언제나 여린 가슴에 상처를 만들곤 했다. 어릴때 동네 강아지가 죽어 있는걸 보고 지원은 무섭고 징그럽다고 했을 때 채원은 불쌍하다며 그 피범벅이 된 죽은 강아지를 안고 엄마 몰래 집 뒤뜰에 묻어 주었다. 채원은 그런 아이였다. 지원은 언니지만 언제나 맘이 여린 채원이 늘 안쓰러웠다. 그런데 또 상처를 받아왔다.
“됐어. 나 아무렇지도 않아. 배고파.”
지원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채원은 무언가 결심한 듯 떨어뜨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스파게티를 집어 돌돌 말아 입에 쏙하고 집어 넣었다. 내가 죄 지은거 아닌데 피할 거 없잖아. 채원은 우걱 우걱 피클을 씹어댔다. 가만 바라보던 지원도 생각을 바꾼 듯 포크를 집어들었다.
“상관없는 사람인데 뭘. 이거 맛있다”
채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였다. 지원은 그런 채원을 보는게 더 마음이 아팠다. 바보같은 기집애. 민준이 바로 채원의 뒤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인지 채원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을 한건 어차피 잊어야 할 사람이라면 이정도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너무 힘든 일이다. 채원은 포크를 잠시 내려 놓고 음료수를 마셨다.
가슴이 답답해. 이러다 숨이 멎지는 않을지도 몰라.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왜 하필 오늘 여기에 온거야. 왜 그 여자와 여길 온거냐구. 난 이제 어떻게 일어나. 내가 일어나는 걸 혹시라도 너가 보면 난 어떡해. 그게 더 무서워서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어. 구질 구질한 사랑. 그 사랑에 내가 얼마나 아파해야 하는건지, 넌 모르잖아.
채원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하고 눈물방울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채원은 어금니를 꽉하고 깨물었다. 눈물을 흘릴바엔 차라리 치아가 부러지는게 더 나아.
"괜찮아?“
채원의 행동을 아무말없이 바라보던 지원이 걱정스레 묻는다. 걱정할 거 없어. 아무렇지도 않아. 누구나 겪는 일이야. 사람이 사랑하다 헤어질 수 도 있는 일이고 헤어지면 마음 아픈건 당연한 거야. 난 지금 그 당연한 절차를 밟고 있는거 뿐이야. 날 위로하진 말아줘.
“나갈래?”
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채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모습으로 일어섰다가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게 얼마나 챙피한 일일지 안봐도 뻔해. 울지마. 이런 일로 아파하지도 말아. 당당하게 웃어야해. 채원은 고개를 들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지원을 향해 하얀이가 들어보이게 미소지었다.
지원은 팔짱을 낀채 그런 채원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저 픽하고 웃고 만다. 그래 그렇게 웃어줘. 니가 아파하면 내가 눈물이 나, 내가 눈물이 나면 바보처럼 나, 찾을 지도 몰라.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이쯤은 아무일도 아니란 걸 내게 알려줘. 지원아. 니가 나에게 그렇게 웃어줘. 그럼 나도 웃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사랑이라는 거 웃기다. 사랑할 땐 세상 모든게 아름답고 행복했는데 이렇게 남이 되고 나니까 왜
나는 혼자였던 나는 기억조차 안나는지..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으로 행복했을까. 그런데 말야. 이번엔 진심이였나봐, 내가 정말 사랑했나봐. 그동안 사랑이 뭔지 몰랐는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게 아마 내가 사랑했었나봐. 어쩌면 좋으니. 이젠 나의 것이 아닌 저 사람을.. 이렇게 내가 마음 아프면 안되는 거잖아.
“우니?”
“미쳤어. 안울어..후추가 코에 들어갔어.”
“울어라. 여기서 말고 나가서. 저 자식이 듣기라도 해봐 기분 나쁘잖아”
“알아”
채원은 가방에서 파우더 팩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이쁘게 하고 나올걸, 화장도 다 뜨고 이게 뭐야. 채원은 콧잔등을 대충 두어번 톡톡 두드리고는 다시 파우더 팩을 가방에 집어 넣었다.
“아직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지는 못하겠어. 그 정도까지 될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 하나봐”
채원은 물 한모금을 입에 넣어 입안을 가볍게 헹구었다.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 조금전부터 채원의 기분을 계속 거슬렸었다. 지원은 냅킨을 한 장 뽑아 채원에게 건낸다. 채원은 지원이 건낸 냅킨을 받아들고 입가를 가볍게 눌러 닦았다.
“나가자”
“나갈 수 있겠어?”
“아무렇지 않아. 그냥 조금 감정이 동요된거 뿐이야. 아무렇지 않아. 걱정하지마”
채원이 지원을 향해 웃어보이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유유히 걸어나갈꺼야. 니가 날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무렇지 않게 니네 옆 스쳐 유유히 지나갈거야. 그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채원은 또각 또각 가볍게 발을 내 딛었다. 채원의 다리가 가볍게 떨림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채원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여전히 예뻤고 그는.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채원도 지원도 보질 못했다. 이런 엉망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난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아. 채원은 애써 고개를 돌려 가게를 빠져 나왔다. 당당하게 나올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채원은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랑이 뭔데. 그깟 사랑..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렇게 지원과의 외출은 어색하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채원도 지원도 별다른 말은 하질 않았다. 채원은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채원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우울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채원이 으레 하는 일종의 버릇이자 습관이였다. 채원은 불도 켜지 않은채 흐르는 음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슴을 애절하게 파고 드는 노래 가사가 채원의 눈물샘을 콕콕 자극했다. 어둠은 채원에게 위안이 되었다. 아무도 채원의 눈물을 볼 수는 없음이야. 채원은 벽에 기대 앉아 무릎을 세워 가슴팍까지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또르륵. 눈물이 채원의 무릎 위로 흘러 내렸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아파. 이건 지지리 궁상이야. 이런 짓 하면 바보같은 거야. 울지마. 채원아 울지마. 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안쓰럽고 불쌍해 가슴이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나 벌받는거야. 지난번에 준이 아프게 해서 내가 벌받는거야. 준이도 이렇게 마음 아팠을까.준아. 미안해. 준아. 사랑하지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내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내가 그래. 나 벌받는거야. 그치..
채원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겠다. 멍하게 벽에 기대 여전히 애절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누가 이런 가슴 아픈 가사를 쓴걸까. 그 사람도 이렇게 아파서 그랬을까. 채원은 노래를 중얼이듯 따라 부르며 알지 못하는 그 작사가를 떠올렸다. 이런 가사를 쓸정도면 많이 아팠겠지. 죽었나봐.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버렸나봐. 따라 죽겠다고 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 이걸로 이렇게 아파하는 내가 바보잖아. 그 자식은 날 기억하지도 않아, 지금쯤 그 여자와 얼마나 행복할까. 근데 난 이게 뭐야. 이러는거 우스워. 채원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화장지를 풀어 코를 팽하고 풀었다. 지지리 궁상.
이러라고 배아파 날 낳은게 아닌데. 저 늙은 여우가 내가 이렇게 울고 있는 걸 알면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채원은 휴하고 가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별이라는 거 이렇게 아픈거야. 그때 채원의 전화기가 어둠속에서 반짝 빛난다. 문자가 왔다고 신호음을 들려주었다.
[돌이킬수 없는 세가지가 뭔줄아니. 흘러간 강물, 지나간 시간, 떠나간 사람 마음 이거다. 울지마]
지원이였다. 내가 울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채원은 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래 떠난 사람 마음 되돌릴 수없다잖아. 민준인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아. 내가 준이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듯이.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를 한 자세로 있었는지 다리가 다 저렸다. 씨. 구질하다. 채원은 저린 다리를 질질 끌고 침대로 다가가 펄썩 들어누웠다. 엎드린 채 누워 가만 생각에 잠겼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그래 그런거야. 채원은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같은 눈물이 주책없이 또 흘러 채원의 베게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날 저녁 채원은 그렇게 밤새 또 울고 또 울었다. 다 아문줄 알았던 상처가 알고보니 속에서 곪아 있었다. 살짝 손끝으로 누르니 누런 고름이 질질 빠져 나왔다. 있는 힘껏 누런 고름을 빼어내고 나니 이젠 검붉은 핏물이 질질 삐져 나왔다. 쓰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렇게 상처는 아물어 갈 것이다. 채원은 싸구려 화장지에 쓰라린 코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젠 다신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