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째 -
새로 들어온 아가씨가 적응을 못하는지, 불면증인지 밤새 잠도 안자고,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소리에 수연은 자다 깨다, 자다깨다 하며 기억나지 않는 산발적인 꿈들만 꾸다가 간호원이 혈압과 맥박, 체온을 재러 옆에 다가온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3일간이나 열에 시달린 사람같지 않게 조금 미열만 남아있을 뿐이어서 어제보단 몸이 훨씬 가뿐하게 느껴졌다.
" 이수연씨, 열나도 옷 벗고 자지 마세요. 벗고 잔 것은 아세요? 이제 열이 거의 다 내렸네요. 오늘부터 정상적으로 식사하시고, 조금씩 걸어다니며 움직여 보도록 하세요. "
간호원이 한 마디 하고는 가버렸다.
수연은 침대 등받이를 바로 하고 잠시 잠에서 깬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7시 30분쯤 되자 계란 노른자 같은 해가 붉으면서 노오란 황금빛을 퍼트리며 건물들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이면 자주 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새삼 아름답게 떠오르는 새 아침의 태양이었다. 아침 식사가 나오고, 수연은 입이 말라 입맛이 없었는데도 생각보다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밥 반공기를 갈비탕에 조금 말아먹고 나자 기운이 좀 나는게 몸이 많이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병동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1402호실의 화상환자 인자언니와 보숙아줌마가 복도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1403호 병실까지 시끄럽게 들렸다. 소란스러워지는 날이었나 보다. 얼마 후 1402호실의 보숙이 뒤이어 간호원실에서 김간호원과 거칠게 말다툼을 하는 모습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환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 더러워서... 자꾸 나만 가지고 뭐라하지 말아요. 난 한 달 있을 예정으로 왔는데 빨리 나가던지 해야지. 원... 회진 오면 의사 선생님께 다 얘기할거야. 간호원이 환자나 구박하고 말이야. 뭐 겁나는 것도 없으니까."
퍼붓는 보숙의 말에 간호원도 같이 화를 내며 한 마디 덧붙였다.
" 그러세요. 누구보라고 그러는진 몰라도 속옷 차림으로 복도를 지나다닌 것도 빼놓지 말고 다 얘기하구요."
" 속옷 차림은요, 난 옷을 다 입으면 잠이 안와요. 그리고 그 때, 간호사님 두 분 밖에 더 있었어요? 난 남들 보는 앞에서도 옷벗고 다니지는 않아요. 내가 무슨 노출증 환자도 아니고..."
" 그래요? 남자 간호원은 남자 아니예요? 다른 환자도 나올 수 있는 문제고... 그렇다고 하면 가만 있다 조심하면 될 것이지 뭘 잘했다고 항의예요?"
옆에서 말싸움을 지켜보던 남자 간호원이 보숙을 간호원실에서 밀어내는 일로 일단 일단락 됐고, 환자들은 자주 있는 일인양 '별일 아니네..' 하며 각자의 병실로 돌아갔다.
평소에도 남자환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남자 병실 쪽으로 잘 기웃거리는 데다, 남자 한 명을 애인으로 만들었으면서도, 비슷한 연배, 혹은 조금 더 어리거나, 많아도 남자만 보면 살살대며 꼬리치는 모습들이 여자 환자들과 간호원들에게 여러번 지적당했던 터라 언제 터져도 한 번은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기어코 오늘 터진 것이었다.
결국 싸워서 못 있겠다며 옆 방에서 수연의 병실로 옮긴 보숙을 보며 수연은 한 숨이 나왔다.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기질을 가진 보숙을 바라보며,
'저 언니는 병명이 남자를 너무 밝히는 병이 아닐까?'
라는 나름의 황당한 상상을 해보았다.
시끄러운 오전이 지나고, 아직은 나른함과 간간히 나오는 기침, 어지러움으로 수연은 주사를 한 대 맞고 약을 먹은 후 낮잠을 잤다. 7명으로 늘어와 시끄러워 졌던 병실이 중앙홀에서 열린 탁구대회 참석으로 조용한 공간이 되었다. 할머니와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은 수연만이 남아 자고있을 뿐...
' 아-함' , 기지개를 크게 켜며 수연은 칼칼한 목의 갈증을 느끼며, 쑤시고 찌뿌둥한 몸을 침대에서 꺼내 복도로 나섰다. 중앙홀에서 정수기의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바라보니, 16명의 토너먼트 전으로 열린 탁구대회는 어느덧 결승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회장과 장승미의 듀스로 계속되는 접전이 참 재미있게 보여 잠시 지켜보며 서 있는데, 김간호원이 수연의 어깨를 치며, " 면담실로 오시래요." 하는 말을 전해왔다.
수연은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담실의 문을 열었다.
담당의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책상위에 두 손을 얹어놓고 수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젠 몸은 좀 어떤가요? 열은 내렸지만 아직 조금 더 쉬어야 하는데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시간이 더 필요하면 다음에 하시고."
" 아뇨, 열도 많이 내렸고, 몸살 기운과 목이 아직 아프지만 조금씩 움직이고, 이야기하는 데는 지장없어요.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
" 음... 어머니와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 일이 있었다구요? 이번에 아프게 된 이유와 연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
" ... 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제가 외출하던 날 창훈씨가 왔어요. 아직 남은 이야기도 있는 듯 해서 그와 한강으로 가서 이야기했고, 제가 계속 헤어지겠다고 하니까 그가 화가 많이 났나봐요. 제 빰을 때리더니 그 혼자 차를 타고 가버렸어요... 그곳에서 몇 시간을 그렇게 서서 찬 바람을 맞았는진 모르겠어요... 오빠가 데리러 와줘서 집에서 잠시 쉬다 왔는데 그것이 독감으로 갔던 가봐요."
" 병원으로 바로 와서 조치했기에 열이 2-3일 만에 가라앉았지, 조금 더 늦게 치료해서 열이 더 오랫동안 지속됐더라면 조금 안 좋을 뻔 했어요. 급성 편도염까지 겹쳐서... 이젠 많이 회복해 가시는 것 같아 다행이구요... 약혼자분은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
"... 글쎄요... 예전에도 한 번 그의 직장 선배부부와 서울 외곽으로 식사를 하러 간적이 있는데 오는 길에 집을 꾸미는 인테리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다 제가 그의 의견을 반대했더니 화가 나서는 그 선배 부부와 헤어지자 마자 돌아오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저를 내리게 하더니 혼자 가버린 적이 있어요. 당황했지만 그 모습만을 보고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맞은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물론 제가 그가 원하는 대로 순종적인 모습을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상시에는 그렇게 매너좋고, 신사다운데 한 번씩 돌변하는 그의 모습이 이젠 조금 무서워요. 마치 마음의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마저 그가 다 얼려버리는 것 같을 정도로...."
" 이수연씨께서 약혼자분과 경쟁하는 사이로 서있는 것은 아닌가요? 약혼자분과 팽팽한 경쟁관계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 ... 그럴 수도 있겠죠. 권위적인 모습을 지닌 그와 순종적이지 못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저와의 사이에는... 그러나 이번에 느낀 것이 있어요. 제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맞춘다고 해서 그 모습이 저의 본 모습일까요? 그런 모습을 얼마간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요? 더 더욱 근본적으로 전 그의 바람기를 용서못해요. 더구나 그 상대가 제 동생임에야...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했으면서도 결혼하자는 그의 그 이중적인 모습도 너무 싫어요. 화가 난다고 서슴없이 올라가는 그의 폭력도, 차도 없는 곳에 수시로 버려두고 가는 그 차가운 무신경함도... 이야기하다 보니 많네요.... 그의 싫은 점들이... 사랑이란게 뭘까요? 그를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도 이젠 얼어버렸어요... 온통 고통과 후회만 남네요... 그가 말한대로 정말 제 마음이 얼음같아서 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제 마음은 아마도 이곳에서 완치되지 않는 긴 시간이 필요하겠죠.... "
"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 그의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집은 재건축으로 공사중이라 우선 제 앞으로 얻어놓은 아파트가 있어요. 퇴원하면 그곳에서 혼자만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려고 해요. 여행도 다니고, 무엇인가도 배워보고.. 새로운 직장을 얻어야 하겠죠.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해보던가요...."
" 음... 당분간 가족들과 있는 것은 어떨까요? "
" 아뇨. 처음으로 혼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여지껏 이만하면 엄마의 말을 들어드리며 자랐다고 생각해요. 새로 시작하고 싶어요. 조카를 보면 아기가 너무 갖고 싶어지거든요. 오빠와 새언니의 관계도 부럽고..."
" 오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 제가 결혼하려고 생각한 계기도 오빠 부부를 보면서 였어요. 오빠는 늘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예요. 말 없이 보듬어주는 사람... 제 이상형이죠. 일찍 가장이 되었고, 여자도 별반 사귀어 보지 않아 여자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는데... 새언니와도 첫 선을 보러 나갔다 첫 눈에 반해 한 달 만에 결혼해서. 제 조카가 허니문 베이비예요.(웃음)... 너무 부러웠죠.... 저도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사랑한다고 억지로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며 사랑하려고 노력해왔죠. 그런데 이젠 그렇게 못하겠어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고 싶어요. 저 자신을 새로이 찾고 싶어요. "
" 동생분과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 휴- ... 제게 가장 마음 아프고, 고통스러운 부분이예요. 냉정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싶고... 만약 그와 지연이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으로 가끔 미칠 것 같아요. 그 상황이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휴 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이런 일들 후에도 그들의 사이가 유지될까 싶지만 ... 모르겠어요. 앞으로의 일은... 예전부터 그리 좋은 사이도 아니었는데... 경쟁관계 말씀하셨죠? 그런 관계 비슷해요. 우리는 ... 나이가 한 살 차이라 더 그런 지도 모르고... 자신이 데려온 아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결론을 내릴 순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겠죠. 집에 있기 싫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 보려구요."
" ...그래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기회가 되면 동생분과 차분히 이야기 해보시고, 같이 한번 상담할겸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기회가 되시면. "
" 글쎄요...그러고도 싶지만, 아직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선생님... 퇴원하고 싶어요..."
" 아직 몸이 덜 회복됐을텐데요... 마음도..."
" ... 이 곳에 있는다고 완치될까요? 제 삶에서 직접 부딪쳐야 겠죠. 겁쟁이로 사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담당의가 잠시 말없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안경테 너머로 수연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 당분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규칙적으로 상담하러 오시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
" 그럴께요. "
" 몸 상태를 하루, 이틀 정도 더 지켜보고, 괜찮다고 생각되면 3일 후 쯤 퇴원하는 것으로 하죠. 우선은 편도염이 악화되지 않도록 가습기를 잘 쐬고, 이따가 주사 한 번 더 맞고, 푹 쉬도록 하세요. 내일 다시 차도를 보죠. "
" 네"
저녁부터 12월의 마지막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연은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가라앉은 마음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음악소리처럼 수연의 가슴에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한 번씩 터져 나오는 기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 지연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