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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사랑해버리자 [4]

*우연* |2005.08.20 12:45
조회 697 |추천 0

4.  또 다른 아픔에 몸서리치다


햇살은 이젠 조금 뜨겁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두꺼운 이불을 치우고 얇은 이불을 꺼내어 덥고 있는데도 조금은 덥다라는 생각이 든다. 채원은 이불을 돌돌 말아 두 다리 사이에 끼운채 잠이 들어있다. 고개를 삐딱하게 위로 쳐들고 자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목이 저려 올 것만 같은 자세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락거리며 핑크색 커튼을 살짝씩 흔들어 놓고 또 흔들어 놓고.. 잔잔하게 흘러 나오는 음악은 일요일 아침 여유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그 평온함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채원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지원이 부스스한 얼굴을 내밀었다. 지원은 곤히 잠든 채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침대에 털썩 주저 앉는다. 그리고는 아직 채 떠지지도 않은 눈을 애써 부비며 채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여전히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지원이 채원을 깨운다. 개슴치레 눈을 뜬 채원. 뭐냐. 누가 나의 단잠을??

 

“일어나”

 

“뭐야. 야.. 놔”

 

채원은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나의 단잠을 깨우지 말라고. 어제 영화 본다고 늦게 잤더니 지금 온 몸이 쑤시고 너무 피곤하단다.

 

“엄마가 일어나래”

 

지원이 졸음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한마디를 건냈다. 늙은 여우? 채원은 머리끝까지 덮어쓴 이불을 내려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왜?”

 

“왜긴 왜냐? 오늘 대청소 할거니까 얼른 일어나서 씻어. 지원이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정신차리고”

 

어느새 채원의 방에 들어온 늙은 여우. 채원은 굼벵이 기어가듯 몸을 배배꼬며 일어났다. 우이씨. 무슨 대청소야. 아. 짜증나.

 

“뭐해. 얼른 얼른 씻질 않고. 오늘 할일 많다. 서둘러”

 

“하필 왜 일요일날 대청소하고 그래. 어제 했음 됐잖아.”

 

“어젠 지원이가 없었잖아. 시끄러. 이 기집애야. 뭐가 궁실거릴게 그렇게 많아? 얼렁 일어나”

 

채원은 입을 있는대로 삐죽거렸다. 늙은 여우. 아침부터 사람 괴롭히기나 하고. 근데 웬 대청소. 늙은 여우 심란한 일이라도 생긴건가. 채원은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어내리며 잠시 생각했다. 언제나 심기 변화가 오면 대청소를 하는 지라 갑작스런 대청소가 어딘지 모르게 찝찝하다. 채원은 침대에서 기어내려 오다시피 바닥으로 내려왔다. 지원은 이미 씻으러 욕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채원은 어슬렁 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 시원한 물을 한잔 마셨다. 어제 영화가 너무 슬펐어. 채원은 자신의 부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슬픈 영화는 봐가지고.

 

“뭐해? 오늘 대청소 하는건 게으름 피우거나 그러지 말아라”

 

“알았어”

 

늙은 여우. 아침부터 잔소리는.. 물에 체하겠다. 흥. 채원은 약간의 신경질적으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지춤을 끌어 올리며 거실로 나와 쇼파에 주저 앉았다

 

“갑자기 웬 청소야? 무슨일 있어?”

 

채원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늙은 여우는 빨랫감을 베란다로 옮기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채원의 말을 시원하게 무시하고는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뭐야. 사람 말 무시하고.”

 

채원은 늙은 여우 가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하긴 무슨 일이 있을 게 없지. 무슨 일이 있을게 있어야지.. 채원은 있는 힘껏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폈다. 온 몸의 신경이 놀란 모양이다 여기 저기서 두두둑 뼈들이 소릴 질러댔다. 에구 허리야.

 

“밥은 먹여주고 하는거지?”

 

빨래를 널고 거실로 들어서는 늙은 여우에게 채원이 물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밥도 안주고 일을 시킨다는 건 너무 하는 짓이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안그래. 채원은 깍지 낀 손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늙은 여우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청소는 반나절이 지나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채원은 뻐근해진 자신의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연신 걸레질이다. 늙은 여우는 갑자기 웬 대청소를 한다고 이러는 건지.. 채원은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늙은 여우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어디갔어?”

 

“몰라, 아까 커텐 빨러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지원은 손놀림을 움직이지 않은채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지. 느낌이 이상하잖아. 늙은 여우가 갑자기 대청소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이렇게 커텐이며 이불 빨래까지 하는 것 모든게 이상해. 이건 분명 뭔가가 있는데. 무슨 일일까.

 

“엄마 커텐에 이불에 그거 다 뜯고 빨고 하는거 뭔지 알지?”

 

채원의 말에 지원도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지원은 가만 채원을 바라보았다. 무슨일이지?

 

“엄마 무슨일 있어?”

 

“모르지.”

 

지원의 물음에 채원은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몰라. 나의 아픔에만 정신이 팔려 늙은 여우에게 무슨일이 생긴건지 아무것도 몰라. 분명 지금 늙은 여우 무언가가 이상해.

 

“설마 별일 있겠어. 봄맞이 대청소 뭐 그런것도 못했잖아. 그런거겠지.”

 

지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채원은 걸레를 바닥에 놓아둔채 쪼르르 욕실로 달려갔다. 늙은 여우는 욕실 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욕실 안으로 얼굴만 내밀고 채원이 늙은 여우를 불렀다. 쭈그리고 앉아 솔질을 벅벅 하던 늙은 여우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채원을 바라본다. 이마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힌 늙은 여우. 허리 아프겠다.

 

“왜?”

 

역시나 짧게 대답하는 늙은 여우.

 

“무슨 일 있어?”

 

채원이 묻자 늙은 여우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는 듯 휭하니 고개를 돌려 다시 솔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뭐야. 또 내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리는거야? 물어보면 대답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일 있냐구!”

 

채원이 소리를 높여 재차 묻는다. 늙은 여우는 여전히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채원은 잠시 그렇게 문에 기대 늙은 여우의 행동을 지켜보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걸레질을 마저 한다. 이상해. 분명 뭔가가 있어. 채원은 그런 늙은 여우가 불안해졌다. 갱년기? 하긴 그건 이미 왔을거고. 우울할까? 아님.. 아빠랑?. 채원은 욕실을 바라보았다.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아빠? 아빠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대청소는 그렇게 하루를 꼬박 걸려 끝이 났고 모두 지친터라 저녁은 대충 중국집에서 시켜 먹었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쑤시는 듯했다. 채원은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에 누워 주말연속극을 보고 있다. 도대체 저 작가는 누군지. 참 재밌게 잘 쓴단 말이야. 채원은 앞에 놓은 과일을 입에 넣으며 혼자 낄낄 거렸다. 지원은 쇼파에 앉아 말없이 티비를 보고 있으며 늙은 여우는 안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야. 엄마 자냐?”

 

과일을 입에 넣고 우적 씹다가 채원이 물었다. 쿠션을 안고 쇼파 깊숙이 기대어 있는 지원은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채원은 몸을 돌려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럼 뭐해? 드라마 안본대? ”

 

“나도 몰라”

 

“웬일이야. 이 드라마에 껌뻑 죽는 사람이. ”

 

채원은 다시 몸을 돌려 티비를 보며 또다시 킥킥 거렸다. 그리고 또 과일을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웃겨. 너무 재밌어. 그때 안방에서 늙은 여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채원과 지원을 부르는 소리였다.

 

“엄마가 부른다. 일어나”

 

지원이 안고 있던 쿠션을 내려 놓고 일어서며 누워있는 채원에게 말했다. 뭐야. 꼭 이런 순간에 부르는 저의가 뭐냐고. 정말 맘에 안들어. 채원은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거 봐야 되는데..

 

“뭐해?”

 

일어난 채 시선을 티비에 고정하고 있는 채원을 보며 지원이 물었다. 지원은 안방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채원은 티비를 끄고 지원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늙은 여우는 가만 앉아 있었다. 티비도 안켜고 뭘 하고 있던거야. 채원은 지원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저건 뭐야? 채원은 늙은 여우 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반성문 그런거 같네. 채원은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십분만 있다가 부르면 다 보고 왔잖아. 저 심술. 채원은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한게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거 봐라”

 

늙은 여우가 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채원과 지원 앞으로 밀어 준다. 뭔데 저렇게 무게를 잡고 그러실까. 채원은 세운 다리를 풀고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지원이 집어든 종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혼.. 뭐야. 채원은 휙하고 지원이 들고 있던 종이를 빼앗아 들고는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혼 소송.. 그 종이 안에는 늙은 여우 이름과 채원의 아빠 이름이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냐고. 누가 이혼을 한다는 말이야.

 

“뭐야”

 

채원이 종이를 내려 놓으며 물었다. 늙은 여우는 아무말 하지 않은 채 한 쪽 다리를 세워 자신의 가슴안으로 끌어당겼다. 지원 역시 아무런 말이 없다. 채원은 지원과 늙은 여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냐구 이게.”

 

“보면 몰라?”

 

지원이 채원을 바라보지도 않은채 대답했다. 누가 몰라서 묻니? 나도 안다구. 이게 이혼 서류라는거 그쯤은 나도 알아. 근데 이게 왜 여기 있냐구.

 

“이혼 하기로 했다.”

 

늙은 여우가 싸늘하게 대답해주었다. 그것은 채원에게 정확한 확답을 주는 것이였다. 채원은 기가 막혔다. 갑자기 이혼이라니? 사람 일이 그런거야?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럴 수가 있어? 말도 안돼. 이건 말이 안돼잖아.

 

“잘해볼려고 노력했어?”

 

지원이 늙은 여우에게 물었다. 그래 노력은 해봤냐구. 이렇게 우리에게 이혼 한다고 하기전까지 노력은 했냐고. 무슨 일인데 이혼을 한다는 거야. 우리가 같이 살지 않는거 그건, 아빠가 지방 공사로 바쁘니까 서울까지 오기 힘들다고 그래서 지방에 집 얻어 나가는 거라고 했잖아. 그게 아무 문제는 아니라고 했잖아. 한달에 한번도 제대로 못보고 지냈지만 그건 아빠가 바빠서라고 했잖아. 근데 이게 뭐야. 이런거였어?

 

“아빠.. ”

 

늙은 여우는 말을 멈췄다. 그녀도 힘이 드는지 자신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지원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채원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답답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좋은 사람이 생겼대.”

 

늙은 여우는 거기까지만 이야기를 했다. 지원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방을 나가버렸다. 쿵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이 닫혔고 늙은 여우는 지원이 나간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 생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아빠가 바람이 났다는 말이야. 채원은 늙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늙은 여우는 이미 마음을 비운건지 자신 앞에 놓여진 종이를 집어 누런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는 침대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작아보였다. 어린 나이에 사랑을 알고 무턱대고 시작한 동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게 채원이고 이듬해 지원이 태어났다. 어릴적 다른 가정 부럽지 않게 행복했고 아빠 하는 일도 크게 번창했다. 부러울건 하나도 없었다. 달라지기 시작한건 작년 이맘때 쯤이였다. 아빠의 귀가가 늦어졌고 외박도 잦아졌다, 하지만 그때 한참 새로운 공사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모두들 아빠가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후 지방 공사라 서울까지 오고 가는게 힘들다고 아빠가 공사 현장 근처에 집을 구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는 일도 더욱 힘들어졌다. 늙은 여우가 가끔 지방으로 내려가곤 했지만 아빠가 너무 바쁘다고 자주 올 거 없다고 한 모양이다. 그렇게 엄마의 외출도 줄어 들었다. 그뿐이였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이라니.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채원이 늙은 여우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늙은 여우는 아무말이 없었다. 채원은 늙은 여우에게 다가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엄마 어깨가 이렇게 좁았구나. 채원은 늙은 여우의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엄마도 실연 당했구나”

 

채원이 늙은 여우의 좁은 등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늙은 여우의 등을 적셨다. 늙은 여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엄마도 실연 당했구나. 그거 너무 많이 아픈건데.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는데. 엄만 너무 아프겠다. 어쩌지. 어쩜 좋아.

 

채원은 잠시 늙은 여우를 안아주고 방을 나왔다. 채원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빠도 그런거구나. 아빠도 그랬어. 엄마를 버린거야. 나를 버린거야. 지원이를 버린거야. 버린다는 건실상 별로 아픈게 아냐. 내가 준이를 버렸을 때 난 별로 아프지 않았어. 근데 버림 받는다는건 너무 많이 아픈거야. 내가 민준이에게 버림 받았을 때 얼마나 아팠는데. 아빤 몰라. 엄마가 얼마나 아플지. 하지만 난 알고 있어. 엄마는 지금 심장이 무너져 버렸을 지도 몰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이 너무 아플지도 몰라. 25년의 시간이 너무 아파서 엄마는 죽고 싶을지도 몰라. 아빤 엄마에게 뭐라고 한거야. 미안하다고 했어? 아니면 아빠도 엄마에게 사랑했었다. 그렇게 말한거야? 아빠. 뭐야. 이게 뭐야. 채원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와락 하고 솓아져 내렸다. 이런일이 내게 생길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채원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을 꾸는 거야. 이런 악몽을 너무 자주 꾸는게 이상

해. 하지만 이건 꿈이야. 엄마와 내가 한꺼번에 버림을 받을 수는 없어, 난 다 잊어가는데 근데 갑자기 이게 뭐야

 

채원은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살았는데 갑자기 민준이 떠올랐고 지난 자신의 아픔

이 떠올랐고 자신 보다 더 아플 늙은 여우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 들어서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쏟아져서 소리 높여 그렇게 서럽게 울어댔다.


 

 

5.  낯선 남자를 만나다

 

 

채원은 부모는 그렇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채원은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차를 몰았다. 늙은 여우에게도 지원이에게도 어디를 가겠다, 얼마를 머물고 오겠다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나선 길이다. 사실 여행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없다. 그냥 차를 끌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이니까. 이미 수명을 다한 듯 오래된 골통 경차는 덜덜덜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듯 고속도로를 달렸지만 채원의 옆을 쌩하고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대형차가 하나도 부럽지는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바람 온 몸으로 맞으며 그렇게 달리는 길은 채원에게 상념도 아픔도 다 잊어버리게끔 해 주었다. 그것은 채원에게 감사 그 전부였다.

 

“정말 좋다..”

 

채원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미치게 좋다. 채원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가 조금 넘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 시간은 죽은 시간같다. 모든 것이 지루하고 늘어지는 시간. 그래서 24시간 중 가장 생동감이 없어 보이는 졸리는 시간,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였다. 그래서 인지 7교시 수업이 언제나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 커다란 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솔솔 불어오는 바람결에 잠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채원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핸들에 가만 얼굴을 묻었다. 라디오는 전파를 제대로 끌어오기가 힘든지 지지직 거리고 있었다.

 

-사랑이 뭐니. 그깟 사랑 누가 알아? 웃겨. 어이없고 짜증나는거 그게 사랑이니.

 

채원이 지원에게 한 말이다. 이젠 사랑따윈 안믿어. 민준이. 유부장. 그리고 믿었던 아빠까지. 정말 징그러워

 

-다 그런건 아니야. 싸잡아서 생각하지마. 그거 너 지나친거야

 

지원은 채원을 설득했다. 자신도 세 여자를 버리고 가버린 한 사람이 지독하게 미워 밤새 문 걸어 잠그고 그렇게 울었으면서 그래도 눈물을 닦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지원은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자 마음 먹었는데 채원이, 마음 여린 채원이 상처를 받았다. 지원은 그것이 겁이 났다. 언니는 그러지마. 나처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언니는 그러지마. 지원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랑이라면 이미 치가 떨려 하지만 결국은 다시 사랑에 목이 말라. 그래서 다시 찾아 헤메게 되는거야. 아직 그건 모르겠지만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너무 증오하진 마. 증오하면 너만 아파. 바보처럼 너만 아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넌, 언니는 아파하지마.

 

채원은 문을 쾅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미 집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침울함이 넘쳐났고 공기는 혼탁했다. 숨을 쉰다는 것은 마치 죽음의 길로 가는 또다른 길이였다. 늙은 여우 역시 충격은 컸던 모양이다. 그렇게 강한 그녀가 머리를 싸메고 들어 누워 죽는 소리를 해내고 있다. 채원은 그렇게 숨막힐 듯 조여오는 그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회사에 휴직계를 냈다. 그리고 그대로 주차장에 처박혀 있던 똥차를 끌고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그것은 채원에겐 마치 면죄부처럼 다가왔다. 집을 뒤로 속력을 내어 빠져나오는 순간 거울로 보이는 등 뒤 풍경은 이미 채원의 것이 아니였다.


채원은 고개를 들어 의자 깊숙이 몸을 누었다. 의자를 뒤로 젖혀 반쯤 몸을 젖힌채 채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조수석에 올려둔 전화기가 경쾌한 소리를 질러댔다. 채원은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윤 준.

 

채원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여전히 경쾌하게 울리는 전화를 가만 바라보고 있다. 준이가 무슨 일로 전화를 했을까. 받아야 할까. 아니면... 채원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울어대는 전화만 손에 들고 안절부절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전화의 벨소리는 뚝 끊어졌고 채원의 귀에는 여전히 지지직 거리는 라디오 소리와 지나가는 차들의 쏜살같은 바퀴소리만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 너 무슨일이니. 내가 그렇게 지독하게 널 버렸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니. 내가 널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그래서 난 지금 너무 지독한 형벌을 받고 있는데.

 

채원은 이미 끊어진 전화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또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건 내가 우는게 아니야. 비가 오나봐.

 

채원은 다시 멈춰진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배가 고파왔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질 않은걸 느끼자 배는 심하게 고파왔다. 휴게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채원의 눈에 휴게소가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들어왔다. 얼마가지 않아 휴게소가 보였고 채원은 유유히 휴게소로 자석에 끌리듯 그렇게 들어가 차를 세웠다. 지갑과 전화기만 들고 차에서 내려 차문을 잠궜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휴게소는 한산했다. 채원은 일단 화장실을 찾았고 비누칠을 해 손을 깨끗이 씻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이 손을 씻고 싶었다. 화장실을 나와 채원은 식품 코너를 두리번 거렸다. 요기할 만할 것을 찾아야 하는데 고픈 배와 달리 입은 그다지 당기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매점에 들러 물 한통과 소세지를 몇 개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즉석코너에서 핫바를 하나 샀다. 혼자서 자리잡고 앉아 먹어대는 모습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 채원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차문을 열고 사들고 온 음식물을 조수석에 올려놓고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푼 채 핫바를 한 입 물어 베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조수석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남자였고 무언가 급해 보였다. 채원은 오물오물 입안의 음식물을 대충 두어번 씹어 삼켰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조수석 창문을 열어 주었다. 단정해 보이는 남자였다. 조수석 창문이 열리자 그 남자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반쯤 밀어 넣었다. 뭐야.

 

채원이 당황하듯 긴장하자 그는 다시 한번 웃어보였다. 이상한 짓만 해봐. 이 핫바 꼬챙이로 콱 찔러 버릴테니까. 채원은 오른 손에 들린 핫바를 살짝 내려다 보고는 손아귀에 힘을 꾹 몰아 주었다.

 

“저기요..”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적지 없이 나선 길에서 배가 고파 무턱대고 들린 휴게소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무슨 용건일까. 그 남자의 출현은 채원에게도 살짝 긴장되는 궁금증이였다.

 

“죄송한데요. 어디까지 가세요?”

 

“네?”

 

어디까지냐구요? 글쎄. 전 목적지가 없는데요. 채원은 그 남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다시 여전히 같은 자세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자세가 조금 불편한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어주었다.

 

“제 차가 고장이 나서 그런데요. 목적지가 비슷하면 좀 신세 좀 질까 하구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시원 시원했으며 살짝 그을린 듯 한 피부는 건강해 보였다. 웃을 때 들어나는 하얀 치아가 고르게 뻗어 있었고 창문에 걸친 손은 거칠어 보였지만 강인해 보였다.

 

“갑자기 시동이 안걸려서요. 제 차가 오래되서 사실 늘 말썽이였는데 이놈의 차가 갑자기 또 말썽을 부

리네요.”

 

채원은 그 남자의 말을 가만 듣고 있었다. 뭐야. 차가 고장이 났어? 그럼 보험을 부르면 되잖아. 채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양미간이 가볍게 주름이 두어개 잡혔다. 그 남자도 그런 채원의 표정을 놓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들이내민 고개를 쑥 빼더니 차를 빙 돌아 채원이 앉아 있는 운전석 문을 확 당겨 열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채원이 당황한 나머지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연 그 남자에게 소리를 쳤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핫바를 그 남자 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런 채원의 모습에 껄껄대며 웃어댔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어대는 거야? 채원은 순간 자신이 핫바를 마치 칼이나 무슨 무기라도 되는냥 그 남자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 나쁜 사람 아니예요. 그것 좀 치워줄래요? 냄새가 좋아서 먹고 싶어져서 안되겠어요.”

 

그 남자는 채원의 손에 들린 핫바를 가르키며 다시 웃어댔다. 저러다 배꼽 빠지지. 그리고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나쁜 사람이 저 나쁜 사람입니다 뭐 그렇게 얼굴에 써놓고 다니나..

 

“잠깐만 내려봐요”

 

그 남자는 다짜고짜 채원에게 내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야 이사람. 느닷없이 나타나서 차에서 내리라느니 같이 차를 타고 가자느니, 무슨 속셈이지? 혹시.. 인신매매범? 아니면.... 채원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 남자를 가만 올려다 보았다. 그 남자는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몸이 움츠러든 채원을 보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한쪽 손을 이마에 짚고는 아! 라고 혼잣말을 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려고 한건 아닌데. 그렇게 됐네요. 제 차가 고장이 났다는 걸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제 차를 보여 드릴려고 그랬는데 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자세로 그 남자는 깍듯한 사과를 건냈다. 그제야 채원의 움츠린 몸이 살짝 풀렸다. 채원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직 주위는 밝고 아무리 한산하다고는 하지만 오가는 차들도 많고 설마.. 채원은 들고 있던 핫바를 조수석에 놓인 비닐봉지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마치 그 남자에게 이끌리듯 차에서 내려섰다. 그 남자 앞에 우뚝 서자 생각보다 남자는 키가 컸다. 채원은 순간 무안해서 살짝 비켜섰다.

 

그 남자는 뚜벅 뚜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채원은 차 문을 잠그고 그 키 큰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남자의 차는 채원의 차가 주차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차 되어 있었다. 그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세워진 차를 가르켰다. 그 남자의 표현 그대로 그차는 똥차였다. 채원의 차보다 훨씬 더 구닥다리 모델이다.

 

“이 놈의 차가 갑자기 시동이 안걸리네요. 휴게소 들어올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출발을 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이렇게 말썽을 부리잖아요,”

 

그 남자는 자동차 바퀴를 발로 탕탕 걷어차며 열심히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보험을...”

 

“아. 그거요.. 안돼요. 이 차 한번만 더 퍼지면 그땐 폐차해야 한다잖아요. 안되죠”

 

그 남자는 설레 설레 고개를 저었다. 채원이 이 똥차를 폐차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채원이 그런 것처럼 몸서리를 쳐댔다. 채원은 멀뚱 멀뚱 그런 남자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았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 남자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거지?

 

“차를 두고 가는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얻어 탈 차가 있어야지요. 한참을 이렇게 여기서 주저앉아 기다렸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

 

남자는 말을 끊기도 전에 또다시 시원스런 웃음 소리를 퍼부었다. 얻어 탈 차가 없다니. 여기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들이 차가 아니고 뭐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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