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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0화> 웃는 모습

바다의기억 |2005.08.26 01:40
조회 12,797 |추천 0

요즘 태권도의 묘미에 푹 빠져서

 

그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태권도하면 =실전에 쓸모없는 무술= 이라고들 하지만

 

앞차기 하나 만으로도 태권도는 충분히 강합니다.

 

============================ 그래서 앞차기 밖에 못하냐 ==============================

 

과연 따블의 위력은 엄청났다.


우린 25분이 조금 넘어서 시험장 근처까지 도착했고


너무나 막강한 요금에 눈물 한 방울을 떨구면서도


곧장 시험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기억 - 뛰어, 뛰어, 뛰어~!!


민아 - 하악..하악....하악!!


기억 - 이이잇! 빨리~!!



시험장까지 이어지는 계단과 오르막길.


난 계속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순식간에 지쳐버린 그녀는


땡볕에 늘어진 곰처럼 기진맥진이었다.


민아 - 나, 나 더 이상은 못 뛰겠어. 기억아, 혼자라도 가!!


기억 

- 어떻게 나 혼자가란 말이야!


어서 일어나, 조금만 더 가면 돼!



주저앉기 직전의 그녀를 달래고 잡아끌며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한 나.



현재시각 9시 33분!!


우린 허겁지겁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쾅!’



기억 -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우리의 등장에 놀란 조교는


기진맥진한 우리의 몰골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확인하고


강의실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교 - .... 시험 시작합니다. 어서 뒤쪽에 가서 앉으세요.


기억 - ...허억...허억... 예!



골인했다... 골인 했어... 해냈다....!!



난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빈자리로 찾아들어갔고


가방에서 필기구들을 꺼내 시험을 칠 준비를 했다.



조교 - 답안지 돌립니다. 모두 학생증 책상 위에 꺼내놓으세요.



학생증이....아, 여기 있구나.


하아... 하아.... 그런데 이게 무슨 시험 시간이더라?



하얀 답안지 위에 적을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아 헤매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내게 다가온 조교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교 - 엥? 공대생이 왜 여기 있어요?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시험지의 제목.


=인문·사회대를 위한 수학. 중간고사=



......... 맞다.



기억 - ......그러게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난


그렇게 애매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란하게 등장해서 뜬금없이 퇴장하는 날 보며


사람들은 폭소를 터트렸지만


그런 거야 어찌 되건 좋았다.



민아 - ........ 고마워요.



그녀가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조용히 원츄를 쌔워주고 시험장을 나선 난


근처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거친 숨을 골랐다.



아이고 허리야....


머리도 지끈지끈 아프고..


숨도 차고 땀도 나고....


어제 마신 게 술이었나?


속이 왜 이렇게 쓰리냐.


아무튼 힘들어 죽겠다....



그렇게 긴장이 풀리자마자


물 속으로 가라앉듯 찾아오는 졸음.


민아야.... 시험 잘 쳐야 돼~.







......................


........


으음..... 내가 얼마나 잔거지?




쏟아지는 햇빛에 찔끔 눈을 뜬 순간


내가 처음 본 것은


날 내려다보고 있는 민아의 얼굴이었다.



민아 - 일어났어?


기억 - ....으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그녀가 손으로 다독이듯 제지했다.



민아 - 그냥 누워있어.


기억 - 아...응.



......누워 있으라니 누워있긴 하지만


뭔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와의 각도.


그리고 머리 밑에 베고 있는 무언가....


난 살며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뭔가를 더듬었다.


뭐지 이건?



민아 - 간~지러~.



그 때 곧장 들려오는 그녀의 반응.


.......... 다리?!



기억 - 헉?! 미, 미안!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복근에서 허리까지 알이 제대로 배긴 듯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기억 - 컥.



난 짧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 그녀의 허벅지 위에 폭 드러눕고 말았다.



민아 - 에유.. 아까 무리하는 것 같더라.


기억 - 아... 워낙 상황이 급했으니까...... 풋.



순간, 너무나 애절한 표정으로 ‘기억아! 혼자라도 가!’를 외치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난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 - 호, 혼자라도 가....큭큭.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제야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든 난


손으로 입가를 지그시 눌러 웃음을 참았다.



민아 

- 이잇....못됐어. 자기도 시험장까지 들어와 놓고....


...응?! 그런데 지금 웃은 거예요?



기억 - 예?!



그녀의 질문은 날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맞아.... 방금.... 분명.....



난 일순 귀까지 확 달아오르는 듯한 당혹감에 고개를 피했다.



기억 - ...... 아, 아뇨..


민아 - 뭐가 아니에요~ 내가 봤는데~!! 또 웃어 봐요, 네?


기억 - ....안 웃었어요.


민아 - 이잇..... 기억아~!! 혼자라도 가~!! 난 틀렸어~!!



갑자기 당시 상황을 재현하듯


과장된 손짓을 해가며 울상을 짓는 그녀.



기억 - .....쿡.


민아 - 그 봐요! 웃었잖아요! 뭘 안 웃어요. 웃었죠? 웃었죠?



아까처럼 큰 웃음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확실히 입 꼬리가 쓱 말려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어색한 근육의 당김을


무의식적으로 꾹꾹 눌러 가라앉히는 내 손을


그녀가 잡아서 멈췄다.



민아 - 보기 좋기만 한데 왜 그래요?



==기억아, 넌 웃는 모습이 더 어울려.



순간,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 뒤로


시간 속에 희미해진 한 사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기억 - ......



==말하자면.... 고슴도치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하늘을 보면서 누워있으면 금방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나...... 기억해 줄 거지?



갑작스럽게 밀려온 추억의 파편들이


눈가로 범람하려는 듯


눈가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혹시 정말로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된 난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기억 - ....나....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도 돼요?


민아 - ...... 응.



때는 10월 초.


단풍이 유독 붉었던 그해


쌀쌀한 날씨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시렸던 순간이 있었다.




다음날. 학교로 가는 길.


난 몹시도 심난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우오오오옷!!



그때... 분명.... 그녀를 안고 뛰었다.


그것도 길 한 복판에서...



--뛰어, 뛰어, 뛰어~!!



그때... 분명.....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시험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잡고 있었다.


학교 한 가운데서...



--간지러~.



생각해보니 무릎베개 한 채 잠도 잤다!



게다가 그 전날은 대뜸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서


한 이불, 한 침대에서 자기까지 했고..



........이래도 되는 건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죄책감.


‘난 사실 굉장히 나쁜 놈이 아니었을까’하는 마음과


‘이제 그녀를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하나’라는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파이널퓨전을 하고 있었다.



대체 아무리 정신이 없었기로서니


어떻게 그런 행동들을 해댔던 것인가?



학교에 도착한 후 첫 수업은 물리.


수업 내용은 대뇌피질에 기록되지 못한 채


귓가에만 맴돌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막막한 상황 속에


미간에 잡힌 주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후.... 이걸 좋다고 해야할 지 나쁘다고 해야할 지...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난 교수님과 제대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음, 요즘 보기 힘들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군.=



이라고 내심 감동 받은 듯한 모습.


그는 눈빛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 자네가 그동안 고심했던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게! 나도하!=



......... 차마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 고개를 숙이면 바닥에 떨어진 F학점이 보일 것 같았다.



지금 무슨 내용을 하고 있었더라?



기억 - 저....


교수님 - 음,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보게.


기억

- 이원자 분자의 자유도에서 운동 성분 3종과


회전성분 2종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진동성분 2종은 반드시 수축과 팽창 두 가지를 동시에 갖게 되는데


어째서 두 개의 자유도가 되는 겁니까?



난 급조한 질문 치고는 제법 깔끔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시선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완전 상반되는 것이었다.



.....분노? 실망? 황당? 뭐지 저 표정은?


설마 너무 기본적인 걸 물어본 건가?


방금 설명했는데 나 혼자 못 들은 건가?



잠시 눈, 코, 입을 얼굴 가운데로 모으기 위해


노력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교수님은


생맥주 500cc를 원샷한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교수님 

- .....아~~주 좋은 질문이야.


여러분, 난 지금 감동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강단에 선 게 30년이 넘었는데


이런 맛에 내려가질 못하겠어.


자, 지금 이 학생이 질문한 내용이 무엇이냐....



..... 왠지 교수님께 미안한 생각이 드는 나였다.




그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삐적삐적 연습실로 찾아갔을 때


연습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인사를 해야 할까 조용히 피해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나를 발견한 그녀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민아 - 앗? 안녕?


기억 - .......



말없이 손을 들어 인사를 받으며


문득 입가에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위로 올라갈 듯 말 듯 망설이는 그 떨림.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 고심할 건 아무것도 없었나.



문득 끙끙 고심하던 내 자신이 우스워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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