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보람찬 주말을 보내고
내일부터 다시 암담한 한 주가 시작됩니다.
주 5일제 이후 월요병이 더 심해진 듯.
그래도 주 5일제라 행복합니다.
============================= 월,화,수,목,금요일만 빼고 ===========================
며칠 후
그럭 저럭 중간고사가 마무리되고
대학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도 말한바 있듯이
한 학기 내내 딸랑 세 과목만 신청한 채
럭셔리 라이프를 즐기던 난
시험이 끝나건 말 건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빡빡한 스케줄에 시달리던 몇몇 친구들은
술과 게임으로 밤을 지새우며.....
.......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뭐 ... 친구들이야 제쳐두고...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녀와 관련한 일체의 행동들이었고
그 중 전화번호 알아내기는
시급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었다.
날도 적당히 따땃미지근 하고
하늘도 푸르딩딩 높고 맑은 화요일.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날 기대감에 잔뜩 부푼 채
서양음악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두 개의 공학적으로 Fitting된 면상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씨 - 호오라... 과연.... 얼굴색이 완전 폈는데?
허씨 - 이야~ 이게 말로만 듣던 커플부대의 면상이냐?
위아래로 쭈욱 스캔을 뜨는 듣한 녀석들의 눈빛에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하는 것을 느낀 난
한 발짝 물러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따지듯 반문했다.
기억 -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김씨
- 오호, 능청 떠는 거 봐라 아주 그냥
뱃속에서 구렁이가 군오징어랑 트위스트 추는 게 보인다. 응?
허씨
- 시치미를 씹어 먹어도 이미 소문 쫙 났어~.
네가 공주랑 사회대 앞에서 에에, 에에에, 에베레베레레....했다고.
‘백설공주와 공대찌꺼기’의 여파로 인해
그녀는 강의실 안에서 공공연히 공주라 불리고 있었고
그 인기 또한 상당했기에
수학시험 날 있었던 일들은 이미 소문이 퍼진 듯 했다.
김씨 - 너 시험장까지 같이 들어갔었다며?
허씨 - 대체 어디서 만났기에 그렇게 된 거야?
김씨 - 설마 벌써 한 지붕 밑에 사는 건?
기억 - ...... 노코멘트다.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나였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쏟아지는 스캔들에
‘그냥 아끼는 동생이에요.’
‘존경하는 선배일 뿐이에요.’
라고 변명하는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 지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아무튼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간 상태로 수업을 마치고
룰루랄라 연습실로 향하던 중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두드리며 다가왔다.
안군 - 여.
기억 - ....? 아, 선배.
안군 - 요즘 민아랑 잘 되간다며?
기억 - 예?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다지 뭐랄까....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며
갑작스레 친한 척을 하는 그의 행동에
난 몹시 꺼림칙한 거부감을 느꼈다.
예전에 흐지부지 넘어가긴 했지만
민아와 몹시 친해보이던 그...
그와는 더 이상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안군
- 이렇게 소문이 날 정도면 이미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건데...
재주도 좋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강의실에서의 일은 그렇다 치고
대체 누가 어떤 소문을 냈기에
그의 귀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걸까?
난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말을 아끼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기억 - .........
하지만 안군은
묵묵히 갈 길을 재촉하는 내 반응에 아랑곳없이
왠지 신경 쓰이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안군
- 뭐... 이미 알지도 모르지만
민아가 걔가 한 때 ‘영문학부의 얼음마녀’로 악명을 날렸잖아.
그 난공불낙의 요새가 무너졌다는 데
귀가 혹 하지 않을 수가 있나...
뭐, 아무튼 힘내라. 파이팅이다. 응?
다시 한 번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잰 걸음으로 앞서 가버리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의도지?
태클? 조롱? 호기심? 응원?
게다가 영문학부의 얼음마녀는 또 뭐야?
그렇게 길을 걷던 중
안군은 연습실이 아닌 다른 곳에 볼일이 있었던 듯
다른 길로 향했다.
내가 연습실에 도착했을 땐
김양과 회계가 서로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며 바닥에 앉아있었다.
서로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은근히 강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난 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기억 - ...뭐하고 있어요?
회계 - 내기.
기억 - 무슨 내기요?
회계 - 누가 더 오래 담배를 안 피우나.
기억 - ..... 며칠 됐는데요?
회계 - 어디보자.... 15분 지났다.
담배를 안 피우는 나로선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가뜩이나 창백한 인상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는 김양의 얼굴을 보자
상황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회계 - 기억아, 앞에 와서 아무 말이나 해 봐라.
몹시 괴로워 보이는 회계가 나를 부르자
김양이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김양 - 반칙이야!
회계 - 그냥 듣기만 할 거야.
김양 - 이야기 듣는 것도 뭔가 하는 거잖아!
회계 - 크으.... 그런가.
아무래도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흡연 욕구 참는 내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한 쪽 구석에 앉아
두 사람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중
내 바로 옆에 놓여있는 담뱃갑과 지포라이터가 눈에 띄었다.
‘팅~. 찰칵.’
무심코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켠 순간
귓가에 쨍하는 충격이 느껴졌다.
김양 - 당장 안 꺼어어어어어어~!!!!!!
회계 - 너 이 자식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살기가 번뜩이는 두 사람의 기세에 흠칫 놀란 난
부리나케 라이터를 끄고 원래 자리에 놓았다.
회계 - 하아....하아.... 하아.... 숨을 쉴 수가 없어.....
김양 - 아아.... 살찌는 것 같아.....
겨우 30분 만에 금단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뭔가에 중독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실감한 나였다.
회계 - 으으.... 포기다. 기억아, 거기 담배 좀 줘라.
빈손으로 담배를 잡은 모양을 만들어
입 앞에 대고 뻐끔대던 회계가
먼저 승부를 포기한 듯 내게 다가왔다.
담배를 받아들고 김양에게 간 그는
먼저 입에 담배를 꼬나문 뒤
담뱃갑을 툭 흔들어 그녀에게 마지막 한 개비를 건넸다.
회계 - 야, 돛대다. 내가 졌다.
김양이 담배를 받아들자
고개를 돌리고 라이터에 불을 켜는 회계.
김양은 뭔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라이터를 꺼내들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양 - 후우....
장장 30분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 보내듯
길게 연기를 뿜어내는 김양.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회계 - 에베베베베~ 페이크지롱~~!!!!! 내가 이겼다~!!
회계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한 손에 들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김양 - .........
‘치익.’
회계 - 끄아아아악!!
김양은........그런 회계의 혀 위에
아무 망설임 없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차마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바닥을 구르는 회계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시니컬한 한 마디를 날렸다.
김양 - 치사한 새끼.
회계 - 어더더더더더!!
회계는 성큼성큼 연습실 밖을 향하는 그녀를 향해
의미 불명의 단어들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봐도 당해 싼 경우였다.
그렇게 둘의 싸움이 끝나고
방금 안군과의 만남으로 인해
찝찝한 기분이 남아있던 난
김양의 뒤를 따라 나갔다.
연습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비상계단에서
못다 피운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녀.
남녀를 불문하고 담배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찌푸려지는 나였지만
그녀에겐 담배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 저.... 선배.
김양 - 응?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라고 세뇌를 시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는 그녀.
분위기가 이정도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물러설 법도 했지만
나에겐 꼭 풀어야할 의문점이 있었다.
기억 - 민아가 ‘영문학부의 얼음마녀’ 였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라고 했다간
‘아니.’ 라고 대답해 버릴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난 바로 본론으로 진입했다.
김양 - 하아....
그녀는 =귀찮은데 귀찮은데 귀찮은데...=
라고 온몸으로 소리치며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담배를 난간에 비벼 껐다.
김양 - 그냥.... 아무리 꼬셔도 반응 없음. 그거야. 됐지?
=더 이상 묻지 마.’ ‘귀찮아.’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에선
위와 비슷한 뜻을 가진 수많은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내겐 마지막 질문이 남아있었다.
기억 - 안군 선배도 그런 시도를 했었나요?
김양 - ...... 응. 가서 담배 좀 사다 줘.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설마 싫다고 내빼는 건 아니겠지?’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사념의 덩어리가 흘러나오는 그녀.
그녀가 말 수가 적은 건
이런 특유의 포스로 상대를 밀어내기 때문인 것 같다.
기억 - 뭐 피우시는 데요?
김양 - 솔.
기억 - 예 알겠습니다.
천 원짜리 두 장을 받아들고 빙글 돌아서는 나를
김양이 깜짝 놀라며 덥썩 잡아 세웠다.
김양 - ....농담도 못하냐?
기억 - ......예?
김양 - .... 하아... 아니다. 말보로 레드로.
기억 - 예.
대체 뭐가 농담이었다는 건지...
김양의 개그 센스는 내게 너무 High한 것 같다.
뭐 어찌됐건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안군과 민아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