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2)-
“이놈아! 하늘이 네 개의 발을 내렸을 때는 그만한 이치가 있거늘..쯧쯧..!
어찌 네 놈이 그 가당치않은 두 발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게야!!“
노파가 분명히 자신의 자세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야호는 직감했다.
두 뒷발로 선채로, 앞다리로는 불곰을 옭아 맨 새끼줄을 어깨로 걸쳐 짊어지고 있던 흰둥이다. 야호는 쭈그렁 노파의 서슬 퍼런 고함에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움찔 움찔 거리며 눈알을 굴려대고 있었다.
예전의 영물인 그의 자존심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하지만 매를 동반한 훈육은, 확실히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효과가 백배인 것 같다. 확실한 AS보장까지!
일단 야호는 눈치를 살폈다. 인간계에 내려온 이후로 그가 이번기회를 통해 확실히 배운 것은, 젊고 기운이 넘쳐 보이는 젊은 인간들 보다, 힘없어 보이는 늙은 노친네들이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한 존재라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 저기에 서있는 노파처럼, 당당하게 큰 소리 칠 때는, 반드시 뒤에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흰둥이는 실눈을 뜨고 노파와 그 옆의 젊은 처자를 찬찬히 훑었다. 특히 노파를 주의 깊게 찬찬히 관찰했다.
퍼-억!
야호의 머리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고얀 놈! 감히 뉘에게 눈알을 부라리는 게냐!”
어느 틈에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온, 노파의 지팡이가 사정없이 흰둥이의 머리를 타격했다. 눈물방울이 쏘옥 빠졌다. 앞발로 쓰윽 쓰윽 맞은 머리통을 문지르며, 야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제 서야 그는 허공에서 한 뼘만큼 붕 떠있는 노파의 발을 발견했다. 허공답보의 경지! 신선의 초입에 든 자들만이 행한다는 전설의 경신술이다.
야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저 꼭대기의 악선 같은 자가, 갑자기 하나 더 눈앞에 나타났다. 성깔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자신이 무슨 업을 그리 많아, 인세에서 이리 고생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노파의 한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한지.. 끌끌.. 제 자식으로 배를 채우는 어미가 있지 않나..
미물인 네발짐승이 두 발로 걸어 다니지를 않나....쯧쯧“
“크르르...릉!”
한낱 미물이라는 말에 야호가 발끈했다. 미물이라니! 자신은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야호는 노기를 띤 눈을 들어 대들듯이 노파를 직시했다.
퍼-억!
아까보다 한층 강도가 높아진 노파의 타격 음이 숲속으로 청아하게 울렸다.
“끼잉...깽깽..”
(내가 동네북이냐! 여기저기서 두들겨 대게..!)
야호는 눈물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천외봉 꼭대기에서, 악선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미물이라...가끔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된다고 흰둥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상대가 저런 성질 더러운 신선들이라면 말이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 노파가 야호를 한대 더 쥐어박으려고 팔을 올릴 때였다.
단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그 움직임을 제지했다.
“할머니, 이제 그만 하셔요.. 더 이상 그 분을 노하시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 무슨 구세주의 등장인가! 야호는 노파 뒤에서 미소 짓고 서있는 아리따운 처자에게로 반가운 시선을 옮겼다. 겉모습만큼이나 마음도 고운 인간이라고 벌써 평가를 끝낸 후다. 더군다나 그분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애정 어린 존칭인가!
막상 고개를 돌려, 젊은 여인을 바라보던 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기이하게 연두 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들여다보던 그들 중, 젊은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하늘의 파수꾼이신 사신께서, 한낱 영물의 몸에 봉인되어져 계신 겁니까?”
“......”
야호는 담담히 그녀의 눈빛을 마주했다.
대답 없는 야호를 개의치 않는,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사신을 봉인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의지이십니까?”
“......”
“메..메야? 사신???”
경악으로 물든 얼굴의 노파는, 후다닥 야호에게서 두어 장 떨어졌다. 야호의 전신으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뭉클 뭉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야호의 어깨 죽지부터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랐다. 희뿌연 안개에 뒤덮여 제 모습을 찾아가는 사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마침내 그의 몸집이 집채만 하게 커졌다.
무엇이든 베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흰털과 신비롭게 흩날리는 검은 무늬가 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와 얼추 비슷한 굵기의 네 개의 다리에는, 붉은 장식털이 불타오르듯 휘날리고 있었다. 그가 숨을 내 쉴 때마다, 신비롭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안개가 내 뿜어져 신수의 몸을 감싸며 위엄을 드높이고 있었다.
이윽고 신수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안광을 내뿜는 황금빛의 눈동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눈빛의 위압감만으로도 그녀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내야 했다.
위와 아래로 뻗은 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짝 벌어지는 듯했다.
그녀들의 마음속에 천둥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너는....누구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소녀는 현(晛)이라고 합니다. ‘밝은 이’라는 뜻이지요.”
「‘현’이라... 네가 어찌하여 봉인을 알아보았느냐」
소녀가 막 대답하려던 차에, 심각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파가 끼여들었다.
“저 아이는 발귀리 신선의 화신체요. 발귀리 그가 당신을 알아 본 것이겠지.”
「발귀리? 그래... 광명을 숭상하며, 누구보다 지혜로운 ‘그’라면 가능한 일이겠군.」
노파는 그가 사신중의 하나인 백호임을 알아보고도 굳이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늘을 지키는 네 방위의 사신 중 하나인 백호.
죽음을 관장하며 죽은 자와 산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오행의 금(金)을 상징하는 백호는, 쇠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력의 상징이다. 그의 강력한 힘은 신통력을 지닌 다른 신성한 존재와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 주로 영계의 불순한 존재(鬼神)를 평정하는 이로, 널리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그의 발 구름 한번이면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전설상의 신수로 알려진 그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 현신해 있다.
“소녀가 여쭈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이십니까?”
「 ...... 」
“아니면..그 분의 뜻입니까?”
쿠오오오.
순간 주위를 압사시킬 듯한 엄청난 기운이 두 사람을 압박해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백호의 황금빛 눈동자와는 달리, 의외로 침잠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네가 광명의 신선 발귀리라 하더라도-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이 아이를 해하려 했다가는, 당신도 온전치는 못할 것이오!”
분노한 노파의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곤 그녀의 육신이 공중으로 한 장정도 떠올랐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현은, 자신을 걱정하여 무리하려 하는 할머니를 말려야했다. 그녀가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담담한 백호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울렸다.
「내 의지가 절반이었다. 허나 이제는 온전히 내 의지가 되었다.」
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뒤로돌아서서,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더 이상 알려 하지마라. 천기가 누설되는 날이면 너와 나는 물론이고 이 세상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요, 사신님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제 운명입니다. 하늘이 늙고 땅이 거칠어 만물이
영웅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
“제가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제 생의 의무이기도 하지요”
“ ...... ”
굳은 의지로 두 손을 꼭 쥐며 현이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층 진한 연두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백호와 마찬가지로, 노파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만... 다만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안배 속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
고마운 마음에, 백호를 올려다보는 현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노파도 어느새 진정을 되찾아 말없이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내 스스로 다시 나를 봉인한다. 나에 대해 천외봉의 그들에게는 언급치 말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날이 오면 주인이 나를 눈뜨게 하리라.」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백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야호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일경의 시간쯤이 흘렀을까?
어느덧 집채만 한 덩치도, 주위를 짓누르던 기세도 온데간데없다.
다만 흰털의 개 한 마리가, 희한한 자세로 고개를 이리저리 털고 있을 뿐이다.
잠시 뒤 제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깨어난 흰둥이의 의식은 잠시 당황했다. 젖은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저 젊은 여자와, 방금 전과는 판이한 기운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노파로 인해 한동안 어리둥절해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노파가 곰 위로 폴짝 뛰어 올라 앉았다. 흰둥이는 움찔! 하며 깜짝 놀랐다.
“뫼에 놀라는 게야! 보아하니 ~ 네 가는 길이 나와 같은 것 같구나! 가자!”
뿌직!
보자보자 하니까 이 인간들이..자신을 이제는 짐이나 끄는 조랑말 취급이다.
조금 전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 턱이 없는 흰둥이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새끼줄을 두 앞발로 모아 쥐고 별수 없이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끄..응....”
(이거 쓸데없는 꼬리를 달고 가서 또 얻어터지는 건 아니겠지..끄응.)
하지만 쓸데없는 꼬리라도 어찌할 것 인가! 당장 이 노파도 감당 못할 존재감인데.
꼬리를 뒤로 말아 감은 채 축 쳐진 어깨로, 일단은 열심히 천외봉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야호다.
“하하하..고놈! 참으로 두 발로 걷는 모양새가 보면 볼수록 기괴하기 짝이 없구나! 끌끌”
“멍! 멍멍!! 끄응..!”
(안다고요! 나도 알아!! 제길! 흑!)
푹신한 곰 쿠션위에 편하게 드러누워, 주변의 절경을 감상하며 한마디 내던지는 노파다.
아까전의 그 두렵던 위엄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엄연히 신수가 봉인된 영물 야호를 대하는 노파의 모양새가 가관이다. 과연 그녀의 배짱한번 두둑하다 싶어, 이들을 지켜보며 조용히 길을 걷던 현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래...마음의 준비는 다 된 게냐?”
“네에..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주어진 길이에요.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쯧쯧..불쌍한 것....”
“가엽다 여기지 마셔요. 전 오히려 기쁜걸요.”
“그래.. 이제 와서 어쩌겠느냐. 잘 헤쳐 나가는 수밖에....”
“.... 죄송해요..할머니..”
“무에가..? 됐으니, 그런 말 말거라.”
몇 일전이었다. 밤하늘의 천문을 살피던 ‘현’이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이번엔 꼭 장백산에 가야한다고 자신을 재촉했다. 노파에게 “현”은 늘그막에 얻은 소중한 인연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더없이 귀하게 키운 아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때가 되어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다며- 눈물을 뿌리며 단호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노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감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제 운명을 듣고, 노파는 얼마나 많은 밤을 절망했던가!
어떻게든 미뤄보고 어떻게든 피해서, 운명에 빗겨나게 해 보려했다. 하지만 노파 자신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목숨 같은 손녀딸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도, 정해져 있다는 그 길속에 온전히 던져 넣는 것 뿐!
그리고 결국 그녀는 지금 ... 장백산의 천외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영물의 몸 그릇에 담긴 사신이라.... 어렵군, 어려워 쯧쯧..그 녀석들도 잘 있겠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노파와 곰을 등에 메고, 야호는 열심히 산길을 오르는 중이다.
천외봉의 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악선을 떠올리며, 그 울화증으로 흰둥이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현’도 산길을 올라오는 반 시진 째- 운해 너머로 무엇인가를 담담히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다.
무심한 구름이 그들의 발 아래로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 파안의 가호가 함께하는 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