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인생을 굳이 불행한 시간속에 가두어 두려 하지말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걸 알잖아. 많은것을 포기해가며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
지 읺겠어?"
"그거 나 싫다는 소리야? 그렇게 들려... 그냥 넌 이대로 있으면 되는데... 내 마음이잖아!
내 마음인데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거야! 싫어! 강요받는거!"
추림은 차라리 선주에게 마음을 줄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되는 일일
까? 가슴이 아팠다. 자신을 좋아하며 몇번을 사랑한다 고백하는것을 받아들여주지 못하
는 자신의 냉정한 마음이 가슴을 쓰리게했다.
피가 뜨거워지고 마음에 커다란 폭풍을 담아야 꼭 사랑하는 것은 아닐텐데도 선주에게 사
랑을 줄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병원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드러난 따듯한 늦겨울의 햇볕을 쬐고 있었다.
목발을 한켠에 놓아둔채 벤치에 앉아있는 추림의 곁에 선주는 어두운 얼굴로 함께 앉아 있
었다.
삼주째가 되어간다. 머리와 어깨의 봉합을 풀어내고 운신이 많이 자유로워져서 이제 곧 퇴
원할 생각이었지만 병원에서는 이주정도 더 머물것을 권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웠지만 견딜만은 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섬광처럼 느껴진다.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는 거대하고 찬란한 빛!
선주의 어깨를 가만히 당겨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한 추림은 선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봐라. 너 지금 이게 행복한 모습인지 생각해봐라. 그런거야. 한가지를 선택하고 가지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거야. 그게 이치고 순리지. 너의 마음에 내가 있어서 내 주위에
머물러 있는동안 넌 과연 무엇을 가졌으며 잃은것은 또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니?"
선주가 눈을 감은채 머리를 힘껏 도리질쳤다.
그녀는 지금 방황중이다. 혼란스러운 것이다. 처음해본 이성으로의 이끌림과 영혼적 교감
을 느끼려 하는동안 걸어보지 못한 힘겨운 길 위에 선 심정이리라.
"선주야.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너의 자리가 여기가 아닌것은 확
실하잖아? 그렇지? 너에겐 나의 말들이 전혀 이해하기 싫은 말들이라해도 넌 인정하면서
또 부정하고 있을테지? 너 그거 아니? 내가 전에 말했지? 니가 힘들어지면 나또한 힘들어
진다는 것이라고 내가 그랬지? 불행은 커지고 전염되는데 행복은 축소되고 한곳에 머무르
려고하잖아. 널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것으로부터 탈출할 생각은 없어?"
추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선주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집을 나온지 두주가 지나고 있었다. 지선이 오가며 선주의 집안사정을 일러 주었는
데, 지선 그녀도 상당히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선주가 사라지자 지선이 괜한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사실이지만 지선은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했다.
추림은 선주를 걱정하다가 누군가를 떠올렸다.
최진규! 선주의 작은 오빠다. 자신에게 린치를 가하고 선주에게 폭행과 감금 모욕과 치욕
스런 짓을 서슴치 않은 인간!
그냥 둘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당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최진규 그는 너무 많은 업을 지니고 있는 인
간이다. 자신에게 한 일은 둘째치고라도 친 여동생인 선주에게 한 짓만 놓고 본다해도 그
인간은 도저히 구제 받을수 없는 자였다.
선주는 오빠를 두려워하고 있다. 원망하고 있으며 미워하고 있었다.
더욱 집에 들어가기 싫어할 것이고 꺼려하고 있을 것이다.
"추림아. 나 그냥 너랑살까? 결혼하거나 그런거 말고 가까이 지내는거 말이야. 그냥 날 여
자로 대해주지 않아도 좋아. 난 그냥 옆에만 있으면 안될까?"
"바보야. 그게 가능한 일이니? 어떤 미친놈이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를 나몰라라 지켜본
데? 내가 수시로 늑대로 변하고 넌 힘없는 양처럼 그 늑대에게 매일 당할텐데? 그래도 좋
아? 어흥!"
추림이 늑대흉내를 내며 선주의 어깨를 당겨 품으로 끌어안았다.
"피이. 내가 바본줄 알아? 자기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어떤 남자가 여자가 옷을 벗고 덤비
는데 무시하니! 지금 약올리는거야?"
그런일이 있었다. 선주의 유혹과 추림의 방어... 끝내 추림의 품에서 안겨 잠드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그것은 선주에게 미련으로 남은 사건이었다.
"추림 나 알아. 추림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것을, 그렇지? 아니야? 김수연씨가 찾아왔을
때 우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널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을수 있지만 네가 좋아하는 여
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다고 하는데, 이야기 도중에 이상한 말을 하더라. 아주 독특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추림 너를 무척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데, 그래서 난 생각했지
추림 네가 만약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두고있지 않다면 내게 이렇게 냉정히 대할까하고
말이야! 하지만 뭐 난 상관안해. 그건 그거고 난 나니까 말이야."
유미를 말하는 것일까? 수연이 그런말을 한 것일까?
후우... 석호와 영진과의 만남... 그럴수도 있겠지. 친구가 될수도 있고 만날수도 있다.
하지만 김석호 그친구는... 그럴놈이 아니지만... 모르겠다. 영진이 녀석의 성품이 마음에
걸린다.
수연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왜 그리도 메어오는지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자신을 피하는듯한 인상이었는데 그들을 만나고 있었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주야. 난 솔직한거야. 널 좋아하거나 진지한 이성으로 생각했다면 난 아마 벌써 너에게
말하거나 행동마저 달리했겠지. 그러지 않아도 단순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하에 행동할 수
있었을꺼야. 그건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널 오래도록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지? 내가 널 여자로 안거나 그랬다면 아
마 난 무척 고민했을거고 그것은 솔직하기 못한 일이기 때문에 날 추하게 만들었을 거야."
추림이라고 해서 왜 충동적이지 않을까!
그도 선주가 진지하게 다가올때마다 흔들리곤 했었다. 그녀는 젊고 충분한 성적 매력을 지
닌 여자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안고 잠들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면 혹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
다는 허무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늘 잠깐의 잡생각으로 그쳤고 더이상 진지해 질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렸
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자고 그러던데. 지선이만해도 남자들이 많은걸? 확 저지르면 남자들
은 변할거라고 했는데, 나쁜 계집애! 거짓말을 했어."
"하하! 임마. 저지르긴 뭘 저질러? 요 철없는 꼬맹이가 아주 응큼한 생각을 했구나."
"히히. 사실 나 되게 궁금했거든. 어떨까하고 말이야. 미선언니는 대준오빠가 첫 남자래 그
래서 그 오빠를 되게 좋아하나봐. 남자는 여자가 처음이면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가진다면
서? 그래서 나도 추림에게 날......!"
"어쭈? 가만 내버려 두니까 아주 말을 잘하네. 그래서 우리 꼬맹이도 그러고 싶었다? 에이
그! 철없는 녀석아. 난 잘은 모르지만 여자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머니가 되는것과 비슷
하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로서 크게 변하는 순간! 여자에게 가장 큰 변화와 위대한 점은 무
엇일까? 난 어머니라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와 처음 일을 겪게 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내가 너무 보수적이거나 진부한건 아니고. 생각을 그렇게 했
을뿐이야."
단지 생각일 뿐이다. 추림은 어려서부터 문란한듯 한 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금욕만은 철저하게 지켜낸 유일한 친구였다. 소위 말하는 논다고 하거나 까졌다라고 말하
는 친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과 자거나 어울릴때도 추림은 철저히 그런 행위만은
피해 다녔고 외면했다. 친구들이 가장 그를 어려워하고 꺼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참! 줄거 있는데 깜박했다!"
선주가 화들짝 거리며 추림의 품에서 벗어나 곁에 놓아둔 작은 쇼핑빽에서 무언가를 꺼냈
다.
"자 이거. 이거 살려고 한참 돌아다녔는데. 추림이 좋아할지 모르겠다."
선주가 내민 것을 알록달록한 선물 포장지에 쌓인 네모난 물건이었다.
"이게뭐야? 나주는거야? 선물?"
"이힛. 지난주가 발렌타인데이 였잖아.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쵸코렛 선물하는 날!"
그랬던가! 생소하지 않은 일이다. 매년 이런 선물을 받곤했다. 그것도 혼자 감당하기엔 너
무 지나친 양을 받곤했다. 하지만 몇년사이에 처음 받아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 그래? 받았으니 잘 먹긴 하겠다만... 이거 되게 무서운거 아닌지 모르겠다.
혹시 쥐약 같은거라도... 농담이야."
추림이 말에 선주가 눈을 홀기며 바라보았다. 추림이 선주의 이마에 알밤을 먹이자 선주
자 베시시 우스며 다시 추림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발렌타인데이... 그녀도 이렇게 자신에게 쵸코렛쯤 주면 좋을꺼라 생각했다.
* * *
낱알 쵸코렛을 사와 포장지를 일정하게 오려내고 일일이 포장하는 작업은 매우 시간이 많
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 제 날짜에 그것을 받을 주인에게 찾아가지 못했다.
방안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유미는 몇시간째 침묵과 멈춘 행동으로 자신을 가두고 있
었다.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다.
도대체 마음속에 든 것이 무엇일까. 날 어렵게하고 힘들게 하며 비틀거리게 하는 이 피곤
하고 거친것들은 무엇일까.
주르륵......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더욱 축축하게 차올랐다.
그를 어찌 본단 말인가! 자신의 더러운 행위에 대해 그를 대할 수 없었다.
부정한 여자... 그토록 힘들던 방황의 길에서 구원받을수 있다 여겨진 단 하나의 믿음을 자
신은 철저히 파괴시켰고 외면해 버렸다.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고 있다.
찾아가 위로해주고 간호해주고 싶은데 그럴수가 없다. 자신이 있고 싶은 자리에 대신하고
있는 어떤 여자... 그녀는 추림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많은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추림을 오해한 자신이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후회스러웠다. 자신을 따듯하게 보듬어주고 안아주며 감미롭
게 내쉬던 숨결이 진심이었음을 끝까지 믿었어야 했는데......
아득해져 온다. 난 어디에 서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고 있는것일까? 삭막했다. 거칠고 메마른 느낌이었다. 마음이 죽어가고 있는듯
여겨진다.
"욱...우욱... 흐흑!"
억누른 흐느낌 소리가 철저한 파괴의 아픔을 묻어내며 터져나오고 있었다.
참을수 없는 고통! 견딜수 없는 그리움! 자책과 자괴의 압박감이 두려웠다.
"유미야... 너 자꾸 왜 이러니? 이제 그만하면 안되니? 너 이런모습 지겹다!"
방문곁에 선 유화가 유미를 응시하며 속상해져서 말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니? 그 남자때문에 그러는거야? 너 잘도 돌아다녔잖아! 다른 놈들 잘도
만나러 다녔으면서 왜 이러는데? 너 너무 솔직하지 못한거 아니야?"
짜증스런 말들이 유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생이지만 동생 같지가 않았다. 매번 보는 모습인데도 늘 틀리고 낮설게 느껴지는 유미였
다.
안다. 유미가 무엇때문에 저런 바보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것은
유미는 다른 이들을 만나러 다니거나 어울리면서 혼자 있을때는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을 가두어 두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저럴수 없었다.
어떻게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러 다닐 수 있는건지 아이러니였다.
조금전에 그녀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어제도 왔었고 그제도 왔었다.
한명이 전화하면 이해나 한다. 한명이 아닌 서너명의 남자가 유미를 찾는 전화를 해왔는데
그것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생 유미는 마치 언젠가 본 영화의 주인공, 마타하리 같았다.
수단과 목적을 위해 수십가지의 사랑을하는 여자. 마타하리!
이차대전당시 미군 장교와 독일군 장교 사이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해 이중첩
자로 활동하던 여자. 첩자로서 그들을 사랑한다는 위선으로 이용했지만 여인으로서 끝없
이 고뇌하고 방황했던 여자였다.
유미가 그 여자 같았다.
자신의 욕망을 불사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남자를 만나지만 오로지 단 한명의 남자만을 사
랑하는 운명. 자신을 자괴하고 자멸시켜가는 불나방 같았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유미가 또 저노래를 부른다.
유화는 이제 지겨웠다. 벌써 저 노래를 수십번도 더 부르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유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내막을 철저히 감추
려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신에게 가장먼저 이야기 하곤 하던 유미가 아니었다.
"석호라는 사람이 전화했어. 전화해달래."
하도 들어 익숙해진 그 사람의 목소리는 이제 누구라는 것을 척하고 기억해내는 유화였다.
오늘로 벌써 세번째 전화를 해왔지만 유미는 통화를 거부했다.
어제도 그랬고 그 전날에도 그랬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다시 전화벨이 울려 유화는 얼굴을 찡그렸다.
유미를 찾는 전화일지도 모른다. 받기가 싫었다. 자신이 유미의 뒤치닥 거리로 전락해 버
린것 같았고 진행형이 아닌 일을 가지고 시간이나 보내고 있다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건설적이지 못했고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여보세요?"
-죄송한데, 유미씨의 집이죠?-
차분하고 맑은 남자의 목소리다. 어디선가 들은듯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 그런데요."
-유미씨 있습니까? 통화할 수 있나요?-
정중하고 간결한 목소리에 유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들어본 목소리다.
하도 정중하고 매너있는 느낌이라 언젠가 누구인지 궁금해 진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유미는 분명 거부할 것이다.
이제 알아서 자신이 커버해 나가고 있는 셈이 되고 있었다.
"지금 유미가 없는데요.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전화하라고 할께요."
이렇게 말하면 실망하거나 푸념의 한숨이 들려왔다.
이 남자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군요. 아니요 나중에 다시 걸겠습니다. 혹 유미씨가 들어오면 추림이 전화했었다고
말좀 전해 주세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예상은 빗나갔다. 그런데... 추림! 그렇다. 맞다! 바로 추림이라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전화를 두번인가 받았었는데... 기억해내지 못한것이다.
"저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
늦어버렸다. 전화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오고 유화는 그만 허탈해져 버렸다.
멍청한... 그를 왜 기억해내지 못했단 말인가! 유미가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일지 모르는데,
방으로 다시 들어간 유화는 손톱을 이빨로 깨물며 유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미야. 전화왔었어."
유미는 아무런 반응이 었었다. 인형처럼 축축히 젖은 얼굴로 아릿한 표정이었다.
"저... 그런데 추림이라는 사람이... 어떻하니? 니가 하도 안받아서 그만 없다고 말해버리
고 말았어."
"추림? 분명 추림씨였다고?"
유미의 얼굴에 거센 생기가 돌았다.
조금전의 그 힘없고 허무한 기색이 사라지고 뜻밖의 생기가 피어났다.
"응. 내가 다시 있다고 말하려는데 그냥 끊어버렸어. 애초부터 자신을 밝혔으면 이러지 않
았을텐데 하여튼 미안해."
"......!"
그가 전화를 해왔다.
통화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날 기억하고 있는것이다.
그럴테지 그는 다른 남자하고 틀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까!
다시 얼굴기색이 처연하게 변한 유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래 차라리 잊어버리자. 그를 잊고 외면한다면 자신의 자책감과 그에대한 미안함을 희
석시키고 덜어버릴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것이 낳겠다. 잊자. 잊어버리자... 멍청한 짓좀 그만하자.
이게 뭐야! 너무 힘들기만 하고 사는게 사는것 같지가 않잖아!
차라리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자.
박경태도 있고 석호도 있고 그외 여러명의 남자들이 있다. 별 감정은 없지만 단순하게 여
기면 그것도 좋을것이다.
그들중 한명을 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야. 그래 그러는거야. 꼭 그일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이 마음은 도대체 뭐야! 왜 이러는거야!
싫어! 싫어!
추림... 이제 그만하자 응?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 만족할게 날 그만 놓
아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하지는 않을게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하자.
나 너무 힘들다.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한 남자를 두고 내 행동에 대해 자책하고 후회해
본적 없어. 추림 네가 처음이야. 싫어. 이제 그만할거야. 잘있어!
어금니를 강하게 악다문 유미는 눈을 부릅뜨고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가슴에 수천개의 비수를 꼿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지리라!
처음은 힘들어도 시간은 잊게하고 지워줄 것이리라!
그래 이것이었어. 이럴려고 난 멋대로 행동한 것이었어.
석호에게 전화해서 만자자고 할까? 아니면 목동에 사는 그 지겨운 남자를 만나자고 할까?
다른 누구를 만나자고 해볼까? 만나서 실컷 놀고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뭐하려고?"
유화가 유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응. 나 씻고 나갈거야."
"씻고? 어딜나가? 그 눈물이나 씻고 하던지 해라."
코끝이 벌건채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유미는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어색하다.
"이쯤에서 말해 보는게 어때? 니 솔직한 마음을."
"......!"
"너 지금 얼마나 바보스러운줄 알아? 왜 솔직하지 못하니? 넌 내동생이지만 정말 너무한
계집애다! 어떻게 넌 아무 남자나 막 만나고 다닐수가 있는거지? 추림인가 하는 남자가
그렇게 좋다고 했으면서 왜 한남자에게 니 마음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데? 왜? 너 위선자
고 속물이야! 나쁜년!"
유화의 말은 진심이었다.
늘 취해서 늦은 시간에 몰래 들어오고 낮선 남자의 전화를 받고 외출하는 반복적인 유화
의 모습은 정말 그랬다.
그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기분이 좋거나 밝은 모습이면 단순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유미는
그러지 못했다. 항상 어두웠고 강요에 의한 몸부림 같았다.
"......!"
유미의 행동이 멈추고 입술을 깨문채 유화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내말이 틀리니? 나라면... 아니 다른 여자라면 그럴수가 없어! 너 내동생이지만
정말 지겨운 애야. 어떻게 함부로 널 다루는거지?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 아니 남자가 아
니어도 너의 행동에 너 스스로가 정당하거나 올바르다고 생각해본적은 있어? 너 정말 웃
겨! 추림인가 하는 사람을 그렇게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좋아한다 말한 것이 불과 얼마 전
인데, 그 후 그를 만난 것 보다 니가 다른 남자들을 만난것이 더 많고 보낸 시간이 훨씬 길
다는것을 알아? 정말 넌 어쩔수 없다! 네가 신기하고 괴물처럼 보여!"
유화의 말들은 신랄했다.
대놓고 비난했고 욕했으며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유미는 아무런 반박도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맞았다! 자신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도 못했고 순수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것이지? 뭐가 달라지는데?
"거울속에 널 봐! 니가 얼마나 유치하고 병신같은지 보란 말이야! 울긴 왜 우는데? 그에게
미안해지고 슬퍼져서? 뭐가 미안하고 슬픈건 또 뭔데? 왜 직접 찾아가지도 못하는데?
이건 뭐하러 정성을 들여 만들고 간직하는데? 그냥 버려버렷!"
유화는 유미를 향해 폭언을 하고 유미가 준비한 쵸코렛 꾸러미를 들어 내던지려했다.
"하지맛......!"
유니의 입에서 발작적인 목소리가 뾰족하게 터져 나왔다.
"왜? 아! 다른 남자거구나! 그럴줄 알았어. 이런거로 환심을 사고 넌 무언가를 얻으려 하
겠지? 그게 뭔지 말해주지 않을래? 웃기다 정말! 유치하고 추레하게 놀지마! 흑!"
유화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말하다가 말고 그만 울어버렸다.
그런 언니를 바라보다가 유미도 다시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쁜계집애! 넌 동생도 아니야! 솔직하지도 못하고 늘 색깔을 바꾸려고만 들고. 도대체
너의 정체성은 있기나 하는거야? 너의 일상이 모두 남자여야 하는거야? 지겹지도 않아?
추림이라는 사람은 너안테 뭔데? 우리에겐 그를 좋아한다 말하고 사랑한다 표현했으면서
너의 모습은 이게 뭐야? 정말 너란 아이는 너무하다. 정말 너무해!"
"......!"
방바닥에 앉아 허공에 시선을 둔 유미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매달렸다.
눈에서 쉼없이 눈물이 쏟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멤돌았다.
아픈 웃음이다. 쓰고 갈갈이 찢기어진 상처투성이 웃음이었다.
"언니... 그를 사랑해! 보고싶어 죽을거 같아! 하지만 그를 대할수가 없어! 내 바보같은 행동
때문에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단 말이야! 그가 보고싶어... 그리워 미치도록... 그리워!"
유화는 유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처절한 고백에 마음이 찡하게 아파왔다.
그래 저것이다. 저런 모습이 정말 솔직하고 순수한 것이다.
되었다. 저러면 된 것이다. 육체는 육체일뿐 정신과 마음이 진정한 인간의 근본이다.
추림이라는 사람이 그런것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동생을 이해할 것이고 여전히 사랑해 줄
것이다.
"유미야 언니랑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하지 않을래?"
유화가 유미에게 다가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미의 얼굴이 왜 이토록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지 유화는 이
방황하는 동생의 아픔을 대신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자. 우리 오랜만에 실컷 취해보자. 나갈까?"
유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화가 유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따듯한 햇볕이 겨울을 비껴가려는 어느 오후의 일이었다.
(31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