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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33장/ 사랑을 가슴에 묻으마!) <실극화>

추림의 풍 |2005.10.18 13:22
조회 326 |추천 0

"너! 조금만 빨리 오지 그랬어?"

"......!"

 

유미가 수연과 헤어져 집에 들어오자 마자 얼굴에 오이팩을 하고있던 언니 유화의 얼굴

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전화했길래 내가 만나자고했어."

"얼마나 되었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미가 빠르게 물었다.

 

"두시간 조금 못된 것 같은데? 아마 갔을거야."

"......!"

 

유미의 얼굴이 밑으로 숙여졌다.

하나도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인연이 아닐까! 이렇게 엇갈리기만 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핸드백을 다시 집어든 유미가 현관으로 나가 구두를 신었다.

무척 서두른다.

 

"어디 가려고?"

 

유화가 유미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은 않은채 문을 열고 거칠게 뛰쳐 나갔다.

뛰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은것을 후회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지만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왜! 하필 그가 찾아 오는날 자신은 굳이 수연을 만났을까!

그가 왔다. 자신을 보러 찾아 왔는데...

 

갔을꺼야... 갔을꺼야... 갔을꺼야......

언니가 한말이 머리속에 계속해서 울렸다.

왜 이렇게 멀까... 그토록 가까운 거리건만 이토록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거치적 거리는 핸드백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구두를 벗고 맨발로 뛰고 싶었다.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나서 걸리적 거렸다.

 

경물과 도심의 빌딩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헉! 헉!"

 

십여분만이 걸렸지만 마치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거리며 맺힌 모습으로 유미는 풍차의 입구에 서서

멍한 얼굴로 계단을 바라보았다.

 

'있을까? 없겠지... 갔을꺼야... 있다면 어떻게... 왜? 난 그를 볼 낮이 없는데......!'

 

바보스러웠다. 이럴려고 온것은 아닌데.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듯 무작정 달려 온 길이었

다.

 

계단에 한 발을 내딛었다.

두근... 심장이 엄청난 괴력에 충격을 받은듯 세차게 흔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입술을 악다문 유미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부딪히는거다. 피하지 말자. 그래 이번 한번만... 없다고 해도 상관없어.

갔을 확률이 높다. 이미 시간이 많이지났잖아... 그래 그냥 온거야. 지나는 길에 들른거라

생각하자.

 

다시 레스토랑의 입구에 서서 투명한 유리문에 시선을 두고 발길을 멈추었다.

초조했다.

 

아니라고 자위하면서도 있으면 어쩌나 없으면 실망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없이 둔중한 느낌이 들며 문이 안쪽으로 밀리고 풍차의 내부전경이 눈에 확하고 밀

려 들었다.

 

"......!"

 

아......!

그가... 있다. 그자리 그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어서오세요! 어맛! 그 분이시네?"

 

여종업원이 손님을 맞이하다가 요란을 떨었다.

추림을 기억하듯이 유미또한 기억하고 있었던듯 유난한 행동을 보였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가운데 발길이 저절로 추림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마치 기계의

동작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추림은 창가진 자리에 앉아 테이블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고인 자세로 창밖을 응시하

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정신이 어지러웠다.

얼굴에 열도 나고 기운이 없었다.

유화가 떠나고 혼자 마신술이 적지않았다. 술 한병을 비우고 다시 한병을 주문해 몇잔을

더 마시자 이제는 몸이 견디지 못하려고 하는듯 전같지 않고 내부에서 술을 거부하는 조

짐이 느껴졌다.

 

몸이 약해진 것이다.

이렇게 돌아다니거나 무리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출혈이 심해 수혈 받은것 것 자체가 아직 완전한 그의 몸에 동화 되었다고 볼 수 없는 상

태다. 상처가 경미하지 않았고 퇴원 후 방탕스런 순간들이 그를 약하게 만든 원인에 불을

지핀 것이다.

 

유미의 발걸음이 느리고 무겁게 움직여 추림에게 다가갔다.

낮설게 다가왔다. 전에 느끼던 그가 아닌듯 전혀 다른 이를 보는 듯했다.

그 이유를 곧 알았다. 두려운 것이다. 자신은 추림을 보기를 두려워하고 있고 꺼려 하고

있었다.

 

순간 추림의 얼굴이 창가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돌려지고 곧 그의 눈이 흡떠졌다.

그의 눈에 확대된것! 그것은 환상같고 꿈같은 그림이었다.

 

"......!"

 

추림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믿을수가 없는 것이다. 착각같기도 하고 헛것이 보이는 듯 했다.

순간적인 느낌은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추림......!"

 

유미의 입에서 나직하고 꿈결같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추림......!"

 

추림의 얼굴에 온통 복잡한 감정이 물결치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그녀가 왔다. 꿈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절실한 염원이 이루어지듯 그녀가 거짓말 처럼 나타났다!

 

"유미......!"

 

추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테이블이 흔들리면서 위에 올려진 물건들이 떨어

지고 넘어졌다.

 

"어떻게... 아! 이리로... 그러니까......!"

 

허둥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천년의 시공을 돌아 이 자리에 선 느낌이 들었다. 억겁의 세월을 돌고 또 돌아 있고 싶

은 자리에 선 느낌이었다.

 

바보같은 표정을 짓던 추림이 곧 정신을 수습하고 유미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 얼굴로 유미를 응시했다.

 

"오셨군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요. 자 이리로 오셔서 앉으세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추림을 바라보던 유미는 그의 이끌림으로 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추림의 눈동자와 유미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켜 들었다.

 

서로가 한동안 그렇게 바라 보았다.

더 확인 하려는듯 더 기억하려는듯 그들은 그렇게 오랜동안 바라보기만했다.

 

변했구나. 당신의 얼굴 모습이 무척이나 변했어.

다쳤다고 들었는데... 무척 힘들었나봐. 어쩌니... 미안해서. 난 당신에게 아무런 힘도 되

어주지 못했는데. 어쩌니...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 할때 난... 난... 못된 여자야!

날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힘들었어? 미안해. 내가 나쁜 여자야. 얼마나 힘들었니!

미안해... 미안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온전한 날 주지 못해서 미

안해! 날 용서하지 말아... 미안해!

 

"얼굴이 말이 아니군요? 좀 웃어봐요. 유미씨. 잘 지내셨어요?"

"......"

 

추림은 변했으면서 또 변하지 않았다.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고 얼굴 표정도 여전히 부드러웠다.

자신의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변하지 않으려했다. 아니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

른다.

 

"전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하하! 좀 엉뚱한 일을 저질러서 조금 다쳤는데, 뭐 괜찮아요.

거의 다 낳았어요. 유미씨는 어찌 지내셨어요?"

 

추림이 애써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며 물었다.

 

"미안해요.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전 잘지냈어요."

"아니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다가도 연락하지 않았고... 친구들안테도 말 안했어요. 별일

도 아닌데... 다행이네요. 잘 지내길 바랬어요." 

 

둘은 서로 거짓말 아닌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함으로 자신을 숨기려 하고있다.

서로에게 덜 미안해 지도록 하고있는 것이다.

 

"술 한잔하실래요? 전 조금 취하네요. 그냥와서 혼자 마시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멋쩍은 추림이 빈잔에 술을따라 유미에게 건넸다.

잔을 받아든 유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추림은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분위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아 온것도 뜻밖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못한 상태

에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초조하기만 했다.

 

전같지 않은 느낌은 당연했다.

서로의 작은 행동하나나 말 하나가 오해나 실수로 이어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일 것이다.

유미 그녀의 일을 모른다면 이러지도 않을텐데... 아니! 그래... 그녀는 내가 그 일을 모르

고 있다 믿을것이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추림의 눈빛이 안정되게 가라앉았다.

 

"유미씨. 제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요?"

"무슨 말이요?"

 

"언젠가 그랬죠. 제가 유미씨와 내기 하자고. 제가 유미씨를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우린

서로 내기했잖아요."

"아! 맞아요. 추림씨가 그랬어요. 기억나요."

 

"전 유미씨와 한 그 내기에서 반드시 이길 겁니다. 수백년이 지나서도 반드시그 내기를

이기고 말 겁니다. 아직 그 내기가 유호함을 기억해 주세요. 십년... 백년이 흘러도 전 유

미씨를 기다릴 겁니다." 

 

"......!"

 

무슨 의미일까? 그때 한 말이 지금 이 싯점에서 거론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을 기다린다... 그것은...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인가?

 

"유미씨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도 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설사 내 모습이 이 모습이 아니

어도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일 겁니다. 전 그럴 자신 있어요. 유미씨가 싫다

해도... 홀로 사랑이어도... 유미씨를잊지 않을겁니다!"

 

반짝이는 눈으로 유미를 직시하며 추림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강한 메세지였다. 진심을 담은 영혼이 전하는 메세지였다.

이루지 못한다면 간직하리라... 바보같은 사랑일지언정 그렇게 사랑할 것이리라!

 

유미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강한 눈빛으로 잡아 묶은 추림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잊지 않을겁니다!

 

유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추림이 자신의 일을 알고 있고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 질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올곧

고 버젓한 사랑을 받아 들일수 없다는 강한 자책감이 들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둘은 서로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여자가 커다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는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며 사

라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자는 절망을 합니다. 남자가 자신을 멀리할까 두려워 떨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한가지 치료할 방법이 있음을 모

른 채 남자를 스스로 멀리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추림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유미의 눈동자가 그런 추림의 눈빛에 떨고 있었다. 두려워 떨었고 셀렘에 떨었으며 미안

함에 떨었다. 그리고 추림의 마음을 알고 흔들렸다.

 

"전 모르겠어요."

 

"남자의 손은 아주 부드럽고 따듯하며 신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면

그 상처는 아물어 버립니다. 남자의 마음은 무척이나 원대하게 드넓고 강합니다. 무엇에

도 흔들리지 않을 철벽같으며 아무리 커다란 것이라도 능히 담아 버릴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술과도 같아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슬픔을 사라지게 하며 고통을 잊게 만듭니다. 웃음을 선사해 주고 행복함을 선물

합니다. 그 남자는 그런 능력이 있는데... 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 유미씨가 그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번엔 추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한 아픔이 담긴 눈동자가 울고 있었다. 돌아오면 안되는냐고 묻고 있었고 힘들어 하지

말라는 전언을 전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었다.

여자의 입장에서 남자의 손길에 자신의 상처를 맡기고 싶다 말하고 싶었고 남자의 마음

에 기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듯하다. 모르길 바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알고 있는듯했다.

마음이 작게 축소되고 몸은 오그라드는것 같았다.

 

"여자가 또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실을

여자는 모르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자가 지치고 상처 투성이인 몸으로 돌아와도 변하지

않을 사랑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요. 전 유미씨에게 그런 남자가

되고 싶습니다. 되어드리고 싶고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런 유일한 존재로 기억되고 싶어

요."

 

말하고 싶었다.

추림에게 그런 남자가 되어 달라고 말해 달라고 싶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음은 두개의 길에서 갈등하고 있고 선택의 강요속에 고통받고 있었다.

후회스러웠다. 모든게 후회스러웠다. 그를 알게된 사실마저도 후회스러웠고 자신의 삶마

저 후회스러웠다.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한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사람에게 자신의 모든것을

줄 수 있는데... 주고 싶은데! 미안한 마음과 자책감만 들었다.

 

유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준비되어있지 못한 사랑이 못내 아쉽고 너무 힘들게 다가왔다.

유미를 바라보던 추림이 아래입술을 지그시 베어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미가 앉은 곳으로 다가가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은 추림이 유미의 어깨를 당겨 품에 안

았다. 힘없이 추림의 이끌림에 품에 안긴 유미의 몸이 떨고 있었다.

그 유미의 가여린 떨림과 흐느낌에 추림의 눈에서 반작하고 이슬이 맺혔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서러워 하는데!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

도 없다. 인간은 결국 이렇게 나약한 존재이던가!

 

신이시여! 제게 단 한번의 기회를 부여하소서! 이 여자의 상처를 잊게 해주고 슬픔을 깊은

어둠속에 묻히게 하며 오욕된 기억을 사라지게 할 힘을 주소서!

 

손으로 유미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가는 추림은 흐르려하는 눈물을 견디며 얼마나 허락된

시간이 그녀와 자신 사이에 남아 있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마 그리 많지 않겠지. 유미... 그녀는 자신을 벗어나려고 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

다. 사랑할수 없어서 그런 몸부림을 하려 하고 있었다.

 

추림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가 원망되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주관을 가지고 있고 행동하는 친구들... 그 중에서 석호가 원망되

고 야속함을 못내 달랠수 없었다. 

 

"유미씨. 저 사실은 조금 힘들었어요. 보고싶은데 보지도 못하고 만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너무 절실히 깨달았어요.

아까 한말 기억해 주시면 안될까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저 기억하고 아주 아주

조금만 믿어 주시면 안될까요? 십년쯤 지나서 기억나고 여전히 내말에 믿음이 간다면 그

때 만나고 싶을지도 모르잖아요. 유미씨가... 언젠가 혼자일때 절 찾아 올수도 있잖아요."

 

추림은 석호의 말을 믿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지만 친구를 생각하는 그의 관점은 그랬다. 친구의 무엇이라도 탐하지

않으려 하는 고지식한 성품! 그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 추림은 어쩜 평생을 살아

가도 모를지도 몰랐다.

 

"추림씨의 그 말 믿을게요. 기억할게요."

 

추림의 품에 안긴 유미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추림이 유미의 눈가에 번진 눈물을 닦아주며 작은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추림씨 사랑해요. 이 마음 변하지 않을거예요. 그리고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요."

 

추림의 가슴에 넓은 파도가 일었다.

어떤 말보다 듣기 좋은 말이었고 그동안의 힘든 순간들이 다 사라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에 비례해 마음 한켠은 더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고 외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의 마음을 완전히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도 여겼다.

 

석호와의 일로 자신을 멀리하려는 유미... 어떻게 해야할까!

처음으로 든 강한 반발심과 묘한 질투심같은 느낌에 추림은 당황스러웠다.

 

'난 남자다! 초라하거나 작아지지 말자!'

 

속으로 자신을 다잡은 추림이 유미의 어깨를 힘껏 당겨 안으며 말했다.

 

"유미씨 나가요. 우리 어디갈까요? 나이트장에 한번 갈래요?"

"예? 거긴......!"

 

"가요. 유미씨와 변변한 추억도 없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오늘과 내일 유미씨를 제게 맡

겨 주세요. 부탁합니다. 어서 나가요. 술마시고 시간 보내는 이런것 건설적이지 못한거 같

아요. 우리 조금은 발전한 환경을 만들어 봐요."

 

"좋아요. 그럴게요. 어디든지 데려가 주세요. 따라가겠어요."

 

추림이 유미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허락되었을 때 잡을 수 있는 자만이 선택된 자라 할 수 있

다. 추림은 이시간을 유미와 함께 있게 된것을 허락된 기회로 여기기로 했다. 

 

"어머? 가시려고요?"

 

그 여종업원이 추림과 유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는체를 해왔다.

 

"예. 다음에 다시 들를게요."

 

추림이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미가 이곳에 자주왔다는 이야기에 혹시나 하고 기다린 것이 유미를 만나게 된 것이 되

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 벌써 어두워 졌네요."

 

마음이 한결 차분하고 밝아진 추림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어둠이 밀려들어 있었

다.

 

유미의 손을 잡은 추림은 가벼운 걸음으로 어두워진 거리를 헤치고 조금씩 사라져갔다.

                                                                                                       (34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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