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편
“야! 야, 임마! 베이비! 나 낼 약속 있다니까! 그것도 엄청 엄청 중요한 약속.....”
바락바락 목에 핏줄 세우며 불렀건만,
벌써부터 뭐가 그리 신났는지 깡충깡충 뛰어가는 베이비의 뒷모습만 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놈의 귓구멍은 어쩜 그리도 편리한지..
듣고 싶은 말만 알아서 해석해서 쏘옥 빼다 듣고, 듣기 싫은 말은 아예 뚜껑을 닫아버리니 말이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란 말야.. 이 바보 멍청이 베이비야..”
한숨을 푸욱 내쉬며 파라다이스 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는 계산 카운터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계셨다.
“아주머니~”
조심스레 아주머니를 불렀다.
죄송스러운 그 말들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랐지만 차분히 아주머니에게 말을 꺼냈고,
아주머닌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지만 웃는 얼굴로 나의 말을 들어주셨다.
파라다이스에서의 마지막 알바여서 그런지 더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아쉬워하는 파라다이스 가족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내 발짓이 유난히도 힘찼다.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큰 수입원이었던 파라다이스를 그만뒀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마음 한 구석에서 슬그머니 일어났지만,
이내 과감히 잊었다.
새로운 일이...그것보다도 새롭고 보수도 훨씬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새로운 일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어느새 집에 도착한지도 몰랐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늘따라 유난히도 열심히 일해서 그런지 파김치가 된 몸으로 부랴부랴 씻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마악 잠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갑자기 떠오른 걱정거리.
..내일 가비랑 놀러갈 때 무슨 옷을 입지?..
대답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옷을 고를만한 여유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으니까.
그걸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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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이화봉!”
“으음..좀만 더..”
“얼른 안 일어나!”
눈부심에 더더욱 푹신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건만, 얄미운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만 나의 이불을 낚아채 가버렸다.
떠지지 않는 눈을 뜨자마자 보인 얼굴 하나..
태미의 성난 얼굴..
“어....태미야.. 이 시간에 왠일이야..”
“너 파라다이스 그만뒀다면서! 왜!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하고 그만두는 게 어딨어!
너랑 나랑 겨우 그 정도야! 내가 그 말을 우리 엄마한테 먼저 들어야겠어!
우리 정말 친구 맞냐구! 나 엄청 너한테 섭섭하고 너가 밉다구! 이.화.봉!!”
아직까지도 비몽사몽거리는 내게 많은 말들을 와르르 쏟아내는 나의 친구 태미.
내가 들은 말은 따악 세글자였다.
나의 이름 이화봉 말이다.
오직 내 머릿 속엔 후회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왜 태미에게 집 열쇠를 줬을까하는..
잠만 더 자고 싶을 뿐이었다.
“태미야...나 더 자고 싶어..”
“너 친구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잠이 오냐!”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온 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주머니 속의 진동.
물론 일어나려고 생각 중이었지만 갑자기 내 몸이 명령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태미가...태미가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야, 너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말 이럴 거야! 아침 잠도 없는 애가 도대체? 어?
야, 이화봉 너 어디 아픈 거야?”
“나? 나 안 아파. 내가 아프기는 어디가 아파..”
태미에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어설픈 미소 같았다.
“뭐야..얼굴도 빨갛구...열도 나잖아!”
내 이마와 목 쪽에 손등을 대더니, 태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 안 아퍼, 진짜. 태미 넌 내가 언제 아픈 거 봤어? 나 천하무적이잖아..”
“시끄러! 안 아프긴 뭐가 아파! 너같이 건강한 것들이 한번 아프면 심하게 아프단 말야!”
“너 안되겠다. 병원 갔다가 우리 집 가자! 내가 병간호 해줄께..”
“내가 무슨 몹쓸 병이라도 걸린 듯이 말하지 마. 단지 좀 피곤해서 그래..”
“됐어! 너의 유일한 베스트 쁘랜의 말을 들으라구~!”
“태미야, 나 오늘 엄청 중요한 약속 있거든. 정말 조금 피곤해서 그래..”
또다시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
분명 가비일 것이다.
..그래, 오늘은 가비를 보는 즐거운 날이야.. 그러니 그만 정신 좀 차리자구, 이화봉..
“이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휴식이라구!
충분한 영양 보충과 휴식!
그것도 우리 집에서 말야!”
“태미야, 나 정말 괜찮아. 내가 나중에 연락할께..”
살짝 움직이자 어마어마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내 눈 앞에 태미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화봉, 하나 둘 셋 하면 일어나는 거야! ..
후우~ 하나, 둘 , 셋!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며 새로온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정신이 몽롱해졌다.
“화봉아!!!!”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들었던 것은 태미의 기겁한 목소리와 함께 미안으로 시작하는 가비의 문자였다.
...미안..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힘겹게 잡고 있던 마지막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