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이혼을 하려구 하는데 용기좀 주세여

이혼 |2005.11.02 15:10
조회 2,182 |추천 0

맨 처음 남편을 만난 것은 1996년 12월 29일이었습니다.

먼 친척벌 되는 언니가 공주대학교 서무실에서 근무했는데, 그 학교 교수의 동생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서울이고, 저는 집이 충남 당진 합덕이었기 때문에 중간 거리되는 천안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 음악 임시교사로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결혼 후에는 직장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면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걸 해 보고 싶다면서 전업주부를 얘기했더니,

  “어우~!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살아요? 같이 벌어야지! 요즘은 부부가 같이 돈 벌어야 돼요.”

라며 말을 막았었습니다. 남편이 처음 선 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제 성격에는 좀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솔직하고 꾸밀 줄 모르는 성격이라서 그런가..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성격이나 외모가 제가 원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도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1주일쯤 지나서 다시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첫 날 저녁에 싫다는 의사를 소개시켜준 친척 언니에게 전했고, 언니는 한 번 더 만나보라고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한 번 보고 판단할 수 있냐면서......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고, 형이 대학교 교수이고, 형수되는 사람은 음대 피아노과를 나와서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육자 집안이었기 때문에 반듯하게 자랐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남편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좋은 시각으로 보려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만나고 세 번째 만난 날, 저를 인천 외삼촌댁에 데려다 주고 서울로 돌아갔기 때문에 잘 도착했냐는 안부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때 시아버지가 받았는데, 다짜고짜

  “몇 번 더 만나보고 시간 끌어봐야 다 똑같어. 어여 결혼 날짜 잡게 상견례 할 수 있도록 날짜 잡아봐라!” 하였습니다.

저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성격이 꽤 급하신 분인가 보다.’ 라고 좋게 생각하면서, 엄마, 아빠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 상견례 자리를 1월 12일 가졌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친정엄마께 반말을 하는 시아버지를 친정아빠가 몹시 불쾌해하셨지만, 엄마와 저는 교장선생님이라서 아랫사람을 많이 대하는 버릇이 몸에 베서 그러신거니, 이해하시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만난 상견례 자리에서 시부모들은

  “이왕 결혼하기로 했으니, 빨리 하시지요? 내가 2월 달에 정년 퇴임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퇴임하게 되면 결혼식 손님도 줄고, 이왕이면 퇴임 전에 식을 올렸으면 합니다. 축의금이 반 정도 줄어들텐데, 2월 달에 식 올리지요?” 라고 말하면서, 친정 부모님을 설득하였습니다.

친정 아빠는 “아무리 성격이 급하셔도 결혼이란게 일륜지대산데, 그렇게 성급히 하기에는.... 결혼 혼수도 준비해야 하고, 청첩장도 돌려야 하고...... 아무튼 생각을 좀 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시부모는 결혼 준비가 뭐 그렇게 오래 걸릴게 있냐며, 이왕이면 퇴임시기에 맞춰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딸가진 죄인이라고, 결국은 결혼 날짜가 2월 15일로 친정 부모님은 통보를 받으셨고, 정신없이 바쁘게 서둘러서 2월 1일 함을 받고, 2월 15일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상견례 이후 결혼결정을 하고 결혼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시아버지가

  “야! 아가야, 결혼하고 바로 분가해서 살면 시집의 가풍도 알지 못하고 식구들끼리 잘 모르고 지낼수 있다. 결혼하고 6개월 이상은 집에서 같이 살다가 분가해야 한다.” 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시집은 서울 강북구 수유리였는데, 우리가 신혼살림을 꾸려야 할 방이 작아서 장롱을 장만하기가 곤란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분가하면 혼수 장만을 제대로 하기로 하고, 우선, 침대와 화장대, TV, 패물, 그리고, 조립식 옷걸이만 사서 들여왔습니다. 너무나 빨리 진행된 결혼이었기 때문에 시집에서의 제 생활은 모든게 낯설고 어렵기만 했습니다. 예정대로 시아버지는 제가 신혼 여행중에 정년퇴임을 하였고, 시집에서의 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이 시부모님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시아버지의 시어머니에 대한 욕설에 저는 놀랐습니다.

  “야!”, “야,임마!”, “썅년”, “돌대가리야!”, “에이! 독한 년!”, “어유!이걸!”, “이 년아! 시끄러워!”... 이런 말들이 저는 적응하고 이해하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또한 시어머니의 시아버지에 대한 행동과 말들도 놀라웠습니다.

  “어유! 내가 못 살아! 어디가서 기집질이나 하고, 천한 년들이랑 바람이나 피고! 내가 좀 괜찮은 년들이랑 바람이 나면 이해나 하지! 나보다도 훨씬 못한 년들하고 놀러나 다니고! 못살어~! 못살어! 이혼해! 이혼해!” 이런 말들에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 번은 식탁에서 시부모님과 밥을 먹다가 여느 때와 같이 옥신각신 싸우다가 시아버지가 시어머니 뺨을 때려서 제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칠순이 넘은 시아버지가 나이 칠십인 시어머니를 며느리 앞에서 패는 집안은 도대체 어떤 집안입니까?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시아버지가 퇴직금으로 받은 2억을 1억은 연금으로 해서 다달이 150만원씩 시어머니 통장에 들어오도록 하고, 나머지 1억은 현금으로 받아서 전남 여수에 횟집을 차렸습니다. 횟집을 차린 후 혼자서 내려가서 생활하셨습니다. 가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그 때마다 집에서는 항상 큰소리가 났습니다.

  어느 날은 여수에서 올라오신 날, 시어머니가 마루에 놓은 오디오를 고친다고 하루종일 전화로 물어보고 A/S 기사를 부르고 하느라 저녁 준비가 늦었습니다. 된장찌개를 끓여서 밑반찬을 만들어서 상을 차렸더니, 대뜸 시아버지가

  “에이! 싸가지 없는 것들! 애비가 모처럼 집에 왔는데 반찬하고 상차려 놓은 것 봐라! 집안에 가장이 객지 갔다 들어왔는데! 싸가지 없는 것 들! 애미년이나 며느리년이나 다 똑같네! 에이!” 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친정 아버지께는 볼 수 없었던 모습과 행동이라서 저는 너무 놀라고 서러워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시어머니와 시동생과 함께 남편과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남편의 월급은 200만원이 안 됐고, 신혼여행 갔다가 쓴 경비와 결혼 비용 때문에 계속 허덕이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선보고 결혼하는 동안 전화세가 많이 나왔다고 시어머니가 “전화세는 너희가 내든지, 너희는 생활비도 안 내니?” 라면서 싫은 내색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생활비를 드릴만큼 여유가 없어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혼 초에는 새로 바뀐 환경과 피곤함으로 인해서인지 소변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서 병원에 가니, 방광염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치료를 했지만, 더욱 악화되어 신우염으로까지 진행이 되었습니다. 의사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절대 안정하고 쉬어야 한다고 해서, 시어머니께는 걱정끼쳐 드리지 않으려고 혼자 하던 치료를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하고 친정에 일주일 동안만 갔다오겠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그래, 그런 병이 왜 걸리는거야? 너! 그거, 처녀적부터 있던 병 아니냐?” 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너무 섭섭하여 저는 방광염과 신우염이 왜 걸리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신혼 초에 여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질병으로 처음 부부관계를 갖는 여성들에게 감염기 쉬운 질병. 완치도 쉽지만 재발율도 높은 병으로 피곤하지 않게 하고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 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께도 알아본 그대로 설명하고 말씀드렸지만,

  “그럼, 결혼한 새댁들은 전부 걸려야 겠네? 그래, 그게 왜 그런 병이 걸렸어? 너는 보기에는 멀쩡한 데 약골이라 걱정이다! 걱정이야!” 라며 탐탁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3개월정도 지났을 즈음에 첫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빠.... 나, 임신했어.” 라고 말하자,

  “ 어...... 그..래..? 그런 것 같더라. 어쩐지... 알았어.” 이렇게 말하곤 끊더군요.

처음엔,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거겠지.. 라고 나 스스로를 달래면서 저녁에 퇴근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막연하게 남편이 좋아하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남편은 퇴근하면서 가방 안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꾸깃꾸깃 꺼내주면서

  “지갑에 돈이 없어서 이것만 사왔어. 돈을 좀 찾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냐?”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만큼 섭섭한 적이 얼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장미꽃 한 송이에 700원이었습니다. 5월 달이라서 꽃 값도 비싸지 않을 때인데, 투명 비닐에 둘둘 말려져서 누가 볼까 서류 가방에 꾸깃꾸깃 넣어온 꽃을 내밀을 때는 얼마나 섭섭하던지! 밥을 사준다고 해서 간 곳이 중국집이었고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주면서

  “여보, 내가 1년동안은 아이 갖지 말자고 했잖아, 물론 나도 피임을 안 했지만, 그런건 여자가 신경 써야지. 우리 생활 즐길거 즐기고 1년 후에 아이는 가져도 되는 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임신을 하냐? 뭐! 어쨌든.. 임신했으니까, 몸 조심하고! 축하한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말은 두고 두고 큰 아이가 다섯 살까지 제게 하던 말입니다.

  “야! 니가 좋아서 낳았잖아! 좋으냐? 애 울구 말썽부리니까 좋으냐? 니가 좋아서 낳았으니까 니가 봐!” 이런 말들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마음 아파할 지는 전혀 생각을 안하고 망설임 없이 제게 말을 합니다.

  임신을 하고 3개월 쯤 되었을 때 또 방광염이 재발하고 한 참을 힘들어 하였습니다.

  이제는 분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시어머니께 어렵게 말을 하였더니, 좋아하시질 않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삼형제 모두 결혼해서 분가하면 3천만원씩만 해 준다고 말씀하시더니, 그 돈으로 분가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난감하였습니다. 분가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서울 강북의 아파트 전세값이 24평이 6천만원~7천만원이었습니다. 남편은 모아놓은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아벨라 차를 사고, 스키용품 사고, 술먹는데 개념없이 모으지 않고 다 썼다고 남편이 말하더군요. 그러니, 시아버지가 주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인천 쪽에 친정 외삼촌들이 사시니까 알아봐달라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인천도 그 당시 24평 아파트 전세가 4천5백만원~5천만원이었습니다. 딸이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걸 보시고 친정 아버지가 “나머지 돈은 보태주마.” 하셔서, 인천 연수동에 있는 하나 아파트 24평을 4천5백만원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남편은 결혼 전에 고합그룹에 다니고 있었는데, 고합 본사에서 좌천되어 경기도 군포에 고합 공장에 있는 연구소로 발령이 나서 서울보다는 인천이 거리상으로도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분가하기로 결정이 나고 시어머니께

  “어머니, 저희 인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가기로 했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늬들 맘대로 결정하고, 늬들 맘대로 이사간다고 얘기하면 끝이냐? 야! 이놈아! 마누라 치마폭에 폭~ 싸여서 그래! 처갓집 근처로 이사를 가니? 자고로, 처갓집하고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데, 잘~ 하는 짓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렇게 한 바탕 난리 소란이 난 후에야 비로소 분가해서 이사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시무보님의 다툼은 끊이질 않았는데, 큰아이 임신 5개월이 넘어설 무렵, 여수에 내려가서 횟집을 하고 있는 시아버지가 살림을 차렸다면서 저보고 같이 현장을 잡으러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차를 6시간 타고 여수에 내려가서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시어머니는 아침에 현장을 덮친다고 횟집을 가셨습니다. 저는 더 이상 시부모님의 싸움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인천으로 올라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시아버지는 남의 영업집에 와서 시끄럽게 난리법석을 떨어서 창피하다고 하며 술을 잔뜩 먹고 회뜨는 칼을 들고 시어머니 보고,

  “썅년! 죽여버릴거야!”

라면서 쫒아와 시어머니가 도망왔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점점 시부모님께 질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즈음에 첫 아이를 임신하고 6개월쯤 되었을 때, 인천 저희 아파트 가까이서 사시는 제 막내외삼촌 댁에서 저녁을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먹으면서 술을 한 잔 먹은 남편은 집에 들어오더니,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더니 한 참을 이야기를 하고는 끊었습니다.

임신을 해서 예민해져 있는 저는 남편에게 화를 냈습니다.

  “좋은 여자야, 왜 너는 화를 내고 이상하게만 생각하냐? 이상하다. 너!”

라고 오히려 저를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더군요. 그래서 한 참을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첫 아이를 낳고, 약 6개월쯤 되었을 때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1998년 그 당시 IMF로 회사마다 정리해고를 하였는데, 남편은 정리 해고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 그만 뒀다고 하면서 그 날 100만원의 술값을 쓰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기가 막혔습니다. 안 그래도 회사생활이 외줄 타는 것처럼 불안했었는데, 그만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앞이 캄캄했습니다. 집에 있는 제가 봐도 회사생활을 무슨 소풍 가는 것처럼 무성의하게 다니는데, 어느 회사에서 반가워 할 른지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 때부터 경제적으로 더욱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25만원씩 붓던 3년짜리 적금도 못 넣기 시작했고, 아이의 분유값과 기저귀값도 벅차오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씩 적금을 못 넣는 걸 아시고 친정아버지가 몰래 넣어 주셨고, 아이의 분유와 기저귀도 사다 주셨습니다. 생활비도 친정에 있었기 때문에 줄일 수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 제가 타던 엑센트 차도 주시면서,

  “여보게, X서방. 엑센트 가져가고, 자네차 아벨라는 기어도 오토니, 중고로 팔으면 값도 많이 나올거야. 팔아서 소를 사게. 내가 시골에 있으니, 소를 키워줄게. 차 두 대씩 필요한가? 그렇게 해서 조금씩 돈도 늘려가고 그러게.”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소만 사서 친정아버지께 맡겨놨지, 소사료도, 인건비도 하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저부터도 아빠라서 당연히 해주시는 거고, 자식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눈물나게 감사하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렇게 남편의 실직기간이 길어져갈 즈음 큰아이 돌이 지나가고, 99년 3월에 시어머니가 인공관절 수술을 했습니다. 동인천 길병원에서 수술을 하였고, 딱히 병간호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간병은 내 몫이었고, 큰아이를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병원에서 한달과 퇴원 후 한 달을 모두 제가 간호를 하였습니다.

  남편이 긴 무직상태로 집에서 놀고 있어 생활비가 없어서 어려웠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주는 돈들이 한 푼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 공짜로 둘째가 병수발 들은거 아니다! 한 만큼 돈 다 줬다.”

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또 한번 마음이 아파야 했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구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자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친정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정 근처에서 피아노학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를 맡기는 놀이방값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친정엄마께 아이를 맡기고 피아노학원을 친정 가까운 곳에서 차리면 놀이방 보다는 이제 돌 지난 아이를 제가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천의 전셋집을 빼서 충남 당진 신평에 빌라를 얻고 나머지 돈은 학원을 인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 실수 아닌 실수였습니다.

  “야! 너 편하자고 처갓집 근처에 사니까 좋으냐?”

  “내가 니네집 식구들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 줄 알기나 아냐?”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엄마가 봐 주시잖아, 오빤 고맙지도 않아?”라고 하면

  “봐주긴! 니네 엄마, 아빠도 심심할텐데 소일거리도 되고 심심치 않아서 좋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럼 제가 “엄마, 아빠 허리도 아프고 몸도 안 좋으신데, 애 보는게 쉬워?”라고 말이라도 하면,

  “먹는 것도 까작거리고 자기 몸을 그 양반들은 아낄 줄 몰라서 그래! 우리 엄마, 아부지 좀 봐라. 강하시잖아! 애 보는게 뭐 그렇게 또 힘들다고 그러냐? 그래서 눈물나게 고맙냐? 부모가 자식 좀 도와주는게 당연한거 아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 남편에게 실망을 해서 제 마음을 추스르기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 학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잘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학원생 30명을 인수했는데, 학원장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자, 학원생이 12명까지 줄었고 더구나,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까지 겹쳐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한 달에 학원 월세 35만원과 유지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오히려 있는 돈 마저 까먹고 마는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어렵게 운영을 하면서 몇 달이 지나서 겨울이 되가는데도 남편은 무슨 자격증 시험공부를 한다면서, 결국은 흐지부지 그만두었습니다. 직장을 구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친정 식구들의 눈도 이제는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집에서 빈둥 빈둥 놀며 편안하게 살쪄가는 사위를 보면서 속상하고 답답해 하셨고, 동생들은 고생하는 큰언니가 안 됐어서 형부를 야속해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정리해고 당한 남편이 의기소침해 질까, 주눅이 들까, 또, 자식도 있는데 알아서 새로운 직장을 찾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내왔건만, 이제는 이건 아니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남편에게 이렇게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헤어지자고 처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에 아차! 했는지, 그 때부터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듯 했지만, 또 그 때 뿐이고, 그 후로 6개월을 또...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 야! 니가 그깟 피아노 학원한답시고, 유세냐? 이게, 어디서 남편을 우습게 알고! 왜? 니네 엄마, 아빠가 그러라고 시키디? 그렇게 좋으면 니네 집에 가서 니네 식구들이랑 살어~!” 소리를 지르며, 밥 먹던 수저를 던지고, 현관 안에 있던 쓰레기통을 집어던졌습니다.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세 살짜리 아들이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니 참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늘

  “그까짓거 하나 하면서 남편 무시하고, 생색내고, 너 할도리 안 하면 때려치워! 그 돈 안 벌어도 좋아! 알았어? 씨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학원을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남편이 놀고 있었기 때문이고, 남편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이가 커서 어린이집도 보내고 양육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남편이 제게 주는 수모는 견뎌야 했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논지 약 1년 6개월여만에 직장을 들어 갔습니다. ‘인터정보’라는 회사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충 대충 다니다가, 얼마 다니지도 않고 그만두더니 ‘삼보컴퓨터’에 들어갔었고, 거기서도 좌천대상에 오르자, 다시 회사를 옮겨 ‘소프트뱅크’에 취직을 했습니다. 맨 처음엔 회사가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더니, 그것도 얼마 안가서 아침 10시쯤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정확히 퇴근하는 등, 회사 눈 밖에 나는 행동을 눈에 띄게 하더니 결국은 그 회사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이도 들고 취직하기가 힘들어지자, 불쑥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1년 6개월을 놀다가 직장에 들어가서 주말부부를 약 2년정도 했는데, 주말마다 내려오면 싸우는 게 일과였습니다.

  “야! 내가 왜 주말마다 이 시골 촌구석으로 내려와야 돼! 씨~발! 내가 니네 집 식구들 주말마다 만나서 접대해야 되냐? 니기미! 좇같다 그래! 씨~발! 지긋지긋해! 알어?”

이런 말들 끝에는 항상 무엇을 집어던지며

  “야! 너! 꺼져! 꼴보기 싫어! 당장 꺼져! 안 꺼져? 니네 엄마, 아빠한테 가라구! 병신아!”라는 말로 끝났습니다.

  제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동안 남편이 무직인 상태가 길어졌기 때문에 생활비나 아이의 양육비, 그리고 양가 집안의 대소사는 제가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친정 부모님 드릴 선물을 사면, “아휴! 드럽게 비싸네! 넌 돈두 많다? 그런 걸 척척 사고?” 라면서 비아냥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드릴 양주 한 병 사는데도 그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남편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집 부모님들은 명절이나 생신때면 용돈드려야 된다고 해서 시어머니 10만원, 시아버지 10만원. 그리고 선물은 따로 사가지고 갔습니다. 명절대면 항상 친정 부모님께서 시댁에 가져가라고 고기나 과일을 싸 주셨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돈 많은 양반들이니까 뭐!” 이렇게 또 비아냥 거립니다.

그런 모든 남편의 행동이나 말들이 ‘친정 근처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서울로 이사를 가자고 했을 때에도 주저없이 동의했습니다.

  서울 시댁 근서로 이사를 가면 남편생각도 조금 달라지겠지 하는 작은 희망을 갖었습니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있는 SK북한산시티 아파트 24평으로 집을 알아 보고 계약을 하려고 자세히 알아보니, 아파트 단지가 재개발 지역에 산동네를 없애고 아파트를 세웠는데, 아직 등기가 나지 않은 아파트였습니다. 그렇기 대문에 대출이 되지 않는 아파트였던 걸 모르고 무리하게 계약을 했던 것입니다.

  저희가 갖은 돈은 없는데 정말 난감했습니다. 남편은 친정아빠한테 와서 아빠가 가지고 계신 인천의 상가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빠는 “그러마!” 하시고 서류를 검사해 보았더니, 건물이 오래 되어서 8천만원 정도밖에 대출이 어렵다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걱정을 하니까, 친정 부모님은 제 외삼촌댁에 부탁을 드려서 돈 5천만원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부랴 부랴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아서 서울 집 사는 돈 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SK 아파트가 1억 4천4백만원이었기 때문에 모자라는 돈이 많았습니다. 신평 빌라 전세값 2천5백만원과 외삼촌이 빌려주신 돈 5천만원, 남편이 신용대출 받은 돈 1천만원, 서울 SK 아파트가 등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SK가 보증 서는 형식으로 빌릴 수 있는 돈 2천만원, 그리고 제 이름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 2천만원을 보태고, 학원해서 있던 돈 9백여만원과 남편의 통장 잔고를 통 털어서 겨우 잔금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학원은 그만 정리하려고 내놓기는 했지만 쉽게 나가지 않아서 서울 아파트로 이사가고도 1년 이상을 운영해야만 했습니다. 맨 처음 12명이었던 학원생이 70명까지 늘어났기 때문에 저도 욕심이 생겨서 조금만 더 주말부부하면서 고생하자고 얘기했었습니다. 남편이 1년 6개월을 놀다가 직장을 가져서 평균 2백만원을 벌 때에도 저금은커녕, 제게도 가져다 주지 않을뿐더러 술 먹고, 한 달 남편 쓰는데 모두 사용했습니다. 큰아이의 유치원비나 교육비등도 제가 피아노학원을 한다는 이유로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잘 되고 있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기에는 미련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주말마다 만나서는 어김없이

  “별로 벌지도 못하면서 학원한다고 힘든 척 하고 생색내냐? 당장 때려 치우라고! 씨발! 니네 식구들이랑 살면서 동생들이랑 있으니까 좋으냐? 니~미! 그렇게 좋으면 니네 식구들이랑 살어! 병신아!”라며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가 친정에 가게 되면 차 안에서

  “야! 내일 아침밥만 먹고 오는거다? 늦장 부리지 말고 니가 서둘러서 오전에 나올 수 있도록 해라!

   알았어?” 라고 내게 다짐을 받으며 출발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친정에 가서도 맘이 편하지 않아서 우왕좌왕 친정 식구들 눈치채지 못하게 서두르면서 부모님께 빨리 가야 된다고 말씀드리면, 남편은

  “왜 그렇게 서두르냐? 늦게 가두 돼!  차도 막히고 슬~슬 가지 뭐!”

이렇게 말을 하며 친정식구들 앞에서 저를 나무랍니다. 친정 식구들은 남편의 이중적인 성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제게만 섭섭하다고 생각하고 얘기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남편이 진짜로 늦게 가잔 소리인 줄 알고 느긋해 했지만, 그래서 늦게 온 날은 어김없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얼굴에 피곤과 짜증을 잔뜩 담은 채

  “야! 내가 일찍 일찍 서둘러서 오자고 했지? 너는 니네 식구들이랑 있어서 좋을지 몰라도 나는 얼마나 피곤한지 모르겠냐? 너는 왜 니네 식군데 말을 제대로 못햐냐? 야! 왜 말을 안해? 맹~하니 있지만 말고 얘기 좀 해 봐! 어유~!”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남편이 원하는 것인지, 어느 것이 진짜 남편의 모습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학원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삿짐 싸는 걸 도와 주시면서 섭섭해 하시는 친정 부모님께

  “야~ 드디어 이사가는구나. 아! 이제는 이사를 가네요. 그죠? 장모님, 이젠 여기 처갓집에 1년에 두번만 올 거예요. 추석하고 설날만 오면 되죠?” 라고 의미있는 농담을 하자,

  “이 사람! 장인, 장모 생일엔 안 올건가?” 라고 말씀하시면서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말들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이삿짐을 싸서 올라오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 이제 당분간 처갓집엔 안 올거니까 그런 줄 알아. 내맘 내키는 대로 할거니까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알았냐?”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말하고 있는 저 사람이 내 남편일까 라고 자문하며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됩니다. 

  서울로 이사를 가고, 저는 학원이 팔리지 않아서 한 동안 주말 부부를 하고 있을 무렵, 주말에 서울에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을 즈음으로 밤 11시가 넘을 때였습니다. 남편의 핸드폰으로 벨이 울렸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받고 있는 남편 핸드폰에서 여자 목소리가 났습니다. 전화를 우물우물 받는 남편이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어... 잤어... 밤 중에 왜 전화했어?... 자고 있었지... 어... 내일 전화할게.... 그래... 잘자...”

핸드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도 대화 내용만으로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너무 화가 났습니다. 자꾸만 남편에 대한 믿음이 깨졌습니다. 남편 말로는 심심해서 장난으로 컴퓨터 채팅해서 전화만 했다고 했습니다. 고등학생이라고 하는 말에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남편말 그대로라고 믿는다해도, 심심해서 장난좀 쳤다고해도, 한 가정의 가장이 앞으로의 계획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 여자아이와 걸쭉한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한심하고 유치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뜬 눈으로 보낸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난리를 치냐고, 너 참 대단한 여자라며 챗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남편의 계속되는 집요한 잔소리를 듣다보면 정말 내가 너무한건가 보다라는 최면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 남편에 대한, 내 결혼에 대한 환상이 점점 깨지면서, 너무 허전해서 우울해 하면,

  “야! 니가 사춘기 소녀냐? 허구헌날 센치해져서 멍~하니 그러고 있냐? 야! 임마!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냐?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어! 새끼야!”라고 면박을 주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은 주말에 큰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에버랜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졸립다고 대신 운전 좀 하라고 해서 제가 운전을 하고 가다가 길눈이 어두워서 갈림길에서 고속도로 쪽으로 잘못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야! 너 왜 이리로 가냐? 하여튼 생각없이 운전하기는! 야! 이 돌대가리야! 에버랜드로 가라고! 야! 내려! 너한테 운전하라고 한 내가 잘못이지! 돌대가리 같은 년!”

저희는 주말에 기분 좋게 나온 나들이를 또 그렇게 망쳤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퇴근을 해서 저녁을 나가서 외식을 했는데, 저와 남편이 함께 술도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저는 컴퓨터 인터넷을 보고 있었고, 남편은 TV를 보다가 저보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듣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자 왜 대답을 안하냐며 컴퓨터를 보고 있는 제 머리를 쳤습니다.

  “야! 왜 대답 안 해! 말 같지 않냐? 이런~ 병~신!” 하며 머리를 볓 번 밀치듯 치길래 제가 왜 사람을 치냐면서 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븅~신 같은 년! 건드려야지만 발끈해서 이제야 쳐다보냐? 넌 그래서 병신이야! 이 병신아!” 하며 또 한 번 머리를 치더니 방에서 나갔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살 때에도 나이 서른이 넘은 시동생을 대답 제대로 안 했다는 이유로 술 먹고 씨발놈이라며 주먹으로 패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 형제들이라서 그런가?’ 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동생과 그렇게 주먹다짐으로 싸우고 나니까, 시어머니는

  “쟤 둘째는 술만 마시면 저렇게 싸우고 동생을 패서 어쩌면 좋니? 즈이 형하고도 총각 때 형수 앞에서 욕하고 주먹질 허고 싸우더니, 또 저러네. 저거! 미친 놈!” 하시며, 예뻐하는 당신 막내 아들 맞은 것에 분해 하셨습니다.

  “쟤가 장가가서 좀 나아지나 했더니.... 언제는 술 먹고 길에서 택시 운전수랑 싸워서 유치장에도 갔다 왔잖니.. 어유 이걸 어째! 저거 술만 먹으면 저러니!”라고 아들 흉을 보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제 눈으로 보지 못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내시는 시어머니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잦아지는 남편의 폭언과 강도가 심해져가는 행동들이 두려워졌습니다.

  서울로 이사를 가서 둘째아이를 임신했습니다. 큰아이도 외로워하고 동생이 있었으면 하길래, 하나 더 낳자고 얘기 했더니,

  “너는 왜 자꾸 애를 날려고 하냐?  하나만 고급스럽게 키우지, 어디, 못사는 사람들처럼 주렁주렁 날라고 하냐? 날래면 낳자. 아이씨~. 애하나 더 키울라면 장난 아닌데!”

그렇게 사정사정 설득 아닌 설득을 해서 둘 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입덧을 너무 심하게 해서 입덧을 시작한 3개월부터 거의 5개월까지는 먹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얘! 너는 왜 그렇게 꼼짝을 안하니? 아이 갖고 그렇게 꼼짝 안하면 막 달에 애낳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점심 때 쯤 시동생과 막국수를 사 가지고 연락없이 오셨습니다. 뭐든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입덧이 그렇겠지만, 입에 당기는 음식이 있고, 생각하기도 싫고 비위가 상하는 음식이 있는데, 둘째 때는 새콤달콤한 음식은 보기도 싫었을 때였는데, 시어머니는 막국수를 먹으면 입맛이 돌 거라고 뜯어서 자꾸만 먹으라 하셨습니다. 도저히 못 먹겠어서 싫다고 말하자,

  “얘! 시동생이 형수 생각하고 이렇게 사가지고 왔는데, 성의가 있지, 조금이라도 먹어야 되지 않니?

   임심은 너만 하는 거 아니고! 나는 애 낳구두 입덧을 해서 양치질을 못했다! 너보다 더 심했었다. 얘!”

그렇게 힘들게 점심을 보내고,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돌아가고 쇼파에 풀썩 누웠습니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마중하고 들어오겠다고 나가더니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튀김 한 봉지를 들고 들어왔지만, 눈빛은 곱지 않았습니다.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습니다.

  “야! 튀김 사왔어! 먹어!”

곱지 않은 말투와 표정이 섭섭했습니다.

  “싫어! 지금 먹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자마자 튀김봉지를 거실에 힘껏 집어 던졌습니다.

  “어유~! 니~미! 임신이 병이냐? 정신을 놓고 쫘~악 깔아져서! 너 왜 그러냐? 씨~발! 진짜 좇같네?

   생각하고 튀김 사다 줬더니, 싫어? 왜 싫어? 먹어!”

너무 속상하고 섭섭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참으려고 했지만, 서러웠습니다. 남편은

  “또 우냐? 넌 우는게 무기지? 이젠 지긋지긋하다! 말을 해! 이제는 우는 것도 지겹다!”

이렇게 계속 옆에서 빈정거렸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아랫배가 꼬집듯이 땅기고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실에 갔더니 약간의 피도 비치기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이가 잘못되나 하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산부인과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가만히 누워서 안정하고 쉬어 보고, 그래도 피가 비친다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문의전화를 하고 아파서 아랫배를 움켜쥐고 다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고, 한 편으로는 낯설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러다 애기가 잘못되면 아기한테 너무 미안하고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아프던 배도 가라 앉고 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임신 초기가 지나고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에 사는 동생이 제가 몸이 무거워져서 집에만 있다고 서울에 놀러온 적이 있었습니다.

  “어? 너 왔냐? 왜 왔냐?”

이러면서 퇴근하고 시큰둥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야!  배고픈데 밖에 나가서 뭐 사먹자. 고기 먹고 싶은데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까? 처제 너두 먹고 갈꺼냐? 우리 나갈건데, 넌 언제가냐?”

저는 제 동생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인천 연수동에서 사는 제 동생이 서울 제가 사는 SK 아파트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오려면 버스를 타고 전철 타고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야하는데, 시간이 빨라야 2시간에서 2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언니 얼굴 한 번 보자고 두시간 반이 걸려서 온 동생을 안 가냐고 눈치를 주는 남편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제게는 형부가 둘, 제부가 둘이 있습니다. 형부들은 많이 배우진 못하셨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분들이시고 제부들 역시 경제적으로 여유롭진 않아도 동기간들이나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착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명절이나 친정에 대소사로 집에 모이는 기회가 오면 저는 또다시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술만 마시면 형부든 제부든 붙들고 빈정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씨~발! 내가 대기업에서 조직생활을 해 봐서 아는데! 좇두 아닌 것들이~!”

형부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술자리에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좋은 날에 좋은 일로 모였는데, 싫은 소리 내기 싫어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는데, 남편은 자기를 같잖게 보고 무시한다고 제게 퍼부어댑니다. 제 바로 아랫 동생네 제부는 술이 약해서 조금만 마셔도 많이 취하는 사람입니다. 명절에 술자리가 길어지자 슬그머니 방에 들어가서 잠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이 또 남편의 눈에 거슬렸나 봅니다.

  “야! 이 새끼야! 일어나! 어디 형님들 다 앉아서 술 먹는데, 자빠져서 자냐? 야! 이 씨발놈아! 일어나라고!”

하며 억지로 앉히려다가 안 되니까 발로 차고 술 취해 자는 제부의 뺨을 때려서 결국은 깨워 일으켰습니다. 제부는 손윗 동서 형님이 그러니까, 고스란히 맞다가 결국은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또, 막내제부한테는

  “야! 씨발놈아! 니가 뭐 그렇게 잘났냐? 좇도 잘난게 없으면서 장인 장모한테 알랑방구나 떨구! 얘라~ 이 병신아! 에~이! 좇같은 새끼!”

  “형님, 그게 아니구요....”“조용히 해! 이 씨발놈아!”

번번히 만날 때마다 그러는 남편이 싫어서인지, 그 이후로는 막내 제부가 남편과는 술자리를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남편은 제 동생들에게도 호칭이 처제, 처남이 아니라

  “야!”, “새끼야!”로 불렀습니다. 한 번은 남동생이

  “매형! 저희도 이제 다 컸는데, 새끼야로 부르지 마세요. 하하!”

라며 남편과 소주 한 잔 하는 자리에서 얘기를 하자,

  “왜? 듣기 싫으냐? 새끼야가 어때서, 임마! 어린놈에 자식들이 내가 새끼라고 부르면 좀 어떠냐? 새끼야!”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 번 대화가 이런 식으로 끝나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술자리건, 대화를 하는 자리건 모두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제가 남편에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오빠! 오빠는 왜 술만 먹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왜 그래? 그리고, 왜 자꾸 형부들한테 씨발놈이라고 그러냐고! 제발 그러지좀 마라!” 그랬더니

  “조용히 해! 새끼야! 넌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지냐? 그리고 오바하지마! 내가 술먹고 어쨋는데?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언제 내가 씨발놈이라고 했냐? 니네집 식구들은 과장되게 얘기해서 사람 병신만드는게 있어. 너두 다 꼭같애!”

  “오빠! 그게 아니구...”

  “시끄러! 병신아”

또 그렇게 저와 남편의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친정집은 친정 아버지가 술을 즐겨하시기 때문에 의례적으로 손님이 오거나 명절에 사위들이 오면, 술상을 봐서 술 한 잔씩 하는 것이 저희 친정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2004년 12월에도 망년회겸 모였는데, 아빠는 술이 거나해 지셔서 먼저 들어가서 주무시고, 동생들과 제부, 그리고 엄마가 남아서 거실에서 남편과 술을 한 잔 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남편은 술이 취했고, 어느 순간부터 술이 많이 취하더니, 친정 엄마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씨~발! 카~악! 퉤! 당신! 정말 재수없어! 씨~발!”

그러자, 친정 엄마는

  “자네! 아이구! 취했구만? 아니, 여보게, 나! 자네 장모야! 왜 이러나? 들어가 자야겠내, 왜 내가 재수없어? 아이구! 거실인데 여기다 침을 뱉으면!... 어이구! 나한테 왜 침을 뱉나? 이 사람 취했나 보네?”

이러시며 황당해 하셨습니다.

  “씨~발! 왜? 침 뱉으면 안 돼냐? 아이구 아이구, 아무튼 장모는 재수 없어! 카~악! 퉤! 여우 같은 년! 씨~발!”

그 자리에 막내 제부와 여동생 둘,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정말 속상했습니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식구들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하는데, 옆에 벗어 놓은 무스탕 점퍼에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웩! 씨~발! 안 치워? 카~악! 퉤!”

막내 제부가 걸레를 가져다 닦고 치웠습니다.

  “형님! 목욕탕에 들어가서 좀 씻으세요.”

라고 말하자,

  “이 씨발놈아! 비켜! 니기미 좇같이! 저리 안가?”

그렇게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정수기에 부딪치자,

  “씨~발! 이건 또 뭐야! 좇같은 새끼들!”

하며 정수기를 잡아서 던져서 쓰러뜨렸습니다. 한바탕 정신없이 그 난리를 친 후 아침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전혀 기억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친정 엄마는 아빠가 아실까, 남편이 무안해 할까 제 동생들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그런 엄마한테 죄송하고 또 죄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조용히 사위인 제 남편을 불러서 타이르셨습니다.

  “여보게, X서방. 이제는 자네 술 조금만 들먹게. 이기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실수하지 말고! 암만 취해도 장모한테 씨~발 재수없어가 뭔가? 침 뱉는 건 또 뭐고, 절대로 술 과하게 먹지 말게.”

엄마의 이 말씀에는 자기 자신도 수긍을 하는 듯이

  “아우!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씨! 제가 왜 그랬죠? 빈 속에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 참! 내가 왜그러지?”

정말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실수를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차를 타고 올라 오는 길에 제게 물었습니다.

  “야! 내가 진짜 그랬냐? 아우 씨! 내가 왜 그랬지? 야! 얘기 좀 해봐 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빠! 술만 먹으면 왜 그러냐? 엄마한테 침 뱉으면서 욕하고 들은 그대로야. 토하고, 욕하고, 침뱉고, 정수기 던져서 고장내고! 왜그래 도대체!”

제가 화가 나서 이렇게 얘기하자,

  “과장해서 확대해 가지고 얘기하지마! 니네 집 식구들은 뭐 하나 잘못하면 과장해서 그냥 막~ 몰아 세우는 그런게 있어. 아니! 또! 그렇게 실수 좀 하면 어때? 죽을 죄를 지었냐?”

오히려 더 성이 나서 제게 퍼부어댑니다. 남편이랑 지내다 보면 제 머릿 속이 멍해지면서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지, 바른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습니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강인철이라는 사람이 법인체를 차려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무실로 출근을 하였습니다. 강사장의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150만원을 한 달에 받았고, 우리는 매달 적자로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습니다. 큰아이 교육비와 유치원비, 작은 아이의 우유와 기저귀값, 그리고 식비, 공과금, 대출금 등 생활비까지 합하면 150만원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슈퍼에서 만원 미만인 돈이 계산되면 카드 계산하기가 뭣해서 현금으로 내면 남편은 난리가 납니다.

  “너는 돈 없어 죽겠는데, 현찰로 척척 내냐? 왜 그렇게 생각없이 멍청하게 사냐? 아유! 답답해! 일단 카드로 계산하라구! 멍청아!”

이런 핀잔을 받고 난 후로 1천원, 2천원의 물건을 사도 무조건 카드로 계산하는 습관이 제게 생겼습니다. 매 달 생기는 적자를 제 이름으로 된 마이너스 통장에서 가져다 메꾸었습니다. 그렇게 허덕이면서도 TV를 새로 사고, 컴퓨터모니터를 완전 평면 17인치 LCD로 바꾸고, 또, 오토바이를 산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오토바이는 한 대에 1천만원 하는 것을 할부로 산다고 야단이어서 겨우 겨우 말렸습니다. 서울은 차가 막혀서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정말 이 사람을 남편으로 믿고 살아야 하는지 수 백번 제 자신에게 물어 보곤 했었습니다.

  어쩌다가 제가 아이들 옷이라도 하나 사려고 인터넷에서 싸게 파는 사이트를 뒤져서 사기라도 하면,

  “너는 인터넷에서 쇼핑하고, 척척 그렇게 사냐? 필요도 없는 걸? 하여튼 쇼핑 중독이야! 중독! 돈두 많다! 너는 니네 아빠 밑에서 곱게만 편안하게 자라서 돈 아까운 줄을 몰라! 너는 이제 니네 아빠가 보호자가 아니라 내 아내라구! 제발 개념없이 돈 쓰지 말고 재테크 좀 해라! 아우! 씨! 니네 부모는 자식들 교육을 잘못 시켰어! 우리 엄마, 아버지좀 봐라. 자식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잘 키워 냈잖아! 안 그러냐구!”

이렇게 장황하게 잔소리를 연설합니다. 저도 반듯한 가정에서 반듯한 부모님의 사랑과 교육을 받으며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하고 귀한 자식으로 올바르게 자란 부모님 딸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음악이었고, 부모님은 제 뜻에 말없이 뒷바라지 해 주셔서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하면서 밝고 건강한 사고로 생활하던 사람이었고, 내 인생에 대해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생활하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내 남편에게 이런 대우를 받고, 남편이 함부로 하는 말과 행동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남편은

  “여자가 집에서 멍청하게 살림하고 애만 키우면 바보가 되는데, 너는 그러구 사는게 좋으냐? 너두 집에서 살림만 하면, 우리 엄마처럼 멍청하고 남편한테 집착하게 되는 거야.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 나도 힘들어 죽겠어!”

라고 내게 틈만 나면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 째가 그 때 막 돌을 지났을 무렵이라서 감히 제가 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생각 끝에 인천 막내 삼촌이 계신 동네로 이사를 가서 아이는 막내 외숙모한테 맡기고, 집에서 피아노 개인 레슨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막내 삼촌네가 사시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서해아파트로 이사를 하기로 하고 집을 얻었습니다.

  친정엄마는 24평에서 33평으로 집을 넓혀서 이사 오는데 혼수로 해 주셨던 장롱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시면서 새로 장롱과 화장대, 거실 장식장과 문갑을 모두 새로 사주셨습니다. 장롱들을 새로 들여놔 주시면서 흐뭇해 하시던 엄마, 아빠 얼굴의 주름진 미소가 눈에 선해서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쏴~하게 아파옵니다. 막내 삼촌이 9층에 사시는 같은 동 2층으로 집을 계약하고 수리를 해서 3월 18일에 이사를 했습니다.

  이삿짐을 들여 놓고 밤에 소주를 한 잔 하더니, 또 빈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봐라! 인천으로 우리가 이사도 왔겠다, 꼬라지가 허구헌날 시도때도 없이 니네 엄마, 아빠를 비롯해서 니네집 식구들 들락거릴테니! 아휴~ 씨발!”

저도 이제는 지긋지긋하고 화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가 서울 살 때는 엄마, 아빠가 길을 몰라서 오고 싶어도 못 오셨었는데, 인천 살게 됐으니까 좋으셔서 그러시는데, 딸네 집에 좀 오시면 어때? 너무 그러지좀 마라!”

라고 얘기했더니 길길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야! 씨~발! 니네 식구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피곤하게 구는지 아냐? 특히 니네 아빠! 그 특유의 술만 먹으면 꼬장부리는 거! 니네 엄마! 여우같이 모든 사람을 지맘대로 할라고 하는거! 피곤하다! 피곤해! 니~미! 그리고 니네 그 싸가지 없는 동생 새끼들! 즈이 부모 말고는 세상에 위 아래도 없는 새끼들! 지긋지긋하다! 언제 나를 사위 대접해 준 적이라도 있냐? 장인 장모가?”

또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으니까, 남편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오빠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느라고 해 주시는데 왜 그래? 그리고! 장인, 장모 뒤에 님자 하나 더 붙이면 혀가 부러지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막 대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어머님, 아버님한테 오빠네 엄마, 아빠라고 하면 기분 좋겠어?”

라고 얘기 하자, 남편은 식탁에서 박차고 일어나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어~ 그래? 니가 친정 식구 근처로 이사를 오니까, 기가 살아서 그런가 본데, 너두 꼬우면 그렇게 해라? 난 니네 엄마, 아빠한테 장인, 장모라고 할거야! 니가 님자 붙이랜다고 내가 하냐? 그리고!

   이까짓 장롱 사줬다고 유세냐? 다 뽀개버릴까보다! 씨발! 니미 좇같네, 진짜!”

하며 문을 쾅쾅 닫고 식탁의자를 획! 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윗집, 아랫집으로 가깝게 지내는 동네고, 아파트라서 다 들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가 막히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해야되겠다는 생각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이사온 첫날의 소란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익스프레스에서 대충 정리해 주고 간 짐을 내가 쓰기 편하게 다시 정리하는데, 해도 해도 끝이 없었습니다. 제가 힘들어 할 걸 알고 동생과 이모, 친정 엄마가 오셔서 짐정리를 도와 주셨습니다. 남편은 이것 또한 못마땅해서 식구들에게 짜증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제게

  “너는 왜 니 일을 니가 해결 못하고, 꼭 니네 식구들한테 의지하냐? 너는 그래서 병신이야! 너나 병신되지! 왜 나까지 병신을 만드냐? 씨발! 열 받게!”

이사를 하면, 하물며 동네에서도 와서 도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삿짐 정리를 여자 형제들이 와서 거들어 준 것이 제가 병신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이었는지, ‘씨~발!’ 소리를 들어야 할 일인지, 또 친정 식구들에게 의지한 것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점점 남편의 성격은 비뚤어져 갔고, 술을 마시면 점점 더 독선적인 성격에 독설을 퍼붓고, 행동이 이상해져 갔습니다.

  제 여동생네 아이가 백일이어서 뷔페에서 밥을 먹는데, 남편이 술을 좀 먹더니, 제동생 시아버지한테 가서,

  “안녕하십니까? 나랑 배치기 한 번 하죠? 아이! 씨! 나 당신네 집에 쳐 들어갈거야? 술 한 잔 줘야 돼요? 어이! 씨!”

이러는 겁니다. 하다 하다 사돈 어른한테 가서 술주정이라니요. 죄송해서 곁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백일 잔치가 끝나고 막내 삼촌 댁으로 식구들이 다 모였는데, 남편이 술이 취해서 목소리가 커지니까 다들 뿔뿔이 집으로 간다고 나갔습니다. 같이 따라 나와서는 제 친정 아빠한테

  “장인! 그냥 가실거예요? 아이!씨! 한 잔 더 해야죠! 아이~씨! 정말 갈 거예요?”

하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아빠 오른쪽 정강이에 던졌습니다. 저는 뭐라 할 말도 잃어 버리고, 변명을 할 어떤 여력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용납을 하지 않으시는 깐깐한 제 친정 아빠는 순간 얼굴이 궅어지시더니 차를 타고 충청도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남편이 미웠습니다. 실망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생활비 주는 것도 인색하였습니다. 결혼 초에는 월급이 작아서 아껴써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해를 거듭할 수록 돈에 대한 남편의 인색함과 예민함에 두 손을 들었습니다. 생활비는 카드로만 쓰라고 하니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마트에서 사는 물건들만 생활비가 아니라, 아파트 알뜰 시장이 서면 사야할 야채들과 과일도 있고, 세탁소에 양복을 세탁하는 것도 있고, 신문값, 우유값도 있고, 하다못해 아이들 자장면을 시켜 먹일래도 현금이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생활비로 현금을 달라고 하면 금요일 쯤 월 초에 한 번 10만원을 찾아옵니다. 주말에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 먹고 나면 1~2만원을 쓰게 됩니다. 나머지 7~8만원을 반으로 나누어서 남편 지갑에 넣고 저는 3~4만원을 줍니다. 다음에 현금을 달라고 하면,

  “야! 너는 니가 레슨해서 버는 돈은 다 뭐하냐? 그건 뭐하고 돈을 달래냐? 그리고 카드는 돈 아니냐? 저거는 아주!..... 너 카드 싫으면 다 내놔! 회수야!!!”

생활비에 대한 실랑이는 그렇게 늘 끝이 납니다. 제가 하는 피아노 개인 레슨은 다섯 명으로 한 아이에 10만원씩 레슨비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50만원이 아니라 5백만원을 버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큰 아이 교육비와 현금으로 나가는 생활비를 다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정말 치사하고 서러웠습니다. 남편이 술 한 잔을 먹고 돈 얘기가 나오면, 카드 당장 내놓으라고 야단을 합니다. 그런 얘기 듣는 것도 지치고 지겨워서 카드를 건네주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카드 이거 TV위에 놓고 갈게. 갔다 올게....”

라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때면 정말 남편에게 남아 있는 정마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서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4월 4일 저녁에 친정에 내려갔다 오자고 했습니다. 어쩐 일인지 남편이 선 뜻 퇴근하고 가자고 해서, 나는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주꾸미도 사 가지고 집에 도착했습니다. 남편이 주꾸미 샤브샤브를 해 먹자고 해서 친정 거실에 상을 차려서 그것을 먹으며 소주도 한 잔 했습니다. 어느 정도 술자리가 무르익자, 남편은 제 바로 밑에 여동생인 29살 된 처제가 형부를 보고 인사도 안하고 퉁명스럽게 대했다면서 다짜고짜

  “야! 너 꺼져! 재수없어! 너! 2층으로 올라가! 이 씨발년아!”

그 말에 동생은

  “뭐라구요? 꺼지라구요?”

하며 벌떡 일어났고, 남편은 그 말에 또

  “이런, 씨~발년이! 너 안꺼져? 이 썅년아!”

하더니 순식간에 동생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휘어 잡았습니다. 엄마는

  “야! 이보게! 어머나! 이게 웬일이야! 여보게! 이거 놔! 이거 놓구 얘기하라구! 여보게! X서방! 야! 어머! 이게 웬일이야!”라며 남편을 말렸고, 친정 아빠도 “야!  정신차려! 이게 무슨 짓인가? 놔! 얼른!”

하며 말렸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남편은 제 동생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치고, 머리를 손에 한번 감아서 질질 끌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도생은 반항을 하고 발버둥쳤지만, 역부족이었고 남편은 분이 안 풀렸는지 발로 마구 찼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뜯어 말리는 친정 엄마를 밀쳐서 엄마는 여기저기 멍이 들고 허리를 다치셨고, 심장이 안 좋으셔서 약을 드시는 아빠는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하셨습니다. 겨우 동생과 떨어뜨려 놓았더니 남편은

  “야! 이 씨발년아! 아유~! 저년 저거 드럽게 싸가지 없네? 아이~ 씨발년! 저거! 저거! 야! 너 이리와! 아주 죽여버릴거야! 너!”

자기 성에 못 이겨서 난리가 났습니다. 제 동생도

  “야! 니가 뭔데 날 때려? 우리 엄마 아빠도 안 때리고 안맞고 살았는데 니가 뭔데 날 때리냐구!”

라고 대들자, 남편은 거실에 주꾸미를 자르느라 갖다 놓은 부엌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때까지 너무 기가 막혀 둘 째를 안고 멍하게 앉아 있던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러다가는 TV에서만 보던 직계가족들간의 살인이 제 눈앞에서 일어나겠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 칼을 뺏었습니다. 남편이 미친 것만 같았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동생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온통 거실에는 음식들이 쏟아져 있고, 바닥에 칼은 뒹굴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잠시였고, 남편은 또다시 제 동생에게로 달려 들었습니다.

  “야! 이 씨발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야! 이 좇같은 년아! 너! 나한테 죽을래? 아이! 이 씨발년이!”

이러다가는 동생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친정 아빠도 말리다 말리다 남편의 뺨을 쳤습니다. 그러자,

  “아이! 씨~발! 야!  나, 장인한테 맞았다! 아이 씨~발! 장인이 도대체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습니까? 나를 자식으로 생각해 보기나 했습니까? 자식새끼들 교육을 저 따위로 잘못 시켰으니, 이제부터는 잘못된 걸 내가 바로 잡아서 다시 가르치겠습니다. 에이~ 씨~발!”

그러더니 소주병을 집어 던지고는 거실에서 방으로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칼까지 휘두르는 남편을 보면서 저는 차라리 그 칼로 제가 죽고 싶어졌습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없어지더군요. 그 난리를 치고, 제가 겨우 뜯어 말려서 상황을 좀 진정시키고 난 후 제 동생이랑 얘기하고 풀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기 피멍이 들어 있는 제 동생에게 하는 말이

  “나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듯하고 올바르게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위아래 없이 행동하는 싸가지 없는 것들은 봐줄 수가 없어요!”

라고 훈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3자인 그 어느 누가 보아도 남편의 행동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지만, 남편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때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걔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은거야. 나는 앞으로도 니네 동생들이 싸가지 없게 굴면, 야! 내 성질 알지? 난 또 그럴거야, 술 한 잔 먹으면 나한테 또 맞을 거야! 알았어?”

라고 말을 합니다.

  저도 이제는 남편이 그런 말과 행동을 대할 때마다 제 인생을 조금씩 포기하고 접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친정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딸사위에게 크게 실망하신 친정 부모님을 대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동기간들을 보지 못하고 가보지 못하는 제 마음은 썪어 문드러지는데, 남편은 처갓집을 안 다닌 이후로 오히려 홀가분해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까지 만든 남편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내 남편이기 때문에 또 한번 접고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내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점점 포악하게 변해갔습니다.

  남편은 술을 마시면 새벽 3~4시까지 마시고 들어옵니다. 인천에 이사온 다음이었는데, 늦는다는 전화가 왔길래 동네 엄마들과 집에서 집들이겸 술 한 잔 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거실에서 먹고 동네 엄마들은 모두 갔고, 저도 술 한 잔 하고 귀찮아져서 대충만 치우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은

  “여편네들이 술 쳐먹고 버젓이 무슨 자랑이라고 마루에 술상을 펴놨냐? 씨~발! 야! 이 씨발년들! 이거 안 치워? 병신같은 년아!”

라고 소리지르며 길이가 약 2m가량 되는 기다란 상을 발뒤꿈치로 부수고 들어서 엎었습니다. 상위에 있던 김치와 골뱅이 무침을 천정과 벽으로 던져서 온통 빨간색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사람같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제 손으로 난장판이 된 집안을 치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침까지 내버려뒀는데, 외숙모께서 올라오셨습니다. 외숙모가

  “야! 니네 이게 원일이냐? 문방구에 뭐 사러 나왔는데, 1층집 할머니가 니네집 불 내는줄 알았다고

   올라가 보라고 걱정을 하시길래 올라왔더니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윤서방! 이게 뭔가! 나 자네한테 실망이야!”

그러시더니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남편은 빨리 빨리 치우지 않아서 이게 무슨 꼴이냐고 제게 면박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9층 외삼촌댁에서 한우를 사와서 우리 부부를 먹이고 싶어서 고기구워 저녁에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시큰둥 하게 소주를 먹다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집으로 갔고, 소주가 7부 정도 남아 있어서 저는 삼촌이랑 마저 반씩 나눠 먹고 내려왔습니다. 집 현관 문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남편은

  “너 무슨 얘기하고 내려왔어! 니 삼춘이랑 친정 일 의논하니까 좋으냐? 그렇게 좋으면 니 삼춘이랑 9층에서 살어!”

라며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의논을 해. 술만 먹고 내려온건데, 오빠 왜그래!” 했더니,

  “지금 내가 집으로 오고 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오로지 술만 쳐먹고 내려왔다고? 이런! 씨발년이!”

라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답답하다, 답답해! 참 나!”

라고 얘기 했더니, 벌떡 일어나서

  “야! 이 씨발년아! 남편을 좇같이 만드니까 속이 시원하냐? 너는 어째 니 일을 니 스스로 해결 못하고 맨~날 니네 식구들한테 의존하냐구! 이 병신같은 년아! 너는 돌대가리야! 이 씨발년아!”

하면서 선풍기를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더니 장식장 위에 있는 커다란 돼지저금통을 바닥으로 또 던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 마음대로 해라!”

라고 얘기했더니, 바로 제게로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 잡아서 끌고 다녔습니다. 제가 바닥에 손을 짚고 버텼더니 가랑이 사이에 제 머리를 넣고 깔고 앉아서 주먹으로 양 옆 관자놀이 부근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니 남편의 왼쪽 허벅지 안 쪽이 보였습니다.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았습니다. 닥치는 대로 남편의 허벅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쌍년! 어~? 나를 무네? 야! 이 씨발년아! 안 놔? 안 놔? 아~! 아! 놔! 이 년아!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네? 놔! 이 년아!”

제게 물린 허벅지가 아팠는지 가랑이 사이에서 저를 놓아 주었습니다. 간신히 숨을 돌리고 나니까 이번에는 발로 차기 시작했습니다. 엎드려 있는 제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밟아서 짖이겼습니다. 그대로 죽고 싶었지만,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죽어 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제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몽롱해 질 때까지 때리고 나서야 안방 침대로 들어가서 코를 골고 자기 시작하더군요. 그 때 맞은 후로 온 몸이 멍투성이라 목욕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목덜미도 멍투성이라 더운 날씨였지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녔고, 얼굴도 멍이 들어서 밤마다 파스를 붙이고 자야만 했었습니다. 머릿 속이 부어서 세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남편은 퇴근해서 저녁겸 소주 한 잔하자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 둘을 외숙모 댁에 맡기고 연수동에 있는 ‘이학수산’이라는 음식점에 들어 갔습니다. 보?을 하나 시켜 놓고 소주를 시켰습니다. 소주를 한 잔 마시자 마자 남편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내가 그 날 왜 기분 나빴는 줄 알아?”

저는 악몽같은 그 날일을 생각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싫어! 듣고 싶지 않고,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때리지 마! 그러면 나도....”

그렇게 말 끝을 흐렸더니 남편은

  “어쩔건데? 또 때리면?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참~나! 너 웃긴다? 그리고 왜 얘기를 안 해? 할 얘기는 해야지! 내 얘기 들어! 내가 그 날 왜 기분 나빴냐면...”

거기까지 듣다가 제가 그만 하자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말하는데 말허리를 잘랐다고 화를 내면서

  “이런! 씨발! 넌 그래서 얻어 터진거야! 알어? 이 병신아! 너는 앞으로도 또 그러면 또 맞어! 돌대가리 같은 년! 씨~발! 넌 더 맞아야 돼!”

저는 얼굴이 뜨거워져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과 제가 둘이서만 갔기 때문에 홀 서빙 보는 종업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바로 옆자리로 주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모두 쳐다보고 수군대며 왔다 갔다 했습니다. 특히 40대쯤 되 보이는 아주머니는 측은한 눈빛으로 저를 한 참 쳐다봐서 제 자신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무서웠습니다. 그런 행동과 말들의 횟수와 강도가 점점 잦아지고 강해졌습니다.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인천 시청에 다니시는 친정 외삼촌께 컴퓨터 유지 보수건이라도 맡게 해 달라고 부탁하러 가자고 며칠을 졸라서 제가 전화를 드려서 약속을 잡아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차, 2차, 3차까지 술자리를 가졌는데, 모두 못이기는 척 남편은 돈을 내지 않고, 외삼촌이 사주셨습니다. 2차에서부터 혼자 술이 취해서 화장실 갔다 와 앉으면서 “씨~발! 좇같이!” 라며 털썩 주저 앉자 삼촌이

  “야! 너 씨발 찾는거 보니까 많이 취했구나! 그만 마시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2차를 급하게 나왔는데, 한 잔 더 하자는 남편 성화에 삼촌은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호프집으로 들어 갔고, 얼른 맥주 한 잔씩 더하고 삼촌과 헤어져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갔었고, 그래서 대리 운전 기사를 불렀습니다. 출발하는데 남편이 대리운전기사한테 항상 그렇듯이

  “야! 이 씨발놈아! 왜! 내가 반말하는게 좇같지? 그지? 좇같아서 운전이 안 돼냐? 똑바로 해! 이 새끼야!”

저는 또 조마조마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리 운전기사는

  “왜 반말하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나 참! 저 운전 못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대리 부르십시오!”

라며 차 시동을 끄고 내려서 가벼렸습니다.

또 시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남편은

  “저런! 씨~발놈이! 야! 이 새끼야! 돈 벌기 싫다 이거지? 좇같은 새끼가 배가 불렀구만! 씨~발놈!”

이러더니 다른 대리 운전기사를 불렀습니다. 역시 그 기사분한테도 똑같이 욕하면서 막 대하였습니다. 참다 못한 대리운전 기사가

  “손님, 나 드럽고 치사해서 더 못하겠습니다. 알아서 가세요. 돈 안 줘도 되니까 나 그냥 가겠습니다.”

하고 집까지 약 500m 남겨 두고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가버렸습니다. 남편이 갖은 욕을 대리운전기사한테 퍼붓더니, 거기서 부터는 운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왜그러냐고 말리자,

  “넌 조용히 해! 이 씨발년아!”

라며 난폭하게 굉음을 내며 집까지 비틀 비틀 운전해서 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저는 작은 아이를 안고, 큰 애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서 아이방 침대에 두 아이를 끼고 누웠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두려워서 남편과 마주대하기가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늦게 들어온 남편은 저를 찾아다니더닌 아이방으로 와서는

  “야! 이 년아! 너 나와! 야!! 안들려? 이 씨발년이 어디서! 씨발년 너! 안 나와? 나오라구!”

이러면서 머리채를 잡아 끌었습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예전에 그랬듯이 또 아빠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이제 그만 자자구~우! 아빠도 그만 자라구! 엄마 때리지 말라구~우! 왜 욕하냐구!”

라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미안하다. 아빠가! 얼른자, 니 엄마땜에.. 그래! 얼른 자~!”

그렇게 아이를 자라고 하더니, 장난감 정리함을 받치는 노란 기둥인 몽둥이를 찾아서 들고 오더니, 제 머리를 꾹! 꾹! 찔러서 옆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야! 야! 야!!! 이리 나오라구 이 씨발년아! 너 안 나올래? 이런 좇같은 년이!”

그래도 제가 모른 척 하고 눈을 감고 있었더니 제 발 밑쪽으로 자리를 옮겨 발목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갖은 욕을 하며 저를 잡아 당기더니, 이제는 제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모른 척 하려고 해도 아이들 앞에서, 그것도 8살짜리 큰 아이가 불안해 하면서 물고 제 품에서 꼭 붙어 있는데, 그 상황에서 제 바지 지퍼를 내리고 벗기려는 남편이 짐승같이 보였습니다. 참다 못 해 저는

  “저리가!!! 이 미친 인간아!!!”

하며 발길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욕을 하며 웃더군요. 그리고 한 차레 더 몽둥이로 머리를 치더니, 포기하고 안 방 침대로 가서 코를 골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래도 계속 살아야 하나...? 정말 한 숨도 잠 못자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여보~!”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저를 찾았습니다. 늘 그랬지만, 어젯 밤에 포악을 떨던 짐승같은 그 사람이 지금 저를 부르는 저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러웠습니다. 목소리조차 듣기 싫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심상치 않다 생각했는지 무조건 미안하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어디까지 그 사람을 믿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 마음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자코 있으니까, 버럭 화를 내면서,

  “맘대로 해! 아~씨! 잘못했다는데! 내가 약속은 안 했었잖아! 약속한대잖아! 손가락 줘봐! 응? 줘 보라니깐! 약속한다니까! 자꾸 그러면 나, 오기가 생기는 거 알지? 잘못했다구! 나 한 번만 안아 달라니까!”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남편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련한 건지, 머리가 모자란 건지, 또 한 번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그래! 약속한대잖아. 한 번만 더 참자! 그래! 까짓거! 또 한 번 참아 보자!’

이것이 2005년 10월 8일 토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후로부터 이틀 뒤, 월요일에 일은 또 있었습니다. 큰 아이가 소풍 가는 날이라서 김밥을 아침부터 쌌고 조금 넉넉히 싸서 동네 엄마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늘 얻어먹기만 하는 저로서는 제가 뭔가를 만들어서 나눠먹고 대접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김밥 세 줄은 남편을 위해 남겨 놓았었습니다. 저녁 때 남편이 전화가 와서 퇴근이 늦는지, 저녁은 먹는지 물어 보았더니, 남편은

  “조금 늦을 것 같애. 저녁? 저녁은 안 먹었는데, 집에 가서 먹으면 너무 늦고, 그럼 살 찌잖아. 나, 살 빼야 되는데, 그래서 지금 빵 사서 먹구 있어. 밥 안 먹을거야, 신경쓰지마.” 했습니다.

월요일은 피아노 레슨도 늦게까지 있는 날이었고, 아침 일찍부터 김밥을 싼다고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저도 저녁하기가 꾀가 나서 9층 외숙모 댁에서 먹고 내려왔습니다. 남편을 주려고 남겨 놓았던 김밥 세 줄은 상하려고 해서 외숙모와 8층 채린이네로 반씩 나누어 주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내려오자마자 늦게 온다던 남편이 들어왔습니다. 출근할 때 돈좀 찾게 현금카드를 좀 달라고 했더니, 돈으로 찾아다 주겠다면서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었습니다. 제가 살빠지는 한약이 있다고 해서 반만 먹어보기로 했었습니다. 한 달치는 12만원인데 당장 제게 그 돈이 없었기에 선뜻 대답을 못 했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동네 언니가 반씩 먹자고 하길래 차마 자존심에 돈이 없다고는 못하고 그러자고, 그렇게 반씩 먹어보자고 했었습니다. 며 칠동안 남편 기분 좋은 날만 눈치보다가 10월 10일 월요일 아침에 얘기를 꺼낸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대답은

  “너는! 하여튼! 살 빠지는 한약이 세상에 어딨냐? 그리고 너는 운동을 하지, 약을 먹냐? 답답하다, 답답해! 알았어! 있다가, 6만원? 돈으로 갖다 줄게!”

라며 출근을 했었습니다. 퇴근하면서 쇼파에 앉아 있는 제게 지갑에서 6만원을 꺼내 세어서 큰 아이도 보고 있는데 돈을 휙~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야! 그리구 왜 카드로 안 했냐?” 해서 저는

  “한의사가 친구 남편이라는데, 어떻게 카드로 해? 그리고 한의원이 멀어서 가기도 곤란하 고, 그래서 그랬어!”

라고 저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고, 남편은

  “야! 이~씨! 이래서 봐 주고 저래서 안 되고,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못 사냐? 카드가 안 되는게 어딨어, 멍청하긴! 착한 척 그렇게 물러 터지면 누가 너 상주냐? 어유!”

그래도 저는 6만원 찾아다 준 게 고마웠습니다. 윗층 엄마랑 나눠 먹기로 한 건데, 돈을 못 주고 며칠이 지났으니, 셈이 흐린 사람이라 생각할까봐 속상했었으니까요. 그렇게 한바탕 잔소를 늘어놓더니

  “밥 있냐? 나 완전히 빈 속인데.... 참! 아침에 김밥 싼 거 있지?” 했습니다.

또다시 당황스럽고 황당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안 먹는다며?...”

  “그래서!!! 또 남들 다~ 퍼줬냐? 이런! ~씨!”

그러더니 밥솥을 열었다 부서져라 쾅! 닫았습니다.

  “씨~발! 뭐든지 척! 척! 버리기 좋아하는 년이 내가 와서 먹는지 물어본 다음에 버리면 안 되냐? 씨~발! 니~미!”

이러면서 왔다갔다 하더니 라면 물을 올려 놨습니다. 저는

  “오빠가 안 먹는다면서... 그래서 김밥 있던거...”

여기까지 얘기하는데, 남편은 말을 잘라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워! 떠들지마! 뭐 이~씨! 넌 내가 돈 벌어다 주는 기곈줄 알지? 씨~발! 야!!! 라면 건드리지마! 내가 끓여 먹을거야! 야!!! 건드리지 말라고!!! 너 그거 건드리면 다 쏟아버릴 테니 그런 줄 아 아! 알았어? 야!!! 너 그거 건드리지 말고 꺼져!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븅신아!”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편이 술 먹고 취중에는 제게 욕을 많이 했었지만, 맨 정신에 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하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다음 날 남편은 무언의 화를 내며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쓴 채, 출근을 하였습니다. 퇴근할 시간쯤 되어서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 하고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술을 많이 먹고 올까봐 두려웠습니다. 10월 11일은 제 외할머니 제삿날이었는데, 외숙모가 제사 지내러 가는데, A(;A는 9층에 사는 막내 외삼촌댁 늦동이 딸로 제 큰아이와 같은 반인 1학년입니다.)좀 저희집에서 재우라고 부탁하시고 가셨습니다. 아이들을 저녁을 먹이고 공부를 가르치고 거실에서 다같이 자겠다고 해서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재웠습니다. 시간이 9시, 10시, 11시가 되었습니다. 평소 남편의 술버릇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6시 30분부터 술 마신다고 했으니 지금쯤 많이 취했을텐데...’ 하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수화기에서 들리는 남편 목소리가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야! 나는 지금 친구가 필요하고, 술도 먹고 싶고, 야!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아냐? 어쩔 수 없으니까 먹는 거지!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술을 먹어도 정신을 차릴 거고, 나는 내일 10시까지 과천에 갈거고, 어쨌든! 어쨌든! 나, 너 재수없어! 끊어!”

횡설수설 두서없이 떠들더니 그렇게 끊어버렸습니다. 그 시간에 그 정도로 취했다면 밤새도록 전화하고 술마시는 것이 뻔했습니다.

  전화 받을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지쳐갔습니다. 아이들 셋이 모두 잠들어 있는 걸 보니 아침까지 재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저도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파트 문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분명히 전화를 왜 안 받았냐고 추궁할텐데 머릿 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문을 열자 마자 일어나 앉아있는 제게,

  “야! 너 왜 전화 안 받어! 어? 이런 병신 같은 년! 야!!! 너 왜 전화 안 받냐고!!! 이 무책임한 년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른

  “미안해... 잘못했어... 깜빡 잠들어서 전화 오는 거 못 들었어. 미안해...”라고 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습니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에 동네사람들 귀가 무서웠습니다. 남편을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달래서 재우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야!!! 이 씨발년아!!! 내 성질 알아! 몰라! 너가 전화 안 받으면 너랑 나랑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전화밖에 없는데, 왜 전화를 안 받냐고? 내가 서울 여의도에서 별 개지랄을 다하면서 온 거 너 알아!!! 몰라!!! 이 병신같은 년아! 이런~! 돌대가리 같은 년! 아~유~! 이런 씨발년! 야!!! 왜 전화 안 받았냐고! 이 무책임한 년아!!!”

세 살짜리 작은 애가 남편 소리에 놀라 깨서 울어서 토닥거리느라 쪼그리고 누웠더니 발로 머리를 짓이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야! 이 년아! 야!!! 이 씨발년아!!! 얘기 해 보라고!!!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너 그렇게 무책임 해도 돼냐? 병신같은 년아!!!”

듣다 듣다 저도 대답을 했습니다.

  “오빠, 자느라고 못 받았다고! 오빠 술 마시고 못 오는 줄 알았어. 미안해, 애들이랑 깜박 잠들었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시간이잖아, 잘 시간에 자야지, 전화만 어떻게 기다리고 있어!”

라고 대답하는 순간 벌떡 일어나서 앉아 있는 나를 향해서 발을 번쩍 들어서 걷어차려고 했습니다. 그걸 보던 큰 아이는 소리를 자지러지게 지르며

  “아빠!!! 이러지 말라고~오!!! 엄마 왜 때리냐고~오!!! 왜 욕해!!! 가서 자라구!!! 엄마가 자느라고 전화 못 받았대잖아!!! 아빠!!! 하지 말라구~우!!!”

아들이 애원하듯 거의 절규에 가깝게 소리를 지르자, 주춤해서 말했습니다.

  “미안해. 알았어, 얼른 자! 니 엄마가 병신 같은 년이라서 그래! 니 엄마가 돌대가리라서 아빠가 화가 나서 그래. 얼른 자! 미안해...”

라고 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는 것 같았습니다. 곧바로 아~악! 아~악! 하는 커다란 괴성을 한 참 지르더니

  “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데, 너는 집에서 멍청~하게 있다가 살 빠지는 보약이나 사 쳐먹냐? 이 병신 같은 년아!!! 씨발년아!!! 아~악! 아~~악!!!”

잠시 후, 다시 거실로 나와서 쇼파에 앉더니,

  “야!!! 너! 이 씨발년! 너 나가!!! 난 너같이 무책임한 년은 부양할 의무가 아무것도 없어!!! 나가라고! 안 들려?”

나는 “알았어, 나갈게, 내일 아침에 다 정리하자.” 했더니,

  “야!! 꼴보기 싫으니까 지금 당장 나가라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이 씨발년아!!! 병신 같은 년!!! 넌 그래서 돌대가리야!!! 나! 니네 식구들한테 스트레스 받을만큼 충분히 받았어! 나는 너 만나고 행복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이 씨발년아!!! 야! 너 당장 나가! 9층으로 가라고!!! 안 나가?!!!”

저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잠옷 남방하나 걸친 채로 내쫓길 수는 없었습니다. 놀래서 울고 있는 아이들만 놔두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박차고 나와서 그 악몽같은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겁 먹은 채 소리죽여 울고 있는 첫째, 둘째, A를 놓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 나가고 멍하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저를 보던 남편은

  “이런 돌대가리 같은 년이 있어!!! 야! 나가라고 씨발년아!!”

하며 식탁의자를 번쩍 들어서 던지려고 했습니다.  또 한번 영훈이가 발작을 하듯이 스프링처럼 튀겨 나가더니 남편을 붙들고 하지 말라고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그제서야 의자를 마지 못해 내려 놓았습니다. 혹시나 의자를 아이들이 다칠까, 끌어 안고 웅크린 제 모습이 처량하고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9년을 살아온 제 인생이 한심했습니다. 그렇게 바닥에 뭉개진 제 인생을 생각하며 멍하니 있는 제 옆으로 와서 앉더니 남편은 또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 병신같은 년아! 야! 들으라고 이 썅년아!!! 너는 돌대가리라서 한 번 얘기하면 못 알아들어

  서 다시한번 얘기할테니 들어!” 이러길래

  “오빠, 알았어, 들을텐데, 내일 아침에 술 깨고 얘기하자. 지금 시간이 몇시야, 다섯시가 넘었잖아,

   아이들도 재워야지. 오빠, 제발 부탁이야. 내일 얘기하자, 응?”

저는 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씨~발년이! 시간이 그렇게 중요하냐? 지금이 몇 신게 뭐가 중요하냐고!! 넌 그래서 돌대가리

   야! 이 병신같은 년아! 내가 다시한번 얘기할테니 들어! 첫째!...”

정신이 멍해지고 사는게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기도를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가고 있을 때 남편의 연설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첫째! 남편이, 집안의 가장이 집에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밥을 먹고 들어오든 먹고 들어오지 않든, 언제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밥 한 공기와 찌개는 꼭 준비해 놓을것!! 둘 째!!! 뭐든지 남편과 의논하고, 남편 허락을 받고 모든 걸 결정할 것! 셋 째!!! 전화를 하면 언제고 꼭 받을 것!! 알았냐? 씨발년아!”

이렇게 해서 수요일 새벽에 난장판은 끝이 났습니다.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의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섯 시가 넘도록 불안에 떨면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없는 죄책감에 가슴이 저려 왔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가는 아이들마저도 저와 같이 망가져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뒤늦게 잠이 든 아이들은 8시가 다 되어서 억지로 깨워서 학교를 보냈고, 남편과 한 집안에 있다는 것 조차도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서, 마침 외숙모께 전화가 왔길래 9층에 올라갔습니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8번이 왔고, 9번째에는 하는 수 없이 받았습니다. 혹시나 외숙모가 눈치 채실까 내색 안하려고 애쓰며 전화를 받았더니,

  “어디야? 여보~ 나, 배고픈데, 언제와?”

마치 수 십마리 뱀이 내 몸을 기어가듯 징그럽고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기가 막혔습니다.
  같이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 속을 스쳐갔고, 더 이상 남편의 얼굴도 보기 싫었고, 목소리조차 듣기가 싫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서 남편이 나가길 기다리는데, 밥을 달라고 했고, 있을 것 다 있으니까 차려 먹으라고 했더니, 남편 밥도 안 주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밥상은 차려주기 싫었습니다. 남편도 저를 화냈다 달랬다 하다가 출근을 한다고 나갔습니다.

  그 길로 둘 째를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여태껏 제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제 집이 그렇게 지겹고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9년을 같이 살았던 남편에게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남편의 폭언과 폭행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