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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78화

피바다 |2005.11.13 19:44
조회 340 |추천 0

    선혈이 흐르는 여자의 입가에 구슬픈 미소가 실리었다. 그녀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불사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마지막까지 제 4황자의 모습을 담으려 모든 것을 지운 채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았다. 생을 매듭지으며 반드시 전하고자하는 한 마디에 죽음마저 아주 잠시 뒤로 한 걸음 물러나주는 듯 했다.

  " 전하....왜 그렇게 슬퍼보이나요? 슬퍼...마세요...울지..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거의 숨소리마냥 새어나오는 목소리였지만 후강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분명히 알아 들었다. 그 말은 공간과 시간은 압도하며 공기를 타고 그의 귀로 생생하게 흘러들어왔다.

  " 전하를 만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행복한지....."

  여자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서리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눈부시게 웃었다.

  " 사랑...해요...초율..전...하.."

  맺혀 있던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서 볼을 따라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육체를 영원히 떠났다.

  후강은 그녀의 팔과 다리에서 생의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축 늘어지는 것을 본 동시에 목석처럼 굳어있던 초율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후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미 후강의 옆자리를 떠나 눈깜짝할 속도로  몸을 날려 여자의 늘어진 몸을 안고 있는 초율이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삶과 이별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여전히 미소가 담긴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여자의 몸을 지배한 죽음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복주는 그 때까지도 사태파악이 안되는 듯 보였다. 약간 얼떨떨하고 김 빠진 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안고있는 초율의 뒷모습을 성의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강은 그런 복주의 무덤덤한 얼굴에 머리칼이 쭈뼛섰다. 불 보듯 뻔한 예감이 다시 한 번 그를 스쳤기때문이다.

  " 으아아아아악!!"

  여자의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확인한 초율이 짐승과도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굉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면서 성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도 높은 지진이 닥쳐온 것처럼 벽과 바닥이 요동치면서 후강은 창 밖으로 먼지 바람이 이는 것을 보았다. 흔들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후강은 이제 몸을 가둘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단단하게 지어진 벽면이 갈라터지고 천장에 걸린 전등의 전구가 박살나 그 파편이 떨어져내렸다.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고 서 있는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위치를 잊고 바닥으로 꼬꾸라지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후강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싸안으며 몸을 바닥에 바짝 붙였다. 복주 역시 넘어지며 커튼을 쥐어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고 후강이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살핀 초율만이 여자를 안은채 홀로 공간을 차지한 섬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노에 쌓인 그의 기는 모든 것을 파괴할 작정인 듯 사정없이 치솟았다.

   " 쩌저적....채앵!"

  방의 유리창이 압력을 못 이기고 산산이 부서지며 그 잔해가 방안으로 쏟아져들왔다. 그 파편을 피하지 못한 복주는 무참히 파편 세례를 등에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 으아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며 복주는 바닥에 쓰려져 부르르 떨었다. 그의 등은 파편이 후벼판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비명과 벽이 터지는 소리와 사물이 구르고 쓰러지며 내는 불협화음으로 난장판이 된 방은 이제 큰 가구마저 엎어지며 위험이 도처에 깔렸다. 후강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때, 모든 상황을 압도하는 일갈성(一喝聲)이 방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 당장 멈추라!"

  기적처럼 정말 모든 것이 멈추었다. 갑작스레 끊긴 기의 파장에 미처 준비가 안되었던 물건들만이 몇 번 더 구르다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졌다. 후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정지화면이 되어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천제 비류천이 때를 맞추어 후강의 뒤에 나타나 주어 있었다.

  후강은 옷매무새를 대강 정리하고 천제에게 예를 올린 뒤 초율의 동태를 살폈다. 외부의 진동은 멈추었지만 대신 초율의 온 몸이 광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여차하면 다시 튀어나올 위험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의 가면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붉은 광채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후강은 붉은 안광에 질려버렸다.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이계의 짐승과도 같은 살기만이 느껴지는 그런 붉은 빛이었다.

  하지만 그가 더 놀란 것은 초율이 어느 새 여인이 아닌 복주의 목을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닥을 기던 복주가 초율의 오른손에 목을 쥐인 채 옷가지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유리조각이 박힌 등의 고통과 초율이 가하는 손의 압박으로 그는 거품을 몰고 눈이 뒤집혀 몸을 비틀어댔다.

  천제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복주의 방 양 끝에 대치한 그들의 사이에는 움직이지 않는 잡기들의 언덕과 숨막히는 긴장감만이 놓여있었다. 복주는 본능적으로 천제에게 팔을 뻗으며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듯 몸을 떨었다.

  " 제 4황자! 당장 그 손을 놓아라. 내가 명하노라!"

  아슬아슬한 긴장을 깨고 천제가 목소리에 단호함을 싣고 명했다.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걸린 듯 엄숙하고 강한 힘이 실려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도발이 된 듯 했다.

  " 뚜둑...."  

  기분 나쁜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초율은  목이 돌아간 복주를 쓰레기 버리듯 바닥 위로 내동댕이쳤다.

  " 허헉..."

  후강은 신음소리를 냈다. 

  초율은 후강과 천제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여자의 시신을 소중하게 안아들었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후강은 초율이 뛰어내린 곳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찔한 높이었다. 하지만 초율은 붉은 망토를 독수리의 날개처럼 펼치며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았다.

  천제도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의 시체를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즉시 군사를 풀었다. 죽여서라도 끌고오라는 명령과 함께 한 남자를 잡기에 심하다 싶을 정도의 엄청난 수의 군사를 풀었다. 천제를 호위하는 무사들까지 초율을 잡기위해 나섰다. 하지만 3일 뒤에 초율은 나타났다.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은 듯 늘 발산하던 살기마저 흩어버린 채 걸어들어와 천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인처럼 그는 측은해보였다. 영혼을 잃은 껍데기같은 모습이었다.

 

  " 그리하여...."

  후강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 제 4황자는 지하감옥에 갇히게 된 겁니다. 300년동안 암흑만이 전부인 지하감옥에 갇혀 매일 죽었고 해가 뜨는 동시에 다시 하루를 살기 위해 깨어났지요. 그것이 천제전하의 결정이셨습니다."

  관지는 놀라운 가족사에 몸을 떨었다. 제 4황자를 처음 만난 날이 그가 바로 300년간의 중벌에서 해방된 날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만난 적도 없던 제 4황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바라보는 것마저 두렵고 불길한 느낌에 떨었는지, 절로 방어본능이 생겨났는지 납득이 갔다. 자기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힌 패륜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 대죄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그런 죄인을 어째서 아버님은 겨우 300년이라는 대가로 그치게 하셨을까요? 혈육을 죽인자입니다!"

  관지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후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제공이 설명했다.

  " 그는 마계대전시 천계를 구한 영웅이야. 아들이기 전에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지. 전하께서 목숨을 뺏을 수는 없는것일세."

  하지만 제공이 설명한 부분은 그가 알고 있고 짐작하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였다. 제공은 머릿 속으로 천제가 초율을 죽일 수 없는 이유를 수 십가지도 더 계산하고 있었다. 천제는 절대 제 4황자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후강은 이제야 긴 이야기를 꺼내면서 하고자 한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 태자 전하...."

  하지만, 후강은 재차 용기를 가져야만 했다. 어려운 말이었다.

  " 그러하니....단념하셔야 합니다. 어제의 그 여인,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그 여인이 제 4황자의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부디 접으소서."

  후강은 고개를 조아렸다.

  " 형...님!"

  후강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관지는 정색을 했다. 하지만 후강은 진심으로 다시 조언하였다.

  " 제 4황자는 다시는 자신의 여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그가 했던 짓보다 더한 일을 해서라도 자기의 것을 지켜낼 것입니다. 부디..옥체를 귀히 여기소서."

  후강은 끝내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관지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은 제공조차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초율이 사랑했던 여자, " 가교"의 죽음이지요. 초율이 왜 300년간 갇혀있었는지 밝혀졌네요. 그리고 그가 어떤 각오로 살아남았는지. 일요일 즐거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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