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51 글쓴이: 적 그리스도
조회:149 날짜:2001/08/25 01:34
.. 예수에 대해서 복음서들의 기자들은 종종 구약을 인용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용들은 대부분 잘못인용하거나, 고의적으로 구약을 왜곡시킨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신약의 기자들은 유대교의 정경인 구약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는가?
1) 처녀탄생설의 잘못된 인용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장23절]
이 구절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 구절을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70인역에는 파르테노스(parthenos),즉 '처녀'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인 Tanakh 에 는 '알마'(almah),즉 '젊은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 어로 젊은 여인은 ("ha'almah"), 처녀는 ("ha'bethulah")이다. [오강남 / 예수는 없다 / 현암사]
개역한글판이나 표준새번역의 난외주,또는 주석성경에 보면 '젊은 여자' 또는 '젊은 여인'이라고 나와있을 것이다.
'젊은 여인'과 '처녀'와의 차이는 엄연한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의 그 구절은 앞으로올 메시아에 대한 예언도 아니었다.
예언자가 아하즈 왕에게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유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면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한 것이다.
즉,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지금은 동정인 한 여인이 곧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정치적인 위험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구절일 뿐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 되었던것이다.
지금은 주석에라도 이렇게 달아 놓았지만 초대 교부들은 이 실수를 알면서도 완강히 고집을 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의 내용을 위조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으며,그들 나름대로의 '아퀼라'역 이라는것도 내놓기도 했다.(15장 참조)
라틴역 'vulgata'를 내놓은 성 '제롬'은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Almah가 처녀가 아니고 젊은 여인이라고 항의하는 것에 대해 알고는 있다. 사실 처녀는 Bethulah라 불리지만, 젊은 여인은 almah가 아니고 naarah라 불린다" (Jerome, Adv. Javianum I, 32; N&PNF, vi, 370.)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 한다고 썼다면 그당시 누가 믿었겠는가?..... 수잔나와같이 간통한 여인으로 몰릴 것이 아닌가?....." (Jerome, The Perpetual Virginity of Blessed Mary, N&PNF, vi, 336.)
카톨릭 백과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대 신학은 이사야서 7:14 절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예언 이라는 것을 인정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 마태가 '보라 처녀가 잉태 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 한 것은 이사야 구절을 잘못 이해 한 것 으로 판정 된다.(Catholic Encyclopedia. xv, 451.)
또한 이 동정녀 출산 문제는 단순히 마태복음기자의 희랍어 번역판에서 오는 번역상의 단순한 착각이라고만 볼수가 없다.
9장의 예수신화설에서 언급하겠지만, 신약성서가 쓰여졌던 당시는 조로아스터와 미트라등의 태양신 구세주전설이 유대인에게 유입되면서부터 동정녀 탄생이 구세주전설의 빼놓을수 없는 모티브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결국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초대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를 원했고, 이교도적인 요소가 하나둘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2) 유아학살과 예수의 어린시절 끼워맞추기
예수의 탄생시 헤롯 대왕에 의해서 베들레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이야기는 허구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그러한 일은 유대인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주변국의 역사에서 찾아볼수 없다.
또한 아이들이 죽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베들레헴이라는 그 작은 마을에 별이 그 집 위에 머물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경배하고 갔다는 그 큰 사건을 모를 집이 없었을 것이다.
헤롯은 사람을 보내 물어보기만 하면 당장 알 일을 가지고, 2살까지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을 해야 했겠는가?
더욱이 헤롯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으며, 그의 지위가 위태로워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입장도 되지 못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렇게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마태복음 2장 18절]
여기서 우선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레미야가 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8킬로 떨어진 마을이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8킬로 떨어진 마을로 두 마을은 딴 마을이다.
그 뿐 아니라 예레미야에서는 라헬의 통곡이 그 어린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 큰 자식들이 적군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터이니 '최후의 소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15~17절]
즉, 두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마태 기자가 왜 베들레헴에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해야만 햇을까?
성공회의 스퐁 주교(John Shelby Spong)은 최근의 그의 저서 "Liberating the Gosples"에서 신약속에서의 예수의 생애는 미드라쉬적(midrash) 기술방법으로 서술되어있다고 밝힌바 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이집트의 파라오에 의해서 유대인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모방했던 것이고, 예수를 모세처럼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켜줄 구세주, 즉 예수를 제2의 모세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히브리인 가정의 어린아이들이 파라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출1:15]를 원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이집트 십장을 죽이고 파라오를 피해 피신하는 것과 같이[출2:12] 예수도 헤롯 왕을 피해 피신을 가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런 사건들이 있었던가 아닌가 하는 것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다.
3) 나자렛예수 끼워맞추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나사렛 예수'로 보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본래 나사렛 사람들로서 호적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이 왔다고 했으며, 마태복음에는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예수의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던중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꿈속에서 받게 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3절]고 언급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하는 말씀이 히브리어로 된 구약의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현대 신학계에선 두가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로 마태복음 기자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의 이사야 11장 1절을 잘못 인용했다는 해석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 11장 1절]
위의 이사야의 구절 중 '가지'라는 말의 헬라어가 '네제르'(nezer)인데 마태복음 기자는 그것을 '나사렛 사람'(Nazarene)으로 잘못 읽었던 것이다. [오강남 / 예수는 없다 / 현암사]
두 번째 해석 으로는, 삼손을 나지르(나자렛)사람이라 칭하리라 하는 사사기 I3장 5~7절에 서 가져온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바로 미드라쉬적 기술 방법 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마태복음의 기자가 예수가 참 주님 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한 삼손의 속성을 예수에게 적용시켰다는 견해이다.
4) 예수의 이집트거주 끼워맞추기
예수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는 것을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도 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2장 15절]
위구절은 호세아 11장 1절의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호세아 11장 1절]
그러나 호세아서 11장의 전반적인 글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을 말한 것이다.
어떻게 이 구절이 예수의 이집트 체류의 사실에 적용이 될 수 있을까?
표면상으로 볼 때 두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예수와 이스라엘민족이 모두 이집트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만 공통점을 갖는다.
"내 아들"이라는 호칭역시 이스라엘민족을 가르키는 것이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애굽기 4장 22~23절]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부터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5) 가롯유다의 배반 끼워맞추기
잘못된 구약의 인용은 가롯유다가 예수를 은화30냥에 팔아서 밭을 샀다는 일화까지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27장 9~10절]
그러나 예레미아서, 또 예레미아 애가 및 그의 제자 바룩의 모든 문서에서 그런 예언은 찾아볼수가 없다.
이런 것은 또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장 37~38절]
이런 예언역시 구약 어디에도 없다.
6) 예수의 부활 끼워맞추기
예수의 행적을 구약을 고의적으로 왜곡시켜 인용한 예는 얼마든지 또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신자의 부활'의 논란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복음)가 어떻게 구약 성경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경대로 (kata. ta.j grafa,j)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kata. ta.j grafa,j)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 전서 15장 3~5절]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모두 구약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성경대로"(kata. ta.j grafa,j)라는 문구를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매우 강조한 흔적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경대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정적이지는 않다.
즉,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구약의 어느 부분에 이 사건들이 예언되고 있는지 명시하고 있지 않아 여러 추측의 설들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위의 고린도 전서 구절에는,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구약 성경의 해석을 통해 설명하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구약속에서 '부활', 특히 '메시아의 부활'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고린도 전서 15장 4절의 확언(確言)과는 달리 신약에서 부활을 구약의 구체적인 구절을 들어 설명하는 시도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예외적인 것이 누가이다.
누가는 예수의 케리그마에 포함된 사건들과 구약의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예언과 성취의 모델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구약은 성경에서 제외되어야한다?"라는 글에서 구약을 보는 신학적 모델에 대해 기록되어 있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난 부활의 예수는 '예수의 고난과 영광'이 필연(必然)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누가복음 24장 26절]
원문에 의하면,
"ouvci. tau/ta e;dei paqei/n to.n Cristo.n kai. eivselqei/n eivj th.n do,xan auvtou"
여기서 누가복음의 기자는 필연성을 가리키는 동사 dei/를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했으며,그 이유는 이어지는 27절에 쓰여져 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27절]
즉, 예수의 부활 사건은 "성경 전체에"(evn pa,saij tai/j grafai/j) 예시(豫示)되어 있고 그것을 예수가 두 제자에게 풀어서 가르쳐 깨우쳐 주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도 구약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상술하지는 않고 "성경 전체"가 예수의 케리그마의 사건과 부합하고 있다고 일반적 진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과 성취의 모티브에 대한 관점은 실제로 누가복음의 말미를 장식하면서 누가의 예수 이야기의 목적과 결론을 구성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누가복음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말에 따르면 예수사건은 이미 다 구약에 예언되어져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
그러한 예언을 담고 있는 곳으로서 '토라'와 (모세의 율법), '네비임' (예언자의 글), '케투빔' (시편이 속한 성문서) 모두에 예수사건이 예언되어있다고 확언하고 있다.
또, 누가복음과 함께 사도행전에서는 앉은뱅이를 고친 후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대중 설교에서,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중략)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사도행전 3장 18~24절]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18절에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을 여호와가 '미리 선포'(prokath,ggeilen)하였고 그것을 이제 성취시키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의 고난이 성경의 어디에 예언되었는가는 그의 설교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도행전 3장 22~23절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서 신명기 18장 15절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거론하면서 그 예언된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케리그마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구체적 예언의 문구나 성경의 부분에 대한 직접적 지적은 없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시편 16편을 인용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해석을 배제하고 시편 16편 자체로만 볼 때는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낼수가 없다.
또한 이 시편이 당대에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읽혔다는 증거 또한 없다.
시편 16편은 본래 여호와의 보호를 확신하는 '신뢰의 시'로서, 시인이 자기 수명(壽命)에 합당치 않은 횡사(橫死)에서 건짐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인것이다.
베드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리라고 확신하는 내용이 담긴 부분을 시편 16장 8~11절을 인용한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사도행전 2장 25절~30절]
아래는 인용한 시편16장의 전문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장 전문]
베드로가 이 시편의 구절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펴는 논리는 이렇다.
1) 위 시편의 기자인 다윗은 분명히 죽었고 그 증거로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행 2:29).
2) 따라서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시신이 썩지 않으리라'는 언급은 다윗 자신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다.
3)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기초한 시편 132편 11절에서 여호와가 다윗에게 맹세하시기를 다윗의 자손을 영원한 왕위에 앉히겠다고 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자신의 후손으로 올 영원한 왕에 대해 그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행 2:30).
4) 다윗의 후손인 예수를 여호와가 다시 살렸다.
따라서 이 시편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행 2:31-32).
사도행전 13장 33~39절에서의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베푼 권면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시편 16편 10절이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그는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사야 55장 3절 후반절을 통해 상기시키고 [사도행전 13장34절] 그것을 시편 16편 10절의 '썩음을 당치 않는 은사'에 연결시키는 헤괴망칙한 억지 논리를 펴나간다.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사도행전 13장 35-37절].
초기 케리그마의 핵심을 이루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성취적 이해에는 시편 16편의 억지 해석이 주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신약 문헌 내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제시되는 구약의 다른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복음의 핵을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강하게 확언하는 것에 비하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구약 예언의 실질적 예증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부활에 대한 구약 예언으로 들고 있는 유일한 예인 시편 16편조차도 현대인의 객관주의적 시각으로 시편만의 뜻으로 본다면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한마디로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논리는 오직 부활의 확실성을 당시의 성경, 즉 구약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취한 해석상의 고육지책(苦肉之策)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약이 등장한 것은 예수의 시대가 훨씬 지난후 1세기가 지나서야 구두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예수의 행적이 기록되어지기 시작한 연유에서다.
7) 어째서 구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했는가?
오늘날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존시에 생겨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모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서는 유대의 폭동 66년에서 77년 사이의 폭동과 그리고 132년에서 135년사이의 폭동이 일어난 중간 기간에 기원되었다.
복음서들 중 최초의 것은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이라고 생각되고 후대의 그럴 듯한 추가물인 부활에 관한 기사를 제외하면 66년~77년의 반란 기간중의 작성되었다.
아무리 빨리 쓰여 졌어도 AD 90년 보다 빠르지는 못 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다시말하면 신약이 등장하지 못한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에겐 구약만이 성경으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를 목격하지 못한 초대교회의 신도들에게 사도들은 예수의 존재를 구약을 통해서 증거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주는 시편 16편의 해석은 초대교회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증명의 논리로서는 기능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성경에 무지했던 당시의 예수 추종자들에겐 그럴듯한 해석으로 이해되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당신도 사이비종교에 심취해 보라. 성경을 이상하게 연결시켜서 말도 않되는 종말론을 주장해도 하번 중독되면 교주의 말이 전부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을 독단적이고 억지에 가깝게 끼워맞춘것일까?
해답이 바로 사해문서에 있다.
예수를 신화파로 바라보는 앞장에서 밣혀 두었듯이 사해문서는 영지주의에 가까웠던 에세네파의 기록으로 추측되며, 놀라운사실은 사해문서에는 예수보다 150년가량 앞서서 예수와 유사한 행적을 보이는 메시아가 등장한다.
정통유대주의 하고는 거리가 먼, 중근동의 메시아신앙과 영지주의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던 에세네파의 산물인 사해문서에서는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성서의 사본들은 물론, 구약의 주석서까지 다양하게 발견 되었다.
그중 구약의 주석서는 쿰란의 에세네파의 독단적인 해석방법과,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를 구약속의 구절들과 연결시키려고 애를쓴 흔적이 있으며, 위에서 지적한 사도들의 잘못된 구약 인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종말론적으로 구약을 해석한다는 점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쿰란의 사해문서 중에는 '페샤림'(myrvp)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18개의 문헌이 있다.
이 '페샤림'은 구약 성서의 개별서들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페샤림'은 구약의 구절들을 쿰란 공동체와 그들의 메시아에 대해서 구약을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구약 읽기와 해석 방식을 '페쉐르'(rvp)라 한다.
쿰란의 '페쉐르'는 일정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페샤림의 기본 유형은 '레마'(lemma)를 구성하는 성경 구절이 적힌 부분과 그것에 이어지는 인용 구절 해석 부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불규칙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해석 부분은 rbdh rvp 또는 wrvp로 시작된다.
쿰란의 독특한 성경 해독 방법의 이름이 된 이 rvp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히브리 단어로서의 rvp는 구약에서 오직 한번 전도서 8장 1절에서만 등장한다.
rb'D' rv,Pe ymiW ~k'x'h,K. ymi (지혜자와 같은 이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전 8:1a).
쿰란의 사해문서에서는 주로 숨겨진 성경 구절의 뜻을 해석하는 작업에 이 단어가 사용되어 학자들의 다양한 번역을 낳았지만, 전도서의 구절에 기초해 '해석'(解釋)이란 말로 옮기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도입부 다음에는 레마의 성경 구절에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쿰란 공동체와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시키는 해설의 작업이 뒤따른다.
'레마'와 해석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방식은 다양하다.
호르간(Horgan)은 네가지로 분류된 페쉐르 해석의 방식을 발견했다.
① 레마의 구절에 있는 행위, 생각, 단어들과 유사한 현재의 상황을 찾아 맞추어 설명한다
② 레마의 기술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어근, 개념 등의 연상(聯想) 작업을 통해 현실 상황에의 적용을 유도한다
③ 레마에 있는 인물이나 사건과 은유적인 동일시(同一視)를 유도하기도 한다
④ 레마와 그 해석이 드러나는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억지로 연결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이와 같이 구약속의 예언이 자신들의 에세네파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믿어 공동체의 관점으로 구약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페쉐르의 형태를 롱게넥커(Richard N. Longernecker)는 일상적인 표현을 빌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This is that) 방식(方式)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또, 쿰란의 에세네종파는 그들의 교리를 합당화 시키기 위해서 구약속의 문장이나 단어를 변경시켜 인용하기도 했다.
티모씨 림(Timothy H. Lim)은 하박국 주석에서 원문을 변경시키는 경우를 두 차례 찾아냈다.
사해문서의 하박국 주석 12장 1~10절에 보면, 하박국 2장 17절이 인용되고 '사악한 제사장'에 대한 페쉐르가 주어진다.
여기서 레마에 인용된 본문과(1a) 해석에서 다시 인용하는 본문이(6b-7a) 다르게 나타난다.
hyrq #ra smxw ~mda ymdm (1QpHab 12.1a)
#ra smxw hyrq ymdm (1QpHab 12.6b-7a)
해석의 재인용에서는 hyrp와 ymdm 사이의 단어들을 생략함으로써 원문의 "사람들의 피 때문에"를 "도성(都城)의 피 때문에"로 읽어 그 내용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악한 제사장'의 사건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석가가 하박국 1장 13절과 '압살롬의 집'의 옳지 못한 행위를 연결시키는 1QpHab 5.8-12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본문 변경이 발견된다.
하박국 원문에서 두 미완료시제 동사 jybt와 vyrxt의 주어는 여호와이고 두 동사 모두 2인칭 단수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주석의 저자는 jybt를 wiiIjybt로 변경하여(5.8) 여호와 대신 '압살롬 집'이 문장의 주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의(義)의 선생'이 핍박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압살롬의 집'이 된다.
이러한 억지에 가까운 구약의 인용은 쿰란의 에세네파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구약을 바라본다는, 자신들만의 공동체 중심의 '페쉐르'로 읽어야만 한다는 신학적 부담까지 지우게 한 것 같다.
그리고, 페샤림의 저자들에게 암시되어 있는 논리는 마태복음에게서 읽혀지는 논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역시 상당히 영지주의적이었다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배척받아 사라졌지만, 정작 기독교의 원류는 영지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스텐달은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 방법을 "페쉐르 유형"(pesher type)으로 정의했고 롱게넥커는 "페쉐르 처리법"(pesher treatments)이라 명명(命名)했다.
물론 신약과 사해문서의 페샤림은 형식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신약은 내러티브(narrative)나 서신의 형태로 전개되고 이야기 진행이나 주장 서술의 중간 중간에 구약의 인용이 삽입되어 사건과 인물과 개념의 예언 성취를 증명한다.
반면에 사해문서의 페샤림은 주석의 형태를 지니며 성경구절을 읽는데 있어 쿰란 공동체의 인물과 사건이 해석의 열쇠로 기능한다.
하지만 구약을 예언으로 보고 그 예언이 자신의 공동체 속에 성취되었다고 보는 해석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도, 직업도 모두 버리고 동굴과 지하속에서 집단생활을 했던 초대교회들은 쿰란에서 금욕적인 집단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와 흡사한면도 많다.
더욱이 에세네파의 메세아는 예수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예수의 행적과 유사하다.
오늘날에도 영지주의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중근동에서 일어난 종교적 현상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비슷한 종교현상은 타종교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속의 구절들을 자신들의 교리대로 멋대로 분석하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띄는 것이 일반적인 영향이었는데, 신약속에서의 잘못된 구약인용, 즉 예수의 행적에 억지로 구약끼워 맞추기는 영지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진다.
기독교의 원류가 영지주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2장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이런식의 구약의 억지적인 끼워맞추기는 필자도 할 수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명기 21장 23절]
이것은 사형에 관련된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을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구약의 기자가 예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구약을 기록했음은 위의 구절로써도 알수가 있지 않은가?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3-21 07:26:18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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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하기를 제발 네 몸과 같이 하라. 니네 야훼의 말이다. [레위기 19장 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