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비가 잦았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중충하고 잔뜩 흐린 하늘만큼이나 수연의 기분도 그리 좋지가 않았다.
지난번 고향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추림의 처지에서 비롯된것은 당연했다.
무엇을 해도, 누구를 만나도 기분은 나아지지 나아지지 않았다.
추림을 마음속으로 좋아하게 되버린 뒤로 마음속에 무언가가 전혀 다른 존재감이 도사리
고 있는듯했다.
가슴이 시리고 차가웠다.
태어나서 이런적은 처음이었다.
주위에 많은 남자들이 존재했었고 다가왔었다.
그들중엔 좋아하고 싶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힘들어 지거나 답답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 남자의 얼굴이 마냥 그리워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세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자 수연은 커피숍 입구를 바라보았다.
석호와 영진을 만나기로 한것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추림의 동생 추용이 절대 비밀에 붙혀 달라고 했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추림의 안위와 건강등이 걱정이 되었고 한편으로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추림의 일을 석호등과 상의하고 면회를 같이 갈 심산이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은 수연이 종업원을 부르려 할때 입구를 통해
들어서는 석호와 영진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짧게 깍은 영진은 말끔한 얼굴이었고 석호는 살이 더 쪄보였다.
한숨을 살며시 내쉬고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김수연이 어쩐일이셔?"
"왔니? 오랜만이다."
"어쭈? 화장한거봐. 이쁜데."
인삿말을 주고받으며 석호와 영진이 다가와 수연의 건너편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잘 지냈어? 만난지 조금 됐지?"
"맞아. 한 두어달 되었나? 그래 여름 피서는 다녀왔어?"
"아니. 그냥 시골에 다녀왔어."
"시골에? 곧 추석인데 그때 안가?"
석호가 관심을 드러내며 묻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를 주문한 영진이 수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기분이 별로인거 같다? 안좋은일 있는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거 같은데. 말해봐라 이 오라버니안테. 뭔 일이다냐?"
석호도 수연의 안색을 살펴보고는 묻자 수연이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할말이 있어."
"할말? 해봐. 기꺼이 들어는 줄께."
석호가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희 혹시 추림소식 알아?"
"추림?"
"그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본지 오래다. 그러지 않아도 너안테 물어보려 했는데, 니가 도
리어 물어보네. 너 알고 있어?"
"아니 모르고 있었어. 얼마전에 시골 갔다가 알게 되었어."
"그래? 그놈 도대체 뭐 하고 지낸다니? 만나면 확 때려 줄거야. 자식이 어쩌면 이렇게 무
심한지 궁금해 죽겠다. 뭐하고 산데냐?"
수연이 석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내리 깔고 한숨을 내 쉬었다.
"왜? 심각한거니? 빨리 말해봐. 뭔데?"
수연이 침묵하자 석호가 재촉했다.
영진도 궁금한지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 때를 기다렸다.
"사실... 추림이 구속되었어. 지금 구치소에 있데."
"뭐라고?"
"억... 뭐? 구치...소?"
석호와 영진이 놀라서 되묻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수연은 축축하게 젖어드는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수연은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사고 친거니?"
얼굴색이 변한 석호가 다시 물어왔다.
눈이 벌겋게 변한 수연이 눈물을 닦아내고 석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회사 사람들하고 회식하다가 싸움이 벌어졌데, 내가 알아 보았어. 재수가 없었다나봐. 여
느때 같으면 합의를 이뤄 낼수 있었다는데... 정부에서 시행한 뭐라더라? 무슨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했는데 그 기간에 사고가 나서 어쩔수 없었다고... 난 그것도 모르고......"
추림의 일을 나름대로 알아본 것들을 이야기한 수연은 서글픈 감정에 젖어 들었다.
다시 눈물이 글썽한 얼굴을 하며 말을 줄인 수연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허탈해진 석호와 영진이 숨을 죽이며 얼굴을 굳혔다.
"휴우! 난 그것도 모르고... 개자식! 말이라도 전해줄 것이지."
"어디에 있다는거야? 그럼 여지껏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환장할 일이군!"
석호와 영진이 동시에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새끼 예전부터 그랬어. 힘들어도 말하지 않았고 저 혼자 삭이곤 했지. 멍청한 놈! 화가
난다. 빌어먹을 놈! 가자! 당장 가봐야겠어."
"그래 가봐야지. 얼굴이라도 봐야 속이 풀리겠어. 수연아! 같이 갈거지?"
영진이 묻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그들에게 추림의 일을 털어 놓으니 마음이 어느정도 안정이 되어서 그녀는 비로서 웃을
수 있었다.
"난 그새끼만 생각하면 마치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가진 존재같이 느껴진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해 그렇게 틀릴수가 있는건지... 꼭 산같고 바다같은 놈이야. 그놈안테 해준거 없이
받기만 했는데... 어째서 그 새끼는 그렇게 재수가 없는건지 늘 힘든일만 생기는거 같아."
어두운 얼굴로 석호가 말했다.
추림과 거의 이십여년을 친구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석호였기에 그가 추림에게 느
끼는 감정은 다른이보다 각별하다 할 수 있었다.
친구를 떠나 그 이상의 무엇과도 같은 사이라해도 틀리지 않을 둘이었다.
추림이 사회로 떠나자 미련없이 추림이 걷게된 길을 따라온 석호였다.
학창시절부터 어떤 일이든 서로 공유했고 함께했으며 커감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우정을 뛰어넘은 친구가 석호가 생각하는 추림과의 사이였다.
그동안 추림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길이 없어 애가 타기도 했었고 서운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수연을 통해 그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게되자 가슴이 뭉클하게 시려왔다.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그렇게 가깝다 여기던 추림이 고생하고 있을동안 자신은 할 일 다
해가며 편히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놈! 팔자 정말 사나운 놈이다. 거기가 궁금했나? 정말 종 잡을 수 없는 놈이야."
"유월에 사고가 났으니까... 벌써 삼개월이나 되었다. 우리도 참... 되게 미안하다 그치?"
석호가 수연과 영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과 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고는 쓸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참. 수연아 너 혹시... 아니다."
석호가 수연에게 무언가 이야기 하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수연은 잠시후 석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유미가 궁금하니?"
수연이 석호의 마음을 짐작하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석호가 유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석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유미와 만나거나 연락한지 오래되어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한 입장이지만 유미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석호가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것이 아니었다.
추림과 유미의 사이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추림이 유미를 어느 선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몰라도 유미가 추림을 지독하게 좋아하
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추림, 그에게 석호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였다.
만약 석호가 유미를 좋아하고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유미를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확인하기 전까지 자신이 추림보다 유미를 더욱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유미역시 연락이 두절되어 만날수는 없지만 수연을 통해 그녀의 근황이라도 알고 싶었다.
보고싶고 생각나는 여자였다.
"나도 연락이 안되는데... 연락한지가 꽤 되었어."
수연도 유미와 연락한지가 오래되어 석호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줄수 없었다.
조금 실망한 얼굴이 된 석호가 허탈하게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추림과 유미가 함께 사라졌잖아? 이상하다 그치? 마치 둘이 어디라도 간 것
같잖아."
영진이 그렇게 말하며 석호를 바라보았다.
사실 석호는 추림과 유미 이야기를 동시에 꺼내거나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해도 이성이란 갈등의 소지가 가장 다난한 것이다.
웬지 추림에게 작아지게 되는 자신인지라 이상하게도 그 친구와의 갈등이 될만한 일은 피
해지고 싶어 지는 것이다.
"석호야. 할 말이 있는데 기분나쁘게 듣지는 말고... 이야기 해도 될까?"
수연이 조심스럽게 석호에게 의사를 물었다.
"응 해봐. 기분나쁠게 뭐 있을까? 걱정말고 해."
"그래? 유미가 추림을 좋아하는거 알고 있니?"
"......?"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직설적일줄 몰랐던지 석호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유미가 추림을 많이 좋아해. 추림도 그럴거야. 너희안테 말을 하지 못했던건... 대충 짐작
하고 있지 않아?"
"휴. 그래 대충 알고있어. 정확한지는 몰라도 내가 유미를... 아니 유미랑 있었던 일을 혹,
추림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에 추림도 유미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고 생각해서 내가 유미와 사귄다고 말했거든. 그 자식은 알았다고 말했는데 막상 너안테
말을 듣고보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눈빛을 빛낸 수연의 얼굴에 어떤 의지의 기운이 떠올랐다.
"유미 좋은애야. 유미가 좋다면 놓치지 말아. 좋은 친구야."
"......?"
"......!"
수연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무척이나 뜻밖인지 석호나 영진이까지 의외의 얼굴을 했다.
어딘지 맞지가 않은 말같아서 헷갈리는 석호였다.
"왜 이상하니?"
차가운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얼굴의 수연은 석호를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또렷한 어조
로 물었다.
"아니 생각한 말이 아니었거든. 그래 솔직히 나 유미가 좋다. 헌데 어쩌냐? 유미 마음은 다
른곳에 있는데 혼자 좋아하면 힘만 들텐데. 니가 다리좀 놔주던지."
조금 마음이 편해지고 용기가 났는지 석호가 조금전의 태도와는 다르게 숨기거나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새끼 아주 광고를 해라. 다리를 놓고 할거나 있나? 그냥 전같이 하면되지?"
영진이 끼어들자 석호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영진에게 유미와의 일은 모두 이야기한 터라 누구보다 석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수연이 유쾌하게 웃음 지었다.
유미는 자신에게 이제 하나의 벽이었다. 추림을 좋아하는 마음이 현실이 된 지금 유미라는
친구는 이미 친구보다 경쟁 상대였다.
마침 석호가 유미를 좋아하고 있었고 밤도 같이 지샌 적이 있었던 터였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석호와 유미가 더욱 친밀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석호가 부디 유미를 더 좋아해 주었으면 싶었다.
또한 유미가 추림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이상하게 추림의 생활과 삶이 꼬이는듯한 기분이
었다. 온통 좋지 못한 일들만 연이어 벌어지고 불행해지는 추림 같았다.
자신이라면 자신 있었다.
추림을 웃게 해주고 싶었고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좋아. 내가 만나면 니 이야기나 많이 해줄게. 대신 오늘 밥이나 사라."
"정말? 좋았어. 사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좋은건지 싫은건지 말도 확실하게 하지 않아서
무척 속상했거든. 이거 같으면 저거고 저거 같으면 이거라서 종잡을수가 없는 여자야."
"원래 진짜는 그런거야 임마. 널 시험하는 건지도 몰라.잘해봐라 자식아!"
영진이 힘을 실어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석호가 연신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줄 몰랐다.
수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추림을 면회하러 가고나서 곧 그가 나오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참거나 돌려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망설여 지는것은 그가 자신의 고백을 듣고 반응할 순간이었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기를 바랬다.
"우리 이러지 말고 나가자. 오늘 기분이 영 그렇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술이나 마시자."
석호가 말하며 서둘러 일어섰다.
* * *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베인 침대에 누워있던 추림이 인상을 쓰며 힘겹게 자리에서 몸
을 일으켰다.
의료과에 입원중인 상태지만 감호소 안이나 이곳이나 답답하거나 편하지 않은것은 매 마
찬가지였다.
옆구리를 깊숙히 찔렸지만 뼈나 장기는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상처는 아니었다. 열두바늘을 꿰멨지만 피는 여전히 흘러 나왔다.
자신을 테러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보복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처음 이곳으로 이송되어 갈등을 일으킨 실세(?) 들과의 충돌은 추림이 참고 싶지 않은 일
이었다.
폭력이 다반사였고 남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끔찍한 일이 반복되는 일을 목도하고 나서였
다.
추림은 말이없고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었다.
시비는 당연했지만 추림은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충돌하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사건은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지만 남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일이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널섹스가 그 이유였다.
한밤에 일어나는 그 사건을 참지 못하고 말리다가 그들과 충돌하고 독종다운 모습으로 그
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었다.
문제는 그들이었다.
평소에 이곳에서 힘좀 쓴다고 거만하게 굴던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추림에게 당했으니 모
욕당했다고 여긴 것이다. 아니 모욕이었고 이미지가 구겨진 사건이었다.
짐작은 했고 대비도 어느정도 했었지만 그들이 흉기를 들고 공격할줄은 몰랐다.
한숨이 길게 흘러 나왔다.
모든것이 어려워 지고 있었다. 그동안 힘들어도 잘 헤쳐나오고 견뎌 냈지만 이상한 일이
었다.
유미 그녀를 마나고 나서 모든것이 삐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추림은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싯점만은 너무도 일치하고 있는점이 있
었다.
어떤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했다.
큰것을 갖기위해 많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후후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정말 믿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
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그리운 사람들 곁에 머물고 싶었다.
벌써 삼개월동안 구속되어 있는터라 이제 서서히 시간 개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자신의 모습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두렵기도했고 적응하지 못할것도 같았다.
어그러진 마음이 그렇게 될 것처럼 만들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비관하지 말자 한 좌우명이 몇개월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서 어긋나
고 있었다.
괴로웠다.
자신을 스스로도 믿지 못하고 점점 비관하는 주체성을 띠어가고 있었다.
추림은 침대 옆, 한켠에 마련된 작은 탁자위에 놓여진 편지지와 볼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담당 간호사에게 부탁한 것들인데 어느새 가져다 놓았나보다.
원래는 사제품을 함부로 사용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추림이 부탁하자 마음좋
은 간호사가 남몰래 가져다 주었다.
볼펜을 들고 편지지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당연히 유미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보낼수는 없을 것이다.
직계 가족외에는 면회도 안되고 편지나 연락을 할수가 없었다.
그저 쓸뿐인 편지는 허무하게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끄응."
한동안 짧은 글을 쓴 추림이 힘들게 침대에서 내려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창가로 다가갔다.
굵은 창살이 쳐진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무척이나 흐려 있었다.
아침까지 비가 내렸었던것 같았는데 바닥을 보니 비가 그친지 오래인듯 물기가 모두 말라
있었고 하늘만 흐려 있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안양 감호소 뒷뜰이었다.
저 멀리 여 수감원들이 푸른 수감복을 입고 모여 잔디를 손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저마다 사연과 우여곡절을 겪고 이곳에 수감됐을 여자들이었다.
다른 모습으로 틀린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군상들이었다.
무엇이든 하나의 귀결은 존재하는것 같았다.
사는것이 죽음을 위해 달리고 있다 믿는 추림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생명은 단 하나의 길
위에 놓인 것이었다.
결국 결말은 그것인데 왜 살아가는 모습을 하려하게 치장하려 할까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
지곤 했다.
나와 너만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유미가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다른 길위에 놓여진 두개의 운명을 하나로 귀결시킬 무언가가 있었으면 싶었다.
나이가 조금 더 든다면 결혼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
유미 그녀를 자신의 세상속에 포함 시키고 싶었다. 혹은 그녀의 세상속에 자신을 포함 시
키고 싶었다.
늘 곁에 있으면서 그녀를 확인하고 어루만지며 살아가고 싶었다.
문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 추림의 눈에 하얀 간호복을 입고 테없는 안경을 낀 작은
얼굴의 간호사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 일어나셨네요?"
"안녕하세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얼굴의 간호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추림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입원해 있는 며칠동안 본의 아니게 익숙해지고 친해진 간호사였다.
엄연한 공무원 신분의 간호사였고 더구나 이곳은 사설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또한 추림을 지도할 입장이었지만 유독 추림에게 사근하게 대해 주었다.
"아직 주무시는줄 알고... 상태좀 보려 왔어요. 이곳에 누워 볼래요?"
"괜찮은데... 봐야 합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추림이 망설이자 왼쪽 가슴에 김민경이란 이름표를 붙인 간호사가 성큼
다가왔다.
"누워요. 제 일이고 명령이니까 해야지요. 의무이기도 하고요."
듣기좋은 음성을 지닌 김민경이 추림을 옆구리를 살피며 말하자 추림은 어쩔수 없이 침대
에 누워야 했다.
"좋아요. 빨리 아무네요. 건강하신가보네요. 덧나지도 않았고 이삼일이면 붕대를 간단하게
봉합해도 될것 같네요."
붕대를 풀어내고 검은 실로 꿰메진 상처를 소독하며 김민경이 익숙하게 손을 놀렸다.
"이정도 상처야 상처도 아닌데요 뭘."
"그래서 기절했어요?"
"......!"
입을 다물어 버렸다.
큰 상어였지만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었다. 기절한 이유는 추림의 정싱이 문제였다.
강한 의지력을 상실하고 약해져 버린 정신과 육체가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네? 뭘 말입니까?"
김민경이 뜬금없이 물었다.
"다알고 있잖아요. 이추림씨를 이렇게 만든 놈들 말이에요. 소문이 파다한데 몰라요?"
놈이라는 거친 단어를 사용하며 김민경이 다시 이해할수 없는 말을했다.
"이추림씨가 조동기인가 하는 놈을 두들겨 팼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그것도 입소하고 나
서 사일만에? 속이 다 후련하던데요. 무슨 연줄이 있는지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도 않고 일
년을 넘게 버티는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누구도 못 건드리는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
소문을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 싸움에서 창피를 당한 그가 조동기인것을 지
금 처음 알았고 그의 사정도 처음 듣게 되었다.
김민경이 놈이라고 말했지만 조동기는 놈이란 욕으로 표현해도 모자란 작자였다.
저질중의 저질이었고 악질적인 놈이었다.
패거리를 아우르며 좁은 이곳에서 할짓 못할짓 다 하는 놈이 그놈이었다.
어디선가 사재 담배를 구입해 판다고 했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호리호리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 수감자들을 강간하는 더러운 놈이었다.
그 일이 기화가 되어 추림과 손을 섞게 되었었지만 추림은 놈에게 이곳에서 나가는 동안
시달릴 것이었다.
"윽!"
김민경이 상처를 잘못 건드렸다.
"어맛! 미안. 많이 아픈거야?"
인상을 구긴 추림이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감싸쥐며 몸을 웅크렸다.
"이추림이 조동기를 묵사발내고 이추림이 조동기 패거리에게 테러를 당했다! 이것이 지금
돌고 있는 이곳의 소문인데 아주 대단히 씨끄러워. 어제 오늘 연이어 이틀동안 점검이 떴
어. 아마 며칠동안 계속 그럴걸?"
"......?"
설마 그 정도 까지인줄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조동기 패거리와 다툰것은 운동시간동안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졌지만 그렇게 학대
될줄은 몰랐다.
긴장감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여럿이고 자신은 혼자이다. 아마 이곳 의료과에서 나가게 되면 바로 손을 써 올 것
이 뻔했다.
걱정이 되는것은 당연했다.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긴장가 우려가 몰려 들었다.
"왜 겁나?"
김민경이 추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장난에 가까웠다.
"그런데 언제까지 반말 할 겁니까?"
"어? 내가 그랬나? 그러면 안되는거야? 내가 나이가 더 많고 누난데?"
"나이많고 누나면 반말해도 되는 겁니까? 예 좋아요. 아주 좋은거 배웠네요. 이러면 어떨
까? 나이어리고 동생도 반말하면 되기로 하는거 말이야?"
"뭐야?"
추림이 그렇게 말하고 얼굴을 베게에 묻었다.
김민경이 한대 맞은 얼굴이 되어 추림을 노려 보았지만 추림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좋아 좋을대로 하라고. 이제 말해줄래?"
"도대체 어제부터 뭘 말해 달라고 하는 겁니까?"
"그러니 말해줘. 여기 왜 들어왔는지 말해줘."
어제부터 난데없이 추림에게 말해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어떤 것인지 밝히지는 않았었다.
무조건 말해 달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아마 신의 사촌쯤 될까?
그런데 겨우 그것을 말해 달라고 하는 거였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추림은 되도록이면 자신의 지난 일을 이야기 하
지 싫었다.
김민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추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려 버렸다.
"첫째, 사람가 사람은 알아가는 과정이 존재하고 그 과정은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접근
해야 하는 법이다. 둘재, 상대의 안좋은 기억은 되도록이면 감싸주고 잊게 해주는 것이 배
려다. 세째, 그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말것!"
"피잇. 뭐가 그래? 난 이추림씨와 동향 사람이고 이추림씨가 폭력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곧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 했는데."
"......?"
뜻밖의 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죄목을 알고 있는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가게 될거
란 말은 정말 의외의 말이었다.
"궁금하지? 그럼 누나라고 불러봐. 그러면 이야기 해주지."
겨우 스믈 세살이면서 누나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추림은 여자를 누나라 부르지 않는 이상한 성격의 남자였다.
"됐습니다.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치료 다 하셨으면 그만 나가주시죠.
전 보다시피 구속된 못된 놈입니다."
김민경의 조건을 일축한 추림이 걷었던 상의를 내리고 돌아 누워 버렸다.
"구속되었지만 범죄자는 아니지. 미결수란 말이야. 좋아 말해주지. 아는 사람이 있어서 부
탁해서 알아 보았어. 한달안에 집행유예로 나가게 될걸?"
"......?"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녀가 부탁해서 알아본 경로가 법조계 쪽이라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다. 이미 학정된 날짜가 잡히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풀려나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본인인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그렇지 알아 볼수만 있다면 얼
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 학실합니까?"
얼굴이 달아오른 추림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호호호! 거봐 궁금하면서. 아는 사람이 있었어. 이거 아무나한테 해주는거 아닌데 내가
힘좀 썼어. 솔직히 말해봐. 기분 좋지?"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연이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혈액순환이 급격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겨우 일면식만 있을 뿐인 김민경이 왜 그것들을 알아 보았을까 궁금해졌다.
그녀와 고향이 같은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도 매우 가까웠다.
겨우 한시간 남짓한 거리였으니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 조건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했을까?
그녀와 며칠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제법 익숙해 졌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이런 신
경까지 쓸 일 없을텐데도 김민경은 아무런 거리감없는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단지 이추림씨가 범상치 않았을 뿐이였어. 멋진 남자정도로 해
두지 뭐. 곧 추석이지? 추석 지나면 나가게 될거야. 운이 좋았데 초범이고 사회에서 성실
하게 생할한 점, 가족이 많은것도 이유가 되었고 별다른 사건없이 조용하게 수감생활한
것도 참작이 되었을걸? 어때? 고맙지?"
"......!"
할말을 잊은 추림은 눈을 빛내며 김민경의 말을 흘려 듣고는 다른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
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추림은 흐리고 어두운 날씨가 거짓말처럼 맑고 개운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49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