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미친 심장의 반란
1
드디어 지섭 오빠가 괌에서 돌아왔다. 살짝 그을린 피부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지섭 오빠의 얼굴을 마주대하자, 나는 반가운 마음에 거의 그에게 달려들다시피 했다.
“어이쿠, 우리 아영이,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얼마나 지섭 오빠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지섭 오빠라면 나의 이유 없이 심란한 이 기분을 금세 달래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과연 그의 얼굴을 대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나 따뜻한 미소와 눈빛이 나의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처럼. 그래, 지섭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렇게 기분이 이상했던 게 틀림없다.
“당연하죠. 그런데 괌에서 내 선물 사왔어요?”
“설마 나보다 선물을 그리워했던 건 아니겠지? 난 아영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죽어라고 달려왔는데…….”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선물꾸러미를 꺼내 보였다. 괌 특산품 전통 나무 조각상과 자게목걸이, 초콜릿 등 선물이 한 보따리다. 가는 곳마다 내 생각을 하며 선물을 사 모은 듯……. 역시 자상한 지섭 오빠.
“선물 사러 다니느라 일 제대로 못한 거 아니에요?”
“그보다는 아영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을 제대로 못하겠더라. 다음에 멀리 나갈 일 있으면 아영이랑 같이 갔으면 좋겠다.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역시 얘기해야겠지? 얘기하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한 거잖아? 그래, 꺼릴 이유가 없다.
“오빠가 걱정할까봐 말을 안했는데……사실 그 동안 사고가 좀 있었어요. 오빠 괌으로 떠난 다음 날,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집수리를 해야 했거든요.”
“정말? 고생 많았겠구나. 그럼 어디서 지냈어? 부모님 댁에서 지냈던 거야?”
“사실 그랬어야 하는 건데……오빠도 알잖아요. 우리 부모님이 좀 유별나신 거. 집으로 들어가기는 통 싫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신세 좀 졌죠.”
“누구? 경숙이라는 친구?”
“아뇨, 걔네 집은 좀 사정이 있어서……. 졸업여행 간다는 걸 깜빡 잊고 은혜한테 연락했었지 뭐에요. 그런데 은혜는 벌써 제주도라……. 마침 승우하고 연락이 돼서, 승우 집에서 그 동안 신세 좀 졌어요.”
“승우? 내가 아는 그 승우 말이야?”
오빠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네,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승우가 나 때문에 그 동안 고생 좀 했죠. 알다시피 제가 좀 심하게 덤벙거리잖아요.”
나는 찔리는 마음에 괜히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러자 지섭 오빠는 다소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아영이나 승우를 잘 아니까 두 사람을 믿을 수 있지만……여자가 남자 집에 들어가 살았다니, 그건 좀 그렇다. 다음부터는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면 오빠한테 꼭 말해. 오빠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정 나한테 연락이 안 되면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고. 알았지?”
“알았어요.”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지섭 오빠는 금세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앙숙인 두 사람이 어떻게 지냈어? 내내 전쟁터였던 거 아니야? 아니면 조금쯤 친해졌나?”
“싸우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어요. 사실 승우 집에 들어가게 된 건 또 하나 이유가 있었거든요. 이건 굉장한 사건인데……승우가 지난 번 내 글을 시나리오로 게임을 제작하겠대요. 그것 때문에 상의하느라 정신없었는걸요.”
“와, 이거 정말 멋진 뉴스잖아! 아영이가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다니! 축하할 일인걸? 우리 아영이, 대단하구나!”
“뭐, 아직 확정적인 것도 아닌걸요.”
오빠의 호들갑에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짐짓 겸손한 척 말했다. 어디 잘 될 줄 알았던 일이 잘못 풀린 게 한두 번이어야지.
“아니야, 승우가 그렇게 말했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 쪽으로 상당히 감이 있는 녀석이니까. 그런데……그 일 때문에 너무 힘들었던 거 아냐? 얼굴이 좀 핼쑥해진 것 같다.”
“그래요? 뭐 그렇게 대단한 작업을 한 것도 아닌데……. 수리가 끝난 집 청소를 하느라 힘들어서 그런가?”
“참, 어제 은혜도 제주도에서 돌아온 거 알지? 오늘도 더블데이트하자고 불렀는데, 괜찮아? 일이 어떻게 되가는지 들을 겸, 잘 됐다.”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는다. 아니, 지섭 오빠나 은혜는 왜 꼭 같이 만나지 못해 안달이지?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촌 지간이라는 건 알지만, 꼭 그렇게 커플까지 친해져야 하는 거야? 물론 은혜를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승우와도 전처럼 원수지간은 아니지만……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따지고 보면 불편할 건 또 뭐야? 거의 일주일 동안 같이 살기도 했는데, 이렇게 만나는 게 뭐가 문제지? 어차피 일 문제로 계속 만나야 할 사이인데……. 그래, 편하게 생각하자. 이렇게 다짐하며 기운차게 대꾸했다.
“그래요. 승우 녀석 나 때문에 제법 힘들었을 텐데……오빠가 밥 사야겠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언제나 노래하는 것 같은 은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녀 뒤로 거무스름한 승우의 얼굴이 보인다.
-덜컹!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다. 내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다른 사람도 듣지 않았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나보다. 그 커다란 소리를 어떻게 못들을 수가 있지? 난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인사말도 제대로 하기 힘들 지경인데…….
“여행 잘 다녀왔어?”
“그럼요. 그런데 오빠는 왜 무뚝뚝하게 그러고 있어요? 둘이 동거까지 하고서……아직도 사이가 안 좋아진 거예요?”
은혜의 농담에 무심코 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또 다시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다. 헉, 이거 왜 이러지? 심장이 미치기라도 했나? 그런 와중에도 승우의 얼굴에 무뚝뚝함이 또 가면처럼 덮여 있는 것을 느낀다. 함께 지내던 동안은 잊고 있었던 표정이다. 그 때는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는데…….
“참, 정말 축하해요.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된 소감이 어때요?”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뭐.”
“어, 오빠. 언니한테 전화 안 해줬어요? 회사에 기획 초안 보여줬더니 바로 OK 떨어졌다면서요.”
“어차피 오늘 만나기로 했으니까, 만나서 말하면 되겠다 싶어서…….”
“정말? 정말 확정된 거야?”
“일단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작업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소설을 게임에 적당하게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내 글이 게임화 된다니……. 당장 엄마, 아빠, 사돈의 팔촌한테까지 전화를 걸어서 이 자랑스러운 소식을 알리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었지만 감격이 북받쳐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언니,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된 기념으로……한 턱 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영이 일이 내 일이니까, 내가 쏠게. 승우한테 그 동안 신세진 것도 있고……. 뭐든 맘껏 먹어라. 아영아, 정말 축하한다!”
이쯤에서 기고만장한 한 마디쯤 해줘야 나다운 건데, 막상 이런 좋은 일이 내게 닥치자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무언가 입안에서 말을 뭉개다가,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은 ‘우왕~!’하는 울음 뿐. 아, 또 눈물을 보이다니……정말 바보 같은 이아영. 하지만 너무 행복한 바보 이아영!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세 사람의 축하 속에 정신없이 식사를 주문했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는데, 은혜가 조용히 내게 말한다.
“언니, 화장실 좀 같이 가요.”
서슴없이 그녀를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은혜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한다.
“언니, 사실은……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심각한 어조와 함께 그녀가 꺼내 든 것은……어쩐지 낯익은 편지봉투이다. 헉, 저것은……내가 은혜에게 보낸 가짜 편지!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이걸 어쩌지? 지금에 와서 승우를 은혜에게서 떼놓는다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제 승우를 내 인생에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단 말이다!
“언니도 읽어보면 알겠지만……승우 오빠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사귀나 봐요. 오빠와 사귄다는 여자가 보낸 편지에요. 이 여자, 승우 오빠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은데……어떻게 하면 좋죠?”
은혜의 맑은 눈망울이 금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지?
“음, 그게……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장난편지일 수도 있잖아. 익명의 편지가 사실인지 알 게 뭐야? 정말이라면 떳떳하게 자기 이름을 밝혔겠지.”
나름 적절한 충고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은혜의 눈에 의아함이 스친다.
“어? 익명의 편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편지 아직 안 읽어봤잖아요.”
이, 이런 실수를……. 하여간 대충 좀 넘어가지, 은혜도 너무 예리해서 탈이라니까.
“그야 그런 종류의 편지는 대부분 익명이니까……. 멀쩡한 여자가 자기 이름 똑바로 대면서 남자와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 얘기할 리가…….”
“깊은 관계……에 대해 쓴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으악, 이제 나도 몰라! 변명을 생각하다가 뇌가 녹아 없어질 것 같다. 당황한 나는 이제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은혜가 까르르 웃는 것이었다. 슬픔으로 미쳐버린 걸까?
“언니도 참……내가 언니 글씨를 모를 것 같아요?”
헉, 내가 쓴 편지라는 걸 들켜 버린 거야? 이번에는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는 거지? 내 오른손이 한 일을 내 뇌가 모른다고 할까? 그러나 은혜는 나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말을 잇는다.
“하여간 언니도 정말 짓궂어요. 이런 장난을 다 하고……. 그래서 나도 장난 좀 쳐봤어요. 어때요? 실감났죠?”
“그, 그래…….”
나의 이 음모에 찬 행동을 은혜는 악의 없는 장난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휴우, 다행이다.
“언니와는 달리, 승우 오빠는 사실 너무 재미없어요. 동창이면서 어쩜 그렇게 다를까요? 언니의 유머를 오빠도 조금 나눠가지면 좋을 텐데……. 어찌나 무뚝뚝한지, 생전 농담이나 다정한 말 한 마디 하는 걸 못 봤다니까요.”
그건 승우가 아직 은혜에게 충분히 익숙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일까?
“승우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 그래. 은근히 수줍음이 많아서, 아주 친숙해지기 전에는 말을 잘 안하는 편이거든.”
“오빠가 수줍음을 탄다고요? 에이, 말도 안 돼. 승우 오빠는 너무 무신경한 게 탈인 걸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어요. 가끔은 그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을 지경이에요. 데이트를 하면서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더 많으니……. 물론 게임을 제작한다는 게 아이디어 싸움이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가끔은 정말 답답해요. 지섭 오빠랑은 많이 다르죠? 아아, 지섭 오빠랑도 반만 섞었으면 좋겠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표정일 때, 어쩌면 녀석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던 슬픈 눈빛으로…….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니까. 은혜는 아직 그걸 모르는 걸까?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은혜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까지 너무 멋있어 보이니, 눈에 콩깍지가 씐 거 맞죠?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오빠를 쫓아다니죠. 사실 오빠는 아직 날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내 쪽에서 오빠를 쫓아 다녔고, 일단 만나다보면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오빠를 졸랐어요. 아직 날 많이 좋아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오빠가 날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난 자신 있어요. 언젠가는 오빠가 더 많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덜컹!
또 다시 심장이 요란하게 내려앉는다. 이거 정말 심장병이라도 걸린 건가? 왜 자꾸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픈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막 행운이 시작되는가 싶으니, 그 유명한 ‘불운을 몰고 다니는 여자’다운 불운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 승우가 이번에 만드는 게임은 비운의 천재가 남긴 유작으로 세상에 기억되겠구나.
슬픈 마음으로 애써 심장의 아픔을 감추며 대답했다.
“응, 분명히 그럴 거야.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인걸.”
진심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그녀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장의 통증만 아니라면 더 힘차게 응원을 해주는 건데…….
은혜와 화장실을 나와 지섭 오빠와 승우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맛있는 식사도 곧이어 준비됐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사를 남겼다. 그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죽을병에 걸린 증거라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아, 과연 나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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