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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으로 하루를 꼬박 보냈다. 끼니까지 걸렀으니 말 다했지. 세상을 먹는 재미로 사는 내가 아니었던가! 내일이면 서쪽에서 파란 해가 뜰지도 모르겠다.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야옹거리는 멍멍이의 먹이는 챙겨줘야 했다. 주인이 정신적 고통을 힘들게 참으며 수고롭게 먹이를 주는데도, 멍멍이는 전혀 고마움을 모른다. 배고픔에 지쳐 녀석의 밥그릇을 조금 넘봤다고 어찌나 성질을 부리는지……. 배은망덕한 나쁜 고양이 같으니!
거울을 보니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평생 울 분량의 눈물을 다 흘린 탓에, 눈이 거의 떠지지를 않는다. 안색은 예전 승우 말마따나 ‘10년은 화장실에 못 간 사람 얼굴빛’이고, 다크 써클은 턱 밑까지 드리워질 지경이다.
어째서 세상이 다 끝난 기분에도 불구하고 허기는 느껴지는 걸까? 이왕 만사가 다 귀찮은 이 상황에 위장도 잠시 파업을 해주면 좋잖아? 하지만 뱃속에서는 일곱 명의 거지가 합주라도 하는 것 같은 꼬르륵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사랑의 아픔으로 고통 받더라도 먹을 건 먹고 해야지. 라면도 떨어지고……슈퍼에 가서 컵라면이라도 사다 먹어야겠어.”
결국 부스스한 머리와 추레한 차림새로 집을 나섰다. 핑핑 도는 눈으로 슈퍼에서 컵라면을 발견했을 때는 마치 산삼이라도 발견한 심마니와 같은 심정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어찌나 감격스럽게 사랑스러운 컵라면을 집어 들었던지…….
부랴부랴 발걸음을 재촉하여 집을 향했다. 적어도 3개의 컵라면은 끓여서, 뱃속의 거지들을 잠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아주 잠깐이지만 다른 골치 아픈 생각들은 잊어버렸다.
‘역시 사람은 1차적 욕구가 채워져야 고차원적인 고뇌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나 잠시 후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1차적 욕구를 잊고 말았다. 나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서있는 지섭 오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빠…….”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지 고작 이틀이 지났던가? 나의 부름에 고개를 든 지섭 오빠의 얼굴은 상당히 까칠해져 있었다.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과 핏기 없는 얼굴빛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울한 그 눈빛은 우수에 찬 분위기를 더해 더욱 멋있어 보였다.
“잠깐……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지섭 오빠 앞에서는 마냥 죄인이 되고 마는 나. 차마 대꾸도 못하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니니, 차에 타라. 차안에서 얘기하자.”
곧 우리는 지섭 오빠의 차 안에 나란히 앉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지섭 오빠가 말했다. 그제 서야 내 인간 같지 않은 몰골이 떠올랐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도 망가져 보이지 않는다면 지섭 오빠에게 더 미안할 것 같았다.
“오빠도……많이 안 좋아 보여요.”
지섭 오빠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웃는 얼굴도 잠시, 곧 심각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은혜한테 얘기 들었어.”
숨이 턱 막혔다. 은혜가 지섭 오빠한테까지 그런 얘기를 했다고?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거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시 의구심이 머리를 쳐든다.
‘지섭 오빠한테까지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역시……은혜의 말이 진실?’
“승우와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며?”
“…….”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침묵만을 지켰다. 내 마음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누구를 믿어야 좋을지……내가 어떤 판단을 하는 게 옳은 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지섭 오빠는 침묵이 긍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다시 시작하자.”
“오빠…….”
“누구나 한번쯤은 흔들릴 수 있어. 그 어떤 사랑에도 위기는 있기 마련이고. 이번 일이 어쩌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니? 우리,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
“하지만……난 꼭 승우 때문에 오빠와 헤어지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난 오빠를…….”
“잠깐, 더 이상 말하지 마. 승우 이름은 꺼내지도 말고.”
지섭 오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틀 새에 그의 미간에 신경질적인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네가 아직 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지금부터 날 사랑하면 되지 않겠니? 나,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게. 우리 함께 노력하자.”
지섭 오빠의 눈이 애절한 애원을 담고 나를 향한다. 그 어두운 눈빛에는 내 머릿속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다. 사랑과 미움, 두려움, 원망……. 이틀 전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지금 그의 눈동자는 마치 소용돌이와도 같다. 그러나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을 감추고, 그는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었다.
“너만 괜찮다면……이번 일은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어. 더 이상 이 일을 입 밖에 꺼내는 일도 없을 거야. 너만 마음먹으면 돼. 아영아, 그렇게 하자. 난 이대로 널 놓칠 수 없어. 널 사랑하니까…….”
마음이 흔들렸다. 이것은 내게 주어지는 2번째 기회가 아닐까? 내가 지섭 오빠랑 다시 사귄다면……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지섭 오빠를 좋아한다. 물론 그 감정은 사랑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지만……언젠가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내가 준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지섭 오빠. 그래, 그냥 받아들이고 모든 갈등을 끝내버리는 거야!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조그마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어떻게 잊을 수 있지?’
그 목소리는 처음에 아주 희미했지만, 점점 더 커다랗게 머릿속을 울리며 지섭 오빠에게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방해한다.
‘역시……이건 아니야. 이제 와서 지섭 오빠와 스스로를 속이는 선택을 할 수는 없어.’
애초에 지섭 오빠의 말대로 할 수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섭 오빠 곁에 있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별을 말했던 것이고, 그 때 불가능했던 일이 며칠 새에 가능해질 수는 없다. 힘들게 마음을 정한 나는 도리질 치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 걸요. 이건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는 일이에요.”
차마 지섭 오빠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서 새로운 고통의 흔적을 발견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분노에 휩싸인 지섭 오빠의 목소리에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녀석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거니?”
그의 눈빛 역시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절대로 너를 녀석에게 보낼 수는 없어. 은혜에게 그런 짓을 한 놈에게…….”
지섭 오빠는 거칠게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럽던 그의 손이 지금은 억센 수갑처럼 내 손목을 구속했다.
“너도 은혜도……어떻게 그런 놈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 있지? 술을 핑계로 그런 짓을 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그런 녀석을…….”
지섭 오빠의 어투는 자칫하다가는 손이라도 베일 것 같이 날이 서 있었고, 그의 손에 잡힌 나의 손목은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빠, 아파요. 놓고 말로 해요.”
“말? 무슨 말?”
“무슨 말이라도 좋아요. 나를 욕하든 원망하든…….”
“그래, 말을 하고 싶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자. 무슨 말을 할까? 너와 승우가 어떤 식으로 나와 은혜의 뒤통수를 때렸는지에 대해 얘기할까?”
“오빠, 그런 게 아니에요.”
“내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뭘 바랬어? 너 편할 대로 쿨하고 멋진 이별의 말을 지껄이며 널 놓아줄 줄 알았니?”
“오빠,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은 지긋지긋해. 정말 미안하다면……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예전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럴 수 없어요. 이미 우리는 전과 달라져 버렸는걸요.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요.”
“다른 건 너 뿐이야. 나는 전혀 달라진 게 없어.”
“아뇨, 오빠. 나 뿐 아니라 오빠 역시……지금 너무나 달라요. 지금의 오빠를 봐요. 지금 이 순간 오빠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에요. 분노와 복수심일 뿐이에요.”
“그래서? 그게 내 잘못이니? 내가 그렇게 되길 원한거야?”
지섭 오빠의 절규처럼 느껴지는 거친 음성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눈물방울은 이내 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요, 다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나도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에요. 나도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걸 어떻게 해요. 내가 모든 걸 망쳐버렸지만……괜히 나 때문에 오빠까지 망가지면 안 돼요. 이런 오빠를 보는 건 싫어요.”
“너만이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어. 다시 내게 돌아와 주기만 하면…….”
“하지만……내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이대로 내가 오빠를 다시 만나면……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잔인하다. 이건 지섭 오빠한테 너무 잔인한 말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말로도 지섭 오빠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왜 상황이 자꾸만 내가 그를 상처 줄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거지?
지섭 오빠는 나의 말에 찬물 세례라도 되는 것처럼 굳어진 얼굴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쳤다.
“넌 화가 나지도 않니? 배신감 느껴지지도 않아? 은혜에게 그런 짓을 한 게 용서가 돼?”
“화가 났어요. 용서할 수 없었어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난 승우를 믿어요.”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지, 사실 내게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승우를 믿어. 죄책감 때문에 그 믿음을 확신할 수 없었을 뿐……처음부터 믿고 있었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의 눈빛을 기억하잖아?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하던 그 표정은? 조금의 거리낌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진실한 눈빛일 수 없을 거야. 어떻게 나는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었지?’
가슴 속에 굳은 신념이 자리 잡았다. 승우의 말이 진실이다. 더 이상의 의혹은 없다. 은혜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말을 했든……진실을 말하는 건 승우다.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 덩어리 하나를 치운 듯 숨통이 튀었다.
그러나 나의 말을 들은 지섭 오빠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럼 은혜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니? 넌 은혜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어? 그리고 내 앞에서……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승우를 두둔할 수 있는 거지? 내게 지금까지 준 상처로 부족해?”
“오빠, 그런 게…….”
“사랑……. 그래, 그 사랑이 너에게 그런 믿음을 주던? 그럼 나의 사랑은? 그저 이렇게 상처받는 것만이 나의 사랑인 거니?”
지섭 오빠의 두 손이 갑자기 내 뺨을 감싸온다. 그리고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려 한다. 그것은 지난번과 같은 부드러운 사랑의 입맞춤이 아니다. 그는 내게 벌을 주고 싶은 것처럼, 거칠게 입술을 빼앗으려 한다.
그 때, 갑자기 차 문이 벌컥 열리며 천둥 같은 목소리가 지섭 오빠의 행동을 방해한다.
“내려!”
승우였다. 검은 눈동자가 파랗게 빛날 정도로 화가 난 표정의 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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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는 했습니다만...앞으로도 갈길은 제법 멉니다.
마무리지어야 할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네요^^
앞으로도 아영 양의 행보에 응원 해주실거죠?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여러분의 댓글과 추천...저를 밥보다 더 배부르게 한답니다.
오늘은 금요일~일주일 중 가장 마음이 넉넉한 게 바로 금요일이지 싶어요.
저도 주말은 푹~쉬고, 월요일에 다시 찾아 뵐께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