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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세상 [1]

버벌킨트 |2006.02.03 22:25
조회 19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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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이 손을 들어 오른쪽 관자 놀이에 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천천히 원을 그렸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모니터에서 눈을 떼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클릭 하던 손이었다.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제길. 얼굴을 찡그리며 통증이 오는 곳을 쓰다듬어 보지만 별 도움이 되진 않는다. 교통사고 였다. 가벼운 사고 였고, 눈에 보이는 상처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난 일년간 저려오는 어깨도 고약한 잠 버릇만을 탓했다.


"바보아냐?"


"이번에 알았어요"


나인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깨를 움직일땐 통증이 없길래..."


픽. 과장이 어이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형광 불빛에 들고 있던 필름을 비춘다. 오십대 후반의 과장은 코끝에 안경을 걸친 전형적인 의사의 모습이었다. 잘생겼던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으로 많이 무디어졌지만 날카로운 턱선에 예리한 눈빛만은 잃지 않았다.


"정말로 몰라서 그런 소릴 하는거야? 모른 척 하는거야?"


단순 근육통 환자는 팔을 올리는 게 무서울 정도로 통증을 호소한다. 하지만 디스크 환자는 팔을 들어올리는 데 별 무리는 없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안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과장에게 나인이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장이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MRI 찍어봐"


"........"


"소견서 써 줄께"


"안 찍을래요"


"보험회사가 아예 안된데? 잡음이 있어도 소견서 있으면 찍도록 하던데."


"합의 했어요. 견디기 힘들면 찍을께요"


"그러다 늦어"


과장이 안경을 벗어 책상에 놓았다. 안경을 따라가던 나인의 시선이 책상 위 챠트에 머무른다. 정나인 27세. 직업 간호사. 혈압, 당뇨 없음. 주 호소 오른쪽 어꺠 통증 (2004년 5월 교통사고). 우울증으로 인한 불면 (정신과 약물 복용중). 시선을 돌렸다.


"그래....."


담배를 한모금 빨아들인 과장이 기침을 두어번 한다. 늘 그랬다. 쉽지 않은 질문을 할때면. 그는 담배를 물고, 기침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약 먹나?"


"........"


침묵이 흘렀다. 부족한 머리카락 만큼이나 참을성도 없는 그였다. 통풍으로 고생하는 인턴에게도 느려터졌다고 호통치던 그가 지금은 한가닥 남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과장이 담뱃재를 휴지통에 털어 넣고, 타다 남은 담배도 던져 넣었다. 그리고 가발 사이로 흘러나오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하나둘 맺히던 땀방울이었다.


"안 먹어요."


나인의 대답에 이번엔 과장이 입을 다문다. 그리고 나인을 지긋이 바라봤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 사실을 확인한 과장이 웃는다.


"언제부터?"


"네달 조금 넘었어요"


"네달?"


나인이 코끝을 찡그렸다.


"세달이요"


"세달이란 말이지... "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다. 중얼거리는 과장을 바라보며 나인이 일어섰다.


"혹시나 소견서 필요하면 말해"


과장이 말했다.


"아 참. 합의 했다고 했지."


과장은 두번째 담배를 물었고, 나인은 문을 닫았다. 합의 하지 않았고, 약은 아직도 먹고 있다. 나인은 속였다고 생각했고, 과장은 그녀가 말하기 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모니터 아래의 시간을 확인한 나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퇴근 30분전이었다. 진료 종료를 알리는 알람을 기다리며 환자 리스트에 새로 고침을 누르던 것이 벌써 삼십여분이 지나고 있었떤 것이다.

동절기가 지나고 하절기에 접어들어 퇴근시간에 한시간이 연장된 후로는 재촉해도 가지 않는 시간에 병원에서 견디는 시간이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간호과장 눈을 피해 몰래 책이라도 봤었다. 하지만 선물 받은 체게바라를 펼쳐 놓은지 20분만에 기습 라운딩을 한 간호과장에게 걸려 버리고 말았다. 이제 막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려는 체를 마중하던 나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에 맞춰 생각나는 대로 단순한 작업을 반복해 시간을 죽인다. 그래도 그렇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연신 새로고침을 누르는 꼴이라니. 이런 모습을 보면 경이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거보세요. 제가 선생님 정신과 근무할 떄 불안 하다 했었잖아요. 선생님은 우리와는 다른 4차원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근무하면 지금보다 더 이상해질거라고. 선생님은 굳이 그쪽을 가지 않은 지금도 충분히 이상한데 말에요"


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오전과는 달리 이제는 한산해진 복도사이로 텔레비젼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다. 하지만 평소처럼 나인은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리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소리면 아직은 진료실 안쪽에 계시는 과장님이 소리를 줄여달라 부탁 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퇴근을 불과 20분 앞두고 있는 시간이 아닌가.


"정말 이거 안 먹어도 된다니까는 그러네"

"엄마. 정말 왜이래 창피하게! 그냥 먹어. 얼마나 한다고"

"오메. 이것이 약값이 올메나 비싼디. 그럴 돈 있으면 니 옷이나 사입어 이것아"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크게 들리는 다툼 소리에 나인이 진료실 밖을 나왔다. 할머니 한분과 그 딸인 듯한 젊은 여자가 실랑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꽂힌 카네이션을 보니 아마도 어버이날을 맞아 안 간다는 어머니를 억지로 모시고 온 모양이었다. 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상담만 한다는 말로 설득을 해서 겨우겨우 병원에는 왔지만 약까지 지어간다는 말에 저렇게 안 먹는다 떼를 쓰는 거라고 나인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양약과는 틀려서 한약은 며칠분만 지어도 몇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나인도 직원가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부담이 되었는데 환자들은 오죽할까. 실랑이 끝에 결국엔 딸이 항복을 한 모양이다.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은 채 두사람의 실랑이를 쳐다보고 있던 간호사에게 딸이 다가가 고개를 젓는 걸로 보아 말이다.


"그렇게 하세요. 원하시면 그렇게 하셔야죠.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으면 좋은약도 독이 된답니다."


3년 선배인 정아에게 나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정아가 곧 고개를 숙이며 답례를 하더니 조그만 입술을 열어 차분한 목소리를 대답을 한다. 겉으로는 저렇게 웃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실랑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아마 퇴근시간전에 결론이 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겠지.


"정나인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전인간호잊었나? 언제나 환자의 입장에서.."

"시끄러워요. 시끄러워요 교수님."


유난히 깐깐했던 실습 담당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나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실랑이를 벌이던 모녀는 1층으로 내려갔지만 상담을 하던 정아는 아직 복도에 있다가 나인이 내지르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인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퇴근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인은 몸을 돌려 진료실에 들어가 그때까지 활짝 열어두었던 진료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꽉 조여두었던 머리핀을 풀어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 날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나인에게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기도 하지만 5년 전 죽은 희경의 기일이기도 했다.

병원을 나서 평소처럼 지하철역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나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탑탑한 공기가 목으로 흘러들어왔다. 흡사 모래가 공기를 통해 들어온 듯 머릿속이 따끔거리자 나인이 눈을 질끈 감는다. 5년 전부터 시작된 두통은 올해도 변함없이 찾아왔다. 나인은 습관처럼 가방을 열어 흰봉투를 꺼냈다. 병원내 약국에 부탁하며 얻은 두통약이었다. 처음 받아올 때는 제법 부피가 있어 어쩌다 책이라도 한권 가방에 넣을때면 제몸 부서져라 봉투가 비명을 지르곤 했는데 지금은 얇은 종이 이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알약을 물도 없이 입에 털어 넣고 빈봉투를 구겨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내일은 약국에 한번 더 들러야겠다. 진료실 냉장고 안에 약사님께 뇌물로 건넬 마땅한 음료수가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멈췄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멀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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