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 8년째다. 첫 무대의 울림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궁금하다
설레었지만 나름대로 편안했던 것 같다. 뮤직비디오가 나가고 노래가 알려진 뒤였으니.
환영을 많이 받았다. 노래는 떳는데 내가 출연해서 인기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라는 부담감은 있었다.
당시는 매니저들이 방송활동을 시키느냐마느냐 말들이 많았다.
외모 때문이었나
촌스럽다고 했다. (웃음) PD들조차 활동을 안하는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정도니.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무대에 섰다. 발라드는 보통 3개월 정도 라디오 등으로 알린 뒤 TV에 출연하는데,
난 뮤직비디오가 한 번 나가고 반응이 좋아 자연스럽게 성사됐다.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다.
가요계에 조성모가 이뤄놓은게 많다. 최단기간 500만 장 판매에,
발표하는 음반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혹자는 200만 장 넘게 팔리다가 100만 장이 되니 이제 조성모도 끝났다고 하더라.(웃음)
너무 ’거한’ 성과가 오히려 해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의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도 조성모가 시작이었다
그래서 내게 뮤직비디오가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날은 뮤직비디오가 내 발목을 잡은적도 있었고. 이젠 누구나 그런 비디오를 만든다.
하지만 나를 답습한 일을 나도 후회하는데 후배들이 그러는 건 안타깝다.
언젠가는 후회할 것임을 알기에 새로운 걸 고민하고 창조해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음악도 발전하고,
그런 면에선 내가 잘한 게 없는 것 같다. 나름의 변신을 시도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틈이 없었다.
네티즌들에게 조성모 하면 떠오르는 걸 물어보니 ’초록매실’ CF를 이야기하더라
그때는 풋풋했다.(웃음) 당시는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늦둥이, 막내, 귀여운소년. 1,2집 재킷 사진도 그런 식으로 찍었다.
꼭 그런 주문을 했다. 이젠 그런 코드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고 내 나이 서른이다.(웃음)
지금은 죽어도 못할 것 같다.
그 이미지는 ’출발 드림팀’으로 단숨에 깨졌다. 남성다움을 의도한 건가
나도 내가 그렇게 잘할지 몰랐다. 당시는 방송 중에도 경쟁이 심했다.
우리끼리도 그렇고, 상대편도 그렇고. 외국팀들은 "헤이몽키"하면서 감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전투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쇼 프로그램을 하든 뭘 하든 잘 보이고 싶었던 때였으니.
데뷔 때와 비교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음악을 하는 자세가 바뀌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데뷔했다.
21살. 가끔 나는 그 나이에 멈춰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 조성모에서 가수 조성모가 된 후부터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다.
많은 걸 잃고도 몰랐다. 잘 되고 싶었고, 잘 보이고 싶어 음악을 한적도 있었으니.
지금은 음악을 잘하고 싶다. 진지하게 음악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부감을 사는 시대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하면서 갈림길에 선 적도 있었나
요즘은 가수들이 음반을 내면 당연히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게임을 하고, 짝을 짓는다.
나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내가 가수가 아니라 연예인이 되어 있더라.
언제까지 이렇게 갈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연예인이 될 것인가, 가수가 될 것인가.
5집을 내면서 많이 자제했다. 방송국에서는 지금껏 안 한 것도 아니니 이제와서 그러는 걸 의아해했지만.(웃음) 쇼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를 많이 내보이고 그렇게 자리를 지킬수록
음악을 할 수 있는 입지는 작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최고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은
공연장이라 생각한다. 뭐, 그렇다고 방송을 전면 중단하겠단 소리는 아니다.
재밌으면 하겠다. 그런데 요즘은 오락 프로그램에 나가도 즐길 수가 없다.
진심으로 그 친구들하고 짝을 짓고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웃음)
대시하는 사람이 없었나
잘 알지 않나. 끝나면 땡이다.
데뷔 후 승승장구였다. 슬럼프가 있었는가
4집 때가 그랬다. 4년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와보니 갈 데도 몸을 뉘일 데도 없더라.
당시 회사의 방침도 굉장히 빡빡했다. 바람 불 때 연 날린다고. (웃음)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펑크도 많이 냈다. 악동 짓도 많이 하고. 다들 기다리는데 안 간 적도 많았다.
방송, 인터뷰 등등. 욕도 엄청 먹었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 숨도 못 쉴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달리면 더 이상 수습이 안 될 것 같은데 뒤에선 채찍질만 하니까.
나는 100밖에 없는데 120을 늘 끌어내야 하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힘들었다.
그때는 전화기도 꺼놓고 잠수를 탔다. 인기 있다고 막무가내다, 통제도 안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나이가 드니 이해는 되더라.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원했던 그곳에서 열심히 더 해줄걸 싶다.
대중의 배반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당신에게 이런 고민이 있을 줄은 몰랐다.
2001년 <내 안의 깊은 울림>이란 시집을 냈을 때도, 일부는 인간 조성모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는지를 알게 됐다고 했지만, 일부는 하나의 퍼포먼스쯤으로 생각했다
내가 IMF때 나왔다. 1998년. 열 집에 여덟 집은 망하던 상황.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 나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빨간 딱지라는 것도 처음 붙여봤다.
음반 들고 들어가면 가족이 기뻐해줄 줄 알았는데, 집안 분위기는 그런 게 중요치 않았다.
당장 살 궁리를 해야 했으니. 다행히 음반이 잘됐다. 2.5집 낼 때 빚을 다 갚았다.
여러분이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다. 그런 내가 어떻게 거짓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감사하고 사랑할 뿐이다. 평생 갈 것이다. "나 너무 힘들어요"가 아니라 보답하는 의미로 시집을 낸 것이다.
8년 동안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뭔가
시간을 두고 쉬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 데뷔 때 누구나 설렘과 기쁨을 갖고 시작했다가
모든 일이 어느 순간 당연시되고 일상이 되어버렸을때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난 그게 4집 때쯤이었다. 4집 지나고 쉬었어야 했는데, 군대가 없었더라면 쉬었을것이다.
2년 정도.
가장 했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두 번째 리메이크 음반을 만들던 순간.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내 녹음실에서
내가 편곡한 노래를, 나와 함께 부르는 기분. 그 카타르시스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리메이크 음반이 8년을 정리하는 의마라고 들었다. 본인의 노래도 아니고
처음 나오는 노래가 <편지>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가사에 다 있더라.
그 노래를 시작으로 리메이크 음반을 만들었다. 그 노래를 허락받기까지 삼고초려했다.
많은 가수들이 노래하고 싶어서 부탁해도 거절하셨다는데. 내가 그 노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그 노래를 왜 해야 하는지,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리메이크 음반을 두 개나 냈다.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나
클래식 세 번째도 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도 행운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세월따라 변할 것이고, 나에게 영향을 준 음악들을 내 목소리로
들려드린다는 것은 강요하는 느낌이 아니라서 좋다. 1980년대 음악을 들으면
얻어지는 것도 많고 공부도 많이 된다.
리메이크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본인의 노래가 있나
심수봉 선생님이 <후회>를 리메이크하셨다.(웃음)
베스트 음반은 내지 않을 건가
그러기엔 활동 시간이 많지 않다. 8년은 베스트 음반을 내기에는 적절한 세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20년 정도는 돼야 연륜이 쌓이지 않을까. 나이가 많은 가수도 아니고.
8년을 정리하는 인터뷰다. 기념으로 가상의 베스트 음반을 만들어달라
어느 날 그냥 <조성모>라는 이름의 음반이 나올 거다.
내가 직접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썼던 노래들의 모음집. 베스트를 만든다면 그러고 싶다.
내가 다니는 곳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은 재미없지 않나.
8년 동안 총 8장의 음반을 냈다. 작사,작곡을 많이 했음에도 조성모에게
싱어송 라이터라는 느낌이 없다
외국의 경우 자신의 음반에 자신이 곡을 쓴다는 걸 굉장히 높이 산다.
그런 노력과 고민을 하는 가수들, 뮤지션이 되고 싶은 가수들을 높게 사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가수들이 곡을 너무 쉽게 쓴다. 나 역시 곡은 썼지만
그게 싱어송 라이터다 아니다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 별로 중요치도 않고.
한류 열풍에서 비껴나 있는 인상이었다
제의는 많았지만 다 거절했다. 일본 활동의 시작은 존경하는 아티스트와의 작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모두 내 뮤직비디오와 나에 대해 사업적 가치를 느끼는 분들이 손을 내밀더라.
"너의 뮤직비디오엔 한류 스타들이 모두 있으니." 배용준씨가 출연한 뮤직비디오의 노래를 부른 조성모",
이건 아니지 않나. 음악을 위한 뮤직비디오지, 비디오를 위한 뮤직이 아니다.
다행히 지금 잘 맞는 곳을 만나 준비 중에 있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한다는 소린가
그렇다. 2월에 있을 콘서트가 아티스트 조성모를 알릴 수 있는 시작이 될 것 같다.
콘서트지만 일본의 음반 관계자도 참석할 것이다.
하필 군대 가기 전인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활동을 쭉 했더라면 이러저러해서 집중 못했을 거다.
지금까지의 내 음악을 둘러볼 기회도 되고. 4급 판정을 받아 아직 결정이 안났지만,
공익으로 간다면 퇴근 후에 음악 공부를 할 것이고, 군대에 간다면 연예사병으로 가고 싶다.
이래저래 2년이란 시간은 내가 달리기 위한 값진 시간이 될 듯하다.
국방홍보원에서 현역으로 오길 기대하고 있더라
내가 써먹을게 많나보다.(웃음)
입대는 언제쯤인가
3월 중에 영장이 나올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
8년 동안 존개감이 확실했다. 그 존재감이 사라질 것이란 두려움은 없나
아쉬움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2년 후에 나왔을 때 반가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싶다.
"발라드의 황제"로 군림했다. 후배들에게 넘겨줘야 할 텐데
황제는 신승훈이다.(웃음) 그리고 이미 그 자리는 넘어간 것 같다.
잘하는 후배들이 많다. 그리고 발라드를 이어가는 건 싫다.
그 길을 걸어가기보다는 후배들이 변화와 변신에 겁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발라드의 ’무엇’이라 하는 건 싫다. 발라드를 많이 해온 건 사실이지만
이젠 내가 부르는 걸 발라드라고 하면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보다는 유연하고 따뜻한 음악, 그게 조성모의 노래인 것 같다.
제대 후 추구하는 콘셉트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린가
발라드냐 아니냐라기보단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얼마전에 역대 50년 동안 가장 많은 음반을 판 가수 순위가 나왔는데 내가 4위더라.
사람들 집에 내 음반 한 장씩은 있다는 말인데, 같은 음악을 들려주는 건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 했던 걸 유지하기보다 "여러분 이런 음악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한번 들어보세요" "이번엔 이런 음악이 참 좋더라고요"라고 제시할 수 있는 음악이 될 것이다.
입대 전엔 뭐할 건가
특별한 계획은 없다. 좋은사람들, 부모님하고 있을 것이다.
여자친구에겐 기다려달라고 당부했나
여자친구는 없다.
방송에서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헤어지면 헤어졌다고 또 말해야하나? 지금은 ’ING’중이 아니다.
8년을 정리하는 공연을 한다고 들었다
2월10,11일 오사카와 도쿄를 시작으로 제주도, 대구, 부산, 서울로 거꾸로 올라온다.
8년을 2년마다 4부로 나누었다. 나에게도 팬들에게도 8년을 정리하는 의미인 셈이다.
공연장에 오시면 알겠지만, 조성모의 이미지 변천사도 볼 수 있다. "잘자. 내 꿈 꿔~"
CF의 패러디가 나올 수도 있고. 아까 기자가 말했던 그 민망한 CF로 귀여운 척을 할 수도 있다.(웃음)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됐다. 민망한 것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추억이니까.
지난 8년을 정리해보라
아이에서 어른이 됐다. 가수에서 뮤지션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 같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도 나오지만 <인기가요>에도 나올 수 있는 가수.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가수 조성모다. 가수는 나이를 먹으면 갈린다.
순위프로그램, 음악프로그램. 난 둘 다인 거 같다.
마이클럽 펌